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5대 경종 왕주 | ← | 6대 성종 왕치 | → | 7대 목종 왕송 |
묘호 | 성종(成宗) | |
시호 | 강위장헌광효문의대왕 (康威章憲廣孝文懿大王) | |
능묘 | 강릉(康陵) | |
성 | 왕(王) | |
휘 | 치(治) | |
자 | 온고(溫古) | |
절일 | 천추절(千秋節) | |
배우자 | 문덕왕후(文德王后), 문화왕후(文和王后) | |
아버지 | 왕욱(王旭/ 후에 고려 대종) | |
어머니 | 선의왕후(宣義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960년 12월 26일 ~ 997년 10월 27일 |
양력 | 961년 1월 15일 ~ 997년 11월 29일 (38세) | |
재위기간 | 음력 | 981년 7월 12일 ~ 997년 10월 27일 |
양력 | 981년 8월 14일 ~ 997년 11월 29일 (16년) |
1 소개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명군.
고려의 제6대 왕. 왕건의 손자로, 왕이 되기 전부터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아 주변의 선망을 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즉위한 이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다지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등 많은 숱한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이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고려는 지방관조차 없는 허수아비 호족연합국가에 불과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종이 12목을 설치한 것도 후일 조선의 지방관 체계와 비교하면 바둑의 포석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할만큼 조잡한 것이었고 그만큼 성종대 까지도 호족들의 힘이 강성했음을 의미한다.
2 생애와 업적
태조와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아들인 왕욱(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동생으로는 이전 왕인 경종의 아내가 된 헌애왕후와 헌정왕후가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성종에게는 사촌형 겸 매부가 되는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개령군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은 자신의 사촌동생이자, 아버지였던 광종의 사위이며 아들의 외삼촌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사실 성종에겐 효덕태자라고 친형이 있었다. 광종의 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혁에 힘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최승로의 주장을 크게 4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하우대, 불교약화, 중앙집권, 신분제 강화. 즉 개혁이라기보다는 고려에 문벌귀족이 등장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여기서 노비환천법이 등장해서 광종이 평민으로 풀어준 사람들이 다시 노비로 돌아가는 일대사건이 벌어진다.[1]
성종은 또한 고려시대 왕 중에서 상대적으로 숭유억불적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라[2]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해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를 도입하는 한편 12목(牧)을 설치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종묘, 원구단, 사직, 방택 등 유교식 건물, 제단도 설치해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때에 왕건의 훈요 10조를 깔끔히 씹고(...) 즉위하자마자 과감하게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시켜 버렸다. 훈요 10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일단 성종 개인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 다만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이후에 금방 다시 부활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한편, 재위 도중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명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재치있는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할지론(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뿐이었다. 이 때를 거란의 제1차 침입으로 치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과 서희 항목 참고.
상기했듯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고려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 만큼 조선시대의 지방관 체계만큼 정교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저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하다. 성종의 치세에도 여전히 호족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으로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3] 이러니 지방 별로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쉽게 말해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성종은 이렇게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로한 탓인지 아쉽게도 38세라는 젊은의 나이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승하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고 죽었다. 조선의 왕 성종과 사망한 나이가 같은데 우연치고는...고려 초엔 정략 때문에 왕이 여러 부인을 맞아들였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성종은 조선의 성종에 비하면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다(...).
아들은 없었고 딸만 있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3 평가
태조가 고려 왕조를 건국했고, 광종이 고려 왕조라는 나라 자체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했다면, 성종은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성종 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고려 왕조 관료제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유교적인 사상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제 정비에 의해 중앙집권체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왕권이 향상되고 고려의 통치 체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초반 약했던 고려의 왕권이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다음에 경종대의 반동정치를 거친 결과물이었다. 이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세조-예종으로 이어지는 성종과 유사하다.
이로 인하여 신분 제도의 질서로 확립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고려의 특징인 중앙 문벌귀족정치가 확립되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유교적 중앙 귀족의 의도가 강했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의 틀을 잡았다. 성종 정도 되는 인물은 이 시스템 속에서도 할 것 다했지만, 그렇지 못한 왕들은 귀족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여러모로 큰 업적을 남긴 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들이 유교사상과 어긋나는 일을 저질러 처벌해야 했다. 여동생들 모두 선왕 경종의 아내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하고 내연남인 김치양을 귀양보냈고,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사망했기에 그녀와 사통한 왕건의 8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였던 왕욱을 귀양보내는 걸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게다가 첫째 아내도 재혼녀다
세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마냥 노골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 교리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불교와 민속 무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초기에는 조정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 못했다.
4 조선 성종과의 유사점
여러모로 조선의 성종과 흡사한 면이 있다.
우선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같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다.(38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덤으로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체제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그 기반이 된 것이 다름 아닌 송의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차 침입에 할지론이 넘쳐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의 과정은 동시에 중앙 귀족의 경쟁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향직 개정이었다. 여기에 노비 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김명수가 성종으로 연기했다. 경종 생전에는 그래도 천추태후와 함께 고난을 견디는 사이였으나, 신라파 유학자 신료들과 친해지면서 천추태후와 대립하게 된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며 선역인 탓에, 그의 거의 모든 업적이 드라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종이 어린 시절, 그녀와 따로 지내게 만들면서 목종의 정신병이나 성격 이상 등도 정황상 성종 탓인것처럼 묘사해버린다. 모든 업적을 천추태후에게 빼앗겨버린 목종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만... 정리하자면 유학자 신료들의 감언이설에 동생과 적대하게 되는 안습군주.
6 강릉(康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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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판문군 진봉리에 남아 있는 성종의 강릉(康陵).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왕릉 맞다. 원래는 병풍석과 석축이 있었는데 농지개발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묻혀 버렸다고 한다.
- ↑ 다만 이게 병크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광종 사후 경종도 호족과 적당히 화합했다. 그리고 성종은 직계로 된 것이 아니라 경종이 자식이 없어 주위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성종은 바보가 아니라, 노비 환속의 제약을 두었는데 특히 40세 전후에는 노비환천법이 통하지 않게 했다. 광종이 법을 시행한 것이 956년이고, 노비환천법이 987년 즉 30년 넘는 세월이 있다. 다만 노비가 너무 날뛰지 못하게 옛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놈은 그냥 노비로 돌아오게 했다.
- ↑ 다만 조선시대처럼 본격적인 국가 주도 숭유억불은 아니다. 교과과정에서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 정도로 이해한다.
- ↑ 조선시대 지방관들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나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 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 즉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