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히피의 왕. The lizard king.
20세기 최고의 음유시인이자 사이키델릭 보컬.
약쟁이 끝판왕제임스 더글러스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 1943.12.8~1971.7.3)은 사이키델릭 락 그룹인 도어즈의 리드 싱어이자, 시인이다. 1960년대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 68운동 등의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카운터컬처(Counterculture)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기득권층(꼰대)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이 문화의 선두에는 프랑스 시인 랭보의 반항심과 통찰력을 계승받은 짐 모리슨이 있었다. 그의 시적·은유적인 가사, Hot한 외모, 상식에 어긋나는 기행들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젊은이들을 홀리고 있다. 27살에 생을 마감한[1] 그가 묻힌 페르 라셰즈 묘지[2]에는 아직도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짐 모리슨의 묘지
2 생애
2.1 어린 시절
귀엽다.
파일:Attachment/짐 모리슨/ino.jpg
짐은 1943년 12월 8일, 미국 플로리다 주의 멜번에서 훈장을 받은 해군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짐이 4살일 때, 사막에서 인디언들이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노래, 시, 인터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어즈의 생존 멤버들이 쓴 책 <도어즈>에 실린 그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짐은 그 죽어가던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자주했다고 한다.
짐의 아버지는 엄격한 군대식 규율을 가정교육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특히 짐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결국 짐의 사후에야 인정하셨지만...)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겠다는 아들의 편지에 '4년간 학비를 대준 것, 짐이 어릴 때 피아노 레슨도 거부했고, 캐롤도 부른 적이 없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밴드는 돈이 안 된다는 것.' 이러한 이유로 엄청나게 반대했다. 짐은 이에 빡쳐서 그 시점부터 아버지와의 연락을 끊고,[3] 도어즈 활동 당시 자신의 프로필에서는 Family Info : Dead고인드립라고 써버렸다.
그는 16살 때부터 니체와 랭보의 작품을 탐독하며 갖가지 글귀를 써내려나가던 조숙한 학생이였다. 이 메모들은 훗날 도어즈의 가사에 깨알같이,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이며 시집[4]으로 출판되기도 한다. 짐의 영어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걔는 책을 엄청 많이 읽긴 읽는데, 국회 도서관에서 듣도 보도 못한 16, 17세기의 악마 숭배 관련 책들을 읽더라."란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학생 시절 그는 공동 아파트에 얹혀 살았는데, 라디오에서 엘비스의 노래만 나오면 볼륨을 최대로 올리는 바람에 결국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는 쫓겨났을 지언정, 짐은 노래를 배운 적도 없음에도(심지어 악보조차 읽지 못했다!) 엘비스에게 영향을 받은 독특한 창법을 갖게 된다.
짐은 세인트피터즈버그 대학, 플로리다 주립 대학을 거쳐 그는 세 번째로 UCLA 영화학과에 들어갔고, 이 곳에서 도어즈 결성의 주 축이 되는 레이 만자렉을 만났다.
2.2 도어즈 결성
D학점의 위엄
짐은 영화를 매우 좋아했지만, 그가 UCLA에서 만든 첫 작품은 지루했다. 그래서 동기들에게는 야유를, 교수에게는 D학점을 받았다.(...) 짐은 UCLA에서 레이 만자렉과 만나게 되는데, 레이는 클래식 피아노를 치다가 재즈와 블루스쪽으로 전향한 키보디스트였다. 역시 블루스를 좋아하던 짐은 레이와 함께 음악 취향, 영화 취향을 공유하고 사이좋게 LSD도 빨아가며 우정을 나누었다. 참고로 이때 짐 모리슨은 훗날 영화감독으로 유명해지는 프란시스 코폴라와 하길종과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길종 감독이 회고하기를, 그런 반항아는 본적이 없었다고.
UCLA 영화학과를 졸업한[5] 짐이 보헤미안 라이프를 즐기던 1965년 여름, 베니스 해변에서 짐과 레이는 다시 마주치게 된다. 락 콘서트의 노래를 쓰고 있던 레이는 짐에게 한 곡 뽑아보라고 하는데, 짐은 노래 잘 못한다고 수줍어하면서 자신이 가사를 쓴 <Moonlight Drive>를 불러주었다.
Let's swim to the moon, uh huh
Let's climb through the tide
Penetrate the evenin' that the
City sleeps to hide
(후략)
레이는 락 음악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러한 짐의 시적인 가사에 뿅 반해서 당장 롹 밴드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짐은 이름까지 미리 골라놓았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시구절 중 하나인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every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
에서 따온 The Doors였다.
(참고로 지각의 문을 청소하는 세제는 LSD였다. 흠좀무.)
2.3 전성기
도어즈는 처음에 '위스키 어 고고'라는 바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여기서 만난 선배 싱어인 밴 모리슨(Van Morrison)[6]은 자신과 성씨가 같은 짐 모리슨에게 무대매너, 반항적이고 위협적이게 보이는 법(...), 간주 나가는 동안 즉석에서 시 읊는 법(...) 등을 전수해주었다. 그러나 도어즈는 <The End>라는, 근친상간의 가사가 담긴 곡을 부르다가 바에서 잘린다. 하지만 이미 음반 계약 기회가 들어왔던 그들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는 게 함정.
도어즈의 첫 앨범 The Doors(1967)에 수록된 <Light My Fire>가 3분짜리로 편곡되어 큰 히트를 친 후,[7] 도어즈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처음에는 관중들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노래가 끝나면 뒤돌아서있던 수줍은 리드 싱어 짐은 이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히게 된다. 많은 소녀팬들을 열광시켰던 그의 가죽바지(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도 이미지 메이킹 중 하나였다.
뉴욕에 건너간 도어즈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가 거쳐갔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게 된다. 그런데 에드 설리번이 <Light My Fire>의 가사 중 'Girl, We couldn't get much higher'가 마약으로 인한 황홀경을 암시한다고 하여 수정을 요구하였다. 짐은 'better'로 수정하겠다고 했지만, 1절에서는 그걸 까먹은 듯 'higher'을 좀 얼버무리더니 2절에서는 아예 작정한 듯이 'Higher!!!!' 질러버린다. 외부링크된 유튜브 영상의 2분 15초 경을 보시라. Light My Fire 라이브 영상
여담이지만, 화가 난 설리반은 라이브 후에 도어즈 멤버들과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도어즈에게 '너네 다시는 에드 설리반 쇼에 나오지 말아라'라는 뜻을 전했다고.(...)
어찌 되었건 간에 도어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2집 <Strange Days>(1967)를 냈을 무렵엔 이미 미국에서 인기 최고의 락 밴드가 되어있었다.
같은 해, 사진가 조엘 브로드스키(Joel Brodsky)는 'The Young Lion'이라는 제목 하에 짐의 흑백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짐 모리슨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어 컴필레이션 앨범, 책, 기념품 등에서 사골처럼 우려먹는다.[8]
3집 <Waiting For The Sun>(1968) 역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인기가 강렬해질수록 짐은 점점 자기파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4 쇠퇴
4집 <Soft Parade>의 녹음 무렵부터, 짐은 약에 쩔었거나 술에 만취한 상태로 스튜디오에 출첵하기 시작한다. 공연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였다. 짐이 공연에 늦게 나오면 나머지 멤버들은 인스트러멘털만 연주하거나, 혹은 레이 만자렉이 노래를 해서 인내심 없는 관객들을 달래곤 했다.
짐의 태도와 함께 외모도 크게 변했다. 날씬했던 짐은 1969년 들어서 술배로 살찌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르고, 옷도 대충대충 입기 시작했다. 항상 고수하던 벨트+가죽바지 대신 후줄근한 티셔츠에 청바지 등을 걸쳤다.
그런데 문제는 1969년 3월 1일, 전미 투어의 첫 번째 도시인 마이애미 공연에서 터진다.
짐은 여자친구인 패멀라 커슨과 싸우느라 비행기를 놓쳐서 공연에 늦게 도착했다. 관객들은 성난 상태였는데, 짐은 부르라는 노래는 안 부르고 술에 취해서 외롭다느니, 사랑이 필요하다느니 주절거리다가, 너흰 바보이자 노예일 뿐이라고 욕을 퍼붓는다. 그리고 로비 크리거[9] 앞에 무릎을 꿇고 구강성교를 흉내 내거나[10], 옷을 벗는 등 별 짓거리를 다한다. 4곡도 제대로 연주 못한 이 공연을 계기로 짐은 풍기문란죄·성기노출죄로 너 고소!당하고,[11] 관중들과의 관계 역시 틀어졌다.
카운터컬처가 점점 제압 당하고 사회 분위기는 보수적으로 변해가면서, 관중들은 더이상 짐을 '시대의 반항아'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친놈'이나 구경거리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제 짐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의 미친 짓을 구경하기 위하여 공연을 예매했다.
고소로 인하여 도어즈의 모든 투어 일정이 취소되고, 짐은 6개월의 징역을 받은 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지난 2010년, 짐 모리슨의 성기 노출죄는 사면되었다.
연합뉴스 기사
아니 죽은지 40년 만에 사면해주면 뭐해...
짐의 머그샷
2.5 사망
짐은 5집 Morrison Hotel(1970)과 6집 L.A Woman(1971)을 녹음한 후, 1971년 도어즈를 탈퇴한다. 그리고 여자친구 패멀라 커슨과 함께 파리로 은둔했다. 이 커플은 파리를 걸으며 건축물 등을 감상했다.
이 시기의 짐은 수염도 깎고 살도 조금씩 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고생+체중증가+수염자국의 크리티컬 3콤보로 심각하게 역변했기에, 짐이 혼자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셔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정말로 시에 전념하려고 애썼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가 평소 존경하던 시인들과 작가들처럼 그는 사후에도 계속 읽힐 수 있는 글을 남김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했다.
그러던 1971년 7월 3일, 짐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패멀라는 누군가를 부르려고 했지만, 짐은 목욕을 하면 좀 나아질 거라며 목욕을 했다. 그는 "Pam, are you still there?"이라는 말을 남기고서 욕조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프랑스 당국에서 부검을 실시하지 않았기에 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하여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나, 헤로인 과다복용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그의 여자친구 패멀라 커슨도 3년 후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7세에 사망한다. 비록 시체를 옮기는 문제 때문에 짐 옆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비석에 패멀라 수전 모리슨(Pamela Susan Morrison)으로 쓰였다. [12]
3 관련 영상
3.1 영화 《도어즈(The Doors)》
1991년에 개봉한 짐 모리슨의 전기 영화로, 올리버 스톤 감독, 발 킬머 주연의 영화이다. 짐 모리슨의 재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하나(심지어 발 킬머가 노래도 불렀다.), 도어즈 멤버들과 팬 사이에서는 평판이 영 좋지 않은 듯하다.
실눈 뜨고 보면 비슷하다.
3.2 다큐멘터리 《이상했던 시절(When You're Strange)》
2010년에 개봉한 도어스의 다큐멘터리로, 조니 뎁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제목은 2집 Strange Days에 수록된 <People are strange>의 가사 중 한 구절에서 따온 것. 짐이 찍은 영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영상을 볼 수 있다.
- ↑ 1970년에 사망한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와 함께 3J로 불린다. 공교롭게도 세 천재들은 모두 만 2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 랭보, 프레데리크 쇼팽, 오스카 와일드,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힌 파리의 묘지. 프랑스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기도.
- ↑ 전화나 편지를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동생과 남동생하고는 간간히 연락을 했다고.
- ↑ <The Lord And The Creatures>, 짐이 쓴 산문시의 형태는 랭보에게 영향을 받았다.
- ↑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짐이 UCLA를 졸업하였는데, 반항 의식의 일부로 졸업식 참석을 거부하고 편지에 동봉된 졸업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항목 3.2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짐이 졸업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이사 갔다고 딸랑 한 마디, 5초 나온다. 질적으로 전자가 더 풍부하므로 전자를 차용하였다.
- ↑ 근데 밴은 짐보다 2살이나 어리다. 이때 밴 모리슨은 뎀(Them)이라는 개러지록 밴드를 이끌고 3코드 가지고 한 여자가 자신에게 와서 한밤을 즐긴다는 가사(...)를 지닌 노래 Gloria로 한창 인기를 끌었다. 나중에 도어즈도 이 곡을 커버한다.
- ↑ 사실 맨 처음 밀었던 싱글, <Break on Through(To the Other Side)>는 반응이 미적지근(106위)했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재빨리 카드를 바꿔친 것이다.
- ↑ 이 문서의 최상위에 첨부된 사진 역시 그 중 하나이다.
- ↑ 도어즈의 기타리스트
- ↑ 드러머 존덴스모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건 구강성교를 흉내 낸것이 아니라 기타연주를 하는 로비 크리거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에 경의를 표하는 제스츄어 였다고 한다.
- ↑ 짐 모리슨이 실제로 공연에서 성기를 노출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성기를 노출한 사진이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 ↑ 아이러니하게도 패멀라의 아버지도 짐의 아버지처럼 미 해군 출신이였다. 그리고 짐과 패멀라 사후 유산 문제 때문에 짐의 부모와 함께 법정 다툼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