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기쁨, 죽음은 존재를 위한 과정일 뿐. 이 과정의 혁명적 투쟁이야말로 지성을 향해 열린 문이다.
일생 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6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Yo sufrí dos accidentes graves en mi vida, uno en el que un autobús me tumbó al suelo. El otro accidente es Diego;. Diego fue el peor..
1 개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희망의 화가
1907년 7월 6일 ~ 1954년 7월 13일
풀네임은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 'Frida[2] Kahlo de Rivera'. 출생 시의 이름은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Magdalena Carmen Frieda Kahlo y Calderón이며,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 후에는 주로 프리다 칼로로 불렸다.
1.1 약력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한 원시적이고 화려한 화풍으로 알려져있다. 6살에 소아마비, 16살에 교통사고, 30여 차례의 수술, 죽음까지 이른 병마, 디에고의 끝없는 여성편력, 세 차례의 유산, 불임 등 그녀의 삶에 반복된 고통과 절망은 수많은 작품의 오브제가 되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그림 중 자화상이 많다.[3]
칼로는 과격한 스탈린주의자였으며 디에고를 비롯한 공산주의자 주역들과 함께 멕시코의 정신을 일으켜 과거 식민지의 잔재를 극복하려 했다. 정치적 활동과 문화적 계몽 등 여러방면으로 애썼다. 또한 멕시코 민중의 토속 예술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생전에는 그다지 주목받는 화가는 아니였고,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정도로 여겨졌다. 유럽에서 리베라 보다 인지도가 더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 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재조명 됐다. 물론 칼로가 능동적인 페미니스트라 보기는 어렵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화자 되며 기구한 생애, 독특한 캐릭터와 작품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오늘날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멕시코 예술과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1.2 평판
짙은 갈매기 눈썹, 강렬한 눈빛, 콧수염의 흔적 아래 육감적인 붉은 입술. 그녀의 외모는 독특하고도 아름다워 늘 인기가 많았는데, 본인도 본인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사고 이전에도 초상화를 그리길 즐겨 자신의 자화상을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또 해외 각지를 다니며 화려한 멕시코 의상과 악세사리를 즐겨 입었다.[4] 그런 여왕과 같은 자태로 신랄하게 에스파냐어로 욕 하는 걸 즐겼고, 외모와의 시너지갭모에가 엄청났다고 한다...충공깽 사드 퀸 사실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 관리에 능했고 매사에 연극적이었다. ;내면의 불우함을 감추려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칼로는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과 관습을 극구 거부했다. 자신의 지성과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하여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5], 조각가 노구치,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 등 나이와 성별에 구분없이 자유롭게 연애했다.그치만 리베라가 한술 더 떴다
2 일생
2.1 유년기
멕시코 혁명(1910) 3년전인[6]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시티 근교 코요아칸에서 헝가리계 유태인 혈통이며 독일에서 이민온 곤살로 기예르모 칼로와 인디오, 스페인 혈통의 마틸다 칼데론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출생 직후 병이나서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그런 기억은 그녀가 자신을 멕시코인으로 여기는 정체성의 근거가 됐고 작품 <유모와 나>(1937)에 반영된다.
사진작가였던 아버지 기예르모는 무뚝뚝했지만 총명한 칼로를 유난히 아끼고 북돋아줬다. 어린 칼로를 철학, 고고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로 북돋아주었다. 칼로는 사진기를 다루는 법도 배우고, 기예르모를 도와 수정작업 등도 관여했는데, 이는 사실적이고 세밀한 칼로의 초상화에 대한 접근법에 밑거름이 되었다.
1913년 6살에 척추성 소아마비로 9달간 집에 있어야 했다. 프리다는 가는 오른쪽 다리를 가리려 양말을 여러 켤레 겹겹이 신고, 오른쪽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으며, 긴 치마의 멕시코 의상을 입곤 했다. 걷게 되자 재활운련의 일환으로 자전거, 롤러 스케이트, 수영, 복싱, 레슬링 등을 두루 섭렵했는데, 여러모로 알파걸이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또래들과 달리 성숙하고 우울한 내면을 갖게 되었으나, 겉으로는 더욱 천방지축으로 굴었다. 하지만 이 시련은 이후에 있을 큰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프리다는 멕시코 독일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1922년 멕시코 국립 예비 학교 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 입학한다.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기예르모로, 당시 전통은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였다. 마틸데 칼데론은 그런 정숙한 소녀들에게 위험한(?) 곳에 딸을 보내는 것을 여의치 않아했다. 그러나 아들이 없던 기예르모는 좌절된 학자의 꿈을 이루고자 프리다에게 희망을 걸었다.프리다는 의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5년 과정을 등록했다. 당시에는 그림에 흥미는 있었으나 장래로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멕시코 시티 중앙에 위치했던 국립 예비 학교는 당시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자 혁명 이후 행동주의, 개혁주의, 분노, 열정 ,혼돈, 파괴, 망가가 지배하는 도가니의 한가운데였다. 당시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스 바스콘셀로스[7]의 정책 덕에 그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되어 프리다가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교생 2천명 중 여학생은 35명이였다. 프리다와 동급생들은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문제아였고, 장차 멕시코의 주역들이었다.
사회 분위기만큼이나 학교 내부에도 급진파와 극보수파 등 여러 정치적 분파들이 치고 받았고, 교내 출판물로 치열하게 싸웠다. 프리다도 여러 동아리에 들었는데, 그중 알파는 '카추차스 Cachuchas'[8]였다. 프리다는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대하는중2 카추차스의 태도를 무척 좋아했다. 남학생 7명과 프리다를 비롯해 여학생 2명으로 구성되었고, 직접 정치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바스콘셀로스를 추종하는 등 낭만적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은 명석한 두뇌로 학교 내 개혁을 선동하고 상식을 뛰어 넘는 돌발행동테러로 교실을 무질서로 빠트렸다. 그 예로 당나귀를 타고 복도를 지나가거나, 개를 폭약으로 감고 불 붙여서 복도에 풀어놓았다. 특히 안토니오 카소 교수를 꼰대라 생각해서 무척 싫어했고 손 봐주려고 벼르다가(?), 대강당에서 교수의 진화론 강의가 있던 날, 연단 바로 위 창문에 15cm폭죽을 설치하고 밖으로 20분짜리 도화선을 밖으로 빼놨다. 그리고 강의중에 폭죽이 터져서 유리조각, 돌멩이, 자갈이 교수 머리 쏟아졌다.파.괘.한.다. 그런데 교수는 아무 표정 없이 툭툭 털고 계속 강의했다고 한다.흠좀무 물론 카추차스는 늘 그렇듯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미리 정해진 멤버가 설치 후 강의실에 착석하고 다른 멤버가 일을 개시하는 식이였다...역시 멕시코 갱나무 물론 앞으로 사고 쳐도, 뒤로 성적은 우수했다. 특히 프리다는 머리가 워낙 좋아서 교과서 한번 읽고 다 암기해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퇴학을 당했었다고 한다. 통고를 받자마자 장관 바스콘셀로스에게 직접 항의서를 보냈는데, 장관은 여자애 하나 못 다루냐면서 교장에게 복학시키라고 했다...
2.2 교통사고
1925년 9월 17일 프리다 칼로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나게 되고 프리다 칼로는 이 사고로 큰 수술을 받게 된다. 이 사고로 칼로는 왼쪽 다리가 11곳이 골절되고 오른발이 탈골되었으며 요추, 골반, 쇄골 등의 부위가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진다. 이 사고가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사고 당시 쇠봉이 그녀의 자궁을 관통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칼로는 죽을 때까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고 고통스런 수술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이 사고 이후 그녀가 받은 수술은 총 32번으로 이 32번에는 소아마비와 사고의 여파로 인해 받은 척추 수술 7번도 포함되어 있었다.
2.3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
그녀의 태도는 얼핏 봐도 남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자신감이 있었고, 눈동자는 야릇한 빛을 뿜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귀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꽤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방해가 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천만에, 꼬마 아가씨. 오히려 영광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질투심에 불탄 루페는 여자아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루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 화가 난 루페는 뒷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 여자아이를 쏘아보았다. 여자아이는 표정만 굳어질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루페가 노려보자 여자아이 역시 말없이 루페를 노려보았다. 루페는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고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저 애 좀 봐! 저렇게 어린애가 자기보다 크고 어른인 여자를 겁내지 않잖아. 난 왠지 저 애가 맘에 들어.”
여자아이는 세 시간쯤 있다가 “안녕!”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기둥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그녀였고, 그녀의 이름이 프리다 칼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2.4 결혼 후
3 화풍
프리다 칼로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초현실주의와 멕시코. 프리다 칼로는 그 자신이 초현실주의로 분류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자신의 그림이 병마와 싸우고 남편의 여성 편력에 상처입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했다고 생각했고, 유럽의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멕시코의 전통에 근간이 있다고하며 극구 부인했다. 그림의 소재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비사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그러나 창의적 상상과 무의식의 적극적 표출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의 사조와는 합치하지 않는다. [9]
작가로서 공식 경력은 작가 생활을 시작한지 12년만인 1938년 멕시코시티 대학 갤러리 그룹전에서였다. 이 전시에서 앙데르 브르통의 주목을 받고, 루브르 박물관이 그녀의 자화상을 구입해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가 됐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의 멕시코전에서 파블로 피카소, 반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 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 받았다.
그녀의 화풍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키워드인 멕시코는 그의 화풍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향점과도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칼로는 작가 생활 초기 보티첼리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로 공부를 했으며 이후에 그러한 공부의 영향이 화풍에도 남아있다. 하지만 이후에 갈수록 그녀의 그림은 점점 멕시코의 장식미술, 당대에 유행하던 벽화운동의 화풍을 따랐다. 그러한 변화에는 프리다 칼로 본인이 중앙아메리카의 신화, 문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있으나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 또한 지대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고유의 상징이나 형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이것은 그가 그렸던 그림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프리다 칼로는 남편의 이러한 취향에 부응하듯 멕시코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기록 영상들을 통해서 그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멕시코 전통적인 문화 이외에도 프리다 칼로에게 멕시코는 혁명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전기 영화 『프리다』 에서도 묘사되어 있듯 당시 멕시코는 혁명적인 정치 상황은 각종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각종 운동들을 촉발시켰다. 멕시코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플루타르코 카예스는 당시 민중들의 높은 문맹률로 인해 문자 교육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카예스 정권에서 문화 정책을 담당하던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통해 이미지를 이용한 대중 교화, 계몽 정책 입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한 정부의 인식 하에서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당대의 화가들에게 벽화 작업을 지시하게 된다.
벽화 운동의 탄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은 정치적 교화에 있었다. 하지만 벽화 운동은 미술가들에게 있어 멕시코적인 상징, 민중들의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프리다 칼로의 경우에도 벽화운동은 정치적 내용보다는 개인적이고 멕시코의 전통에 뿌리를 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가지 요소들 이외에도 프리다 칼로의 화풍을 형성한 것들은 다양하다. 가령 그녀의 굴곡진 생애는 프리다 칼로 화풍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사소하게는 그녀가 본래 의사를 지망했던 학생이기에 당대의 해부학 도면들도 칼로의 인체 표현에 반영되어 있다.
4 여담
- 영국의 밴드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이 프리다 칼로의 작품인 'What The Water Gave Me'를 보고 영감을 받아 동명의 곡을 발표했다. [10]
- 2015년에 소마 미술관에서 프리다 칼로 개인전이 열렸다. 신문사 개최라서 그런지 도록 퀄리티는 좋은 편
(남편인 리베라전은 도록 퀄이 안습)2016년에 디에고 리베라와 합동 전시회가 있을 예정.
- 2002년에 개봉된 전기영화에서는 셀마 헤이엑이 분했다. 실제 프리다가 그린 자화상에 맞추어 배우를 분장시킨 다음 프리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연출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똑같다.
- ↑ 1939년 애인이였던 Nickolas Murray의 뉴욕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2012년 11월 멕시코 보그의 부록 표지로 쓰였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프랑스판 표지는 사실무근함.
- ↑ 독일어로 평화frieden를 의미
- ↑ 143점의 회화작품 중 1/3 가량인 55점이 자화상이다.
- ↑ 주변에서는 "어디에서 서커스 공연하나?"하며 놀렸지만 칼로는 개의치 않았다. 단, 멕시코 의상을 입은 것은 칼로의 개성이 아니라 민중을 중요시한 디에고에 대한 동조 심리였고, 다리를 가리기에도 적합해서 였다.
- ↑ 연애가 아니라 친구나 사제관계였다는 말도 있다.
- ↑ 자신을 혁명의 딸로 여겨서, 출생증명서와 달리 자신의 생일을 1910년 7월 7일로 삼았다.
- ↑ 1920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알바로 오브레곤은 디아스의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법률가이자 철학자였던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멕시코 교욱이 '우리 피, 우리 말, 우리 사람' 위에 세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 ↑ 회원들이 쓰고 다니던 챙이 달린 모자에서 유래
- ↑ 초현실주의를 극혐했는데, 당시 초현실주의자들을 '미X 정신X자 X새X들'이라 불렀다... 'this bunch of cuckoo lunatic sons of bitches of surrealists'
- ↑ 참고로, 이 밴드의 보컬인 플로렌스 웰치는 프리다 칼로의 엄청난 팬이다.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프리다 칼로 관련 물품으로 도배되어 있는 화장실을 공개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