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제르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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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정치가. 1877년 9월 11일 ~ 1926년 7월 20일.

풀네임은 펠릭스 에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폴란드어: Feliks Dzierżyński(펠릭스 지에르진스키), 러시아어: Феликс Эдмундович Дзержинский)[1] '드제르진스키'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르면 'дз'는 'з'와 같은 음가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므로 '제르진스키'가 옳다. 심지어 이 사람의 성이 해당 규정의 예시로 나와있다.

벨라루스 태생이며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리투아니아의 김나지움[2]을 졸업하기 전 혁명에 관련했다는 이후로 퇴학당했다. 그러자 그는 마르크스 계열의 리투아니아 사회 혁명당에 가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 민주주의라는 단체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 때문에 수많은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897년1900년 두 차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그곳에서 탈출하여 베를린에 도착하여 '외국인 위원회(Komitet Zagraniczny)'를 조직하여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3]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던 약혼자가 결국 사망하는 바람에 잠시 활동을 중단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가 1905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다시 탈출에 성공. 이후 당을 재건하는데 주력하면서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었다.

1910년에는 당원이었던 조피아 무스카트와 결혼하나 이번엔 부인이 체포되었다(...). 조피아는 시베리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제르진스키는 조피아가 옥중에서 출산한 아이를 데리고 도피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의 제르젠스키는 각종 계략을 체득하여 경찰들의 추적을 회피하는 데에도 도가 터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1912년에 다시 체포되었다.

2월 혁명으로 석방된 그는 폴란드 혁명을 구상하다가 볼셰비키에 감화되어 여기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4월 테제를 크게 지지했고, 10월 혁명 때는 페트로그라드[4]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레닌은 제르진스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반혁명세력 척결을 위한 방법을 구상케 했는데, 제르진스키는 '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Всероссийск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комиссия по борьбе с контрреволюцией и саботажем), 줄여서 체카(ЧК)라는 기구로 이에 화답하였다. 이 체카는 몇번의 재정비를 거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데, 그 이름은 다름아닌 KGB. 제르진스키는 스스로 체카의 총수가 되어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을 박멸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5] 적백내전 때에는 체카가 자체적인 병력을 소유하는 등 갈수록 제르진스키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반혁명세력으로 의심되는 인사를 미리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한 적색 테러는 유명한데, 하룻밤 사이에 1500명을 사살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강도가 엄청났다.[6]

이후 제르진스키는 내무인민위원회장, 통신인민위원회 인민위원, 국가경제최고회의장 등의 고위 직책을 맡으며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잡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에 초연하고 혁명에만 분투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오직 혁명 성공을 위해서만 일했기 때문에 당시 볼셰비키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사실 그는 공안기관과 자체병력(소련 내무군의 전신이 되는 수십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을 거느렸기 때문에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 끼어들만한 발판은 갖추고 있었으나, 트로츠키, 스탈린, 지노비예프와는 달리 전혀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반혁명세력 처단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러시아 내 혁명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작 폴란드 공산당에 대해서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7]

1926년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에서 그는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연설을 했는데, 주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항하는 '통합반대파'의 인물들, 즉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에프, 레프 카메네프 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연설 도중 그는 굉장히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결국 연설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8] 스탈린 왈,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충실한 기사였다.[9]

소련은 그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현 벨라루스 민스크 근처에 있던 폴란드인 거주 구역을 제르진스카야로, 그 중심지를 제르진스크로 명명했다. 참고로 이 구역은 대숙청 기간에 해산되었으며 관련 행정관들은 모조리 처형되었다.[10]

제르진스키가 만든 체카의 후신인 KGB에서는 당연히 그를 드높이는 데에 앞장섰다. KGB 본부 앞 루뱐카 광장 중앙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철의 펠릭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출신지인 당시 폴란드 인민 공화국 측에서도 그를 기리며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가 생겨났으며 그의 동상도 세워졌다.

그러나 소련 정부 붕괴 이후 그는 처절한 보복을 당한다. 루뱐카 광장에 있던 철의 펠릭스는 러시아인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철거당했다. 2002년 모스크바 시장 유리 루즈코프가 이걸 복원하려다가 엄청난 반대에 못 이겨 철회한 적도 있다. 하긴 소련 시절 공포 정치의 중심이었던 KGB를 만든 인물이나 다름없으니 치가 떨릴 만도 하다.

그의 고향 폴란드에서도 별로 좋은 대접은 못받는 듯. '고향을 버리고 러시아에 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고 한다. 폴란드 공산 정권 붕괴 이후 그의 이름이 붙은 광장과 거리는 모조리 개명되었고 동상 또한 철거되었다.

현재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인듯. 앞서 언급한 2002년 제르진스키 동상 복원 시도 때 러시아 정부 쪽에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 분이 제르진스키의 상당한 팬으로 추정되어서 속내는 모르는 상태. 한때 집무실에 제르진스키의 흉상을 모셔두기도 했다는 카더라 통신도 존재한다.

소련에서 활동하다가 스탈린의 1인 독재, 개인숭배 체제가 시작되자 탈출해 영국으로 망명한 논픽션 작가에 의하면, 그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청렴하지만 인간적인 면모라곤 없이 체제에 절대 충성하는 말 그대로 혁명의 도구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부패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섬뜩한 숙청 기관의 장에 적합한 비인간적 인물이었다는 말.
  1. 소련의 카메라 브랜드 중 그의 이름을 딴 ФЭД라는 카메라 화사가 있다.
  2. 훗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군을 이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군과 동창이다.
  3. 말이 탈출이지 실제로는 대장정급. 시베리아 최서단 지역과 당시 러시아 제국 서쪽 국경간의 거리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700km에 달했으며, 베를린까지의 거리는 3,500km에 달한다. 제르진스키가 복역한 유형지가 시베리아 동부에 위치했다면 그 거리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4.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5. 당시 소련 밖으로 망명한 차르 지지세력과 소련 안에 남아서 공산정권의 눈치를 보는 구 세력 양쪽에서 공산정권을 뒤엎고 옛 차르시절로 되돌아가려는 모의가 있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는데 제르진스키는 '트러스트 작전'이라는 희대의 역공작으로 이를 분쇄했다. 이 '트러스트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카는 가짜 저항조직은 물론 역시 가짜 성직자가 있는 지하성당까지 만들어 국내외의 반체제세력을 완벽하게 낚았다.
  6. 당시 사형수들의 비명소리와 총소리를 묻기 위해 일부러 자동차 시동을 켜놓고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7. 나중에 폴란드 공산당은 친소 성향 때문에 폴란드인들에게서 분노를 샀고(그 반대급부로 폴란드 동부의 소수민족들에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1938년에는 반폴란드 감정이 있던 스탈린에게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지도부와 당원들이 대량학살당한 다음 스탈린이 직접 명령을 내려 해체했다(...).
  8. 그리고 그 이후의 후계자들이 라브렌티 베리야까지 자연사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 후임인 멘진스키는 자연사했고, 그 후임인 야고다, 예조프, 베리야가 제명에 못살고 갔다.
  9. 참고로 스탈린과 제르진스키 간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스탈린이 소련 내 조지아의 반대파들을 칼로 위협하며 강제적 소비에트화에 관한 논쟁을 벌이다가 찬성파였던 스탈린이 측근인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Grigory(Grigol) Ordzhonikidze)와 함께 반대파의 일원인 아카키 카바히제(Akaki Kabakhidze)를 폭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 레닌으로부터 진상조사 명령을 받아 현장에 파견된 게 제르진스키였지만 결국엔 흐지부지되었다고. 참고로 나중에 오르조니키제는 1937년 2월자살하는데 이게 정말로 자살인지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10. 현재도 제르진스키의 이름을 딴 도시가 존재한다. 하나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에 있는 제르진스크. 두번째는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에 있는 제르진스크. 마지막은 앞서 언급한 벨라루스의 제르진스크(지금은 스토프치 주 소속)이다. 다만 벨라루스의 제르진스크는 최근 원래 이름이었던 코이다나바로 불리는 추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