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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의 전투.
전체적으로 보급 문제로 양쪽 모두 고전했으며 사막이라는 배경 때문에 일반적인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1]
23만여 명의 독일군이 포로로 잡힌 독일 패망의 원인 중 하나.롬멜만 있었다면 상황이 나았을지도
쿠르스크 전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2]과 비슷하게 위대하던 장군들의 공백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전투이며 대전의 전환점이 되는 전투.
영화 발키리의 초반부 부분이 튀니지 전투이다.
튀니지 전투 | ||
날짜 | ||
1940년 ~ 1942년 | ||
장소 | ||
북아프리카 전선 | ||
이유 | ||
이탈리아의 침공 | ||
교전국 | 연합군 영국 미국 등등 | 추축군 독일 이탈리아 등등 |
지휘관 |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 롬멜 가리볼디 |
결과 | ||
추축군의 패배 북아프리카 전선의 아프리카 집단군의 소멸과 23만명이라는 크나큰 손실 독일 패망의 원인 중 하나 | ||
피해규모 | 추가예정 | 추가예정 |
1 이탈리아의 진격
이탈리아 공화국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는 당시 동맹국이였던 독일과 군사 수준이 같다고 믿고 있었다. 근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애초에 빈약한 경제 때문에 성장은 커녕 오히려 약해지는 부분도 있었고 보병과 해병을 제외하면 연합군의 나라들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빈약했다.[3] 이런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확신과 독일은 지원을 믿고 연합군의 식민지가 있는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헬게이트 오픈
2 도와줘요! 소방수
이탈리아의 믿음에 따라 독일은 지원을 하기로 결심하고 90경사단과 제 15기갑사단 등의 병력을 파견한다.[4][5]
추가예정
3 미국의 개입
초반부 물자만 지원하던 모습과 달리 중반부에 들어서자 미국은 전차부대와 보병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형 전차인 M4 셔먼은 연합군의 전차병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추가예정
4 롬멜의 철수 후의 북아프리카 전선
4.1 사막의 여우의 부재
독일의 아프리카 집단군과 이탈리아의 군대를 모아 마지막 공격인 카프리 공세가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아프리카 집단군을 이끌던 롬멜은 더 이상 아프리카 전선에 가망이 없는 걸 깨닫고 우크라이나에 있던 히틀러에게 가 철수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승리 아니면 자살' 이라는 구호를 강요하던 히틀러에게는 이런 일은 허락 될 수 없었고 롬멜을 강제로 병가처리하고[6] 아르님에게 아프리카 집단군의 지휘권이 넘어가게된다.
4.2 추축군의 상황
10척의 유조선 가운데 1척만 남은 상황에서 전차[7]를 기동할 연료[8]마저 부족했고 전차마저 부족했다. 수적으로도 연합군이 배로 많은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맹국인 이탈리아마저 불안한 상황이었고 연이은 패배로 사기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다 롬멜이 없었다.[9]
아직도 독일군 5개 사단과 이탈리아 9개 사단이 남아있긴 했지만 물자가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영국군과 미국군을 막아낼 충분한 병력이 되지 못했다. 영국 군함들은 계속해서 보급함들을 침몰시켰고 수송기 또한 계속해서 격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레트 방어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났고 연합군[10]에 비해 추축군은 서로 연락이 잘 통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4.3 전개
몽고메리의 마레트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작전은 제15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0군단이 롬멜이 우려했던대로 측면으로 우회해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추축군은 북서쪽으로 60km를 후퇴하고 가베스 부근의 와디 아카리트에 새 방어선을 만들게 된다.
미 2군단도 협곡을 통해 추축군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미군이 이기는 상황이었지만 지형[11]때문에 미군은 독일군을 추적하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군 8군과 미국 2군단의 계속된 공격으로 방어선은 다시 붕괴되고 추축군들은 다시 복쪽으로 후퇴하게 된다.[12]
독일의 후퇴 이후 영국군과 미군의 전선이 연결되면서 다시 소모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연합군 공군은 추축군의 공수작전을 차단하는데 집중했고 영국 군함들 역시 보급선과 탈출로 차단에 집중하고 있었다.[13] 이 때부터 아프리카 집단군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미 2군단과 영국 1군과 8군이 포위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14]
남쪽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공세에 독일군은 다른 방어선의 대전차포와 예비 전차 전력을 돌려 막아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의 전차병력에 구멍이 생겼고 이 떄문에 미 2군단과 5군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방어거점 대부분을 점렴당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공세인 엔피다빌 방면의 연합군의 공격은 추축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험난한 지형 때문에 당시의 병력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에게 수비임무를 밑기고는 병력을 증강해 주변으로 집결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5월 5일 연합군의 모든 준비는 끝난 상황이었다. 결국 대대적인 포격 지원을 받은 연합군의 보병은 추축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6, 7기갑사단이 밀고 들어가게 된다.
5월 7일, 영국전차가 튀니스로 입성하게 되고 북쪽의 비제르테는 2군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결국 6일 후 230,000명의 추축군[15]이 연합군에 투항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추축군 세력은 개발살나버리면서 추축군의 치명적인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16]- ↑ 예를 들면 트여있는 환경때문에 보병이나 전차들은 노출이 쉬웠고 독일의 88mm포가 대전차포로 자주 사용되거나 보병의 엄페물이 거의 없어 전차가 더욱더 중요해졌다.
- ↑ 많은 장군들이 당시에는 살아있었지만 전선에 없었기 떄문에 부재했다고 할수 있다. 그 이유는 노르망디가 연합군의 상륙지역으로 예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
- ↑ 일례로 이탈리아의 주력 전차였던 중전차 M11/39은 항목을 확인하면 알겠지만 안습한 전차였다.
- ↑ 티거의 제대로된 활약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 ↑ 롤멜이 처음 히틀러에게 요구했던 병력은 4개의 기갑사단이였다. 하지만 제대로 편성되지 못한 2개의 사단만이 주어진다.
- ↑ 하지만 아프리카에 롬멜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롬멜은 민간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
-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지형이 사막인지라 전차는 전투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 롬멜은 부족한 연료를 최대로 활용했지만 아르님이 그런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 ↑ 이는 군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 ↑ 공군과 육군이 협조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 ↑ 이 떄문에 가베스 주변의 고지의 이탈리아군을 소탕해는데도 몇 주가 소모되었다.
- ↑ 이 와중에도 이탈리아 해병은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때문에 해당 영국 사단은 해당 이탈리아 포로들을 죽여버렸다. - ↑ 이 때문에 독일군의 상황은 더 악화되어간다.
망했어요. - ↑ 10 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은 괴링 사단이 8km가량 침투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 ↑ 이 병력들은 시치리아 방어전을 담당할 군사들이었다.
- ↑ 독일은 부차적인 전선에서 주요 사단이 손실을 입거나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