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츠 구데리안

이름Heinz Wilhelm Guderian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
출생1888년 6월 17일,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 쿨름
사망1954년 5월 14일, 서독 슈방가우
복무독일 제국군(1907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상급대장(Generaloberst)
주요 참전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공방전
청색 작전
주요 서훈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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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7월의 구데리안.

파일:Attachment/하인츠 구데리안/enigma.jpg

암호를 다룬 책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슈르비우스의 에니그마 관련 사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가운데 지휘장갑차 안의 구데리안 장군의 좌측 하단에서 에니그마를 이용해 통신중인 전차 승무원복 차림의 통신병과 통신부사관들이 보인다.

사태가 불분명할 때는 공격해라.
"Der Motor des Panzers ist ebenso seine Waffe wie die Kanone."

"전차의 엔진은 주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

Es gibt keine verzweifelten Lagen, es gibt nur verzweifelte Menschen.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단지 절망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1 개요

독일 기갑 부대의 신화를 쓴 군인, 기갑전의 아버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기갑 지휘관이자 군사 이론가, 저술가이며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함께 프랑스 침공의 1등 공신으로 독일 국방군의 무적 기갑 군단 전설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명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전격전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으나 전격전이라는 용어가 사어에 가깝기에 그러한 평가는 적합하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갑 전술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창안하고 확립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유능한 인물임에도 원수에는 오르지는 못했다. 한때 그의 직속 부하였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에르빈 롬멜, 발터 모델 물론 파울루스는 승진 후 히틀러의 뒷통수를 아름답게 때리며 항복했지만 도 원수까지 올랐는데, 그는 프랑스 침공 이후 종전까지 5년 간이나 승진 못하고 결국 상급대장에 머물렀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에게 참패하면서 승진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1943년 기갑군 총감으로 복귀했을 때는 야전군인도 아닌 데다가, 이미 괴물로 변한 소련군을 막아내기 급급한 상태가 되어서 승진 기회를 잡지 못했다.

2 생애

2.1 성장 과정

1888년 서프로이센의 쿨름(오늘날 폴란드 헤움노)에서 출생했다. 1901년부터 1907년까지 군사 교육 과정을 밟은 그는[1] 1907년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하노버 제10예거대대에 견습 사관으로 임관한다.[2] 이듬해 메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진급한 그는 1911년부터 프로이센 통신대 소속 제3무선통신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2.2 제1차 세계대전 -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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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의 구데리안.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그는 통신장교로, 그리고 다시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대국적으로 전장을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고, 정보 부서로 발령되면서 오히려 실전에 나설 기회가 없었기에 전략적인 식견을 더욱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독일 제국의 패전으로 끝난 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신생 독일군(Reichswehr)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 내외의 병력밖에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나, 구데리안은 능력을 인정받아 군에 남았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참모본부라는 조직을 보유할 수 없었던 독일군이 사실상의 참모본부로 설치한 병무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1927년 소령으로 승진한 뒤 구데리안은 베를린에 위치한 군의 차량 수송을 감독하는 교통 병감부에 배치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훗날 전격전이란 잘못된 용어로으로 알려지게 되는 기동전 교리의 선구자로 알려지게 된다. 이 무렵 구데리안은 기동전을 주장하던 풀러, 리델 하트, 샤를 드 골 등의 저작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군에 광범위하게 배포한다.[3]

구데리안은 1931년 중령으로 승진한 뒤 오스발트 루츠 소장참모장이 되어 기동 부대 육성에 착수했고 다시 1933년 대령으로 승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갑 전술을 주창하게 된다. 이는 1937년 그의 저작 '전차를 주목하라!'(Achtung Panzer!)로 정리된다 할 것이다.

구데리안의 자서전에 의하면 처음 나온 1호 전차의 시제품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욕심이 적다. [4]

1935년, 아돌프 히틀러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군의 재무장을 선언하면서 새로 창설된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이 된 그는 이듬해 다시 중장으로 승진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제2기갑사단과 차량화된 LSSAH 연대를 이끌고 단시간에 에 진군하여 자신의 이론의 유용성을 입증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

2.3.1 체코 병합 ~ 프랑스 침공

1938년 2월 4일부터 제16기갑군단군단장이 된 구데리안은 독일의 체코 병합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방에 신속히 진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는 제19기갑군단을 이끌고 출격, 비츠나 전투코브린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쩔쩔맨다. [5][6] 코브린 전투는 무승부이긴 하지만 휘하 기갑 부대들이 폴란드 기계화 기병대에게 모랄빵이 터지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일종의 해프닝들이고 큰 흐름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이딴 전차를 훈련용이 아니라, 실제 전투용으로 쓴다니 아이고 맙소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결국 폴란드군은 코츠크 전투를 끝으로 무너지고, 소련군맛깔나는 뒤통수로 폴란드 전역은 종료된다. 사실 비츠나 전투만 아니었으면 거의 완벽했는데[7] 이때 구데리안의 독일군은 동쪽에서 다가오던 소련군과 브레스트에서 조우했고, 합동 퍼레이드를 하는 등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 양군이 피투성이로 맞붙는 2년 후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 1939년 9월 23일, 폴란드 브레스트에서 화기애애하게 합동 퍼레이드를 하는 독소군. 중앙의 연단에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이 구데리안,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제20차량화보병사단장 육군중장 마우리츠 폰 빅토린 장군, 그리고 그 옆의 가죽 코트를 입은 사람이 소련 육군중장 크리보셰인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 때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최대한 변호해 주며 작전채택을 도왔고, 그 스스로도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에 따라 아르덴 돌파를 감행, 뫼즈 강을 건너 연합군을 분산, 고립시키고 전역을 양분한다. 이때 그가 보여 준 신속하고 과감한 기동으로 그는 '재빠른 하인츠'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의 활약으로 독일군은 됭케르크까지 연합군을 몰아 붙이지만 이때 히틀러의 개입으로 수십만 명의 연합군이 영국으로 철수하는 것을 방관해야 했다.[8]

2.3.2 독소전쟁

1941년, 제2기갑집단, 이른바 구데리안 기갑집단의 사령관이 된 그는 독일군의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증강된 제2기갑군을 이끌고 출격, 특유의 신속 과감한 작전으로 단시일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하는 등 기동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9][10] 소련군을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가 모스크바 침공 직전, 히틀러로부터 남쪽 키예프(Kiev) 방면으로 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그가 히틀러에게 항의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 그가 히틀러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11]

구데리안은 제2기갑집단[12]을 이끌고 질풍처럼 모스크바를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 모스크바를 둘러싼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를 모스크바 전투라고 하며 구데리안은 완강해진 소련군의 저항 이외에도, 10월의 가을 장마로 인한 라스푸티차로 고전을 겪고, 11월부터 시작된 동장군은 독일군이 이전에 맛보지 못한 고초였다. 게다가 레닌그라드 수비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모스크바로 온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은 이전까지 구데리안이 대적해 보지 못한 강적이었다. 결국 12월 4일, 구데리안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철군을 명한다. 이와 동시에 주코프는 공세로 나와서 독일군을 모스크바 전면에서 100~200km 밖으로 밀어붙였다.

이때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구데리안이 히틀러의 위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군을 명령하였다며 고발하였고, 이 결과 구데리안은 1941년 12월 25일부로 지휘권을 박탈당한다. 이로서 구데리안은 보직을 잃고 1년간 본의 아니게 백수 생활을 했다. 이때 히틀러의 신임을 잃은 것이 그가 끝내 원수로 진급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구데리안은 이후 자신이 결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변명하였으나, 얄궂게도 후에 구데리안의 지지자들은 구데리안이 히틀러의 추종자가 아니었다는 근거로 이 사건을 활용한다. 이때 구데리안은 이 사건을 가지고 클루게 원수와 크게 다퉜고, 클루게가 구데리안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지만 히틀러가 이를 뜯어말렸다고 한다.본격 다 늙은 아저씨들의 나쁜 계집애 놀이

1942년 9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우세한 연합군의 공세에 수세에 몰리면서 신병까지 얻어 상황이 말이 아니던 에르빈 롬멜 원수는 자신을 대신해서 아프리카 전선을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은 구데리안밖에 없다며 육군최고사령부에 교체를 청했으나 최고사령부는 즉각 "구데리안은 부적합함"이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13]

이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구데리안은 1943년 3월 1일 다시 일선으로 복귀하여 기갑 부대 감사관이 되었다. 그는 기갑 전술 훈련을 총괄하는 동시에 전차의 설계와 생산을 감독했다. 구데리안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 구데리안은 무리하게 신기술을 적용한 소수의 전차들을 투입하느니, 차라리 신뢰할 수 있는 3호 전차4호 전차를 대량 생산하여 안그래도 빠듯한 보급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주자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별의별 신형 전차를 다 제시하면서 밀덕질을 벌였고, 이 때문에 전선에 나가 있는 장병들과 장비들에 대한 보급 및 정비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고 한다.

손자병법에서도 군주가 장군 하는 일에 간섭 하면 전쟁이 폭삭 망한다고 했듯이, 구데리안은 그가 극동의 전장을 누리던 시절 정신병자 히틀러의 간섭을 사사건건 받아 일을 그르치는 일이 매우 잦았다.

2.3.3 1944년 7월 20일 이후

발키리 작전으로 잘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다음날인 1944년 7월 21일, 구데리안은 7월 1일 신경쇠약으로 물러난 쿠르트 자이츨러(Kurt Zeitzler)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구데리안은 이때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국방군의 나치화를 주도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14]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 히틀러의 삽질이 너무나 충공깽이었기에,독일군은 동서에서 계속 밀리기만 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히틀러는 관심은 주로 서부에 상륙한 영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대결하던 동부전선은 실질적으로 육군 총참모장이었던 그의 총지휘하에 있었다.

1944년 12월, 히틀러가 마지막 기갑전력을 긁어모아 서부에서 공세를 준비하자, 고도로 기갑화된 소련군과 대결하고 있던 구데리안은 이것을 동부전선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히틀러와 대판 싸웠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히틀러의 도박은 실패했고, 전력이 불충분했던 동부전선의 독일군도 소련군에 관광당하면서 베를린까지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후 테오도르 부세(Theodor Busse)가 지휘하던 제9군이 퀴스트린에서 반격 작전을 거하게 말아먹자 히틀러와 언쟁을 벌였으며 여기서 단단히 뚜껑이 열린 히틀러는 1945년 3월 28일, 구데리안에게 "그동안 수고 많이 했는데 몸도 안좋다 하니 6주만 쉬셈"이라고 통보한다.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그리고 6주 뒤 독일은 항복한다.[15]

2.4 종전, 그 이후

구데리안은 1945년 5월 10일 그의 기갑 참모들과 함께 미군에 항복하였으며 1948년 6월 17일 무혐의 석방될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는 구데리안의 기소 혐의에 대해서 군인으로서 정당한 자세에 입각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폴란드는 비츠나 전투 당시 구데리안이 폴란드군 사령관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포로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내용으로 고발하였지만 이는 교전 중인 부대 간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허풍으로 판단되었고, 폴란드에서 유용했다는 저택 또한 원래 독일의 영토였던 지점에 위치했던 것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소련은 구데리안의 혐의에 대한 기소를 중지하였다.

전후 그는 서독 연방군의 자문역을 맡기도 하고, 한때 그가 신나게 발랐던, 영국 퇴역 군인들의 모임에 초대받아 이들과 같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세월을 보내다[16] 1954년 5월 14일 바이에른 남부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는 부인 마르가레테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장남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Heinz Günther Guderian)은 전후 서독의 신생 연방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진급, 그 역시 기갑 부대 감찰관으로 활동하였고, 2004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3 업적

3.1 전차 기술 발달에 기여

구데리안은 전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알았고, 전차 설계의 기초를 마련했다. 구데리안은 모든 전차에 무전기가 필요함을 역설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의 전차의 성능이 프랑스, 영국군 전차의 성능에는 크게 밀렸지만 무전기가 설치된 독일군의 전차는 단체로 전술적 활동이 가능했고 그렇지 않은 프랑스, 영국군의 전차는 개인 플레이에만 의존했다. 이것이 초기 연합군의 전차전의 패인이 되었다.

또한 구데리안은 중구난방이던 전차병의 수를 5명,전차장, 포수, 조종수, 탄약수, 무전수로 고정했다.[17]더불어 전차에 여유 공간을 두게끔 함으로써 추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게 하였다. 4호 전차가 대표적. [18]

3.2 전술 이론

집단적인 기갑 부대의 운용 등과 같은 전술 이론은 구데리안이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도 참모본부에서 그의 지지자는 소수에 불과했다.[19]. 그러나 구데리안은 1938년 안슐루스 때부터 일찌감치 전차 집중 편성의 실전 경험을 쌓으며 여기서 파악한 장단점을 다음 전역에 반영하는 등, 기갑 부대의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프랑스 침공에서의 압도적인 성공으로 독일군, 나아가 2차 대전을 대표하는 전술 교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구데리안을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평하는 이유는 전차의 개발에 있어 그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 첫째, 차후 확장성에 대한 고려다. 주포의 개량들이 이루어져 전차의 성능을 업그레이드 할 경우 차후 개조가 용이하도록 넉넉하게 공간을 확보하여 전차를 개발했다.
  • 둘째, 전차의 무게 범위를 조정했다. 전차의 3대 요소가 화력, 방어력, 기동력인데 그중 방어력과 기동력은 서로 반비례 하는 요소다. 때문에 이런 모순 관계를 극복하고자 전체의 무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량을 통과할 수 있는 무게까지 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었다.
  • 셋째, 전차 승무원에 관한 최적의 인원을 산출하였는데 그것은 전차장, 장전수, 포수, 조종수, 무전수의 5명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결론 내린다.
  • 넷째, 모든 전차에 무전기와 내부 통신용 마이크를 장비'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차는 지휘관 차량 외에는 무전기가 없었고 전차 부대는 깃발을 이용한 수신호로 통제하였다.
  • 다섯째, 포탑에 360도의 시계 확보가 가능한 전차장 전용 큐폴라를 설치하여 전차장이 안전하고도 쉽게 전후방을 파악하여 전차를 통제하여 일사분란한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4 나치 논란

구데리안은 전후 회고록 등을 통해 자신을 히틀러와 나치의 삽질과 잘못된 이념에 맞서는 순수 군인이자 전쟁범죄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20] 하지만 구데리안이 군사학적으로는 히틀러와 늘 대립각을 세우기는 했어도 그가 상당한 나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구데리안은 전쟁 전부터 히틀러와 친분이 있었으며,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오페라 극장에 초청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친분은 나치즘에 대한 철저한 동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사 전문가로서 비전문가인 히틀러의 의견에 이의를 다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반항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승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는 히틀러와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방법론의 차이.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독일군 내에서는 상관에 대한 절대 복종보다는 참모와 지휘관의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최적의 작전을 짜는 것이 더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나치와 무관한 자신이 순수한 군인이라는 것의 증거는 될 수 없다. 독일군이 세계 최초로 총참모부를 설립한 것은 이런 전통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회고록에 든 히틀러의 "병크"라는 것들도 후대의 역사가 중에서는 히틀러가 옳았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키예프 공략과 모스크바 공방전 같은 경우는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오판 때문에 전체를 망쳤다는 식으로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장했지만, 후의 일부 사가들은 히틀러에도 일리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구데리안은 실패의 원인을 모두 히틀러에 떠넘겼다고 볼 수도 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경우 구데리안을 철저한 나치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한 직후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구데리안은 국방군 전체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7월 20일은 독일 총참모본부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이다. 몇몇 총참모본부 장교들의 반역 행위로 인해 대 독일제국 전체가 파멸의 위기에 몰렸다. 총통에 대한 충성에 있어서 절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능가하지 못하게 하라. 열정적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것을 전파하는 측면에서 자신을 따르지 못하게 하라. 무조건적 복종을 통해 타의 모범이 되어라.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없이는 제국의 미래도 없다.[21]

또한 빌헬름 카이텔이 도입했던 나치식 경례를 국방군 전체의 표준 경례로 만든 인물 또한 구데리안이었다.

5 기타

  • 티거모에화한 '엘비라 티거'라는 여성을 다루는 법을 배움으로써 티거를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게 되는 매뉴얼, 티거 피벨을 인가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현재 이 매뉴얼은 오토 카리우스 자서전을 사면 끼워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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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 직전에 표지에서 번역자와 저자 이름 뒤에 모두 '저'라고 표시되고, Guderian이 Gudreian으로 적혀 있는 등 오타가 뒤늦게 발견되었다. 이에 출판사는 오타를 수정한 표지를 제작하여 아직 풀리지 않은 물량의 표지를 모두 교체한 다음 배본하였고, 구입자 중 기존의 오타 표지를 받은 사람에게는 출판사 카페에 접수하면 <<바우트 원>> 마우스 패드와 함께 새 표지를 보내 주고 있다. 오타가 있어도 표지 퀄리티 자체가 워낙 좋았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표지가 2개 생기는 셈이고, 근사한 디자인의 마우스 패드까지 동봉되기에 초기 구매자들은 득템을 했다고 만족 중. 편집부의 신속하고 성의 있는 대응이 돋보인 예이다. 표지 교환 기간은 초기 물량을 받은 독자 모두에게 새 표지가 전달될 때까지 라고 한다.

6 주요 보직 내역

  • 1907.2.28 : 육군 입대
  • 1907.2.28 ~ 1907.4.10 : 10엽병대대 장교훈련과정 수료
  • 1907.4.10 ~ 1907.12.14 : 메츠 사관학교 배속
  • 1910.6.28 ~ 1910.7.28 : 10수색대대 배속
  • 1912.10.1 ~ 1913.10.1 : 코블렌츠 주둔 3무선통신대대 배속
  • 1913.10.1 ~ 1914.8.2 : 베를린 육군대학 파견
  • 1914.8.2 ~ 1914.10.4 : 5기병사단 직할 3무선통신기지장
  • 1914.10.4 ~ 1915.5.17 : 4야전군 직할 4무선통신기지장
  • 1917.4.3 ~ 1917.4.27 : 4사단 참모부 선임보급장교
  • 1920.1.16 ~ 1920.5.16 : 고슬라 주둔 10엽병대대 3중대장
  • 1920.5.16 ~ 1920.9.8 : 20보병연대 독립중대장
  • 1920.9.8 ~ 1922.1.16 : 17보병연대 제3대대 중대장
  • 1922.1.16 ~ 1922.4.1 : 7차량수송대대 배속
  • 1924.10.1 ~ 1927.10.1 : 슈테틴 주둔 2사단 장군참모장교, 보조 지휘과정 훈련교관
  • 1927.10.1 ~ 1930.2.1 : 국방부 병력동원국 육군실 배속
  • 1928.10.1 ~ 1930.1.31 : 차량수송 전술교관
  • 1930.2.1 ~ 1931.10.1 : 3차량수송대대장
  • 1931.10.1 ~ 1934.7.1 : 차량수송총감부 참모장
  • 1934.7.1 ~ 1935.6.27 : 차량화전투부대 총감부 참모장
  • 1935.9.27 ~ 1935.10.15 : 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 1935.10.15 ~ 1938.2.4 : 뷔르츠부르크 주둔 2기갑사단장
  • 1938.2.4 ~ 1938.4.1 : 기갑부대 사령관
  • 1938.4.1 ~ 1938.11.24 : 16군단장
  • 1938.11.24 ~ 1939.8.26 : 고속기동부대 사령관
  • 1939.8.26 ~ 1940.6.1 : 19군단장
  • 1940.6.1 ~ 1940.6.30 : 구데리안 기갑집단장
  • 1940.7.1 ~ 1940.11.16 : 19군단장
  • 1940.11.16 ~ 1941.7.28 : 2기갑집단장
  • 1941.7.28 ~ 1941.8.3 : 구데리안 군집단 사령관(2기갑군 지휘권 인수)
  • 1941.8.3 ~ 1941.10.5 : 2기갑집단장
  • 1941.10.5 ~ 1941.12.26 : 2기갑군 사령관
  • 1941.12.26 ~ 1942.1.16 : 2기갑군 지휘권 박탈, 지휘관 예비 대기발령
  • 1943.2.28 ~ 1945.3.28 : 기갑총감
  • 1944.7.21 ~ 1945.3.28 : 육군참모총장
  • 1945.3.28 ~ 1945.5.1 : 휴양 조치
  • 1945.5.1 ~ 1945.5.10 : 티롤 지역 기갑부대 감찰관(제국 대통령 칼 되니츠 제독 특별지시)
  • 1945.5.10 ~ 1948.6.16 : 미군 수용소 수감
  • 1948.6.16 : 석방

7 진급 내역

  • 1907.2.28. : 육군 사관후보생(Fähnrich)
  • 1908.1.27. : 소위(Leutnant)
  • 1914.11.18. : 중위(Oberleutnant)
  • 1915.12.18. : 대위(Hauptmann)
  • 1927.2.1. : 소령(Major)
  • 1931.2.1. : 중령(Oberstleutnant)
  • 1933.10.1. : 대령(Oberst)
  • 1936.8.1. : 소장(Generalmajor)
  • 1938.2.10. : 중장(Generalleutnant)
  • 1938.11.23. :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0.7.19. : 상급대장(Generaloberst)

8 주요 수훈 내역

  • 1914.9.17.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4.11.8.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38.3.13. : 오스트리아 점령 기념장
  • 시기 미상 : 전차 출격 휘장 은장[24]
  • 1939.9.5.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13.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0.27. : 기사 철십자 훈장(3번째 수훈)
  • 1941.7.17.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4번째 수훈)
  1. 이때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동기로서의 우애(?)를 다졌다.
  2. 구데리안은 후에 아버지가 지휘하던 부대로 전속받은 것이 운이 좋았다고 회상한다.
  3. 이 때문에 훗날 독일군의 전격전은 영국과 프랑스 전술가들의 이론을 복사한 것이라는 잘못된 주장이 나오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전격전 항목 참조
  4. 기동전사 건담에서는 자쿠를 본 도즐 자비의 말로 패러디된다.
  5. 특히 비츠나 전투에서는 휘하의 4만 2천명의 제19기갑군단 전체 + 야포 + Ju-87의 지원을 받는데도 무려 3일 동안이나 밀린다. 그것도 고작 720명의 경무장한 폴란드군에게 했다. 이 폴란드군은 대전차포도 없는데 대전차 소총 2정만으로 독일 전차 10여 대를 격파한다. 자세한 건 비츠나 전투 참고.
  6. 종전 후 구데리안은 비츠나 전투 당시 포로들을 학살하겠다고 위협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전쟁 중 흔히 있을 수 있는 공갈 정도로 넘어갔다고 한다. 참고로 비츠나 전투에서의 폴란드군 생존자는 20~40여명으로 추정. 지휘관인 라기니스 대위는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한다.
  7. 비츠나 전투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개전 초기의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비츠나 전투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문제지
  8. 사실 수뇌부도 많이 참아 준 거라고 한다. 수뇌부에서 정지 명령을 내리니 구데리안은 무전기를 끊어 버리는 대인배적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부하 장교들이 '엉엉 옷 벗게 생겼어요 자제요'라고 하자 멈추긴 멈췄다.
  9. 이때 구데리안에게 편제된 기갑차량에 붙은 G란 마크로 인해 Great Guderian(위대한 구데리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10. 여담으로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패한 소련군 지휘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은 분노한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사형되었다.
  11. 구데리안은 키예프로 제2기갑집단의 방향을 돌린 것이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지만 제2기갑집단의 보급 상황을 고려할 때 모스크바 진격은 재정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2. 1941년부로 10월 5일 부로 구데리안 기갑집단을 제2기갑집단으로 재명명하였다.
  13. 이 일을 가지고 구데리안이 그만큼 신임을 잃었다는 증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솔직히 아프리카 전선은 구데리안만한 인물을 보낼 만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부전선에 하루 빨리 복귀시켜도 모자랄 판이었다.
  14. 당연히 회고록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15. 제3제국 정계에서 "건강 문제"는 정치적으로 거세되었다는 뜻과 같은 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데리안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정말 몸이 안 좋기도 했다고 한다.
  16. 그런데 졌으면서 영국 장성들에게 어그로를 끌어서 키배가 벌어졌다고 한다.
  17. 지금은 따로 무전수를 두지 않는 관계로 4명이 대부분이다. 이는 전후 미국의 전차 승무원 배치가 국제 표준이 됐기 때문인데, 미군은 셔먼 전차부터 탄약수가 무전수를 겸하고 전방 승무원은 부조종수 겸 전방 기관총 사수로 설정했고, 전방 기관총 사수는 있으나마나한 보직이어서 결국 M48 전차에 이르러서 폐지되었다.
  18. 여유공간이 무시 못하는 게 K1 전차의 경우 120mm 활강포의 주퇴복좌기를 확보할 여유 공간이 모자라서 K1A1으로 업그레이드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
  19. 라팔로 조약에 따라 소련의 전차 학교에서 유학 경험을 쌓은 기갑 장교들은 계급도 연령이 낮은 편이고 그들의 세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프랑스 침공에서 지휘관이었던 유명 장성들은 정작 구데리안의 지지자가 아니었다
  20. 예를 들어 포로로 잡은 소련군의 정치장교를 사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코미사르 명령"이라고 불린다.)을 자신의 부대에서는 실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1. 출처:제프리 메가기 저,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
  22. 원래는 영문판 중역본으로 공동 번역 중이었으나 출판사에서 일어판, 원서, 영문판을 비교하는 작업을 한 결과 영문판이 원서 내용이 꽤나 삭제된 부분이 많아 영문 번역을 취소 시키고 원서 직역으로 나갔다 그래서 정발이 꽤 늦어진 것이다.
  23.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 <<진흙 속의 호랑이>> 오역 사건 이후, 많은 이들이 이동훈이라는 이름에 경기를 일으키고 있다. 길찾기 측에서 "혹시 이 책도 이동훈을 쓴 중역본이냐?"고 묻는 사람들 탓에 "이동훈도 아니고, 원서 직역이니 안심하라."고 답해 주느라 진땀 뺐다고 한다.
  24. 은장은 전차, 금장은 장갑차 승무원에게 수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