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 10조

訓要十條

1 소개

고려태조 왕건이 그의 뒤를 위을 후대의 들의 귀감을 위해 만든 10가지 유훈. 간단히 말하자면 고려 국왕의 행동 지침서쯤 되겠다. 그러나 몇몇 당연한 소리들을 제외하면 훈요 10조의 대부분 항목은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다.

2 내용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고려사절요 고려 태조 26년 편[1]. 그 내용을 하나하나 보자면...

○ 夏四月,王,御內殿,召大匡朴述煕,親授訓要,曰,我聞,大舜,耕歷山,終受堯禪,高帝,起沛澤,遂興漢業,予亦起自單平,謬膺推戴,夏不畏熱,冬不避寒,焦身勞思,十有九載,統一三韓,叨居大寶,二十五年,身今老矣,第恐後嗣,縱情肆欲,敗亂綱紀,大可憂也,爰述訓要,以傳諸後,庶幾朝披夕覽,永爲龜鑑,
▷ 여름 4월에 왕이 내전에 나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친히 훈요(訓要)를 주며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대순(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위를 받았고, 한(漢) 나라 고제(高帝)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 나라 제업(帝業)을 일으켰다. 나 또한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잘못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고, 외람되이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니 이 몸은 이제 늙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후사(後嗣)들이 기분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무너뜨릴까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요를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니 아침 저녁으로 펴 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를 바란다.

2.1 첫째,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 其一曰,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是故創立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之各治其業,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
▷ 1조는,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를 힘입었다. 그러므로 선종(禪宗)ㆍ교종(敎宗)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임명하여 분수(焚修)하여 각각 그 업(業)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훗날 간특한 신하가 정권을 잡으면서 중의 청탁을 들어주어 사원(寺院)을 다투어 서로 바꾸고 빼앗으니 꼭 이를 금지할 것이다.

왕건이 비록 고려를 다스리며 국가의 통치 체계로 유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당시 대부분의 호족들이 불교도였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불교를 받들고 있었으므로 국론과 백성들의 결집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교를 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만 그의 후손인 성종대에는 널리 유학을 권장하고 불교 행사인 팔관회나 연등회 등을 폐지시켜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물론 이는 중앙집권화와 관료 체제를 통해 국가의 통치 체계를 다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탄압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불교가 당시 고려에서 중요시되었다는 것이다. 오항녕의 경우, '조선의 힘'에서 훈요 10조의 첫번째 조항이 불교에 대한 언급이며 마지막 조항이 유교에 대한 것임을 들어 유교보다 불교가 우선시되었던 고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구라고 보기도 했다.

2.2 둘째,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할 것.

○ 其二曰,諸寺院,皆是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者也,道詵云,吾所占定外,妄有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各稱願堂,或增創造,則大可憂也,新羅之末,競造浮屠,衰損地德,以底於亡,可不戒哉,
▷ 2조는,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의 형세를 추점(推占)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추점하여 정한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이 장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ㆍ공후(公侯)ㆍ후비(后妃)ㆍ조신(朝臣)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 일컬으면서 행여 더 창건할까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의 말기에 사탑(寺塔)을 앞다투어 짓다가 지덕을 손상시켜 망하기까지 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라는 너무 절을 많이 지어 망했다면서 현재까지 세워진 절들은 모두 도선이 정한 것이므로 함부로 절을 더 짓지 말라는 것.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경계하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2.3 셋째,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 其三曰,嫡子嫡孫,傳國傳家,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凡元子不肖者,與其次子,次子皆不肖者,與其兄弟之中,群下推戴者,俾承大統,
▷ 3조는, 적자(嫡子)ㆍ적손(嫡孫)에게 나라를 전하고 집안을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常禮)라 하지마는,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므로 요는 순에게 선위(禪位)했으니 실로 공심(公心)인 것이다. 무릇 원자(元子)가 불초하거든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여 주고, 차자가 모두 불초하거든 그 형제 중에서 뭇 신하들이 추대하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라.

이 조항 때문인지 고려는 신라나 조선 등 다른 왕조와 비교해 유독 아들를 내버려두고 동생에게 상속한 사례가 많다.

이는 무엇보다 장자인 신검을 무시하고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가 패가망신한 견훤의 전례를 보았기 때문에 내린 유훈인듯 하다. 왕건 본인도 견훤의 전철을 밟기를 원치 않아서 외가 가문의 세력이 별로 시원찮았던 장남인 왕무를 정치 공작을 통해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거기다 굳이 견훤의 예가 아니더라도 장자상속이 확립되지 못한 왕조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충분히 강조할만한 부분이다.

다만 적자적손 원칙을 밝힌 그 뒷부분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굳이 '장남이 무능하면 그 이하 형제가 계승해도 좋다'라고 해석될만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냐는 의견이다. 특히 왕건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해 겨우 왕위에 올린 혜종들의 무자비한 왕권 도전에 시달린 끝에 왕위를 뺏기다시피 양위한 사례를 감안하면 안 붙이느니만 못하다란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달리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이 "장자가 불초할 때~"의 문구는 아마 왕건이 붙이고 싶어 붙인 문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고려는 왕건 개인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접착제 삼아 각지의 유력 호족들을 엉성하게 붙여놓은 형태의 국가였다. 당시의 호족은 조선시대 권력층처럼 관직이나 왕의 총애를 기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식이 아닌 자신이 기반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면서 형성한 세력[2]에 기반하여 권력을 행사했다.

즉 사실상 군벌이라고 봐야 할 이런 호족들이 연대한다면 왕위찬탈은 물론이요 아예 국가 전복까지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왕건이 괜히 부인을 29명을 둔게 아니다).

반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고려 초기 중앙 관제가 군사-행정 양 면에서 왕의 뜻을 받는 기관(내봉성-내의성과 병부)과 호족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기관(광평성-순군부)으로 양분돼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당시의 고려는 호족들의 발언권이 강력했다.

왕건이 복잡한 혼인관계와 개인적인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이를 연결시켜 놓았다해도 자신이 살아있을때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자신이 죽고나서도 그 연결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고려왕조의 기반을 튼튼히하기 위해 장남인 혜종을 차기 왕으로 내정한 것도 왕건이 살아있을 당시엔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겠지만 왕건이 죽은 뒤엔 얘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왕건은 혜종에게 문-무 양면에서 당시 최고위 신하였던 왕규박술희를 붙여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언으로까지 '장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라고 못박아버린다면 호족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즉 굳이 쓸데 없이 덧붙인듯한 '장자가 불초할 때에는~'이란 문장은 후사 문제에 관해 왕건이 실시한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가진 호족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립서비스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 진행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의 시선에서야 말도 안되는 짓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왕건의 입장에선 자신이 직접 혜종을 다음 왕으로 공인했고 거기에 보완책으로 왕규박술희라는 당시로선 최선의 후견인을 내세웠으며 혜종 본인도 전쟁터에서 활약한 능력있는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면 왕요왕소를 앞세운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것이다.[3]

따라서 이정도로 호족들을 견제해놓은 상황에서 굳이 유언격인 훈요십조에서까지 장자계승을 못박는다면 호족들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왕건 본인의 예상으론 혜종이 왕위를 굳건히 지킬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당시 호족을 달래기 위해 사족같은 둘째 이하가 계승 가능한 경우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망했어요...

피도 눈물도 없이 몰아치는 동생들을 냉정하게 처단하지 못한 혜종[4], 왕요 - 왕소세력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외려 역적으로 몰려버린 왕규, 군권은 장악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왕규와 연합하지도 못했던 박술희. 이렇듯 왕건이 기대했던 셋 모두 왕건의 기대를 정확히 저버리면서 왕건은 스스로의 유언으로 맏아들의 자리를 뒤흔든 못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2.4 넷째,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 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
衣冠制度,愼勿效焉,
▷ 4조는,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당(唐) 나라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이 모두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으나, 나라가 다르면 사람의 성품도 다르니 반드시 구차히 같게 하려 하지 말라. 거란(契丹)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나라이므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역시 다르니 부디 의관(衣冠) 제도를 본받지 말라.

이러한 유훈을 내린 이유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주범이기 때문. 고려는 본래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 하에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주세력이 되어서 세웠던 발해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거란을 원수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후에 거란이 보내온 사신을 감금시키고 그들이 선물로 보내온 낙타50마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는 등 매우 거칠게 대했는데(만부교 사건), 훗날에 거란은 를 건국하여 고려의 이러한 거친 대응에 대해 침략으로 답하였다.[5]

거란은 아니지만,[6] 훗날 몽골 제국에 굴복해 원간섭기 반속국으로 떨어진 뒤에는 몽고풍이 유행해 왕과 부원배들이 앞다퉈 몽골의 의관을 하는 등 결과적으로 제대로 지켜지지는 못했다.

2.5 다섯째,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 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脉之根本,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 5조는, 짐은 삼한 산천의 드러나지 않은 도움을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근본이 되니,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 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이루도록 하라.

위에 소개된 거란에 대한 배격과 그 의미가 비슷한데, 다시 말해서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이니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오늘날의 평양) 역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못지 않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왕건은 이 서경을 여진족으로부터 빼앗은 후에 다시 일구어 재건하였으며 폐허가 된 성곽도 재건축 하는 등 무척 애지중지하였다. 이 서경을 통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서경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북진정책을 수행하려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왕건 사후에 거란여진 등의 북방 유목 민족들이 차례로 세력을 불려가며 각각 을 세워 중원의 에게 세폐를 뜯어가는 등 그 위세가 대단해졌기 때문에 북진 정책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안습.
실제로도 고려의 역대 왕들은 이 유훈에 따라 서경을 개경에 이은 제 2의 수도처럼 아꼈고 분사 제도를 두어 개경의 정치 체제와 유사한 독자적 정치 체제를 구축해 놓기도 하였다. 정종 의 경우 훈요십조의 이 구절을 바탕으로 서경천도를 하고자 했으나 무리한 계획이라 실패했다.

다만, 서경의 위세가 수도인 개경 못지 않게 높아지다 보니 서경에도 개경처럼 강성한 정치 세력가들이 일어나서 개경파와 서경파로 국론이 분열되는 부작용도 낳았으며, 결국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거치면서 서경의 분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2.6 여섯째,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 其六曰,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減者,切宜禁止,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
▷ 6조는, 연등(燃燈)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八關)은 천령(天靈)ㆍ오악(五嶽)과 명산(名山)ㆍ대천(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특한 신하가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꼭 그것을 금지해야 한다. 나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맹세하기를 법회일(法會日)은 국기일(國忌日)을 침범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러이 이에 따라 행해야 한다.

위의 1조인 불교의 숭상과 맥을 함께 하는 유훈이다. 연등회팔관회는 모두 불교와 관련된 행사로, 왕건이 후대의 왕들에게 이러한 대규모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결속력을 높일 것을 권한 것이다.
다만 후대의 성종이러한 행사는 그냥 돈놀음이다라며 깔끔하게 폐지시켜 버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으며, 이는 현종 때에 가서야 부활되었다. 팔관회는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다 조선 건국 직후에 폐지됐고 연등회는 규모는 축소되는 등 난항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2.7 일곱째,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 其七曰,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徭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古人云,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賞罰中,則陰陽順矣,
▷ 7조는, 왕이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간(諫)하는 말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요점이 있을 뿐이니,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스럽게 되며, 꿀처럼 달디단 참소도 믿지 않으면 참소가 저절로 그치는 것이다. 또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납세를 적게 해 주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 주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소한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기가 낚시에 걸리고, 상을 중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앞에는 반드시 새가 피하고, 인덕(仁德)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정당하면 음양이 순조로울 것이다.

2.8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의 금강(錦江) 밖은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 其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灾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 8조는, 차현(車峴 차령산맥(車嶺山脈))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형(山形)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國戚)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王侯)나 궁원(宮院)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두고 전라도 지역을 겨냥한 지역감정과 연결시키는 의견이 있고, 훈요십조가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 제기의 강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특정지역에 대한 지역감정설은 근거가 없는 단순한 설에 불과하며, 후백제의 주요 세력이자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가 후백제 멸망 후에 고려에서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또한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구한 신숭겸, 6대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한 최지몽도 전라도 출신이다. 그리고 혜종의 외가가 바로 나주 오씨이다. 애초에 저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이란 지역이 어디인지 상당히 애매하다. 통일 과정에서 있던 청주, 공주의 반란, 통일 후 있었던 천안 부근의 목천 오성 반란 등을 근거로 차현 이남에서 금강 북쪽에 이르는 지역(대략 현재의 충청남도 중부 지역)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왕건 집권 당시의 상당 요인들이 호남 출신이었다는 점, 훈요십조를 왕건에게서 받아 기록한 박술희도 후백제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정지역에 대한 지역감정설에 상당한 의문을 주는 부분이 있다.

2.8.1 해석에 따른 이견

현재 사용하는 지명과 당시의 지명의 비교분석을 따지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차령산맥이란 명칭은 1903년 고토 분지로란 일본 지질학자가 명명한 뒤로 지금까지 사용하였기에 약 천년 전의 사람이 그 명칭을 쓸 리가 없고 령(岺)과 현(峴)은 산맥과 고개수준으로 달라지기 때문.

공주강 밖이란 표현 또한 당시의 안팎 사용 방법을 따르면 행정구역, 성벽, 강처럼 인공물, 자연물의 경계를 따지는 경우일 뿐인데, 강의 경우엔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공주성은 강의 남쪽에 있었기에 강 밖이란 말은 강의 북쪽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명칭인 백강, 금강이 아닌 '공주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에도 강내, 강외를 지역명칭으로 사용하는 지역이 있다면 '이름이 지어진 당시 행정기구가 강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란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구별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청주시 강내면과 강외면(현 오송읍)이 청주 북강, 즉 미호천을 두고 각각 어느 쪽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현재 車峴이란 한자 명칭을 사용하는 차현고개가 존재하며, 이 지점에서 공주강 이북지역의 교집합을 이루는 지역은 남북국시대 신라의 행정 구역인 9주 5소경에서 서원경, 즉 청주로, 궁예가 성장을 한 곳이자 자기의 세력기반으로 잡은 지역 중 하나기도 하다. 실제로 역성혁명 직후에는 이곳에서 궁예를 받드는 청주 호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갓 건국을 한 고려의 입장에선 당연히 견제를 할 지역일 수 밖에 없었다.

2.9 아홉째, 백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 其九曰,百辟群僚之祿,視國大小,已爲定制,不可增減,且古典云,以庸制祿,官不以私,若以無功人,及親戚私昵,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恤,量除徭役,每年秋,閱勇銃出衆者,隨宜加授,
▷ 9조는, 모든 제후(諸侯)와 뭇 관료들의 녹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이미 제도가 정해져 있으니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또 고전(古典)에, '공적(功績)에 따라 녹을 제정하고, 관작(官爵)은 사정(私情)으로 주지 않는다.'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이거나 친척ㆍ사사로이 친한 사람들이 헛되이 국록을 받게 되면 백성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 역시 복록(福祿)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니 꼭 이를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악한 나라(거란(契丹)을 가리킴)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한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병졸에게는 보호하고 구휼하며 부역을 참작하여 면제해 주어야 하며, 해마다 가을에는 용맹하고 날랜 인재를 사열(査閱)하여 그 중에서 뛰어난 자는 알맞게 계급을 올려 주어야 한다.

2.10 열째,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 其十曰,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十訓之終,皆結以中心藏之四字,自是嗣王,相傳爲寶。
▷ 10조는, 나라나 가정을 가진 이는 근심이 없을 때에 경계를 하여야 하니,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 일을 거울삼아서 오늘날의 일을 경계하라. 대성인이신 주공(周公)도 무일(無逸) 한 편을 성왕(成王)에게 올려 경계하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출입할 적에 보고 반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10훈요의 끝마다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中心藏之)'는 네 글자로 끝맺었다. 이로부터 왕위를 이은 왕들이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왕건은 각 훈계의 말미에 중심장지(中心藏之, 마음 속에 간직할 것)라는 말을 붙이게 해서 반드시 이것을 지킬 것을 상기시키게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 충복이었던 재상 박술희를 불러 이를 전수하고 천수를 마쳤다.

3 훈요십조 날조설?

고려 태조가 정말로 훈요십조를 직접 지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여덟째 항목은 당시 고려의 상황과 관련되어 여러 모순점이 보인다.

지역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현종시대(1009-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기존에 권력 중심에 있던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경주 지역 출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근거중의 하나로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 이런 추측에서 훈요십조를 날조한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바로 최제안과 최항 그리고 현종.

그 증거로 훈요 10조가 왕건의 유훈이었다면 왜 후대 왕들이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는것. 특히 사찰 건립을 제한한 것을 지킨 왕들이 별로 없다는 점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왕건이 2조에서 당부했던 사찰건립 금지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역대 왕과 신하들도 사찰을 많이 지었다. 광종은 대봉은사, 불일사 등 거대한 사찰을 지었고, 현종은 현화사를, 문종도 흥왕사를 지었다. 김부식, 최제언, 윤언, 최항 등 당대 최고 권력가들도 경쟁적으로 개인 사찰을 지었다. 제6대 임금 성종 때 최승로는 '절을 마구 짓는 것을 금해 달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연등회의 팔관회를 성대하게 치루라는 6조도 지켜지지 않았으며, 고려의 역대 왕들은 오히려 팔관회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왕건은 5조에서 서경에서 100일간 머물라고 당부했지만, 후왕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훈요십조에 따르면 왕건은 훈요십조를 '중심장지'라면서 후왕들이 명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하지만, 후세 왕들은 훈요십조의 조항을 지키지 않았다. 역대 고려 왕들은 훈요십조를 일부러 지키지 않은게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지키지 않은 것이다.

8조의 내용에 대한 설명을 더 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건이 백제인을 미워했다는 증거가 없다. 왕건을 괴롭힌 세력은 백제 세력 가운데 호남 세력이 아니라 오늘날의 청주 일대의 호족 세력이었다. 왕건의 상당수 측근들은 호남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훈요십조의 다른 항목에서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 사람이며, 이 고장에서 또한 최지몽이 출생했으며, 일찌감치 정윤이 되었던 혜종의 외가, 곧 장화왕후의 본가 역시 나주였고,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 태생의 순천 박씨로 견훤의 외손녀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역시 전남 곡성 용산재 출신이다. 결정적으로 훈요십조를 전해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 사람이었는데, 옛백제 사람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옛백제 출신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 없다. 왕건은 생전에 '나주의 40여 개 군은 나의 울타리와 같은 곳으로써 나를 잘 따랐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나주일대의 해당지역은 왕건이 고려의 건국 이전에 수군으로 정복한 지역이다.

둘째, 승주 출신의 박영규, 남원 출신의 현소, 나주출신의 윤다라, 아주 수국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김심엄, 광산출신의 김길 등 호남출신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용이 됐기 때문에 결국 후왕들에 의해서도 훈요십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셋째, 풍수지리에 따라 따져 보면 호남은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公州)강 바깥”은 경주에 대한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는 아니며, 오히려 낙동강을 낀 경주 지역이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라는 주장도 있다. 뒷날 성호 이익은 금강이 반궁수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이에 대해 한강의 범위가 훨씬 더 넓고 가깝기 때문에 멀리 있는 공주강을 거론함을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 즉 8조는 풍수지리 관점에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왕건 스스로가 풍수지리에 상당한 깊이가 있었다는 점을 볼때, 이러한 겉핥기 식의 풍수를 중요한 통치 방침의 유훈으로 내렸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8조가 외척들을 경계하라는 취지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애시당초 후대 왕들의 외척들이 어느 지역 출신일지 알수도 없는데 지역을 근거로 배제하라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다음 보위를 이을 혜종에게 직접적으로 외척을 경계하라는 의미라고 봐도 이상하다. 당시는 왕건의 혼인 정책으로 인해 외척들이 난립한 상태였으며, 그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곳은 정종과 광종의 어머니 신명왕후 유씨 세력이었다.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세력은 그 기반이 약했다. 8조의 의미가 혜종의 외가인 나주 지역을 포함해서 신명왕후 유씨 세력을 경계하라는 것이라면 얼핏 의미있어 보일지 모르나, 박술희에게 까지 혜종을 부탁할 정도로 혜종의 지지 기반이 약한 판인데 혜종의 가장 측근의 지지 기반이 될수 있는 나주 세력을 배제하라는 것은 왕건이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권력 분쟁에 대해서 보는 눈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혜종을 염려했다면 따로 불러 청주의 유씨 세력을 경계하라고 하면 될일이지 굳이 대대로 국가 정책의 기조로 삼을 유훈으로 물려줄 이유가 없다.

또한 고려사에 훈요십조가 기재되게 된 경위가 수상쩍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함에 따라 사초가 불타서 사라져 버려 고려사-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기록할 때에야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 있던 문서라면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서기 10세기 말 이후로 현재까지 훈요십조로 전해지는 글은 최승로의 자손 최제안이 그의 사망 연도인 1046년 이전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것이다 (고려사93 열전6 최승로). 어떤 왕에게 바쳐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최제안은 현종·덕종·정종·문종 치세에 조정에 봉직하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시기상 현종의 정변에 의한 즉위를 구실로 침공을 받아, 개경이 약탈당한 거란의 두 번째 침공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문서가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뒤 새로 짓는 국사 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욱이「훈요십조」는 나주 출신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 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5조 다섯왕조를 비평한 최항로의 옹사에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내용의 언급이 없다. 현종 즉위 직전까지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내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4 날조설에 대한 반박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신해 2년(1011) 편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임오일에 삼례역(參禮驛 전북 전주군(全州郡) 삼례면)에 이르니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인의 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곧 옛 백제로서 성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옳다 여겨 바로 장곡역(長谷驛)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본문에서의 성조는 태조 왕건을 의미한다. 훈요십조 조작설 자체가 왕건이 백제땅을 싫어했다는 정황이 없음을 전제로 하여 경주 최씨 조작론 등 그야말로 음모론 수준의 가정이 추가된 것인데, 거란의 침공으로 인해 피난길에 올라있는 급란의 상황에서마저 백제땅을 기피했던 상황은 왕건이 백제지역을 미워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날조설 제 1근거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더구나 일국의 태조왕의 유훈이 단 한사람의 의지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사후 조작되어 전래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누구나 마음먹고 외우면 전문암기 쯤은 일도 아닌 소박한 분량의 유훈을 허위 기록해봤자 당장 탄로날 뿐이다. 더구나 고려사절요는 고려실록 등 당시 존재하던 사료들을 집대성하여 오늘날의 국가기록원 역할인 춘추관에서 편찬된 역사서이다. 많은 사료가 소실된 이후라면 모를까, 고려실록이 존재하던 당시에 왕명으로 편찬된 고려사절요고려사조차 의도적으로 조작됐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장황한 면이 있다.

또한 날조설에서는 최항이 훈요십조와는 관련이 낮다고 보는데, 오히려 최항은 훈요십조 문서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최항은 현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보필한 측근이자 스승으며, 선왕인 목종이 직접 최항에게 후계자인 현종을 잘 보필해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훈요십조 원본을 목종에게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사찰건립 금지 조항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 최승로의 상소를 보면 직접 훈요십조의 내용을 인용해서 사찰 건립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아무리 일국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신성하고 큰 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후대의 왕들이 이를 무조건 100% 따랐으리란 법은 없다.

고려사절요가 완성된 조선시대 이후에도 훈요십조의 내용에 대한 진위 논란은 없었으며, 훈요십조가 다르게 기록된 사료나, 훈요십조가 다르게 기록되었다고 기록된 사료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한 국가의 태조가 남긴 유훈이 실제로는 조작되었다는 사소한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통성을 극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리 없다. 하다 못해 그런 의혹이라도 가졌어야 정상인데 그 조차 없다는 것은 조선의 학자들도 훈요십조 조작설이 의미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8조의 내용이 지역감정을 심히 자극하는 부분인지라 이에 대한 방어논리로 조작설이 등장했을뿐, 역사학적으로는 의미없는 가설이다. 그리고 훈요십조의 내용이 사실이어도, 그것이 현대의 지역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담으로 근대에 들어와서 이 조작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이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이다. 위의 최항-최제안 조작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도 그이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마니시 류의 조작설 자체가 오히려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시키려는 식민사관의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참고로 이마니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 중 한명이 이병도였다. 유사역사학자들이 이병도의 주장을 곡해해서 마치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서 지역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억지를 부리는 꼴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
  1.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계묘 26년(943), 후진 출제(出帝) 잉칭(仍稱) 천복 8년ㆍ거란 회동 6년
  2. 당연히 군사력과 그를 지탱하는 경제력을 포함하며 상당수는 왕건으로부터 지역 통치권까지 하사받아 정당한 지역 통치자로서의 권위도 같이 지녔다.
  3. 이에 더불어 왕건은 자기자식들에게 근친결혼을 장려하여 자식들의 외가인 대호족들이 결혼을 통해 다른 호족들과 세력 연대를 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4. 동생들의 외가 세력에 눌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5. 그런데 고려는 발해가 멸망할 당시에도 원군을 보내지 않는 등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내심으로는 발해가 망하기를 원했다는 설까지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최대의 적국이었던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미처 신경쓰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당시 고려도 발해를 도와줄 형편은 못 됐다. 거기에 발해가 망한 것도 단 15일 만이라,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능이나 했을지 의문.
  6. 다만 몽골과 거란은 문화적 계통이 가까웠고, 몽골 제국군에는 거란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