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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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arvel 기적의 흑형

이름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
(José Leandro Andrade)
생년월일1901년 11월 22일
사망년월일1957년 10월 5일
국적우루과이
출신지살토
포지션윙 하프[1]
신체조건179cm / 77kg
등번호-[2]
소속팀[3]벨라 비스타(1921~1923)
나시오날(1924~1930)
페냐롤(1931~1933)
아틀란타(1933~1934)
우니온 타예레스(1934~1935)
몬테비데오 원더러스(1935~1936)
아르헨티노스 후니오르스(1936)
국가대표34경기 / 1골(1923~1930)

1 생애

1.1 선수 데뷔 전

아르헨티나 출신 어머니를 둔 그는 당시 축구계에서 보기 드문 흑인이었다.[4] 그래도 우루과이 대표팀에서는 안드라데가 활약하기 전에 이사벨리노 그라딘이라는 흑인 선배[5]가 있어서 안드라데가 뛰는데 사람들의 편견 같은 건 덜했다. 그라딘이 운동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면[6] 안드라데는 특유의 운동 능력에 드럼, 바이올린, 탬버린 등 음악적 재능까지 더해진 쾌남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형편이 좋아서 취미로 배운 것은 아니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바람에 먹고 살기 위해 밴드에서 일하느라 배웠다고... 춤 실력도 있어서 로스 포브레스 네그로스 쿠바노스(Los pobres negros cubanos)[7]이라는 댄스클럽을 이끌기도 하였다. 칸돔베라 불리는 춤을 매우 잘췄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카니발의 왕이라 불렀다. 그 밖에도 구두닦이, 신문배달 일도 하는 등 어렸을 때는 고생을 매우 많이 했다.

1.2 초기 선수 생활

미시오네스라는 클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나사치와 함께 벨라 비스타에서 처음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여기에서 실력을 드러내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나시오날로 이적했고 이런 클럽에서 우승하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국대 선배들이 있는 나시오날로 가는게 낫지 나시오날로 이적한 이후 그는 대표팀 동료들과 대표팀에서 우승컵 사냥을 시작했다. 첫해에는 나시오날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나시오날은 한동안 우승을 못했다. 안드라데가 다시 프로팀에서 우승하는 것은 페냐롤로 옮긴 후였다.

1.3 국가대표팀

국대에서도 그의 운동 능력은 매우 중요했고, 우루과이의 1선 수비에 있어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다른 동료들과의 호흡 속에서 그가 속한 우루과이는 세계 최강의 위용을 뽐냈고, 올림픽, 코파 아메리카 등 닥치는 대로 우승컵을 쓸어 모았다.

1924년 올림픽에서 흑인이 운동한다는 것을 당시 유럽에서는 잘 상상하지 못했다. 안드라데가 모든 축구팀에서 유일한 흑인 선수였을 정도. 하지만 안드라데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며 유럽 축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었다. 우루과이가 5게임에서 20득점과 2실점의 성적으로 우승하는 동안 안드라데는 대활약을 펼쳤다.

1924년의 코파 아메리카에는 명단에만 올랐고 1926년 대회에 다시 참가하였다. 안드라데는 이 대회에서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1928년 올림픽에서 안드라데는 8강전을 제외한 전 경기에 출전하였다. 결국 우루과이는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재경기에서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다.

1.4 초대 월드컵 그리고 이후

초대 월드컵에서 그는 중원을 장악했고, 우루과이는 파죽지세로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그의 플레이에 감명받은 기자들은 그에게 투표에서 3위를 던지는 것으로 화답했다. 즉, 첫 월드컵 브론즈볼 위너!

그리고 센테나리오 경기장에는 그의 활약을 기리는 동판이 있다고 한다.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난 후에는 신흥 명문팀 페냐롤에 들어갔고 그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여러 팀을 돌아다니다 1936년에 은퇴했다.

안드라데는 은퇴 후 파리에 건너갔지만 방탕한 생활로 인해 파리 올림픽에서 받았던 금메달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렇게 파리에서 거지꼴로 방황하였고 잊혀져 갔다. 1956년에 독일 기자 프리츠 하크가 발견했을때에는 이미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몬테비데오의 빈민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핵으로 인해 다음해에 사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가장 대표되는 장점은 역시 운동 능력. 그의 운동 능력은 대단했고 빨랐다. 기술적인 능력까지 좋아서 혼자서 중원을 먹는 플레이가 가능했다고.. 킥 기술도 좋아서 각종 바이시클 킥 등도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IFFHS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하프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3 여담

  • 20년 후우루과이 대표팀에서 같은 하프백으로 활약하여 우루과이를 우승으로 이끈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는 그의 조카이다.
  • 안드라데 역시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2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시합에서 아르헨티나 팬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우루과이 선수들이 그에 대응해 관중들에게 서로 돌을 던지면서 투석전이 펼쳐졌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체포되었고 3연전 중 3번째 시합은 우루과이 선수들의 거부로 치러지지 않았다.
  • 1928년 올림픽 출전 당시 안드라데는 처음에 출전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안드라데의 대체 선수까지 다 뽑아놓고 출국을 준비했지만 안드라데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출전을 알렸다. 대체 선수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스는 덕분에 네덜란드 관광만 하고 돌아왔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현재의 포지션으로는 수비형 미드필더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다른 기록들을 보면 페냐롤 이후의 클럽 경력이 크게 갈리는 편이다.
  4. 약간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안드라데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출생증명서에 호세 이그나시오 안드라데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아버지라 추측만 하고 있다.
  5. 우루과이 대표팀 최초의 흑인 선수로 알려져 있다.
  6. 실제로 그라딘은 400m와 200m 달리기 남미 챔피언이었다.
  7. 뜻은 가난한 쿠바 흑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