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남편 커트 코베인과 딸 프란시스 코베인과 함께
2015년 딸 프란시스 코베인과 함께
Courtney Love
1 소개
본명은 코트니 미셸 해리슨(Courtney Michelle Harrison). 1964년 7월 9일 생. 그룹 홀(Hole)의 리더이자 가수, 영화배우. 음악적 성향은 그런지 펑크. 커트 코베인의 웬수 전 배우자로도 유명.
어린 시절부터 평범하지 않고 주위의 골치를 썩이던 소녀였다. 히피였던 부모 아래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Greatful Dead(그레이트풀 데드)라는 전설적인 락 밴드의 매니저이며 마약을 상용했다. 여러 번 퇴학을 당하다가, 절도로 소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16세에 집을 나온 후부터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밴드와 스트리퍼로 삶을 이어나갔다.[1]
13세 때 반드시 락스타와 여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는데, 21세 때 영화 시드와 낸시에 단역으로 데뷔하고[2] 24세 때 밴드 홀을 결성한다. 여자 가수의 그룹이란 걸 생각하면 이름이 참 뭐하다. "구멍"이라니(...)[3] 첫 번째 앨범인 'Pretty on the inside'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밴드 활동을 시작하면서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 등[4] 다른 밴드의 구성원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의 연애사가 유명하다. 1992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부터, 코트니 러브와 커트 코베인의 신변은 언제나 둘의 의도에 맞지 않게 언론에 과도하게 노출당하게 된다. 커트는 이에 대해 "언론은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는다. 때문에 코트니는 다른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는 밖에 나오려고도 하질 않는다. 단지 지역 여성 잡지에서 부탁한 인터뷰에 가볍게 응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심한 결과가 벌어지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우리 부부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같은 부부[5]가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하였다. 중증의 마약 중독증이었던 코트니 러브는 임신 이후 재활치료에 들어가서 마약을 끊었다.고 구라쳤다. 부부 둘다 성격상 커트 코베인은 언론에 상당히 호의를 갖지 않기로 유명했고 코트니 또한 결혼 후 자신의 신변이 언론을 통해 왈가왈부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샷건 자살 이후 코트니 러브의 삶은 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홀의 멤버 크리스틴 파프의 죽음에 대해 코트니 러브에게는 온갖 억측과 비난이 쏟아진다.[6] 커트 코베인의 사망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Live Through This'[7]는 1994년 거의 모든 비평단 투표의 톱을 기록, 미국에서 160만장이 팔린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 선정되는 등 그런지락의 명반으로 인정받고 있다.
- Live Through This의 수록곡 Violet, 홀의 대표곡이 된다.
1996년엔 아마데우스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거장 감독 밀로스 포먼의 영화 '래리 플린트'에 출연했는데, 단역 출연 경험이 전부였고 마약 중독자인 코트니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데 제작사가 고심이 많았다고 한다. 매주 마약 검사를 실시하고 보험까지 들어야 했다고...
밀로스 포먼은 경험이 부족한 배우는 연기 테크닉은 떨어지지만 감정 연기가 잘 나올 수 있다는 이유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코트니도 배역을 위해 2주만에 16kg를 감량하는 노력을 보였다. 밀로스 포먼의 말처럼 비교적 일상적인 배경의 영화 초반보다 마약 중독과 법정공방이 오가는 후반부에서 높은 몰입도를 보여준다.
영화가 공개되고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다. 코트니의 연기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으로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줄리엣 비노쉬가 호명되자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영화로 코트니는 새틀라이트 어워즈를 비롯한 5개의 시상식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고[8] 골든 글로브에선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 시카고 트리뷴과 인디펜던트 지에선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을 점쳤지만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 [9]
-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 시상자로 참석한 코트니 러브[10]
이 때의 인연으로 밀로스 포먼의 후속작 '맨 온 더 문'에서 짐 캐리의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1998년, 포스트 그런지 풍의 홀의 3집 'Celebrity Skin'[11]은 평단의 찬사와 함께 미국에서 140만장이 팔렸고 그래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에서 공연해 파격적인 시스루 의상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2005년에 전작 'Live Through This'와 함께 '죽기전에 들어야할 앨범 1001'에 선정되었다.
- 빌보드 모던락 트랙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Celebrity Skin
-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던 Malibu
이쯤에서 마약을 끊었으면 한 여인의 아름다운 성공기가 됐겠지
홀은 2002년에 해체하지만, 코트니 러브는 그 와중에도 맹렬하게 영화와 음악 활동을 전개한다. 2004년에는 펑크 풍의 솔로 앨범 'America's Sweetheart'를 발매한다.[12] 평단에서는 상당한 호평이었다. 단 이 시기가 마약 복용의 절정기(...)여서 제대로 된 활동은 하지 못했고 본인도 나중에 당시 마약 때문에 레코딩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Riot Girl Movement라고 일컬어지는 반항적인 그런지 여성 록 사운드를 대표하는 가수라고 볼 수 있다. 반항적이고 도발적이지만 천진함이 느껴지는 록 아이콘이기도 하다. 도발적인 패션은 항상 가십지의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 사이를 오가며 1999년 우드스탁에서의 'Celebrity skin' 공연에서는 가슴을 노출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아티스트로서나 배우로서의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사생활이 매우 문란하고 주위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 발언, 또는 성적이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자주해서 관심병자라고 불리기도 한다.[13]
1995년엔 MTV의 리포터와 야외 인터뷰를 하던 마돈나의 머리 위로 메이크업 콤팩트를 집어 던지고선 무대 위로 올라와 인터뷰에 참여했다.[14] 딱 봐도 술에 취한 상태여서 인터뷰 내내 횡설수설했으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마돈나 역시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톱스타답게 의연하게 대처하고 자리를 피했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과거 드루 배리모어가 레터맨의 데스크에 올라가 레터맨을 향해 가슴을 노출했던 장면을 똑같이 재현했다... 드루와는 90년대에 절친으로 둘이 같이 술마시고 마약하는게 일이었다.
마약중독으로 딸 프랜시스를 빼앗겼다가 양육권 분쟁에서 겨우 승소했으나 딸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지만 한때는 딸과 동시에 피둥피둥해진 상태로 돌아다니는 모습이 발견된 적도 있고 그다지 좋은 부모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스트리퍼였고 평생 마약 상용자에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제끼는 등 막장 이미지의 소유자지만, 실은 매우 인텔리로서 언변이 매우 훌륭하고 책도 많이 읽고 머리에 들은게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15]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배웠고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 대학인 더블린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신학을 배웠다. 코트니 러브가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직접 쓰는 가사의 깊이와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통찰력에 있다. 그 예로 Celebrity Skin의 가사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헐리웃의 지성파, 연기파 배우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턴과도 오래 사귄 것을 보면 그런 점을 알 수 있지만...
한때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에게도 집적댄 적이 있는데, 레즈너는 엮이지 않기 위해 스튜디오를 누드 아니키 사진으로 도배하는 강경책(!)을 시도했다. 그래도 집적대고 호텔방까지 쫓아오자, 결국 레즈너는 베란다를 통해 탈출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솔로 앨범에선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락밴드 스트록스의 리더이며 미남으로 유명한 줄리안 카사블랑카스를 겨냥한 가사를 쓰기도 했다.[16]
이 밖에도 유명하고 재능있거나 미남이고 핫한 남자들에게 지나치게 집적거려 악명이 높다. 오죽하면 커트 코베인이 이런 아내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
사실 커트 코베인과 결혼한 것도 그의 명성과 재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많았고,[17] 심지어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코트니가 관련되어있다는 음모론이 끊이지를 않는다. 코베인의 죽음 직후 "Courtney Did It"이라고 쓰인 티셔츠도 팔린 적이 있을 정도. 코베인의 죽음은 자살로 위장된 것이며 그 배후에 코트니 러브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책과 다큐가 여러 편 있다. 제법 자세한 정황과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정말로 살인 정황이 있다면 미국 경찰이 정식으로 기소해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18] 대단한 빽이나 권력도 없고 또 폭행이나 약물로 여러 차례 법원을 출두한 경력을 지닌 여자가 살인이랑 중범죄를 저질렀다면 이렇게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터. 만약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면 마약중독자에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코트니 러브가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을 지키기도 힘들었을 듯. 물론 오노 요코처럼 세계적인 스타의 반려는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지만, 코트니 자신의 행실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아 불을 더 지핀 측면도 없잖아 있긴 하다.
조금 다른 버전으로 빌리 코건과 짜고 죽였다는 설도 있다. 코진요 빌진요
그러나 그녀가 항상 악동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선행을 하여 매스컴을 탄 적도 있었다. 1999년 공연을 하러 가는 길에 뒤집힌 승용차에 갇혀있던 두 여성을 발견하고 구조한 것이다. 당시 사고를 담당한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대화를 나눌 때 너무 소박한 느낌이라 그녀가 유명 스타인 코트니 러브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만난 러브와 홀 멤버들은 모두 남을 생각하고 도울 줄 아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묻혀버렸다
2009년부터 새 멤버를 모집해 홀을 재결성하고[19], 6년이나 질질 끌었던 새 솔로 앨범 'Nobody's Daughter'도 홀 이름으로 변경해 2010년 발표했다. 커버 아트는 마리 앙투아네트. 다만 평은 좋지 않다. 성적도 망했다 롤링스톤에서는 그 해의 음악 재앙 1위로 홀의 컴백을 뽑았다(...)
약도 끊고 최근들어 여러 방면으로 재기에 힘쓰고 있다. 2014년 너바나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정식에 참여해 데이브 그롤과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고[20] 드라마 엠파이어, 리벤지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라나 델 레이의 월드 투어에 게스트로 공연하기도 했다.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계속 출연 예정이라고 한다.
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은 코트니 러브의 팬으로 코트니와 생 로랑 화보를 찍었고 VIP로 초청한 컬렉션 무대에서는 홀 시절의 패션과 흡사한 디자인의 옷들이 선보여졌다.
딸인 프란시스 코베인은 2015년 가을에 뮤지션 남자친구와 결혼했지만 반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2 앨범
2.1 홀
- Pretty on the Inside(1991) [21]
- Live Through This(1994)
- Ask for It(1995)
- My Body, the Hand Grenade(1997)
- The First Session (1997)
- Celebrity Skin(1998)
- Nobody's Daughter (2010)
2.2 솔로
- America's Sweetheart (2004)
- How Dirty Girls Get Clean (2006)
3 출연작
3.1 영화
- 시드와 낸시 (1986)
- 지옥특급 (1987)
- 비디오테이프 대소동 (1988)
- 1991: The Year Punk Broke (1992)(다큐)
- 바스키아 (1996)
- 필링 미네소타 (1996)
- 래리 플린트 (1996)
- Not Bad for a Girl (1996)(다큐)(공동제작자)
- 체이스 식당의 마지막 나날들 (1997)(다큐)
- Kurt & Courtney (1998)(다큐)
- 비포 뉴 이어 (1999)
- 맨 온 더 문 (1999)
- 비트 (2000)
- Bounce: Behind the Velvet Rope (2000)(다큐)
- 줄리 존슨 (2001)
- Last Party 2000 (2001)(다큐)
- 트랩트 (2002)
- 메이어 오브 더 선셋 스트립 (2003)(다큐)
- 스트레이트 투 헬 리턴즈 (2010)
- 힛 소 하드 (2012)(다큐)
- 커트 코베인:몽타주 오브 헥 (2015)(다큐)
3.2 드라마
- 썬즈 오브 아나키 (2014)
- 엠파이어 (2015)
- 리벤지 (2015)
- ↑ 일본에서 스트리퍼 생활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 ↑ 원래 코트니 러브는 주연 '낸시'의 오디션에 "내가 바로 낸시다!"라고 패기 있게(...) 참가하였으나, 클로이 웹이 주연을 따내고 코트니 러브는 낸시의 친구 '그래천' 역으로 출연한다.
낸시에 비견되는 썅년이 되었지 - ↑ 셰익스피어 고전 문단에서 따온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현지에서도 그냥 구멍 취급.
- ↑ 빌리 코건과 사귀고 결혼식을 잡았으나 코건과 커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다가 커트와 결혼한다...
- ↑ 언론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
- ↑ 코트니가 남편 커트 코베인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문은 지금도 여러 권의 책이나 주위의 지인들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는 코트니 러브의 아버지 행크 해리슨조차 딸을 의심하고 있을 정도.
- ↑ 이 앨범에 실린 모든 곡들이 사실은 커트 코베인이 써준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앨범의 모든 곡의 작사는 코트니 러브가, 작곡은 남편 코베인과 슈게이징 밴드 Janitor Joe 출신인 홀의 베이시스트 크리스틴 파프, 그리고 당시 홀의 기타리스트이자 크리스틴의 남자친구인 에릭 앤더슨이 하였다. 즉 두 커플의 공동 창작물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크리스틴 파프 역시 커트 코베인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6월 16일 욕조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은 채 발견되었다.
- ↑ 미국에선 영화사에서 수상에 유리하도록 주연을 조연 부분으로 바꿔서 시상식에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 ↑ 코트니가 수상한 5개의 시상식들은 모두 평론가들이 심사하는 시상식이었고 아카데미의 경우는 감독, 작가, 배우같은 영화계 종사자들이 심사하므로 연령대가 높고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 악동 락스타인 코트니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 ↑ 본인은 후보로 오르지 못했지만 래리 플린트가 감독상과 남우 주연상 후보였기에 참석
- ↑ 이 앨범의 주요 프로듀서는 코트니의 전 남자친구이자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로 유명한 빌리 코건이다. 그런데 코건은 3집 작업 직전까지도 코트니가 커트를 위해 작곡한 'Doll Parts'를 들먹이면서 "코트니가 작곡을 할 수 있다면 기타를 3코드 이상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작곡가일 것이다" 라며 깠다. 이에 코트니는 빌리 코건이 1996년 머리를 밀고 컴백하자 코건을 자신 때문에 머리까지 삭발할 정도로 아직도 과거의 일로 우울해하는 찌질이라면서 맞받아쳤다.
가해자에게만 과거의 일이겠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나?홀의 베이시스트 멜리사 아우프 델 마우어는 스매싱 펌킨스가 처음 해체하기 직전 밴드와 같이 투어를 돌기도 하였다. - ↑ 미국의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미가 증오하는 커트 코베인의 마녀 코트니 러브의 솔로 앨범인데, 코트니 러브 특유의 냉소적 조크가 넘치는 제목이다.
- ↑ 한 미국 언론은 이것을 "Attention Deficit Disorder" 라고 비꼬기도 했다.
- ↑ 리포터가 코트니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을 때 마돈나 왈, "코트니 러브한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할 거에요?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 ↑ 실제로 커트 코베인과 연애 초반 밴드의 불합리한 인세 문제를 두고 "곡은 주로 너 혼자 쓰는데 인세는 왜 똑같이 받아?" 하고 항의하자 커트가 최종 계약을 하기 일주일 전 밴드의 인세 중 자신이 50%로 차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바꿨고 (이로 인해 커트와 크리스트의 사이가 무척 나빠졌다.) 커트에게 인문학 서적 등을 빌려주며 가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단, 커트 생전 인터뷰에서 커트는 자신이 없으면 운동화 신발끈도 못 맬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커트 사후 너바나의 곡은 커트가 단독으로 썼으니 너바나의 곡에 대한 권한은 너바나가 아니라 커트의 미망인인 자신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잉 발언을 일삼았다.
- ↑ 제목은 "But Julian, I'm a little older than you".
- ↑ 그 당시 코베인의 라이벌이나 다름없던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빌리 코건과 양다리 관계였고 남편이 살아있을 당시에도 빌리 코건과 단 둘이 여행을 가는 등, 대놓고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 ↑ O. J. 심슨 사건처럼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게 아니라 아예 체포가 되지 않았다.
- ↑ 베이시스트 모집에 꼴랑 한 명만 지원했다고.
- ↑ 화해하고 서로 문자도 주고 받는다고.
- ↑ 정규 앨범은 볼드 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