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페론

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35대36대37대
에드미로 파레이후안 페론에두아르도 로나디
46대47대48대
라울 알베르토 라스티리후안 페론이사벨 데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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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도밍고 페론 Juan Domingo Perón.

1895년 10월 8일 ~ 1974년 7월 1일

아르헨티나의 36, 47대 대통령. 한국에선 단순히 표퓰리즘을 시행해서 경제를 말아먹은 독재자 정도로 알려져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영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든 부정적으로 작용했든간에 아르헨티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카를로스 메넴이나 네스트로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도 페론당 출신.

1 인물 소개

아내인 에바 페론이 상당히 유명하며 대중영합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1]

참고로 어머니가 원주민인 메스티소였지만 그 당시엔 아르헨티나에선 원주민을 인간이하의 존재로 취급했기에 친가에선 그가 메스티소라는 사실을 숨겼다. 1911년에 군사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군인으로써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승진속도는 느렸긴 했지만 착실하게 군인으로써의 길을 걷던 중에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귀국 후에는 1943년 군사쿠데타에 참여해서 13년간 통치했던 군부독재정권을 뒤엎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군사 쿠테타에 참여한 공로로 노동사회복지장관직을 역임했고 페론은 공산당 계열의 노조는 탄압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노동정책에 있어서 그 동안 사민주의 세력(급진시민연합, 사회당)도 못내었던 공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성과를 내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45년 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헌을 지지하는 쿠데타로 모든 직책을 잃고 야인이 될 위기에 처해졌으나 그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에비타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 시위로 풀려난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장관 재임시의 업적을 내세워 52.8%의 득표율로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좌파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대통령 취임에 성공한 페론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반대파에 대해 탄압을 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전후복구로 인한 수요상승, 임금상승, 중산층 확충, 복지확충으로 인한 내수증진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와 여성참정권 부여, 외국계기업의 국영화 정책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헌법을 개정했고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3.5%의 득표율을 얻어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50년대 들어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국들이 전후복구를 거쳐 공업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의 수요가 크게 줄어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덩달아 침체를 겪기시작했고 그와 성향과 별개로 나치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나치에게 피해입은 국가들과 마찰을 빚어 이러한 경기침체를 더욱 심해지게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에비타가 죽은 이후에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 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면서 독실한 신도들의 지지도 잃어버렸으며 군부내에서도 반 페론파의 세가 강해지면서 1955년 9월 후안 페론은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20년 가까운기간동안 아르헨티나는 잦은 정권교체, 인플레이션 등의 혼란을 겪게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후안 페론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한편 후안 페론은 파라과이와 파나마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겼고[2]자서전을 집필하면서 좌파와의 관계도 가지며 재기를 노렸다.[3]

이후 1973년 이미 장기화된 성장침체와 정치혼란에 지친 정부에선 페론파의 출마도 허용했고ㅡ 이어서 치러진 총선에서 페론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친 페론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정부에선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고, 오랜 망명생활에서 벗어난 페론은 노동자 권리 증진과 정치혼란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아미 고령이었던 페론의 건강상태는 이미 악화 된채여서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쪽짜리 대통령 신세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지 채 일년도 못된 1974년 7월 1일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7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2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

대중영합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을뿐 오히려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4] 그가 주창했던 페론주의[5][6] 때문에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그 뒤의 군부 독재 정권[7], 그 후 라울 알폰신 정권[8], 카를로스 메넴 정권 등이 오히려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것도 있다. 이런 (카를로스 메넴 정권[9]에서 도입,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10]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좌측 그래프를 보다시피 1945년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는 8000달러를 넘었다. 76년 이후 확 줄어들지만 일단은 이것만 보면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대치로 보았을때 이야기고 상대치로 보면 전혀 다르다.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의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늘어났으니까. 우측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페론이 집권한 1946년에는 아르헨티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2차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정도까지 떨어져 버렸다. 즉 적어도 1인당 GDP만 보고는 페론이 딱히 뭘 잘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긴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경제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사실 무리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11] 이후 주욱 내리막길 이었다. 이를 고작 10여년 집권한 페론주의 탓이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게다가 70년대에 후안 페론이 집권한 것은 고작 9개월에 불과했으니 페론의 영향이 남아있던 50년대라면 몰라도 60년대와 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66년부터 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기에 그 만큼 경제성장이 지체될만한 여지가 컸던 것.

요즘은 페론이 아니라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정권부터 1983년까지 이어지는 군사정권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진짜 나락으로 보낸 원흉으로 지목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페론이 칭찬 받을 인물은 아니라도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한국 사람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많이 갔다는게 그 증거인데[12] 이때까지만 해도 경제가 파탄 지경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근본 원인은 과도한 외채로, 페론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발전을 경계하는 기조였으며 군사정권이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현재의 외채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측면이 있고 20세기 초 발전된 국가였던 아르헨티나가 그의 시대를 거친후 몰락했다는 측면도 있어서 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듯하다.

3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 나치 인사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오자 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돈받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커넥션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위에서도 보듯 가톨릭과도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니면 카톨릭 종교계의 부탁을 받아서 숨겨주고 그로 인해 외교적인 부분이나 대외적 이미지에 손해를 감수했는데 종교계에서 그에 대한 보상은 커녕 간섭이 끊이지 않아서 카톨릭계와 마찰이 생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페론주의를 단순한 좌파 포퓰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극우 파시즘적 요소와 더 관련이 깊다는 주장도 많고 실제로 위키피디아에서는 페론주의 항목을 '제3의 위치(Third Position)'카테고리에 넣고 있다. 사실 후안 페론의 1기 집권당시 제1야당(급진시민연합)이 좌파 성향이었고, 페론당이 우파 기믹이었다. 후안 페론이 1960년대에 좌파와도 관계를 가지면서 색체가 흐려진감이 없지않긴 하지만, 어쨌든 그 덕택에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합)페론당의 성향을 보면 성향이 몹시 다양해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우파에서부터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좌파에 이르기까지 성향이 다양했다. 다만 2000년대 초 이후에 좌파블록과 중도파 블록, 우파 블록이 성향차이나 권력배분등의 문제로 인해 완전히 분리되었고, 2010년대 전반기 아르헨티나 야당 가운데서도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단, 2015년 말에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당선되면서 정권이 바뀌었다. [13]후안 페론은 21세기의 대통령 중에 이 인물과 정치적인 스탠스가 비슷하다고도 볼 수도 있다.

트로피코의 플레이 가능한 실존 아바타 중 하나인데, 방구쟁이저능아라는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다(...)

4 관련항목

  1. 사실 당시만해도 아르헨티나는 대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국가로 상류층들이 영어식 발음으로 스페인어 하기를 자랑으로 여겼을 정도.
  2. 참고로 당시 파라과이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장군이 친미반공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그리고 이 체제가 1989년까지 이어지다가 1989년에 자신의 측근이었던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에 의한 쿠데타로 민주화되었다.) 당시 파나마는 예나 지금이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친미국가이며(운하문제로 갈등이 있었기는 했지만) 스페인은 그 악명높은 프랑코가 집권해 있었다. 이것만 봐도 후안 페론의 정치적인 스탠스가 단순히 좌파라고 단정짓는 일이 얼머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수 있다. 비록 좌파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건 사실이고 외교적으로도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도 사이가 좋고 우호적이었으며 이들과도 교류가 잘 이뤄졌던 것도 사실이긴 하면서도...(그러나 70년대에 반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와 공산권 국가들과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3. 물론 극우파와의 관계도 밀접하게 가졌다.
  4. 다만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 자체가 특별히 이상한건 아니고 당대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거긴 한다.(...) 당장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서 경제정책을 짜기도 했던 시기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성공적으로 잘돌아가고 있었기에(물론 인민들에게 그 과실이 제대로 배분된건 아니었지만)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도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인데 문제는 미소양국에게 모두 욕먹던 나치인사들을 받아들여서 평판을 깎아먹는 바람에 수출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5. 2000 ~ 2010년대에 집권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페론주의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다만 네스토로 키르치네르 대통령 시기에는 어느정도 성과를 본 반면에 페르난데스 시기에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수완부족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형편.
  6. 사실 페론이 표퓰리즘으로 나라 말아먹었다고 욕 먹는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은 그리 세를 얻지는 못했고(일단 5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 뒤를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다.) 90년대 집권한 카를루스 메넴도 페론주의 계열 정당(정의당)에서 활동하던 정치인이었긴 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7. 갈티에리(아르헨티나의 독재자) 정권. 포클랜드 전쟁이 바로 이 정권 당시에 일어난 일이다.
  8.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
  9. 여담이지만 카를로스 메넴은 현재 집권당(그리고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인 정의당 소속의 정치인이었다.(...) 물론 애시당초 정의당내에서도 좌파블록과 우파블록이 나누어져 있어 2010년대 들어 거진 좌파블록과 우파블록이 따로 후보를 내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10. 정확하게는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망명을 가 있었다.
  11.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높은 임금을 바라보고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중에는 프랑스와 독일 출신도 있었다.
  12. 아르헨티나를 거쳐 제3국으로 재이민을 간 사람까지 고려하면 십만명 정도는 될 듯
  13. 다만 1차 투표로만 친다면 페론주의 후보의 득표가 과반을 넘기는 했다. 3위를 차지한 세르지오 마사가 페론주의 우파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