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귀한 제노바 공화국 Serenissima Repubblica di Genov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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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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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년 ~ 1815년 | ||
표어 | Respublica superiorem non recognoscens (자신 보다 더 높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국) | |
위치 | 이탈리아 북부 해안 | |
수도 | 제노바 | |
정치체제 | 상인 공화정 | |
국가원수 | 도제 | |
언어 | 이탈리아어,라틴어 리구리아어 | |
민족 | 제노바인,라틴인 | |
종교 | 가톨릭 | |
주요사건 | 1005년 건국 추가바람 1797년 1차 멸망 1814년 부활 1815년 사르데냐 왕국으로 합병 | |
통화 | 제노비노 | |
성립 이전 | 자치 도시 | |
멸망 이후 | 사르데냐 왕국 |
1 개요
이탈리아 서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겸 영구 콩라인
2 역사
중세에 베네치아와 함께 유럽과 중동을 잇는 양대 무역국가로 군림했다. 처음 그 발전의 막이 오른 것은 10세기 무렵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조인 파티마 왕조와의 해전에서 점차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하여 10세기 말엽엔 북아프리카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튀니지의 술탄을 굴복시켜 지중해의 강자로 그 세력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노바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쟁자가 있었으니,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
이탈리아 해안의 동안에 위치한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는 도시의 시작부터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의 상권을 점차 잠식해 가며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한 동방무역로를 장악함으로서 동방 무역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윽고 제노바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자 이미 안정된 무역로를 확보하고 있던 베네치아가 대응에 골몰하고 있던 반면에, 제노바는 발빠르게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베네치아에게 돌아갈 수 있던 많은 이권들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동방무역에 있어 베네치아와 거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했다지만... 사실 식민지의 개수 같은 것만 보아도 베네치아의 화려함보다는 덜하다. 아무래도 위치상 베네치아와 같이 에게해에 식민지를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노바가 직접적으로 지배한 식민지는 우크라이나의 카파 주변과 모나코, 코르시카와 사르디냐 섬의 북부정도로, 이탈리아에 본토에서 상당한 크기의 속주를 차지하고 에게해의 섬들을 거의 다 점령, 오스만 투르크와 동지중해의 패권을 다퉜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그것에 비해서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에 사용된 모든 물자와 병력은 1차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제노바와 베네치아인의 손에 의해 수송되었고, 이런 '운송업'과 '무역'을 겸한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게 되었다. 가령 당시 제노바의 무역수입은 프랑스 왕국 전체 세입의 3배에 달했다. 이 시기가 바로 제노바의 전성기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우군으로 참전해 분전했으나 프랑스 기사들의 삽질로 대패해 체면을 구긴, 먼나라 이웃나라의 오류로 유명한 프랑스의 석궁병이 바로 제노바 용병이다. 일부 학자들은 제노바 상인이 자본주의를 시작했고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 순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고 본다.
3 베네치아와의 경쟁
리즈시절에는 베네치아와 라이벌 관계였고, 한때 4차례에 걸친 전면전을 벌여 마지막 전쟁에서는 베네치아 수도까지 침입하는 등 승세를 타는듯 했으나 베네치아의 바로 옆동네에서 벌여진 키오자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만다. 이를 전환점으로 베네치아가 1381년 제노아를 누르고 승리한다.
키오자 해전 이후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도 탈락하고, 카파와 키오스 섬을 비롯한 해양 무역 거점들도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상실하며 국운이 위태했던 제노바 공화국을 구한 건 옆동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제국의 부상이었다. 스페인 세력이 무력으로는 서지중해의 패자로 떠오르면서도 무어와 유대인 추방으로 인해 자국의 금융, 교역 인프라를 스스로 날려 먹으며 이 공백을 제노바의 은행가들이 매꾸어 이후로도 17세기 후반 스페인 패권 자체가 몰락하기 전까지 제노바는 예전 같은 독립 세력으로서의 포스는 발휘 못해도 부유한 금융의 허브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자체적인 금융 인력을 스스로 말아 먹어버린 스페인의 무역, 금융, 유통업은 전적으로 제노바 상인과 은행가들의 전담이 되어 신대륙의 금은이 세비야로 들어오면 이를 제노바 상인들이 본토 제노바로 이송하여 다시 나머지 유럽으로 되팔고, 나아가 카스티야의 양모, 바스크 지방의 고래기름,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유통 또한 제노바 상인들이 취급하게 되었으니 정말 치명적인 타이밍에 줄을 잘 서서 기적의 생명연장의 꿈은 물론이오, 제 2의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 바를 두고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1557년에서 1627년 까지를 "다른 역사학자들이 주목하지 못한, 스페인 제국의 시대 뒤에 있었던 제노아 금융 제국의 시대"라고 평했다. 인적인 차원에서도 당장 콜럼버스 본인 또한 제노바 사람이었고, 후기 스페인군 테르시오의 명 지휘관으로 활약을 떨친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또한 제노바 출신 스페인 장군이었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제노바의 국운 또한 스페인에게 종속 되어 당시 스페인의 숙적이었던 발루아와 부르봉 왕가 아래 프랑스 왕국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도저히 제노바도 감당 못 할 규모의 재정난이 스페인 제국을 여러차레 격타하고 이에 따라 스페인이 제노바를 물리적으로 보호해 줄 능력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쇠퇴하면서 18세기를 거쳐 프랑스의 위협적인 그늘아래 긴 쇠락을 겪다가 결국 나폴레옹의 손에서 오랜 숙적 베네치아와 함께 멸망을 맞이하였다.
한 때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밀린 콩라인에 불과했지만, 현재 베네치아가 관광도시로서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과 달리 제노바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항구 도시로 이용되고 있어 도시 자체로써는 베네치아보다 우위에 있다(물론 현재 인구도 베네치아보다 넘사벽). 인구는 도시내 인구는 60만 정도, 도시권 인구는 80만 이상, 대도시권은 150만 정도. 이탈리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26만 정도에 불과한 베네치아와는 상당히 큰 차이.
북이탈리아 지방의 주요항구로서, 나폴리에 이어 이탈리아 제2의 항구이다. 물론 항구 이용량도 이탈리아 내에서도 8위로 떨어진 베네치아보다는 훨신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다만, 제노바가 있는 리구리아 주 전체의 경제력은 베네치아가 있는 베네토 주 전체 경제력보단 떨어지는데, 이건 베네토 주에는 파도바, 트레비소, 비첸차, 베로나 같은 인구 많은 지역이 다수 있는 반면에 리구리아 주에는 인구 10만을 넘는 도시는 제노바가 유일하기 때문. 하지만 제노바도 인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거.
4 기타
중세에 잘나가던 산업인 용병에도 뛰어들어서, 제노바 쇠뇌병이라는 용병자원을 주력으로 파견했다. 애초에 제노바가 공화국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이 제노바 쇠뇌병의 활약 덕분으로, 십자군 전쟁이라는 성전에 투자함으로써 제노바는 중세 유럽 질서의 비호 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백년전쟁 때도 프랑스 쪽에 용병을 공급하였는데, 크레시 전투나 아쟁쿠르 전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프랑스 쪽의 지휘가 워낙 병맛이었던지라...
크림 반도 남부에 식민도시를 만들었는데,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러시아 남부에 쳐들어왔을 때 제노바와도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