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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관회는 신라 때 불교의 팔관재계를 지키기 위해 열렸던 불교법회에서 시작되었고 고려 때에는 비교적 불교적 색채가 옅어져 무속 신앙의 제천행사처럼 된 국가행사이다.
2 신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팔관회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한 이후 진흥왕이 산천용신제와 10월 제천행사 등의 토속 신앙의 종교의식과 불교의식을 결합해[1] 전사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3 고려
고려에 들어오면서 팔관회의 불교적 색채는 옅어지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를 통해 팔관회와 연등회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후세에 당부했다. 다만 유교적인 정책을 펼친 성종(고려)은 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놀음이다라며 훈요10조를 무시하고 폐지시켜 버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다다음 왕인 현종(고려) 때에 가서야 부활되었다.
4 조선 이후
조선 정부는 사대문 안쪽에 승려의 출입 자체를 금지할 정도로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에 당연히 국가행사로서의 팔관회도 조선이 건국된 그 해에 사대부의 주청으로 폐지되었다. 다만 고려 팔관회 때 행해졌던 음악과 무용은 일부 조선의 궁중행사에 전해졌고 불교색을 뺀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일부 유교의례로 편입되었다.
5 여담
팔관회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일들
- 1170년 의종 24년의 팔관회에서 무신의 난이 시작되었다.
-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곳[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