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코다 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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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한 병사의 시체.


▲ 오늘날의 핫코다 산.

일본어 : 핫코다[1]설중행군 조난사건 八甲田 雪中行軍 遭難事件
영어 :Hakkōda Mountains incident(학코다 산 사건)

1 개요

1902년, 산악지역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가 혹한으로 210명 중 199명이 얼어죽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평시 훈련중 발생한 사고로서는, 생존률이 고작 5%에 불과한 이례적인 대규모 참사였다.

2 배경

20세기 초 일본 제국만주조선에서의 이권을 두고 영일동맹을 등에 업고 제정 러시아와 계속 대립 중이었으며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본군도 對러시아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러시아군홋카이도를 거쳐 혼슈 북부로 침공함을 막는 방어 작전이었다.

도호쿠 일대에 주둔한 일본 육군 8사단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물자 보급선을 확보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8사단은 육로 침공만이 아니라 일본이 제해권을 상실하여 아오모리 해안 철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2]까지 전제하고 이 상황에 대비한 보급 루트를 확보하고자 했다.일본군이 웬일로 보급에 신경을! 이를 위해 생각한 보급루트는 바로 내륙의 핫코다 산을 관통(…)하는 하치노헤-핫코다 산-아오모리 루트였다. 자국, 그것도 본토 영토 내에서 뭔 보급선을 개척한다느니 류트를 확보한다느니 하니까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아오모리 현은 홋카이도와 마주보는 혼슈 최북단으로, 예전부터 번이 통치하긴 했지만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고 일부 지역에선 아이누들이 건재한 지역이었다. 메이지 유신 후 40여 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8사단은 아오모리에 주둔한 5연대 2대대에 동계 산악행군을 겸한 보급로 탐사 명령을 내렸다. 이에 2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하되 1대대와 3대대에서 병력을 약간 차출하여 최종적으로 210명의 병력이 차출되었다. 지휘관은 2대대 예하 중대장 중 1명인 칸나리 분키치(神成文吉)가 맡았으나 2대대장 야마구치 진(山口 鋠)이 동행하였다. 이렇게 지휘권이 양립했기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3 경과

3.1 1일차(1/23)

탐사대는 1902년 1월 23일 목요일 아침 7시경 부대를 출발했다. 행군 초반에는 여정이 매우 순조로웠고 날씨도 혹한기 산악훈련을 하기 적절한 추위 정도였기에 탐사대는 현지 주민들이 자청하는 길안내마저 사양하며 순조롭게 산을 올랐다.

그리고 오후부터 급격하게 기상이 악화되었다.

차라리 오전 중에 기상이 악화되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귀영하거나, 주둔지를 세우고 사태를 지켜보다가 역시 귀영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산 중턱 가까이까지 올라가고 나서 급격하게 추워지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니 지휘관들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내려가자니 지금까지 올라간 게 아깝고, 행군을 강행하자니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일단 계속 가보자는 최악의 판단을 내렸다.

그치라는 눈은 계속 더 쏟아지고 밤이 될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으며,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던 비상식량도 다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물자를 운반하던 썰매부대는 폭설 때문에 본대와 뒤쳐진 끝에 결국 썰매를 포기하고, 썰매에 탑재한 물자를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병사들의 체력부담은 더욱 커졌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나 지휘부는 야간행군을 강행했다. 폭설과 혹한 속에서 제대로 된 보온조치 없이 휴식하고 수면을 취하다간 숙영지를 공동묘지로 만들 뿐이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3.2 2일차(01/24)

그래도 이때까지는 부대로부터 약간이나마 보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심각해졌다. 지휘부는 고민 끝에 아오모리로 귀영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눈이 하도 와서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귀영이 어렵자 차라리 핫코다 산 동쪽 다른 길을 통해 마을로 내려가기로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엉뚱한 협곡으로 가다가 산 중턱 하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폭설과 눈보라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길들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나침반조차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았기에 방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결국 길을 찾지 못한 부대는 부대원 다수가 동사할 것임을 알면서도 개활지 한 곳을 잡아 임시 숙영지로 삼았다. 하지만 땅은 얼어붙었고 공구를 지닌 병사들은 다수가 낙오하여 그나마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였다. 결국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5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3 3일차(01/25)

부대의 운명은 사실상 이때 결정났다. 부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이 길이 아닌가벼를 반복하며 무의미한 행군을 계속할 뿐이었다. 후대의 조사에 따르면 기적적으로 제대로 방향을 찾은 적도 있지만 폭설로 인한 시계 미확보로 인해 잘못된 길이라고 착각하고 길을 되돌린 적도 있었다고.(…)

지휘관 칸나리 대위는 이 날 아침 그나마 체력이 남았다고 판단된 병사 12명을 선발하여 2개 조로 척후대를 편성, 선발로 내보냈다. 말이 좋아 척후대지, 사실상 구원을 요청하는 연락병이었다. 이들 척후대 중 1개 조는 이후 연락두절, 전원 동사했으며 다른 1개 조는 길은 찾아내었으나 민간인이나 마을을 발견하진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은 생존자들도 살기를 거의 포기한 지경에 이르렀다. 편제도 유지되지 않았고, 그저 앞에 사람이 가면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대열이 유지되었다. 지쳐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낙오되고 낙오는 곧 죽음이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이 계속되었다.

한편, 산악지대와 달리 날씨가 화창해진(…) 아오모리의 부대 주둔지에서는 부대가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귀환자도 없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하치노헤나 인근 지역의 군, 경찰들에 연락을 넣어본 뒤에야 뭔가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그제서야 구조대 파견을 준비한다.

3.4 4~5일차(01/26-27)

생존자들은 잔여인원을 2개 조로 편성하고 각자 길을 달리하여 나아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살아있던 칸나리 대위와, 또 다른 대위(쿠라이시 대위) 1명이 각 1개 조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그러나 쿠라이시 대위네 조는 길을 잘못 들어 또다시 헤맨다.

칸나리 대위네 조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아갔으나 칸나리 대위는 끝내 쓰러진다. 칸나리 대위는 동행하던 고토 오장에게 ‘’’본대에 연락하여 구조대 파견을 요청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을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고토 오장은 무작정 산 아래쪽으로 걷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서 있는 상태로 정신을 잃었다가 구조대에 의해 발견, 최초로 구조되었다.

고토 오장은 구조되면서 제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칸나리 대위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이에 구조대는 그 주변을 수색하다가 죽기 일보 직전의 칸나리 대위를 발견했다. 그러나 칸나리 대위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는데, 얼마나 추위에 시달렸는지 급히 주사를 넣으려 했어도 피부가 얼어서 주사바늘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27일자 구조는 이것으로 종료되었는데, 구조대조차 반수가 동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그나마 회복된 날씨였으니…

3.5 6일차 이후(01/28-02/02)

구조대 다수가 동상에 걸리다보니 구조작업은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구조작업을 위한 병력도 부족해 센다이의 5포병연대에서 지원 병력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29일, 구조대는 산 곳곳에 구조작업을 위한 초소와 거점을 마련하고 이곳들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을 개시했다.

1월 31일부터 본격적으로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가장 많은 생존자가 발견된 곳은 쿠라이시 대위의 그룹이 은거 중이던 절벽이었다. 이들은 혹한을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절벽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숨어 있어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대장 야마구치 진도 이때 같이 구출되었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야마구치는 절벽 안에 숨지 않고 스스로 혹한에 노출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지휘관의 책임감으로 부하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동굴도 아니고 그저 움푹 패인 곳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후 2월 2일에 나머지 생존자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산 곳곳에 있는 주인 잃은 오두막 내에서 추위를 버티며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하지만 생환자 다수가 사지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외에 6명이 더 구조되었지만 이들은 구조 후 치료 도중 사망했다. 최종 생존자는 210명 중 겨우 11명. 그나마 이 중 동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3명뿐이었다.

3.6 원인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기상조건이다. 당시 아오모리 현과 핫코타 산 일대의 기후는 춥디 추운 아오모리의 날씨를 생각하더라도 예상 이상으로 엄청 추운 이상기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동계장비를 갖추더라도 조난당하여 동사하기 쉽다.

문제는 그 제대로 된 동계장비조차 없었다.(…) 설상화 등을 갖추곤 있었지만 여분이 없었고 이상기후에 가까운 혹한에 도저히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다 부대원 대부분이 이와테, 미야기의 농촌 출신이었다. 같은 도호쿠 지방이긴 하지만 추위 면에선 비교가 안 된다. 겨울전쟁때 핀란드의 겨울 전장에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병사들을 집어넣은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때 병사들이나 초급 간부들이 얼마나 안이했냐면, 적당히 행군하다 저녁에는 쉬면서 핫코다 산의 노천온천에서 몸을 녹이자는 생각으로 수건만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상술했지만 지휘계통의 원인도 있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공식적인 지휘관인 칸나리 대위 외에도 대대장 야마구치가 동행했고, 칸나리와 동격의 대위도 여러 명 있었다. 이건 뭐 말이 지휘관이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동격의 장교들과 논의를 하고 야마구치에게 다시 의견을 구해야 하는 체계이니 이런 위기 상황에선 최악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분위기상, 대대장 앞에서 대위들이 일치감치 귀영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약한, 군인답지 못한 생각이라고 까일 염려가 있으므로...

4 뒷이야기

  • 참사 소식을 들은 노르웨이 국왕이 위문품으로 스키를 보내줬다.스키 타고 다녀도 그 혹한에선 못 버티지 싶은데… 이를 일본 스키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 8사단 5연대와 동시에 행군 훈련을 행한 부대도 있었는데, 31연대 소속 병력 38명이 조금 다른 루트로 행군했다. 이들 또한 심한 악천후 속에서 행군했지만 5연대와는 달리 전원이 무사히 귀환했다. 이들은 지휘관들부터 동계훈련의 경험이 풍부해서 혹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민간인 안내원들에게 안내받으며 행하여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 미리 민간인 안내원들을 행군 길목에 배치시키고 기다리게 했는데, 날씨가 악화되어 안내원들이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 당시 안내원들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 패전 전 일본군이나 패전 후 육상자위대 모두 추모 겸 해당 루트로 동계행군훈련을 몇 번 실시했다. 이때는 당연히 동계장비를 빠방하게 준비한 데다가 1902년의 미친 날씨가 재현되지 않아서 무사히 성공.
  • 언제나 이때 정신 못 차린 일본군은 시베리아 출병때도 동계장비 제대로 준비 안 했다가 신나게 동상에 걸린다.(…)
  • 이 사건은 1971년에 소설, 1977년에 영화화되었고 후자의 경우 한국군에서도 동계작전과 방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교육용으로 틀어준다. 때문에 핫코다 산대신 한자 독음인' 팔갑전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소설 및 영화의 내용은 창작을 위해 각색하다보니 생존자 증언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작중에서 칸나리 대위는 3일차에 부대해산 명령을 내리고 알아서 생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마지막 한줄기 희망을 놓지 않던 부대원들이 집단멘붕하는데, 생존자 증언에서는 부대해산 명령이 없었다고 한다.

  1. はっこうださん라고 읽는데, 국립국어원은 핫코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국립국어원 표기대로.
  2. 제해권을 상실했을 경우 러시아 군함들이 해안으로 몰려와서 함포 좀 쏴주면 해안 철도는 바로 마비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