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화

중국 랴오닝 성의 고대문화
홍산문화하가점 하층 문화하가점 상층 문화

1 개요


홍산문화(紅山文化)는 B.C.4000~B.C.3000년경 지금의 랴오닝 성 서부에 위치하였던 신석기시대의 고고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 문서에서는 홍산문화를 전후하여 신락문화의 상한(B.C.5500)부터 소하연 문화의 하한(B.C.2000)까지를 광의의 홍산문화로서 다루도록 한다.

2 발견

홍산문화의 발견은 20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가 최초로 적봉시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유존을 발견하였고, 1919년에는 스웨덴의 지질학자 안데르손이 사과둔 유적을 발굴하였으며, 1919~1924년에는 프랑스의 고고학자 리쌍과 샤르뎅이 열하성에서 신석기시대 유존 여러 곳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에 1935년에는 일본의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와 미즈노 세이치가 홍산후 유적을 발굴하면서 처음으로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가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곧 이어진 중일전쟁 크리...

이후 1948년에 중국 고고학의 초석을 다진 페이원중(裵文中)은 홍산후 유적과 사과둔 유적 등을 중원의 채도문화와 북방의 세석기문화가 만나 탄생한 일종의 '혼합문화'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1955년에 인다(尹達)는 이 문화가 앙소문화와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되 단순한 혼합문화를 넘어 새로운 유형을 창출하였다 인식하고 이것을 '홍산문화'라 이름하였으며, 이 명칭은 1958년에 뤼준어(呂遵諤)가 수용하면서 학계에 널리 수용되었다.[1] 하지만 곧 이어진 대약진운동 크리...

그러나 당시까지의 유존 발굴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고학계의 기본 전제도 황하 유역이 중국문명의 발상지라는 일원적 문명기원론의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으로 고고학계의 분위기 자체도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한 반론이 자유롭게 제기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홍산문화는 근본적으로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앙소문화의 변이형 정도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이 지역에서 홍산문화보다 선행하는 문화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중국에 탄소동위원소 측정이 본격화되는 동시에 각지에서 새로운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유존들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부터 황하 유역 중심의 일원적 문명기원론에 비판적인 시각이 등장하게 되었다. 비판자들은 중국문명 발생의 다원성, 지역문화의 다양성 등을 강조했는데 특히 쑤빙치(蘇秉琦)는 각 지방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구계유형론을 그 대안으로 제창하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이다.

더군다나 그 영향으로 요서 일대에서도 대규모 발굴이 잇달아 이루어져 수많은 신석기시대 유존들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이에 홍산문화에 뒤이은 소하연 문화가 1974년에, 선행하는 흥륭와 문화가 1982년에, 직전의 조보구 문화가 1989년에 그 개념이 정의되었다. 또한 1973년에는 호두구 유적의 홍산문화 석관묘에서 옥기가 출토되었고, 1979년에는 동산취 유적에서 제사터와 여신상이 발견되었고, 1981년에 우하량 유적에서 대형 건물지와 적석총 등이 발굴되었다.

3 전개

3.1 신석기시대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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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신락 하층 문화

B.C.5300~48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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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기에 심양시 북쪽 신락숙사(新樂宿舍) 자리에서 세석기와 압인문 통형관의 공반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중기의 문화가 발견되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이는 7000BP[3] 이전의 것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랴오닝 성의 신석기시대 문화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후 요동반도 남단의 곽가촌(郭家村)이나 소주산(小珠山)에서도 같은 종류의 압인문 통형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위에 대문구문화 전기의 문화 유존(6000BP)이 중첩되어 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다.[4]

신락문화의 주민들은 반움집에서 생활하면서 기장 위주의 원시농업을 부분적으로 경영했다. 하지만 원시농업은 생산량이 적었으므로 여전히 주된 생업은 물고기잡이였고, 개와 돼지도 함께 키웠다. 또한 신락 유적에서는 흑옥으로 만든 공예품이나 나무로 깎은 모양의 지팡이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대체로 신락 유적 사람들의 토템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5]

3.1.2 흥륭와 문화

B.C.5500~48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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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에 요하 서쪽에서도 압인문 통형관을 특징으로 하는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 유형을 대표하는 유적으로는 부신시에서 발굴된 사해유적(査海遺蹟)과 적봉시에서 발굴된 흥륭와 유적(興隆窪遺蹟)이 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사해유적 중기에 해당하는 제1호 주거지의 연대는 7040±100BP였으며, 흥륭와유적 제119호 주거지의 연대는 7240±100BP였다. 그 범위는 북으로 시라무렌 유역, 남으로 대릉하 유역을 포괄하고 난하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흥륭와 문화의 사람들도 신락문화와 같이 반움집에서 생활했지만, 집들이 가지런하고 규칙적이며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주거지역을 둘러싸고 환호가 구축되어 있어서 본격적인 집단사회(tribe)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해유적의 주거지역 중심부에는 광장이 있고, 이곳에는 유명한 용 모양의 돌무더기와 함께 취락에서 가장 큰 규모인 46호 주거지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는 무덤군과 갱(坑)이 발견되었는데, 갱 안에서는 많은 규모의 돼지뼈가 발견되어 망자에 대한 제의가 집전되었음을 보여준다.[7]

그러나 이것이 중국 학계한국 일각의 주장처럼 사회의 계급화나 '수장(chief)'의 존재를 보여주는 현상은 아니다. 이처럼 마을 안에 무덤을 조성하는 것은 동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레비-스트로스가 조사했던 남아메리카의 원시부족인 보로로(Bororo)족도 이러한 취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로로족의 경제활동도 수렵과 어로를 생업으로 삼고 부수적으로 농업을 경영하는 형태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당시 동북아 전반의 사회는 이 정도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8](작성자가 구체적으로 원시 부족인 보로로가 어떠한 단계의 사회였는지 설명하면 좋을 듯 하다, 단순하게 원시부족이라고 했을 뿐 그들의 인구 수나 사회단계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흥륭와 문화에서 주목되는 유물이 바로 옥기인데, 흥륭와 문화에서 출토된 각종 옥기들은 중국 최초의 옥 가공품인데다가, 옥은 예로부터 귀금속의 일종으로 취급되었으므로 그것이 취락 내 소수에 의해 독점되었을 경우 청동기시대의 청동기처럼 전문적인 수공업과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된 증거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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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유적 출토 옥기 집계[9]
유적과 분류옥기도기석기도면상 표시
F-2小381113적색
41277
4331045적색+녹색
F-3小111109적색
1711527
2012312
F-3中1412226
1812623
2711247
5421568
F-3大1614585
3621055
46343123
FM-243272적색+녹색
FM-3761528녹색
H34155

망했어요(...). 사해유적에서 옥기는 주거지의 크기나 유물의 수량과 무관하게 1~3개씩 고르게 소유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옥기를 소유한 이들의 주거지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주거지와 공간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들에게서는 단수 부장된 소량의 옥기를 제외하고는 다른 주거지들과 똑같은 양상으로 생산 활동을 의미하는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흥륭와 문화 단계에서는 계급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죽창... 아니 옥기 앞에서는 너도 한방, 나도 한방, 환인도 한방

또한 종전에는 흥륭와 문화에 선행하는 개념으로 B.C.7500년 정도의 소하서 문화(小河西文化)라는 개념이 제시되었지만, 소하서 문화는 토기·석기·골기·묘장·주거지의 형태가 모두 흥륭와 문화의 그것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B.C.7500년이라는 연대도 7470±115BP를 오인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B.C.5500년으로 연대가 내려와 궁극적으로 흥륭와 문화와 합치되게 되었다. 즉 소하서 문화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고, 단지 흥륭와 문화의 지역유형이었을 개연성이 큰 것이다.[10]

3.2 신석기시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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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조보구 문화

B.C.4500~4000[11]


흥륭와 문화가 발견된 것과 동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독특한 흑도문화를 지닌 조보구 문화가 조사되었다.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 조보구 문화의 유적 가운데 빠른 것은 적봉의 조보구 유적(趙寶溝遺蹟)으로 6220±85BP이고 늦은 것은 소산유적(小山遺蹟)으로 6060±85BP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조보구 문화는 흥륭와 문화에 후속하여 나타났으며 초기 홍산문화와는 같은 지역에 공존하면서 나란히 발전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범위는 북쪽으로 노합하에서부터 남쪽으로 난하 하구에 이르렀다.[12]

조보구 문화는 기본적으로 신락-흥륭와 문화의 특징이었던 압인문 통형관을 계승하고 있지만, 이에 더하여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간토기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그 색깔로는 황갈색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회갈색과 홍갈색이며 흑갈색은 비교적 적다. 이 시기 중국의 산둥 성에서는 북신문화(B.C.5900~B.C.4400)에서 대문구 문화(B.C.4300~2500)를 거쳐 산동 용산문화(B.C.2500~2000)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깔의 간토기 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조보구 문화의 주민들은 북신문화의 채도를 본따 이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조보구 문화에서 발견되는 석기는 모두 농업과 관계되는 대형석기로서 보습, 도끼, 공이 세트 등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농업 생산의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돼지와 개를 위주로 하는 가축의 뼈, 그리고 사슴을 위주로 하는 야생동물의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여전히 수렵과 목축이 주된 경제생활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2.2 홍산문화

B.C.4000~3000[14]

3.2.3 부하문화

B.C.3300~2700

3.3 신석기시대 말기

3.3.1 편복자 문화

B.C.3000

3.3.2 소하연 문화

B.C.3000~2000

4 요하문명?

홀로세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인류는 자기 나름의 생활 양식을 발달시켰고,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통의 문화를 영위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가라는 새로운 단위의 사회 집단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 수준에 도달한 문화를 가리켜 통상 문명이라고 부른다. 분명 황하 유역에서 시작한 신석기 문화와 별도의 계보를 가지는 요하, 양자강 중류, 양자강 하류, 아무르강 유역, 일본 열도의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별개의 신석기 문화 모두가 문명으로 발달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문명의 조건으로 꼽는 도시화, 직업과 계층의 분화, 문자의 사용 등등을 만족하는 동아시아 지역은 기원전 2천년대 초반의 황하지역을 기반으로 한 문화밖에 없다. 그나마도 메소포타미아나 인더스 강 유역에 비해 훨씬 늦은 시점이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문명을 운운하는 것은 독자적인 기준에서 억지로 문명을 인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자면 신석기 시대 말기에 서안 강채유적(Jiangzhai, 姜寨)에서 5헥타르 정도 크기의 집 백여채가 모여 있던 수준까지 발전했을 때 중동 지역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우크라이나에서도 400 헥타르 크기의 집자리 유적이 나온다. 무엇보다도 양자강 문화를 주창하는 움직임은 일본의 조몬 문화를 조몬 문명으로 격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파생된 것으로 농경조차 시작되지 않은 일본 열도가 도토리 채집을 기반으로 문명 수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논리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야스다 요시노리를 필두로 한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것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된 농경과 문명이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비로소 동아시아에 농경과 문명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문명의 기반이 되는 여러 비옥한 지역이 존재했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양의 영향 없이 동양에서 독자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매우 당연한 소리를 엉뚱한 논리와 경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장이나 벼농사의 개시 시기가 아나톨리아의 밀농사의 시작 시기보다 느리고 레반트 지역의 도시 발달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청동기 사용 시기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겨우 동아시아가 뒤쫓아가지만 그것이 이 지역 사람의 열등함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동일한 논리로 동아시아에서 황하유역의 발전이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한반도 주민이 저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4.1 고조선과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

홍산문화 등도 포함하여 보면 옥기를 많이 썼고, 돼지 머리 용, 사슴 머리 용 등의 조각품이 많이 나온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상징인데 이민족의 땅에서 더 오래된 용유물이 나와 문제가 된다. 을 형상화한 조각 등 곰은 우리 신화에서 환웅과 결합한 것으로 나오고 이것은 실제론 곰을 토템으로 한 부족과의 결합으로 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유물에 곰발 등의 유물이 나오고 있다. 근데 곰신화가 유럽과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게 함정. 어 걔네들 완전 한민족 아니냐?

또한 농사를 지었는데 아주 초기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의 단계이며, 이 곡식이 담겨 나오는 토기가 바로 빗살무늬 토기. 이것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 되지만 중국에서는(전통적인 중원지방) 발견되지 않는 양식이다. 황하지방은 앙소문화가 바탕인데 이곳은 채도토기(그림을 그리는)가 기본이라는 식의 서술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홍산문화의 농경은 문명의 단계에 다다르지 못해 수렵과 목축이 그와 동등한 수준의 지위를 차지했다. 밀이나 벼는 중국에서도 신석기 시대 말에나 재배되는 작물이라 기장이 주된 곡물이었다. 또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토기 중 고산리식토기는 아무르강 하류의 오시포프카(Osipovka)문화에, 융기문토기는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Novopetrovka)문화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요서지역의 신석기 토기와 계보를 달리한다.[15]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기초적인 이야기라서, 또 환빠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중간에서 소시민들만 이래저래 현혹당할 뿐. 게다가 홍산문화에서도 채도토기는 많이 발견된다.

또한 중요한 유적으로 피라미드가 있다. 이것은 이집트와는 다르지만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드는 양식인데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계통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100여년전에 비해 머리스타일도 다르고 옷도 다르고 먹는 것, 자는 곳 다 다르지만 무덤 쓰는 것은 비슷한 것처럼 무덤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런 무덤을 쓰지 않는다. 흙을 파고 묻는 스타일이다. 우리나라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스타일의 돌무덤, 요하문명(신석기즈음)의 돌무지무덤, 그리고 고구려양식엔 돌무지무덤 위에 고인돌을 얹은 양식이 있어서 이 문화들의 후손임을 알 수 있고 백제의 서울지역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4.2 중국 정부의 주장과 문제

추가바람
  1.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69~273쪽;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292쪽; 이해련, 「홍산문화의 연구현황과 문제점: 토기와 옥기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역사재단, 2008,72~74쪽.
  2. "新樂文化", 《藝術與建築索引典》, [1], 2015/09/08 확인.
  3. BP는 Before Present의 줄임말. 지질학이나 고고학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되며, 1950년을 0BP로 잡는다.
  4.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30~231쪽.
  5. "신러 유적", 《고고학사전》, [2], 2015/09/08 확인; "시아오쮸샨문화", 《고고학사전》, [3], 2015/09/08 확인.
  6. "씽롱와문화", 《고고학사전》, [4], 2015/09/08 확인.
  7.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34~241쪽.
  8.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116~117쪽;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동아시아, 2005, 109~200쪽. 그러나 중국 앙소문화, 일본 조몬문화, 남미 보로로족이 모두 취락을 둥글게 환상(環狀)으로 배치하는 데 반해 흥륭와 문화의 취락이 가지런하게 열을 맞추어 분포하는 것은 이 문화의 특색이다.
  9. 刘赫东·田广林, 「兴隆洼文化查海遗址出土玉器发微」, 『赤峰学院学报』 제35권 1기, 2014, 4~5쪽. 유적 분류에서 F는 건물지, FM은 거실묘, H는 매납갱이다. 바 이후의 숫자는 흥륭와 문화의 2기·3기를 의미하고, 한자는 건물지의 크기가 소형·중형·대형임을 의미한다.
  10. 박진호, 「요서지역 초기 신석기문화 연구 : 소하서·흥륭와문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2014, 108~115쪽.
  11. 궈다순, 「요하유역의 신석기 및 초기청동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상 해석: 고고학상 드러난 요하유적의 시대구분」, 『박물관기요』 제15집, 단국대학교, 2000, 61쪽;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8~289쪽.
  12.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8~289쪽.
  13. 궈다순·장싱더, 김정열 역,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번역총서 13, 동북아역사재단, 2008, 295·303쪽; 오강원·홍현선, 『중국고고(선사시대 편)』, 백산자료원, 1997, 192·196·207쪽.
  14. 송호정, 「요하유역 고대문명의 변천과 주민집단」, 『중국 동북지역 고고학 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역사재단, 2008, 28쪽.
  15. 이동주, 「동북아시아 초기신석기문화의 형성과 전개」, 『문물연구』,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06, 4~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