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

1 화장법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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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팍도사강호동 볼을 주목.

볼에다가 특수한 안료[1]로 붉은 칠을 한 것. 급할 때는 스티커(...)로 때우기도 한다. 대개 전통 혼례식 등에서 볼 수 있다.

2 백제의 왕족 昆支

扶餘昆支
(? ~ 477년 7월)

성은 부여씨, 이름은 곤지다.[2] 태어난 해는 미상이나 형인 문주왕과 함께 457년 송나라에 보낸 관직요청 기록에 등장한 걸 보면 최소 437년 이후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는 동생이라 기록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다. 문주왕의 동생 또는 삼촌이기도 하다.[3]

개로왕이 송나라에 주청하여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의 작위를 얻었는데 좌현왕이 흉노에서 2인자의 칭호로 쓰인것을 보면 개로왕 다음으로 백제의 2인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좌현왕은 병권을 총괄하는 직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로왕은 진씨와 해씨가 장악한 병권을 몰수해서 아들인 곤지에게 줬을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주는 개로왕 대에 상좌평을 지냈다고 하니 개로왕 대의 국정을 친족-왕족 중심으로 이끌어 나간것으로 보인다. 이후 461년,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백제가 국가적인 위기 때 태자나 왕족을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전례로 볼 때 곤지가 파견된 것은 그가 백제의 2인자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사의 기록은 없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아스카베 일대를 경영하면서 기반을 닦았다는 전승이 전해져 온다. 이 기반은 후에 아들인 동성왕, 무령왕[4]이 즉위에 어느정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5] 그외에 가외치 지역의 도래계 씨족들의 성장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으로 쳐들어와 개로왕을 잡아 처형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문주왕이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자 귀국하여 477년 4월 내신좌평이 되었다. 내신좌평은 6좌평의 수장이면서 왕명을 출납하고 백성들에게 법률을 공포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수상과 같은 위치였다고 볼수있다. 문주왕이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한 것은 웅진 천도이후 급추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있을듯 하다.

그러나 곤지는 불과 세달 후인 477년 7월에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문주왕 말기에 병관좌평 해구가 왕권을 위협하며 실권을 부리며 끝내 문주왕까지 암살한 것으로 미루어 해구에게 암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곤지가 죽기 얼마 전에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곤지의 암살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들 이후에 인물의 죽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실상 문주왕에게 급변이 있을 경우에 왕위 계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게 곤지였기 때문이고 개로왕대의 상황부터 감안해본다면 해씨들에게 곤지는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나중에 곤지의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는데, 그가 동성왕이다. 또한 무령왕도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에 나온 무령왕의 나이로 보면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형이라고 보는편이 타당할 것이다.

드라마틱한 인물은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다뤄진 경우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최인호의 소설 '왕도의 비밀'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뤄지는데 작품 초반부 악역으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개로왕에게 왕위와 약혼녀를 빼앗기고 웅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개로왕의 왕비(곤지의 전 약혼녀)를 납치하여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 이후에는 등장이 없지만 개로왕이 흑화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송산리 고분군에 곤지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되었고 당대 만들었던 무덤이 모두 온전히 남아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은 알 수 없다.

3 교향시편 에우레카7의 등장인물

곤지(교향시편 에우레카 세븐) 항목 참조.
  1. 입술에 바르는 연지와 같은 것을 쓴다.
  2. 중국사서에는 성과 이름을 줄인 여곤(餘昆)으로 기록됨.
  3. 문주왕도 개로왕의 아들(삼국사기),동생(일본서기)으로 설이 오락가락하는데 이쪽도 대체로 동생으로 본다.
  4. 다만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정확히는 불분명하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체로 곤지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다.
  5. 하지만 동성왕과 무령왕의 즉위를 오히려 웅진-사비 지역 귀족들의 추대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