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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 (Zico) | |
본명 |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Arthur Antunes Coimbra) |
생몰년월일 | 1953년 3월 3일 |
국적 | 브라질 |
출신지 | 리우데자네이루 |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
키 | 172cm |
프로데뷔 | 1971년 CR 플라멩구 입단 |
소속팀 | CR 플라멩구(1971~1983) 우디네세 칼초(1983~1985) CR 플라멩구(1985~1989) 가시마 앤틀러스(1991~1994) |
감독 | 가시마 앤틀러스 (1999)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002~2006) 페네르바흐체 SK (2006~2008) 분요드코르 (2008) CSKA 모스크바 (2009) 올림피아코스 FC (2009~2010)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2011~2012) 알가라파 (2013~2014) FC 고아 (2014~ ) |
통산 기록 | 클럽통산 697경기 475골 / A매치 71경기 48골 |
브라질의 축구선수이자 레전드. 2006 FIFA 월드컵 당시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세계 프로축구사의 진정한 프리킥 황제
1 개요
본명은 아르투르 안투네스 코임브라(Arthur Antunes Coimbra). 지쿠(Zico)는 '말라깽이'란 뜻이다.[1] 국내에서는 '지코'로 불렸다.
통칭 하얀 펠레.[2] 축구팬들 사이에선 '하얀 펠레 지코'로 유명하다.
1980년대 세계를 풍미한 슈퍼스타로, 예로부터 온갖 캐사기 유닛을 숱하게 배출한 브라질에도 펠레와 가린샤 뒤를 잇는 엄청난 명망을 자랑한다. 아직도 브라질 사람들은 카카를 지쿠의 아래로 본다. 흠좀무.
역대 올해의 남미 최우수 선수상 최다 수상자(3회 수상)이기도 하다. 남미 리그 내에서는 펠레와 더불어 투톱이라고 할 만하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982년 스페인 월드컵,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하지만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78년엔 무패 3위라는 성적표.[3][4]를 받기도 했다.
특히 1982년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지쿠, 소크라테스, 파울로 로베르토 팔캉, 토닝요 세레조로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의 4중주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도 최강팀 떡밥에서 빠지지 않고 이름을 내민다. 축구 역사상으로 따져도 역대최강이라 불리는 1970년 브라질 국가대표팀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982년 브라질의 월드컵 행보를 요약한 동영상. 3분 9초 경부터 디에고 마라도나가 뛰는 아르헨티나를 박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5]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3:1로 승리를 거뒀으며, 그나마 아르헨티나의 1골도 종료 1분 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멘붕한 마라도나는 종료 5분 전 브라질의 수비수 바티스타를 걷어차고 퇴장 당했다. 반면 지쿠는 이 경기에서 1골 1어시에 남은 득점 장면에서도 어시의 어시를 기록하는 등 3골 모두에 관여하며 MOM급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그 후 이탈리아 전에서 파올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내주고 브라질이 탈락하면서 그 화려한 행보를 끝내고 말았다.
2 플레이 스타일
탁월한 개인기를 보유했으며 킥이 대단히 정교했다. 특히 수비벽을 살짝 넘겨 차는 프리킥의 정확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득점 기록만 보면 포워드 같지만, 실제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6] 이는 동시대의 프랑스의 축구 영웅인 미셸 플라티니도 마찬가지이나 지쿠는 좀 더 단독으로 전진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경기를 읽는 눈이 예리할 뿐더러 '발에 레이더가 달렸다'는 찬사를 들을만큼 정교한 킥으로 수비 허점을 노리고 길고 짧은 패스를 자유자재로 뿌렸다. 특히 볼을 세워놓고 차는 킥은 명불허전으로, 팀에서 프리킥, 페널티킥, 코너킥을 도맡아 차다시피 했다. 오죽했으면 "페널티킥과 프리킥이 뭐가 다르단 거야?" 라고 할 정도.
프리킥의 본좌이자 甲 of 甲 으로 꼽는 주니뉴 페르남부카누가 이야기하길 지쿠가 나보다 잘 찬다. 실제로 역대 프리킥 통산 골순위도 1위. 우디네세에서 뛰던 시절,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는 프리킥을 차려는 지쿠를 견제하기 위해서 수비벽을 쌓은 유벤투스 선수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기어나오는 통에 심판의 제지로 인해 경기가 5분 가까이 지연되기도 했다는 소설같은 일화도 있다.[7]
프리킥 통산 골수는 비공식 추정 101골. 프리킥 잘 찬다는 베컴이 통산 50골대인걸로 봐서 어느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겠다.
지쿠의 플레이 스타일을 알 수 있는 영상들은 다음과 같다.
1981년에 도쿄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탈 컵(현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팀과 남미의 코파 리베르타 도레스 우승팀이 맞붙었던 매치)에서 플라멩고 소속이었던 지쿠가 7~80년대 당시 최강이었던 리버풀을 3:0으로 박살내던 당시의 영상이다. 당시 리버풀은 거의 10년 가까이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 컵 둘 중 하나에서 우승하였을 정도로 강했던 팀이었다. 하지만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지쿠의 지휘하에 플라멩고에게 대패하고, 당시 리버풀 소속의 잉글랜드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면서 팀이 쌓은 업적에 비해서는 선수 개개인이 회자되는 정도는 덜한 팀이 된다. 어찌보면 지쿠에 의해 매장 당한 셈.
23살인 1976년에 우루과이와의 경기 영상.
위의 영상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득점에 특별히 주력하던 미들라이커 유형의 선수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팀의 빌드업을 후방에서부터 리드하던 지휘관 스타일의 선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선수가 득점력도 역대 최고 수준이니, 레전드로 꼽지 않을 수가 없다.
3 커리어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CR 플라멩구에서 보냈지만,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세리에 A 우디네세 칼초에서 뛴 적이 있다.
이후 1989년 CR 플라멩구에서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199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미토모 금속공업' 팀에 들어간다. 이 팀은 J리그가 출범하면서 가시마 앤틀러스가 된다. 지쿠는 J리그 출범에 깊이 관여했을 뿐더러 선수로서도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일본 팬들의 지지를 얻는다. 1994년 가시마 앤틀러스를 마지막 팀으로, 지쿠는 현역에서 은퇴한다.
2002년 필립 트루시에 감독의 뒤를 이어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2004년 AFC 아시안컵 우승을 맛보기도 했지만, 2006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2005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당시에도 졸전을 펼치자 대한민국의 조 본프레레 감독과 일명 '감독 단두대 매치'를 벌이기도 했다(...).[8] 그 경기에서 승리한 후 정신을 차렸는지 팀을 재정비해 본선 진출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으나, 막상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 국가대표팀이 졸전 끝에 1무 2패로 광속 탈락하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야나기사와의 이것만 없었어도...
첫 경기에서 거스 히딩크의 호주에게 역전패하였고, 모국과의 경기에서는 1-4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후 터키 쉬페르 리그의 페네르바흐체 SK 감독을 맡았으며,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PSV 에인트호번을 조 3위로 밀어내고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뒤 16강에서 세비야 FC를 꺾고 팀을 8강에 올려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도 선수 못지않은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으며,[9]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케빈 키건의 후임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 뒤 우즈베키스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의 FC 분요드코르,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PFC CSKA 모스크바를 맡았으나 각각 1년만에 경질되었으며, 2009년 슈퍼리그 그리스의 올림피아코스 F.C. 감독을 맡아 20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 2위로 다시 한 번 챔피언스 리그 16강을 밟는 등 좋은 성적올 올렸다. 하지만 팬들은 지쿠의 팀 운영 방식이나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쿠를 까대기 시작했으며, 구단도 이를 받아들여 결국 2년차에 팀의 지휘봉을 놓게 되었다.
이후 자국으로 돌아가 CR 플라멩구의 단장을 맡았으며, 2011년부터 이라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2014 FIFA 월드컵 3차 예선에서 A조에 소속되어 중국을 떨구고 조 1위를 확정짓고 최종 예선에 올랐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최종 예선에서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일본과 한 조가 되었다. 조추첨 이후 "일본을 꺾을 자신이 있다."고 인터뷰했다.
4 여담
여담으로 지쿠가 일본 국가대표팀에 부임한 뒤 한 때 나카타 히데토시, 나카무라 슌스케, 오노 신지, 이나모토 준이치 등 당시 일본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선수로 MF를 꾸린 적이 있다. 이를 놓고 일본에선 '일본판 황금 4중주'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막상 경기에서 좌우 측면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끝내 포기했다. 생각을 해 보면, 수비형 미드필더를 주로 하는 나카타와 이나모토, 중앙에서 플레이메이커를 하는 오노와 나카무라를 뒀으니, 좌우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무래도 자신의 현역 시절 브라질 국대의 주 포메이션이었던 4-2-2-2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 브라질의 공격형 미드필더는 지쿠 본인과 소크라테스로 오노, 나카무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선수들이었다.
한 일화로는 J리그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는 젊은 선수가 있어 당장 선발해야 한다며 프로필을 알아봤는데, 한국 선수인 김근철[10]이었다.
한국 선수들의 강인한 인상이 남달라 보였는지, 일본대표팀 선수들에게 '한국 선수들처럼 뛰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김주성 축구게임으로 알려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었던 오락실 축구게임 세이부 컵 축구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메인 모델이자 주장으로 나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초기 J리그를 상징하는 대형 스타이지만, 의외로 J리그 출범 전에는 지명도가 낮다 보니 이름과 관련한 안습한 일화도 있었다. 가시마의 전신 스미토모금속에서 지쿠를 데려왔다는 뉴스가 나오자, 지역 주민들이 '제철소에서 또 사고 (일본어 발음으로 '지코') 를 친 모양이구만' 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도시인 가시마의 프로팀 가시마 앤틀러스가 빠르게 명문으로 발돋움하면서 그런 일은 사라진다.
중국의 탁구 선수 장지커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지쿠가 플라멩구 유스팀에 합격하면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을 때 150cm에 30kg이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출중했지만 이런 형편없는 피지컬로는 답이 안 나오니 결국 팀에서 육체개조(...)를 시켰다고.
- ↑ 이 별명은 카카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 ↑ 이 무렵엔 토너먼트가 아닌, 16강 조별 리그 방식이었다. 결국 골득실에서 홈팀 아르헨티나에 밀려서 결승전에 오르지 못했는데, 지금도 승부조작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현재 담합을 막기 위해 같은 조 마지막 경기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연다고 명시했지만, 이때는 이런 규칙이 없어서 아르헨티나가 브라질보다 나중에 경기를 치뤘다. 결과는 골득실차 +3을 극복한 6-0 대승(...).
- ↑ 이 국제대회 우승이 없는 커리어 때문에 호마리우에게 "지쿠가 뭘 우승한 적은 없잖아." 라고 하였다.
- ↑ 참고로 이 부분에서는 록키 4의 OST 'Burning Heart'가 쓰였다.
- ↑ 이 때문에 하얀 펠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전방 공격수였던 펠레와 미드필더였던 지코, 둘의 활동반경은 미들진부터 최전방까지 매우 비슷했다.
- ↑ 출처는 베스트 일레븐.
- ↑ 참고로 이 경기에서 패배한 본프레레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마지막 기회를 얻었고, 결국 그 경기에서도 패배하자 어김없이 경질되었다.
- ↑ 이 당시에는 페네르바흐체 팬들 사이에서 '크랄 아르투르(Kral Arthur, 킹 아르투르라는 의미)'로 불렸다.
- ↑ 이 친구도 소싯적에 축구팬들에게 유망주로 기대받았지만, 이른 나이에 J리그 간 선수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폭망해 버렸다. 그리고 K리그로 돌아와서 경남FC와 대구FC를 전전하다가 이후 태국 리그에서 뛰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