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漢中/汉中(Hànzhōng)

1 개요

이놈들아, 한중에 들어갑시다.
공포의 우주방어도시[1]

중국의 지역명.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산시 성(陝西) 한중 시로, 면적은 2만 7천 km²로 경상도보다 약간 작은 정도이고 인구는 370만 명 정도이다. 한중 시내 지역인 한타이 구의 인구는 50만 명 정도.

2 지리

지형적으로 한중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친링 산맥(진령산맥)에서 시안(서안)이 있는 관중#s-4쪽으로 향하며 남쪽은 다바 산맥(대파산맥)에서 오늘날의 충칭 시가 있는 쓰촨 분지(사천분지)로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장강 유역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천수에 이른다.

한수#s-2양쯔강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분지로 경제적으로는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으나 군사적으로는 엄청나게 중요한 지역이다. 북으로는 관중 평야, 남으로는 쓰촨 성, 동으로는 장강 유역으로 갈수있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아찔하게 험준한 산악 지대라서 한중을 통과하지 않으면 사천 평야로 들어가는 것도, 나가는 것도 매우 어렵다.

3 역사

한고제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가 아직 군벌로서 진에 반기를 들고 연합하던 시절, 누가 진의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지를 두고 경합을 벌였다. 승자가 관중 지방(함양 일대. 현재의 산시 성(섬서 성) 지역)을 먹기로. 승자는 유방이었으나, 반진 연합군의 맹주에 가까운 중추적 역할을 하던 것은 초나라의 후계라는 정통성을 가진 항우의 세력이었기 때문에 유방은 관중 대신 훗날의 위협을 제거할 겸 첩첩산중의 분지라 진출이 어려운 한중을 영지로 받았으며, 진의 명장이던 장한 등을 삼진왕으로 봉해 유방을 감시했다.

그러나 위에 설명된 대로, 군사/지정학적으로는 엄청난 요지인 탓에 세간에서는 항우가 유방에게 관중 대신 한왕[2]으로 봉하고 한중에 가둔 게 가장 큰 실책이라고 평할 정도다. 험한 지세와 그럭저럭 풍요한 물산 덕에 유방은 안전하게 세를 불릴 수 있었으며, 안심하던 삼진왕들을 광속으로 발라버린 뒤 항우와 건곤일척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는 한나라.

삼국지를 읽어본 사람들에겐 오두미도장로의 본거지와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지에서는 사천성 지방을 서천(西川)이라고 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한중 지방을 동천(東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진수정사 삼국지에서 조비의 위황제 등극보다 유비의 한중왕 선언에 더 많은 기록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진수가 촉 출신이라서는 얘기도 있지만 삼국지의 전체 흐름, 특히 촉한의 대립에선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조비가 위나라 황제에 오른 것은 당시 거의 멸망한 거나 다름없었던 후한의 공식적인 소멸이었으므로 비중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것은 역사적인 흐름보다 당시에는 엄청난 정치적 제스처였다.

전한고조 유방항우와 대립하다가 한중 땅을 분봉받아 한왕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왕조가 일어섰다. 그의 후손 유비는 한중왕에 오르면서 선조인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망해가는 한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유비가 그 옛날 유방처럼 제2의 한고조가 된다는 제스쳐는 정치적으로 큰 상징을 가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돗자리나 짜던 놈이 나와 맞먹으려고 하다니!"[3]라고 단순히 빡쳐서 유비를 치려고 했지만 괜히 정사나 창천항로에서 조조가 유비의 한중왕 등극 소식을 듣고 충격 받은게 아니다. 조조: 와 x 발 잠깐만

간단 요약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유비가 '조조 이 색휘는 항우와 같은 역적이고 나는 한 황실의 종친이니 한고제의 뜻을 이어받아 역적을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겠다!' 라고 선포한 것.

4 관련 문서

  1.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사방이 산악에 둘러싸여 있으며 양평관 등의 관을 낀 외길로 수비가 가능해 공격하기가 엄청나게 힘든데, 현실고증 맞다. 하지만 반대로 한중을 근거로 한 세력이 외부로 진출하기 또한 힘들며, 이게 바로 항우가 유방을 여기로 좌천보낸 이유다.
  2. 이것은 항우의 사상이 낡은 봉건제의 부활이었기 때문인 점도 크다. 진나라식의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옛 춘추전국시대 국가의 후예들에게 봉토를 내려 왕으로 삼은 것뿐이니 명목상으로는 항우(혹은 초왕 미심)와 동급의 통치자들인 셈이고, 4백년 한나라의 중앙집권을 경험한 삼국시대와는 사정이 다르다. 물론 그 시절과 달리 이 땅 자체의 정치적인 상징성 자체는 증가했지만.
  3. 당시 조조는 위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