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중국사의 여성
1 소개
옹정제의 서후이자 건륭제의 생모. 만주 양황기 사람으로, 종 4품 사품전의 벼슬에 있던 니오후루 링쭈(凌柱)의 딸이었다. 그녀의 고조부는 어이두(額亦都)의 백부인데, 어이두는 청나라 개국공신으로서 누르하치의 최측근 부하이자 매제이자 사돈이었고 홍타이지의 장인이었으며 보정대신 에빌룬(遏必隆)의 아버지이자 강희제의 두번째 황후 효소인황후의 조부였다.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즉 효성헌황후는 효소인황후의 9촌 조카뻘이 된다. 이렇듯 그녀는 만주족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다만 그녀의 부친은 관직도 높지 않고 권력이나 재력 모두 대단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그녀는 아버지의 관직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13세에 매우 낮은 지위로 옹왕부에 들어왔으며 옹정제의 측복진 이씨(훗날의 제비 이씨)의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1] 이후 옹정제의 병을 간호해주면서 옹정제의 눈에 띄어 왕의 격격이 되고 1711년에 훙리를 낳은 후 측복진이 되었다. 훙리가 강희제와 옹정제의 귀여움을 받아 그녀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옹정제가 즉위했을때 후궁으로 올라가며 희비 칭호를 받았고 1730년에는 희귀비로 봉해졌다. 효경헌황후 사후에 후궁을 통솔하다가 이후 아들 훙리가 건륭제가 된 덕에 성모황태후로 즉위했고 숭경황태후(崇慶皇太后) 봉호를 받게 되며 거처도 자녕궁으로 옮겼다. 아버지도 일등승은공으로 올랐다. 이후 편하게 복을 누리며 살다가 1777년 84세에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했던 건륭제는 그녀를 효성헌황후로 추존했다고 하며 옹정제의 태릉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륭제의 생모가 전씨, 혹은 진씨로 기록도 존재하며 건륭제 황자 시절에는 전씨, 황제 등극 시절에는 뉴호록씨로 기록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2]다만 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상상이 빚어낸 근거없는 야사' 라는 입장이다.
참고로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건륭제는 그녀에게 정말 효성을 다했다. 그녀는 아들로부터 온갖 화려하고 값비싼 귀중품들을 셀 수 없이 선물받았다. 그녀의 생일에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답고 즐거운 파티가 그녀를 위해 열렸는데, 이 파티의 호화로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였다.
또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전국의 명소를 찾아 효도여행을 수 차례 떠났는데, 후일 그녀가 나이가 들어 멀리 여행하기가 힘들어지자, 건륭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였던 강소성 소주의 거리를 청의원[3]에 특별히 재현해주었다. 그야말로 청나라에서 가장 복 많은 여인.
2 미디어 믹스
2.1 후궁견환전
주인공 견환 참조.
2.2 황제의 딸
배경이 건륭제다 보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 나온다. 태후라는 위치다 보니 건륭제도 절절매는 인물로, 거의 절대적인 위치라고 봐야 할 듯.
보통 '부처님'이라고 불리는데, 그에 맞게 불교 신자다. 때문에 위구르에서 건륭제의 후궁으로 들어 온 향비가 이슬람 신도라서 갈등을 빚어내기도.
그러나 정작 작중 위치는 "권력 강한 호구". 주로 며느리인 황후와 황후의 시녀인 용 상궁의 계략에 놀아나 자미와 제비 일행을 갈궈대기 일쑤다. 그나마 데리고 있는 청아공주가 제법 현명한데다, 주인공 일행과 친하기 망정이지.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일행을 인정하고 잘 지내려고 한다.
2.3 후궁여의전
전작의 견환과는 다른 인물. 뉴호록씨라고만 나오지 이름은 안 나오는데 팬들은 편의상, 그리고 애정상 견환이라고 부르는 듯. 작가는 뉴호록씨와 견환은 같지 않다고 밝혔고 팬들도 둘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라나랍 의수를 데꿀멍하게 하여 죽게 만들기는 했지만 전작에서 등장한 친자식들인 6황자 홍염이나 롱월공주, 령서공주, 심복인 근석은 존재하지 않고 몽고로 시집간 단숙장공주와 장친왕이 양육하는 유숙장공주를 두고 있으며[4] 두 딸을 위해서, 그리고 뒷방 늙은이가 되지않기 위해 후궁에 강력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 사실상 최종보스.
후궁의 세력이 한쪽으로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꾸미고, 후궁들 간의 갈등과 분란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홍력이 자신을 어머니로 여기지 않고[5] 자기 사람들을 불임으로 만드는 걸 다 알고있지만[6] 그녀들을 속이고 자신의 말로 이용한다. 후궁은 사실상 홍력과 태후의 바둑판이나 다름없다. 태후가 된 후로도 암투를 벌이고 누군가를 이용해야 하는 자신이 독하다는 자각은 있으나 딸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한다.
여의를 이용하기 위해 도와주는 편이다. 여의를 냉궁에 보낸 것도 사실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의가 냉궁에서 목숨을 위협받자 직접 냉궁으로 찾아갔는데 선제가 살아있을 적에 냉궁으로 쫓아낸 길태빈이 태후를 죽이려하고 여의가 태후를 구하게 된 후 여의를 신뢰하게 된 것 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단숙장공주가 곁에 돌아온 후로는 더이상 권력욕을 보이지도, 홍력과 대립하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 ↑ 궁녀가 아니라 처음부터 왕부의 후궁으로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 ↑ <영헌록>에 '측복진 전씨가 희비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 ↑ 지금 이화원의 전신.
- ↑ 장친왕의 적장녀이자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단유공주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단유공주는 몽고 과이심의 군왕 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에게 하가했고 건륭 19년에 죽었다.
- ↑ 홍력이 병에 걸렸을 때 홍력은 "어냥"을 불렀고 랑화는 그가 친어머니를 찾는다는 걸 눈치챘으나 태후에게 황어냥을 찾는다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태후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 ↑ 제노를 통해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