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人愛國團
1 개요
1931년 김구의 주도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한 항일무장투쟁 단체.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1]의 의거로 특히 유명하다.
2 탄생
1920년대 임시정부는 일본의 견제 및 그로 인한 자금 사정 악화와 더불어 위임통치 청원 사건 및 횡령논란으로 말미암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독립 노선을 둘러싼 내부의 대립으로 인하여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이런 영 좋지 못한 상황에서 반전이 찾아온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움에 따라 중국 내에서 반일감정이 커졌던 것.
임시정부는 이런 상황이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한중간의 우호관계를 증진[2]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테러와 같은 비밀공작을 수행할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단체 수립에 관련되어 임시정부는 김구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1931년 10월 김구가 상하이에 체류중이던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 80여명을 모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니, 이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다. 애국단의 단장으로는 당연히 김구가 취임한다.
3 활동
'한 사람을 죽여서 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수단의 근본'임을 기치로 내건 한인애국단은 소수의 고위층 인사를 암살시킴으로써 일본의 침략 욕구를 좌절시키고자 했다. 첫빠따 첫 대상은 일본의 덴노. 1931년 12월에 덴노를 제거하는 명령을 부여받은 이봉창이 도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 1월 8일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한다. 사쿠라다문 의거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에서 히로히토는 무사했지만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이자 '국체 그 자체'였던 덴노를 향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게다가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였던 국민일보가 '제2의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실패했다(不幸不中)'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이 문제는 중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상하이 사변까지 야기한다.
여기에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이 덴노의 생일을 기념해 열린 열병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대장,[3]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 시게미쓰 마모루[4] 주중 공사 등 무려 7명을 살상해 버리자 중국 측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는 장제스의 저 유명한 극찬은 덤. 덧붙여서 1920년대 내내 중국정부로부터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 재건 착수와 같은 사안을 놓고 중국 측의 대대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5]
이어서 한인애국단은 조선 총독 암살 등을 계획했지만, 한인애국단의 연이은 활동에 일본이 잔뜩 경계수위를 높여서 수포로 돌아간다. 한편 윤봉길 재판 과정에서 김구가 스스로 배후임을 밝힘에 따라 일본 측은 김구와 임정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고[6] 그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야만 했다. 여기에 1937년 이후로는 중일전쟁까지 터지면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고, 이 무렵부터는 김구 역시 요인 암살 등의 단발적인 투쟁보다도 군대 양성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구 애국단원 일부를 난징에 자리잡은 중국 국민당 군사간부학교에 파견하는 등 광복군 건설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 결실이 1940년 창설된 한국 광복군.
4 관련 항목
- ↑ 이전 버전에서는 열사로 되어 있는데 둘의 행적으로 보면 의사로 칭해야 맞다.
- ↑ 만보산 사건 이후로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개차반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조선말기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조선에 진주중이었던 청나라 군대가 민중들에게 부린 깽판 때문에 1920~30년대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반중감정도 상상 외로 컸다.
- ↑ 할힌골 전투 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다리 한 쪽을 잃었다.
- ↑ 나중에 미주리 호에서 일본측 대변인으로 2차 대전 항복문서에 서명한 그 인물이다.
- ↑ 물론 1920년대와 비교해서 대대적이었던 거지, 천조국의 랜드리스같은 거랑 비교하면 안습수준이다. 게다가 광복군 수립 과정에서도 중국이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갈등이 꽤 격했다.
- ↑ 김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기 김구 목에 걸린 현상금은 오늘날의 오사마 빈 라덴 그 이상 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