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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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FIFA 월드컵
4회5회6회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1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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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공식 포스터

1954년 6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개최된 5회 대회이며,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 개최지 결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결정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이니 FIFA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자는 거였지만 사실은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대륙 국가 중에 개최여력이 있는 나라는 대전 당시 중립국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이다. 실제로 이 다음 대회 역시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부터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졌으며,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6개국 체제가 고착화되었는데, 대신 기권팀이 3개국이나 되었던 지난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기권팀이 전무하여 진정한 의미의 16개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사실상 현대 월드컵의 시조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대회서부터 전범국가인 서독동독, 일본, 이탈리아의 출전금지가 해제되었다.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흠좀무한 다득점 대회로 기록되었다. 한국이 크게 공헌했다 월드컵 역대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야구 스코어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 특히 '매직 마자르'로 불리던 헝가리는 한국을 9:0으로 개발살내는 등 5경기에서 27득점을 기록하는 흠좀무스러운 공격력을 과시했다. 헝가리의 이 기록은 1974년 유고슬라비아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를 상대로 거둔 9:0 승리와 1982년 헝가리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0:1로 승리한 경기와 함께 월드컵 사상 한 대회에서 한 팀이 기록한 최다득점 타이 기록이다.[1]

또한 스위스는 이 대회에서 무려 10실점을 헌납하면서 개최국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브라질이 독일에게 1:7로 완패하는 등 한 대회에서 14실점을 허용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2 지역예선

개최국 스위스와 전대회 우승국 우루과이가 자동진출권을 확보하고 나머지 14개 티켓을 두고총 37개의 참여국을 13개 조로 나누어 각조 1위에게 본선 진출권을 부여했다. 다만, 영국 홈네이션만으로 구성된 3조는 FIFA의 우대정책이 계속되어 조2위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 1조 : 서독, 노르웨이, 자르
서독은 3승1무 12득점 3실점의 우월한 실력으로 손쉽게 본선에 올랐다. 지난 대회에서는 협회결성이 늦어서 예선조차 치르지 못했던 자르는 노르웨이에 1승 1무(3-2,0-0)를 거두며 선전했으나 서독에게 탈탈 털리며(1-3,0-3) 탈락. 그리고 이 예선이 자르 축구대표팀의 마지막 경기가 된다. 이후 자르는 2년 뒤 정식으로 서독에 편입되면서 대표팀도 사라졌다.
  • 2조 : 벨기에, 스웨덴, 핀란드
  • 3조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다른 조들이 각각 홈&어웨이로 팀당 4경기를 치룬 반면 영국 홈네이션만으로 이루어진 3조는 유일하게 홈&어웨이 개념없이 팀당 3게임만을 치루는 풀리그를 했다. 잉글랜드가 3전승으로 조1위, 스코틀랜드는 1승1무1패로 조2위를 차지했고, 지난 대회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이번에는 얌전하게 본선에 진출했다.
  • 4조 : 프랑스,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프랑스가 4전승으로 쉽게 진출했다. 룩셈부르크는 4전패 1득점19실점으로 광탈하며 승점자판기의 오랜 역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 5조 :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오스트리아가 홈에서 포르투갈을 9-1로 떡실신시키고 원정에서 비기며 본선에 합류했다.
  • 6조 : 터키, 스페인
스페인이 홈에서 4-1로 이겼지만 원정에서 터키에게 0-1로 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90년대 이후였다면 골득실로 스페인이 본선에 올랐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런 개념이 없던 관계로 중립국 이탈리아에서 3차전을 치뤘는데 2:2 무승부를 기록, 동전던지기(……)로 터키가 승리했다.
  • 7조 : 헝가리, 폴란드
폴란드는 내부사정으로 기권, 헝가리가 한 경기도 안치루고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 폴란드로서는 하필 세계최강 헝가리와 같은 조에 걸렸으니 본선 가능성이 낮은 편이었다.
  • 8조 :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 9조 : 이탈리아, 이집트
이집트는 처음으로 유럽 예선에 나왔다. 시리아나 레바논도 그렇고 이집트도 유로바스켓 같은 대회에 참가하던 적도 있듯이 아프리카 및 아랍지역 나라로서 당시 유럽 대회나 예선에 나올 수 있었다.(정확하게 당시에는 아프리카 축구협회나 지역 스포츠 협회가 없었기에) 그리고 1-2,1-5로 털리며 탈락했다.
  • 10조 :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스라엘
  • 11조(남미) :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 페루
1950년 월드컵을 자기네들이 아닌 브라질이 개최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아르헨티나는 이번에도 불참을 선언했다. 페루가 기권하여 나머지 3개국간 리그가 치뤄졌고, 지난 대회 준우승한 브라질이 나머지 팀들을 압살하며 본선에 진출했다.
  • 12조(북중미) : 멕시코, 미국, 아이티
  • 13조(아시아) :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
중화민국이 내부사정으로 기권, 한국과 일본간의 경기만이 치뤄졌다. 최초의 공식 한일전. 경기는 홈&어웨이가 원칙이었으나, 일본 애들이 한국 땅 밟는 거 두 눈 뜨고 못본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로 인해 두 경기 다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이때, 한국 대표팀은 만약 패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결사의 각오로 경기를 치렀고, 결국 2경기에서 1승 1무(1차전 5:1, 2차전 2:2)의 성적을 거둬 본선에 진출한다. 이로써 한국은 주권국가로서 첫 아시아 월드컵 출전국이 된다.[2]

3 본선

3.1 조별예선

1954년 대회 조별리그는 꽤 특이한 방식을 도입했는데, 조별 풀리그가 치루지 않고 상위시드 2개국, 하위시드 2개국으로 나누어 각팀당 2경기씩만 치루게 하여 조별로 4경기씩만 치뤄진다.[3] 그러고도 순위 결정이 나지 않으면 최종 순위결정전을 치뤄 2위를 결정짓는 방식인데, 이 방식은 결국 1회용으로 사장되고 말았다. 또, 조별리그에서도 전후반 90분에서 무승부가 나오면 연장전까지 치뤘고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안나면 무승부로 기록했다.

조별 리그
1조브라질유고슬라비아프랑스멕시코
2조헝가리서독터키대한민국
3조우루과이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스코틀랜드
4조잉글랜드스위스이탈리아벨기에

1조에서는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가 사이좋게 1승1무로 진출했다.

2조에서는 악마의 왼발 페렌츠 푸스카스를 앞세운 매직 마자르 헝가리가 대한민국을 9-0, 서독을 8-3으로 떡실신시키는 위엄을 보이며 손쉽게 8강에 선착했다. 서독은 대신 터키를 잡아 1승 1패, 한국을 7-0으로 꺾고 헝가리와 경기가 없던 터키와 1승1패로 동률, 순위결정전에서 터키를 다시 7:2로 꺾으며 8강에 합류한다. 서독은 한국과 경기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한국은 2패로 대회를 마감한다.

3조에서는 우루과이와 오스트리아가 사이좋게 2승을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우루과이는 스코틀랜드를 7:0으로 밟아버렸고, 오스트리아도 스코틀랜드에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

4조에서는 잉글랜드가 벨기에와 4:4로 비기며 암울하게 출발했으나 홈팀 스위스를 2:0으로 격파, 축구종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본선에 직행했다. 반대로 홈팀 스위스에 지고 벨기에를 대파한 이탈리아는 스위스와 최종 순위결정전을 치뤘는데 여기서 패하며 광탈…. 스위스는 개최국 2라운드 진출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3.1.1 대한민국 대표팀의 도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라는 영예를 안고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헝가리를 만나 0-9로 참패하고 만다. 결과만 놓고 보면 졸전을 치렀거나 아시아와 세계의 축구 수준 차이를 실감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9-0까지 막아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

우선 당시 헝가리 축구의 위상을 보자면, 축구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조차도 대회 직전의 평가전에서 헝가리에 7-1로 압살당했던데다가[4], 당장 이 월드컵 대회 조별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해있던 팀이자 대회 우승국인 서독도 헝가리를 예선에서 만났을 때 무려 8골이나 먹으며 3-8로 참패했고,[5] 헝가리는 토너먼트 8강전과 4강전에서도 전 대회 준우승국 브라질과 전 대회 우승국 우루과이 등의 강팀을 만나서도 각각 4골씩 때려박으며 손쉽게 제압하고 결승까지 올랐다. 그만큼 이 대회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은 유럽을 넘어 세계 최강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력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6][7] 게다가, 실제로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유효슈팅이 무려 100개(...)가 넘었으므로 헝가리의 골 성공률은 9%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故 홍덕영 골키퍼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골을 허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즉 유효슈팅 10개에 1골쯤 들어간 셈인데, 게임이나 축구를 보면 알겠지만 저정도 유효슈팅을 때릴때의 전력 상황과 경기 상황을 비교해보면 저건 기적과도 같은 결과다.

심지어, 故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막아내다가 갈비뼈가 골절될 정도로 투혼을 보였기에,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이러한 활약에 감동하여 故 홍덕영 골키퍼에게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해외 언론은 20-0 내지 그 이상의 스코어를 점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잠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깨면 취재나 하자구' 이런 생각이었던 것.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놀랐다고 한다.

즉, 이게 꼭 한국을 씹을 이야긴 아님에도 당시 월드컵을 하네 뭐네에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참가하여 유럽과 남미 참가국이 준다고 이런 주장하던 이들이 그 명분으로 삼았던 점도 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쟁피해를 복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8]

실제로 1946년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하기로 예정이었으나 전쟁복구 문제 때문에 월드컵이 취소된 전례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기어이 일본을 꺾고 본선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새 닳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들 중 한 명이 “당신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故 홍덕영이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이므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이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재치있게 받아넘겼다는 웃픈 일화가 전해진다.[9]

게다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당시 한국 대표팀은 일단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하네다 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도쿄 - 방콕 - 콜카타 - 로마 - 취리히로 이어지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10] 그나마도 티켓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이들의 사연을 접한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을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티켓을 양보해서 간신히 1진이 먼저 출발해서 경기날짜만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11]

이 때문에 선수들은 본선에 진출하고도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다른 팀들이 전부다 개막 1개월 전부터 모여서 현지적응훈련하고 뭐하고 할 때는 물론이고 월드컵이 개막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경기 전날 오후 10시에야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피로회복은 고사하고 짐도 제대로 풀지도 못한 채 유니폼만 갈아입고 바로 세계최강 헝가리와의 경기에 출전해야 했다.

즉, 이미 출전한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며 이런 상황에서도 전반 초반 20여분까지는 헝가리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고, 이때 헝가리 키퍼와 1:1 기회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12] 100개가 넘는 슈팅 속에서 9실점 밖에 안한 한국팀은 알고 보면 정말 눈물겨운 투혼을 발휘해 싸운 것이다.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당시 한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이런 눈물겨운 투혼 때문에 이날의 승장이었던 헝가리의 구스타프 감독 또한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라고 칭찬했다.

이후 2진이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헝가리전에서의 참패로 인해 분위기도 가라앉은 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한국 선수들은 터키전에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결국 7-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을 이긴 터키 역시 독일과 두 번 붙어 두 번 모두 패배하며 한국과 나란히 탈락의 쓴 잔을 들이키고 만다.

당시 한국팀의 감독이었던 故 김용식 감독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말로 선수들과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도 세계와의 격차는 너무도 컸고 조 추첨 운도 너무 없었다.

한국팀의 이런 내막을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갑자기 한국팀 선수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점퍼, 청바지, 소세지, 통조림, 자기 나라 현금, 손목시계 등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들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돌아갔다. 당시 월드컵을 관전하러 온 축구팬들에게 한국은 0-9로 패하는 쩌리가 아니라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투혼의 팀으로 평가되었다. 물론,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시련을 겪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이 시간이 흘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을 달성하고, 원정 첫 승에 원정 16강까지 달성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다.

3.2 토너먼트

지난 대회와 달리 스위스 대회서부터 조별리그 이후 결선리그가 아닌 토너먼트를 치루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전의 월드컵은 각 조에서 오직 1위만 살아남고 2위 이하는 광탈하는 방식(1930, 1950)이거나 조별리그 자체가 없는 완전 토너먼트 방식(1934, 1938)이었다. 이 대회부터는 각 조의 2위도 생존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너먼트 대진표 작성이 매우 이상했다. 어떤 조의 1위와 다른 조의 2위가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붙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대회 8강 토너먼트는 한쪽에 각 조 1위들을 죄다 몰아넣고 다른 한쪽에 각 조 2위들을 죄다 몰아넣었다. 실제로 하단의 대진표를 보면 4개 조의 1위인 브라질, 헝가리, 우루과이, 잉글랜드가 결승 티켓 한 장을 놓고 혈투를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독은 조 2위를 해서 다른 3개 조의 2위 국가과 경쟁한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결승에 진출했고, 결국 우승까지 했다. (다음 대회부터는 정상적인 대진표로 바뀌었다.)

8강 첫 경기에서 오스트리아와 홈팀 스위스의 알프스 더비에서 전반에만 9골이 나오는 엄청난 난타전 끝에 오스트리아가 7:5로 스위스를 제압하고 4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이것은 전반 20분까지 스위스가 3:0으로 앞서다가 오스트리아가 명추격을 하고 역전을 이루어 전반전을 5:4로 오스트리아가 앞선 채로 끝냈다.

8강 2차전에서는 전 대회 챔피언 우루과이는 명불허전 세계최강답게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추격을 뿌리치고 4:2로 승리하며 월드컵 2연패를 향해 순항했다. 전반 30분까지는 1:1로 양팀이 그럭저럭 박빙의 승부를 연출했으나 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루과이가 연달아 두 골을 내리 퍼부어 놓는 바람에 잉글랜드는 망했다. 그리고 이 대회를 끝으로 FIFA의 영국 우대정책은 폐지되었다.[13]

8강 3차전에선, 지난 대회의 비운을 설욕하러 온 브라질이 상술한 이상한 대진표 때문에 당대최강 헝가리와 너무 일찍 부딪혀 2:4로 패하고 매직 마자르는 순항을 계속했다. 이 경기는 베른의 난투극으로 회자되는데 헝가리의 히데구티 선수가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영 좋지 않은 곳이 허전했다. 브라질의 수비수가 히데구티를 수비한답시고 히데구티의 바지를 잡아당겨 찢어버렸는데 이 때문에 히데구티는 관중들에게 성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게 원인이 되어 경기가 중단되고 양팀간에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경기결과는 헝가리가 이기긴 했으나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패싸움은 계속 되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간신히 패싸움을 저지했다.

8강 4차전에선 서독이 유고슬라비아의 자책골과 후반 쐐기골로 2:0으로 이기며 4강행 마지막 티켓을 손에 넣었다. 서독은 정말 쉽게 올라갔다. 그러면서 서독은 체력을 회복하며 슬슬 우승 준비를 하고 있었다.

4강 1차전,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와 매직 마자르 헝가리의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헝가리가 전후반 각 1골씩 넣어 2:0으로 이기나 싶던 경기는 후반 30분과 41분에 연이어 터진 우루과이의 추격/동점골로 원점으로 돌아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연장 전반 15분을 아무 소득 없이 마친 두 팀의 경기는 연장 후반 체력이 다한 우루과이를 몰아붙인 헝가리의 파상공세로 4:2로 끝났다. 4강 2차전에선 서독이 가장 손쉬운 상대인 오스트리아를 만나며 6:1로 압승하며 결승전에서 헝가리와 리턴매치를 벌였다.

3/4위전에서 헝가리와 120분 혈전을 치룬 우루과이를 오스트리아가 사실상의 홈버프를 받으며 3:1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킨 가운데 7월 4일 대망의 결승전이 치뤄졌다. 조별예선에서의 경기 결과도 있고 해서 모두들 헝가리가 이길 것이라 생각했으나, 헝가리는 8강 브라질-4강 우루과이라는 최악의 대진을 혈전으로 치뤄가며, 특히 4강전을 연장전까지 치루며 체력이 다 소진되고 푸스카스마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상황.

그럼에도 헝가리는 전반 8분까지 연달아 두 골을 넣으며 기세를 올렸다. 경기는 헝가리쪽으로 기울고 서독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메스암페타민까지 복용해가며 있는 힘 없는 힘 짜내어 전력을 다했다.[14][15] 전반 10분의 추격골과 18분의 동점골로 2:2 균형을 맞춘다. 모두들 또 연장전까지 가나 하는 후반 39분, 헬무트 란의 결승골이 터졌다. 이른바 베른의 기적. 당시 서독의 승리가 얼마나 간신히 이뤄진 거냐면, 당시 서독은 아디다스에서 만들어 준 과학적 축구장비들을 착용하고 뛴 최초의 팀이었다.

경기 당일에는 많은양의 비가 쏟아졋는데, 이러한 기후에서는 아디다스에서 만들어준 기후별로 교체 가능한 스터드를 가진 축구화가 특히 강점을 보여줫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일팀의 주장이엇던 Fritz Walter은 비가오는때에 가장 잘뛰기로 유명한 선수엿고, 그러한 이유로 당시 독일에서는 비가오는 기후를 Fritz Walter-weather이라고 불럿었다.

즉 템빨 +기후빨 +약빨 + 홈빨에다 에이스 부상 + 연장혈투 + 진짜 집단 패싸움까지 했던 헝가리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템빨하고 홈빨을 비난할건 또 있나

이로써 헝가리는 우승 문턱에 좌절하고 서독은 출전금지가 해제되어 나선 첫 대회에서 바로 우승을 차지하며 패전으로 의기소침해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결승전을 독일에서는 아직까지도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기억한다.

경기대진표경기대진표경기대진표
A8강 1경기
브라질 2:4 헝가리
E4강 1경기
헝가리 4:2 우루과이
G결승
헝가리 2:3 서독
B8강 2경기
우루과이 4:2 잉글랜드
-
C8강 3경기
유고슬라비아 0:2 서독
F4강 2경기
서독 6:1 오스트리아
D8강 4경기
오스트리아 7:5 스위스
H3/4위전
우루과이 1:3 오스트리아
1954 FIFA 월드컵 우승

서독
첫 번째 우승

4 결과

순위국가경기득실승점비고
1서독54011812+68우승
2헝가리54012710+178준우승
3오스트리아54011712+583위
4우루과이5302169+764위
5브라질311185+338강
6잉글랜드311188038강
7유고슬라비아311123-138강
8스위스3102710-328강
9터키210184+421라운드
10이탈리아210153+221라운드
11프랑스210133011라운드
12벨기에201158-311라운드
13멕시코200228-601라운드
14체코슬로바키아200207-701라운드
15스코틀랜드200208-801라운드
16대한민국2002016-1601라운드

5 기록실

  • 최초 득점 – 밀루티노비치(유고슬라비아), vs 프랑스(6월 16일), 전반 15분
  • 퇴장 – 없음
  • 최초 페널티킥 – 레이몽 코파(프랑스), vs 멕시코(6월 19일), 후반 43분
  • 최초 멀티골 – 핑가(브라질), vs 멕시코(6월 16일), 전반 34분&43분 * 해트트릭
    • 샨도르 코치시(헝가리), vs 대한민국(6월 17일, 조별리그)
    • 카를로스 보르게스(우루과이), vs 스코틀랜드(6월 19일, 조별리그)
    • 에리히 프롭스트(오스트리아), vs 체코슬로바키아(6월 19일 조별리그)
    • 샨도르 코치시(헝가리), vs 서독(6월 20일, 조별리그). 해트트릭을 넘어서서 1경기 4골을 기록했다.
    • 브루한 사흐린(터키), vs 대한민국(6월 20일, 조별리그)
    • 막스 모를락(서독), vs 터키(6월 23일, 조 순위결정 플레이오프)
    • 시오도르 바그너(오스트리아), vs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요세프 휘거(스위스), vs 오스트리아 (6월 26일, 8강전)
시오도르 바그너와 요세프 휘거의 해트트릭 기록은 한 경기(8강 오스트리아 vs 스위스)에서 동시에 기록되었다.
  • 최다 득점 경기 - 오스트리아 7 vs 5 스위스 (8강, 6월 26일)
  • 최다 득점차 경기 –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 (조별 리그, 6월 17일)
  • 최초 역전승 - 서독 4 vs 1 터키(조별 리그, 6월 17일)
  • 자책골
    • 지디 디킨슨(잉글랜드), vs 벨기에(조별릭, 6월 17일)
    • 라울 카르데나스(멕시코), vs 프랑스(조별리그, 6월 19일)
    • 이반 호바트(유고슬라비아), vs 서독(8강전, 6월 27일)
    • 루이스 크루즈(우루과이), vs 오스트리아(3/4위전, 7월 3일)
  • 무득점팀 -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대한민국
  • 득점왕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11골

6 전부다 패배팀

이 월드컵에서는 모든 팀들이 최소 1패 이상을 기록하였다.

  • 1조
    • 브라질은 8강에서 헝가리에게 2-4로 패배했다.
    • 유고슬라비아는 8강에서 서독에게 0-2로 패배했다.
    •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0-1로 패배했다.
    • 멕시코는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게 0-5로 패배하고 프랑스에게 2-3으로 패배했다.
  • 2조
    • 헝가리는 결승에서 서독에게 2-3으로 패배했다.
    •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3-8로 패배했다.
    • 터키는 조별리그에서 서독에게 1-4로 패배했다. 본선 진출을 가리기 위해 서독과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서독에게 2-7로 패배했다.
    •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0-9로 패배하고 터키에게 0-7로 패배했다.
  • 3조
    • 우루과이는 준결승에서 헝가리에게 2-4로 패배했다.
    •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1-6으로 패배했다.
    • 체코슬로바키아는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에게 0-2로 패배하고 오스트리아레게 0-5로 패배했다.
    • 스코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오스트리아에게 0-1로 패배하고 우루과이에게 0-7로 패배했다.
  • 4조
    • 잉글랜드는 8강에서 우루과이에게 2-4로 패배했다.
    • 스위스는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에게 0-2로 패배하고 8강에서 오스트리아에게 5-7로 패배했다.
    •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스위스에게 1-2로 패배했다. 본선 진출을 가리기 위해 스위스와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스위스에게 1-4로 패배했다.
    • 벨기에는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에게 1-4로 패배했다.
  1. 하지만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이 헝가리에게 9:0으로 패한 것도 사실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
  2. 주권국가라는 것을 명기한 이유는 1938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가 출전한 전력이 있기 때문. 1950년 월드컵에는 인도가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기권.
  3. 그래서 한국이 첫 월드컵때 서독과 같은 조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4. 여담으로 이 경기의 패배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골차의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5. 그러나 서독은 예선 헝가리전에 주전 7명을 출전시키지 않고 사실상 2군으로 경기에 임했다.
  6. 지금으로 비유하면 남수단이나 소말리아 같은 내전에 시달리는 세계 최빈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독일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팀들을 상대로 2:0, 3:0 정도로 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7. 또한 당장 서독이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헝가리를 꺾고 우승한 것을 왜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르는지 생각해보자. 더구나, 우루과이는 직전 대회인 1950년 월드컵의 우승국이고, 브라질은 이 다음 대회인 1958년 월드컵의 우승국이니, 즉 헝가리는 연달은 3개 대회의 챔피언을 모두 꺾었을 정도로 막강한 팀이었다.
  8.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월드컵 전에는 이승만이 경찰을 이용하여 5.20 총선을 흔들고 있었고 월드컵 후에는 사사오입 개헌 까지 시도하던 시대였다.
  9. 게다가 그 당시 한국은 월드컵 경기 입장료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한국팀은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
  10. 참고로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취리히로 바로 가는 직항편이 개설되어 있다.
  11.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프랑스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했다.
  12. 이 때문에 초반에 경기가 안 풀리자 헝가리 선수들 사이에서 니탓이네 네탓이네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3. 잉글랜드는 타국과의 교류를 거부하면서도 1930년까지는 매우 강했다. 허나 너무 우대정책을 펼쳤던 탓에 이 시대의 제한적인 방식으로나마 여러 인종, 민족, 문화의 세계 축구인들이 서로 교류하며 실력을 발전시키는 사이 보기좋게 도태되고 말았던 것이다.
  14. 이때까지만 해도 메스암페타민은 합법의약품이었고, 운동경기에서 금지약물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기에 지극히 합법적이었다. 하지만 서독 선수들이 비타민이라고 둘러댄 걸 보면 비신사적인 치사한 짓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당시는 신사의 스포츠로 불리며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에서 홈팀 스웨덴이 공정해야 한다고 결승전 상대인 브라질에 불리하지 않게 잔디를 관리해 주던 시절이었다.
  15. 2010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관련 논문을 내놓기는 했지만 정작 1954년 월드컵이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