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Plaza Accord, Plaza Agreement

1 개요

1985년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1]에서 진행한 합의.

2 배경

당시 미국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 지미 카터 시절 취임)가 살인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려서 달러 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간 상태였다.[2] 이로인해 미국의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이 시기에 미국의 제조업은 시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 당시의 금리인상과 직후의 레이거노믹스는 이후 미국의 경제구조를 뿌리채로 바꾸어 놓아서, 금융분야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제조업이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와 현재의 미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아무튼 이로인해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의 최강국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이 때문에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일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2.1 J 커브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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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변동이 변하는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기 때문에 결국 시간이 지나서야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마르크 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 또 대한민국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그냥 물건이 구려서 그런 것 같다[3]

3 합의

미국 국내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 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주의 정책을 펴든지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이 재무 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환율의 현실화등으로 이루어졌고 해결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4 합의의 영향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채택 1주만에 약 7%, 엔화는 8.3% 가 각각 상승했고, 이후 2년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5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이후 엔고 상황에서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1995년 4월 역플라자합의가 성사 되었다.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이 반사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4]

플라자 합의의 대책으로 루브르합의가 나왔으나, 각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다.
  1. 여담으로 그 호텔은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실제 무대가 된다. 그래서 나홀로 집에 2에 당시 이 호텔의 소유주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출연한다.
  2. 덕택에 196-70년대 당시 서구권으로부터 돈을 끌여올리던 제3세계 국가들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국가파산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콜롬비아,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소말리아, 이집트며, 196-70년대에 서구권에서 돈을 끌여올려서 공장을 지었던 유고슬라비아나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도 경제적으로 엄창난 타격을 받아 1989년 동구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 한국도 이 당시에 세계 수위권에 들정도로 외채가 엄청났기에 국가파산의 길로 접어들수있었겠지만 다행히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안갔고, 북한도 70년대 초반에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돈을 끌여올려서 경제위기를 겪고있을거 같지만 일찌감치 디폴트를 선언한데다가(물론 당시에 멕시코나 폴란드에 관심이 집중된지라 별 다른 주목을 받지못한 측면도 크다.) 소련으로부터 경제지원을 강하게 받고있어서인지 그런지 사실 이 당시엔 경제파탄 상태는 아니었고 당시에 경제성장이 침체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루마니아같은곳에 비하면 양반으로 북한의 경제가 파탄상태에 직면하게 된건 1990년부터의 일이다.
  3. 실제로 통화가치 변동으로 수출 경쟁력을 증가시켜도 물건이 똥(...)이면 J커브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싸면 뭐해 물건이 구린데. 메이드 인 차이나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4. 시기적으로도 유가하락, 금리인하, 88올림픽으로 인한 투자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기 때문에 역사상 최고의 호황인 시기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