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스미스


우리에게 잘 알려진 Horses 시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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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단독 내한 당시

1 개요

펑크의 대모

Patti Smith
본명은 퍼트리샤 리 스미스 Patricia Lee "Patti" Smith

미국의 펑크 록 뮤지션이자 시인. 펑크 록 뿐만이 아니라 재니스 조플린의 바통을 받아 여성 뮤지션계에 한 획을 그은 뮤지션이다.

2 생애

1946년 12월 30일 월요일에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베벌리 스미스는 웨이트리스였고, 그의 아버지 그랜트 스미스는 허니웰 발전소에서 일했다. 그는 유년 시절을 뉴저지 우드버리에서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와 글쓰기, 몽상에 빠지기를 좋아하던 소녀는 12살 때 가족과 함께 간 필라델피아 시립미술관으로의 짧은 여행을 통해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기 시작한다. 멀대 같이 키만 컸던 말라깽이 소녀는 프리다 칼로와 랭보, 짐 모리슨을 영웅으로 삼았지만 뉴저지 촌구석의 넉넉하지 못한 가정 환경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열렬한 신도로 패티에게 종교적인 교육과 성경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패티는 십대 시절에 제도화된 종교를 거부하고 떠나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너무나 그에게 제한을 가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부분은 노래 'Gloria'의 첫 구절에 나타나 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Jesus died for somebodys sins but not mine: 예수는 내 죄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죄를 위해 죽었다네."

부모님의 뜻에 따라 교대에 들어갔지만 1966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풋내기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임신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이 시련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기로 하고 이웃의 시선을 피해 낯선 바닷가 마을에서 홀로 아기를 낳았고 아기는 낳자마자 입양을 보내게 된다. 출산 후 패티 스미스는 대학을 자퇴한다. 교과서 만드는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그녀에게 유일한 꿈은 ‘예술가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1967년 여름, 다니던 공장에서 정리해고 당하자 그녀는 꿈에 그리던 뉴욕행을 결행한다. 아트 스쿨에 다닐 돈도 없었고 직장이나 잠자리를 책임져줄 사람도 없었기에 한동안 돌아다니며 파리도 갔다왔다가 최종적으로는 뉴욕 첼시 아파트에 정착한다. 당시 미국은 히피 열풍으로 가득했고 패티 스미스도 히피와 비트의 영향을 받아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를 위시한 옛 시인들부터 앨런 긴즈버그 같은 비트 시인들까지 다양한 시인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술적 동지인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랑 만나 동거하게 된다. 잠깐 사귀기도 했으나 메이플소프는 동성애자였기에 헤어졌고 좋은 친구이자 동지로 남게 되었다.

첫 앨범 발표년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년배 뮤지션들보다 음악 생활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동안 글을 써서 잡지를 내 발표하거나 행위예술이나 연극 배우에 출연하며 살아갔다. 그래도 음악 활동에 대한 의지는 있었기에 버스킹을 하기도 했고 잠깐 블루 오이스터 클럽 리드 싱어로도 고려되기도 했지만 없던 일이 되었다. 대신 블루 오이스터 클럽 멤버랑 사귀는 등 나름대로 친교가 생겨서 서로 앨범 작업에 참여하는 사이가 되었다. 마침내 1974년 스스로 밴드를 결성하기로 하고 지금까지 음악적 동반자 역할을 하는 기타리스트 레니 케이[1]를 만나게 된다. 이후 체코 망명자 출신으로 블론디 초기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이반 크랄과 드러머 제이 디 도허티가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활동중인 패티 스미스 그룹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CBGB 등지에 무대에 오르면서 텔레비전(밴드) 리더인 톰 벌레인을 위시한 토킹 헤즈, 라몬즈, 블론디 같은 뉴욕 펑크 멤버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렇게 1975년 패티 스미스는 아리스타랑 계약 후 앨범 작업에 착수해 Horses라는 첫번째 앨범을 내놓게 된다. 지미 헨드릭스가 소유하고 있던 일렉트릭 레이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존 케일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앨범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랭보, 앨런 긴즈버그나 잭 케루악 같은 비트 문학의 낭독시의 영향을 받은 간결하면서도 번뜩이는 로큰롤을 담고 있었고, 발매 즉시 굉장한 찬사를 받았다. 메이플소프가 자연 조명만으로 찍은 화장기 없고 털털한 패티의 사진을 담은 앨범 아트도 굉장한 파급을 불러일으켜 코트니 러브크리시 하인즈 같은 여성 로커를 위한 새로운 전략을 마련했다. 판매량은 30위 정도였지만 이 앨범은 뉴욕 펑크의 시작을 알리는 승전보로 평가받으며 패티 스미스를 펑크의 시인으로 평가받게 만들어 주었다.

Radio Ethiopia 발표 후 1979년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작업한 싱글 Because the Night와 그 싱글이 수록된 Easter가 나오면서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때 MC5 멤버였던 프레드 스미스 ("소닉"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으며 소닉 유스가 이 별명에서 밴드명을 따오기기도 했다.)를 만나 사귀다가 결혼하게 된다. 결혼 이후로는 미시건으로 이주해 활동을 많이 줄였지만 1988년 Dream of Life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후 메이플소프가 에이즈로 죽고 남편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남동생도 사망하고 밴드 멤버랑 커트 코베인도 사망하는 악재가 겹치면서 다시 8년을 침묵하게 된다. 아이도 키우느라 본인도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후 뉴욕에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1996년 Gone Again을 발표한 뒤로는 다시 돌아와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3 앨범 목록

3.1 정규앨범

3.2 라이브 앨범

3.3 편집

3.4 EP

  1. 이 사람은 개러지 록 컴필레이션 너겟츠 기획자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