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자 전투

1 개요

팔루자는 이라크에서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주요 전쟁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겪었다.

2 영국-이라크 전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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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영국군과 이라크의 여단이 팔루자에서 벌인 전투. 영국은 바그다드를 차지하기 위해 팔루자를 필요로 했다. 1941년 5월 17일부터 5월 18일 사이에 구르카 대대와 기계화부대 등이 강을 건너 공세를 했다.

3 걸프전

전투라 하긴 그렇고 공중폭격이 있었다.

4 이라크 전쟁

팔루자에서 미군에 대한 여론은 좋지 못 했다. 특히 학교 건물을 접수하여 부대기지로 활용하며 통금을 내려 점령군이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2003년 4월 28일에 팔루자 주민들은 통금을 어기고 바트당 본부 등에서 "신은 위대하다! 모하마드는 예언자다! 사담도 싫고 미국도 싫다!"라는 시위를 했고 미합중국 육군 제82공수사단 325보병연대 1대대 장병들이 사격을 개시해서 지역주민 17명이 사망했고 미군 장병 3명이 부상하는 일이 있었다. 팔루자는 사담 후세인 시절에 부유한 동네였다. 그후 82공수사단 장병들은 3기갑기병연대와 101공수사단 병력으로 교체되었다. 2003년 7월 4일에는 순찰중인 미군 차량에 RPG 공격을 가해 6명이 부상을 입고 1명이 전사했다. 같은 해 7월 30일에는 모스크에서 대형 자살테러가 있었고 8명이 사망했다. 2004년 2월 12일에는 존 아비자이드(John Abizaid)[1] 당시 중동사령관(대장)과 찰스 스왜넥(Charles H. Swannack, Jr.) 82공수사단장(소장)[2]의 호송차량이 공격당하는 일도 있었다. 11일 뒤에는 민방위 기지와 경찰서가 공격당해 17명의 경찰이 살해당하고 87명의 죄수가 탈옥하는 일도 있었다.

2004년 3월 31일 블랙워터 소속의 민간군사용역업자 4명이 기관총에 의해 살해당하고 주검이 유프라테스 강 다리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보복을 결심하여 팔루자를 공격한다.

4.1 제1차 팔루자 전투

2004년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발생했다.

이라크 군사작전부 차장이었던 마크 키미트(Mark Kimmitt)[3] 준장은 블랙워터의 죽음을 보고 복수를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2004년 4월 3일 이라크 1해병원정단의 합동태스크포스(JTF)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미합중국 해병대가 작전에 참여했고 제임스 콘웨이와 제임스 매티스[4]가 지휘하는 미군 2000명의 병력이 팔루자를 포위한 뒤 공습이 시작됐다. 이에 맞서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규모는 약 3천6백명. 이때 팔루자는 미군의 공격으로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한달 동안 전투를 치른 뒤, 미군은 이라크인들로 구성된 '팔루자 여단'에 도시를 넘겼지만, 곧 팔루자 여단은 와해되어 버리고, 무기들은 죄다 이슬람 반군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후 2차 팔루자 전투로 이어진다.

4.2 제2차 팔루자 전투

2004년 11월 7일부터 12월까지 계속되었다. 미군의 작전명은 ‘유령의 분노’.

이 때 미 해병대와 이라크 반군 사이에 엄청나게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상대하던 미군 해병대가 1968년 베트남 후에 시 전투 이후 가장 격렬했던 시가전이라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

이 전투에서 미군 등 연합군 107명이 전사했고, 이라크 이슬람 반군은 1200~1500명이 전사했다. 민간인은 8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팔루자 시내의 모스크 200여개 중 60여개가 파괴됐고, 5만채의 건물 가운데 1만채가 완전 파괴됐으며, 남은 건물의 3분의 2가량도 큰 손상을 입었다. 이라크 이슬람 반군은 미군에게 그야말로 개발살나서 후퇴했다. 이후 미군은 2007년 이라크군과 정부에 팔루자의 지배권을 넘겼지만, 2013년 말 ISIL이 이곳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3차 팔루자 전투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두차레 전투에서 미군의 강함이 증명되었는데 상대하는 이라크군과 이라크 무장세력들 입장에선 미군이 좀비가 되었다는 점이다. 왜냐면 장비의 발달로 미군은 그 어떤 국가의 방탄복과 헬멧보다 더 두터운 방탄복과 강화된 헬멧을 쓰고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 보호장비 덕택에 미군의 생존율이 높았다.

시가전 특성상 이라크군과 무장 세력들이 미군만큼 수류탄을 많이 사용하는데 미군은 수류탄이 근처에서 터져도 부상만 입지 사망하지 않았다. 수류탄이 옆에서 몇발이 터져도 팔과 다리에만 부상 입을 뿐이고 머리와 몸통은 보호장비 덕택에 유탄이 미치지가 않았다. 훈련소에서 던졌을때는 그 엄청난 폭음과 물보라에 깜짝 놀란 수류탄이 미군에겐 별볼일 없는 무기로 전락했다. 게다가 미군은 워낙 덩치도 좋고 보호장비도 좋아서 일반적인 공격부위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아 이라크군이 내부적으로 미군 얼굴만 노리라는 전달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왜냐면 얼굴 외에는 부상만 입지 여간해서는 사망에는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헬멧 역시 총탄에 뚫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미군 헬멧은 방어력이 굉장히 좋아서 이라크 저격병이 정확히 헬멧을 맞췄음에도 미군은 죽지 않았다. 이제 보통의 장비로는 효율적으로 미군을 사살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이 드러나 미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가전이라는 것이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공격하는 입장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기 마련인데 지금의 미군은 기존의 군사적 한계를 뛰어 넘는 것 같다. 시가지 전투임에도 이라크군이 2,000여명 사망할때 미군은 단지 90여명이 사망했을 뿐이다. 특히 수류탄이 터져도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좀비 군사와 전투를 벌이는 상대편 입장은 끔찍했을 것이다.

팔루자의 이라크군도 이렇게 쉽게 점령 당할지는 몰랐을 것이다. 당시 팔루자에는 이라크군만이 아니라 주변국의 무장단체가 이라크군과 협력하여 싸웠는데 이들은 다양한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들인데 경악할 정도였다. 이라크군과 무장 세력들의 통신을 감청한 미군에 의하면 미군이 너무 빠르고 사방에서 미군이 나온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미군의 전투 능력은 생각한것보다 굉장히 강하고 조직적이였다. 그래서 시가전에 나름대로 자신했던 이라크군과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미군한테 철저히 궤멸당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 당시의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은 미국에서 인기를 얻어 대선에서 당선되어 재선될수 있었다.

5 이라크 내전

5.1 팔루자 함락

201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이라크군ISIL 사이에 벌어진 전투. 결국 ISIL에 함락되면서 ISIL이 점령한 이라크 최초 도시가 되었다.

5.2 테러리즘 분쇄 작전 (제3차 팔루자 전투)

이라크군ISIL에 대항해 2016년 2월 2일부터 팔루자를 포위하였고, 2016년 5월 22일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6월 26일 이라크군의 승리로 끝난 전투. 팔루자 인근 지역을 포위해 IS 보급로를 차단하는 1단계 작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성공적으로 종료됐으며, 6월 1일부터 드디어 팔루자 시가지에 직접 진격하기 위한 2단계 작전이 시작되었다. 6월 초에는 이라크군이 팔루자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도시 중심부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궁지에 몰린 IS는 팔루자 시내의 민간인이 탈출하려 하는 걸 엄금하고 [5] 탈출이 발각되면 사살하는 잔혹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며, 아직 5만명이나 남아있는 팔루자 민간인들 사이에 지하디스트 조직원을 끼워넣고 민가에 진지를 구축하는 등 인간방패 수법으로 이라크 정부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결국 IS의 발악을 제압하고 6월 26일 팔루자를 완전 장악했다.
  1. 1951년 생 미합중국 육군의 장군으로 레바논 계통의 아랍계 미국인이다. 중부사령관을 지내고 2007년 전역.
  2. 2006년 전역. 도널드 럼즈펠드의 신임이 좋았던 장군이었다.
  3. 1954년생. 2007년 준장 전역 후에 국무부에서 근무했다.
  4. 둘 다 4성장군까지 진급했다.
  5. [1] 출처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