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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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의미로도,정말 나쁜 의미로도 남미의 한 국가를 대표한 여성.

Eva Perón. 본명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 '에비타'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두번째 부인. 1919년 5월 7일 ~ 1952년 7월 26일 (33세).

2 생애

2.1 비참한 어린 시절

1919년 5월 7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에바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1] 후닌으로 옮겨서 가난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영화배우라는 꿈을 키웠던 에바는 193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옮겨가서 5년만에 연예인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슬픈듯 하면서도 호소력 짙어서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목소리는 우아한 미모와 함께 그녀의 큰 무기가 된다.

2.2 후안 페론과의 결혼

그리고 1944년, 에바는 당시 산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에 대한 이재민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있던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당시 첫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아가던 후안 페론은 에바에게 한눈에 반하고 둘은 1945년에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에바는 대통령 선거에 참가한 남편을 돕기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그녀의 얼굴을 알리고 에비타라는 이름도 얻게 된다.

2.3 에비타 신화

이후 1946년 후안 페론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고 영부인이 된 에바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리고 본능적으로 그들을 이해하면서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을 펼친다. 이 와중에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에게 식량 배급 약속을 받거나 스페인에서의 아동 구호 활동, 노동 단체와 기업 등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에바 페론 재단의 성립과 같은 자선 사업 정책으로 민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도 더욱 유명해지게 되고 덩달아 남편 후안 페론의 인기도 치솟아오른다.

하지만 1950년 자궁암 진단을 받고 1년 후에 부통령 후보로까지 지명되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후보 자리에서 물러난다. 1951년 11월에 재선에 성공한 후안 페론은 그녀를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지만 결국 건강 악화로 1952년 7월 26일 에바 페론은 숨을 거두고 만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33세.

많은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히 치뤄졌다. 노동자와 민중들 같은 약자들을 위해서 노력한 에바 페론은 오늘날까지도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에게 추모를 받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한 여성의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일지도 모르지만

2.4 에비타 신화의 문제점

밑의 논란에서 후술하겠지만 에바 페론의 개혁은 장점만큼이나 문제점들도 많이 있어서 완벽하게 성공한 개혁이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더군다나 남편인 후안과 함께 종신통치를 하려는 낌새를 보인 것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아주 신랄하게 비꼰 뮤지컬이 바로 에비타이다. 항목 참조

2.5 사후의 수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민중들에게 추앙받고 있던 에비타 신화의 불을 끄기 위해서 당시 방부 처리 되어 있던 에바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몰래 빼돌린다. 이후 1971년에 후안 페론측으로 송환된 그녀의 유해는 1975년 이사벨 페론(후안 페론의 세 번째 아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하지만 또다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고 에바의 유해는 대통령 궁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구역[2]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고 현재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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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은 죽어서 이런 곳에 안장되었다.

에바 페론의 유해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후안 페론과 당시까지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국민들에 의해 방부처리되어 미라화 되었다. 현존하는 미라 가운데 그 방부처리가 손에 꼽힐 정도로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웹에서 검색하면 미라가 된 사진은 물론 미라로 만드는 작업중인 사진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은 사후 엄청난 수난을 당했는데 후안 페론이 실각한 직후 군부는 미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귀 일부분과 손끝을 잘라 조사했었고 그 외에도 코가 깨지고 발이 훼손당했다.(이것은 무엇때문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녀의 시체가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직후에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면 실로 안타까울 정도이다.

게다가 그녀의 시신은 네크로필리아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기도 한다.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즈의 <산타 에비타>라는 소설과 알리시아 두호브네 오르띠스의 저서 <에비타 페론: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 >에서는 에바 페론의 시신에 정욕을 느껴 정신이 이상해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제 그녀의 시신을 방부처리 중인 사진을 보면 보존도가 괜찮은데다가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다. 죽은 시신이 아니라 잠자는 듯이 보일 정도. 그래서 각종 픽션에서 네크로필리아을 자극하는 소재거리가 되는 듯 하다. 이래저래 생전이나 사후나 수난이 많은 여자다.

(후방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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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부서진 에바 페론의 시신

발 끝이 부서진 에바 페론의 시신

3 평가

흔히 페론주의으로 알려진 페론 부부의 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라는 칭송에서 '대중의 인기를 권력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신랄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다.

3.1 비판적 시각 :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

페론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이 남미 포퓰리스트의 시초이며, 우고 차베스 등의 지도자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페론주의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19세기 말의 아르헨티나는 미국 GDP의 80%에 달하는 경제대국이었고, 2차대전이 발발하던 시점까지도 60% 전후를 유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는 30년대 초 미국에 역전당하기 전까지 한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곡물을 생산하는 국가였다.[3] 그러나 페론 집권기 이후의 약 25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평균 1%대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지독한 침체기에 빠져들게 된다.[4][5] 이러한 경기침체는 서유럽 경제강국들이 전후복구를 통해 급속도로 성장하는 상황에서, 페론 부부의 인기영합주의와 무분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며 추진력을 잃어버린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페론 부부는 '빈민계층을 위한 정치'을 명분삼아 사실상 독재를 자행했다는 지적도 있다. 페론은 정당간의 토론과 협상을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불신하였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계층간 갈등을 표면화시킴으로써 훗날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불안정을 유도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6] 실제로도 후안 페론은 나치의 영수 히틀러의 책을 즐겨 읽으며 선동술을 배우기도 했다.(...)[7]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정의주의"로 포장하여 반대세력을 가차없이 숙청하였으며, 독재를 위해 헌법개정까지 시도하는 등, 페론 부부의 행보는 대중을 위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조차 페론주의에 관한 항목들을 파시즘과 같은 '제3의 위치' 카테고리에 싣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3.2 옹호적 시각 : 비델라와 갈티에리가 저지른 짓거리까지 덮어쓸 이유는 없다.

반면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사회개혁으로 인해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기형적인 경제구조가 그나마 정상화될 수 있었으며, 기나긴 경기침체의 근본적 책임은 복지정책이 아닌 군부의 연이은 쿠데타에 있다고 주장한다.

페론 부부의 집권기(와 그 사이의 군부독재 기간)에 1949년에서 1976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의 개인소득은 2배 이상 증가했다. 연 평균 2.6%니 아주 높은것은 아니다. 해당 기간 동안 전체 국민의 60%를 차지했던 극빈층은 전체 국가소득의 3분의 1을 재분배받았으며, 극소수의 대지주층이 독점하고 있던 부의 재분배는 아르헨티나가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에바 페론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만으로 자신의 집권 연장을 노리거나 선거에 이용하지도 않았다. 지방 토호세력과 대지주들에 착취당하던 민중들이 에바 페론을 통해 자신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페론을 못 잊어 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연금제도와 휴가, 상여금, 무료의료혜택 등 사회보장 제도가 생긴 것도 페론의 업적이었고, 정치참여를 강조하면서 양성평등 운동을 주도했으며 여성들의 참정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일반국민들은 대지주들이나 자본가들에게 노예와 별반 차이가 없이 착취를 당했다는 말이다. 부의 재분배 과정을 통해서 국민들은 아직까지도 페론의 업적을 고맙게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포퓰리즘이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페론 부부, 특히 에바 페론은 여러 기금을 유치함으로써 연금제도, 무상의료, 평생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복지제도를 확립시켰고,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 및 양성평등 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8] 나아가 페론주의(Peronism)은 남아메리카 각국에 전파되어 현재 중남미 지도자들의 정치, 경제적 연대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약 20년에 달하는 페론의 집권기간동안 아르헨티나의 빈민율은 꾸준한 하락세를 기록했으나, 군사 쿠데타 이후 약 7년간 무려 4배에 가까운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다.

또한, 후안 페론은 주요산업의 국유화 및 국가 수준의 공업화를 단행하였고, 이는 뒷날 아르헨티나의 재도약에 밑거름이 된다. 반면 1976년 쿠데타로 페론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정권을 장악한 군부독재세력은 시장개방으로 일시적인 성공을 이끌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유치한 외국 자본이 나라 경제를 뒤흔드는 현상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결국 경제 파탄으로 이어진다.[9] 이러한 점에서 아르헨티나의 경기침체는 페론주의보다는 군사독재정권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위의 표에서도 나와 있듯이 페론이 제아무리 잘해봤자 호르헤 비델라가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를 군홧발로 마구 밟아 짓이겨놓고 그것도 모자라 레오폴도 갈티에리잉글랜드를 상대로 현피를 걸었다 된통 얻어터진 사건으로 인해 국가 전반이 겉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고 결국 2002년이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페론이 아무리 잘해봤자 비델라와 갈티에리가 다 망쳐놔서 별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집권했던 급진시민연합이나 카를로스 메넴(다만 메넴은 페론주의 게 정당인 정의당 소속의 정치인이었다. 그가 펼쳤던 경제정책들을 보면 위에 언급된 페론주의하고 거리가 멀지만...)도 경제정책에서는 페론주의를 계승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의 부패한 군부는 페론의 이와 같은 업적을 모두 말살하고 무분별하게 깎아내렸으며 에바 페론의 측근들을 무능하고 부패한 통치자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더러운 언론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에바 페론의 업적은 공과 과를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르헨티나는 아직까지도 정치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공공연한 통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의 강력한 경쟁국가였던 미국이 빠른 기간안에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민자 누구에게나 쉽게 시민권을 주면서 참정권을 행사하게 하고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아무에게나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이것은 군부를 비롯한 부패기득권들의 정치통제를 위한 것이었으며 부정선거에 이용하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민주화 세력들을 탄압했다. 다시 말해서 부패한 지방토호세력과 연방 대부호들의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고 새로운 이민자들이나 깨끗하고 부패하지 않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유능한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법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전히 페론당(정의당, 승리전선)이 원내 1, 3당을 차지하고 있으며, 2003년 대선에서는 득표율 1, 2, 3위가 모두 페론주의자[10]일 정도로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다.[11]

위의 비판적 시각에서 말하는 에바 페론의 문제점 역시 사실은 에바 페론의 문제점도 아니라 호르헤 비델라의 문제점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페론 정권에서는 그럭저럭 나라가 잘 굴러가다가 호르헤 비델라가 집권하면서부터 구렁텅이에 빠졌고, 비델라 등의 군사독재정권으로 입은 폐해와 충격이 2016년 현재까지도 계속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쿠데타로 발호한 군사독재는 다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4 기타

워낙 극적인 인생을 산 데다가 평가 또한 확연하게 엇갈리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의 일생을 주제로 한 에비타라는 이름의 1978년작 뮤지컬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하여 크게 흥행했다. 다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에바 페론을 굉장히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으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런던에서의 흥행이 한동안 주춤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7~8년의 세월 동안 2900회의 기록을 세울 정도로 큰 흥행을 기록했고 21세기에도 재차 공연이 올라오는 등 흥행과 작품성 양면에서 호평받아서 뮤지컬의 역사에 명작으로 기록되었다. 영화판도 제작되었는데, 흥행 성적은 영 좋지 않았으나 마돈나의 에바 역 캐스팅에 크게 우려를 표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낮은 기대치를 뛰어넘는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2012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에바 페론 60주기를 기념해서 100페소짜리 한정판 지폐가 발행되었다.
  1. 에바의 아버지 후안 두아르테는 에바의 어머니 외에 따로 정부가 있었기에 에바의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 다른 이름으로 무소코 공동묘지라 불리며 이 묘지는 세계에서 최고로 호화로운 묘지로 정평이 나 있는데 무덤을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처럼 만들어 놓은 게 일품! 무덤을 집과 동일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문은 말할 것도 없고 창문도 달려있는데다가 심지어는 관 옆으로 침대, 책상, 의자, 꽃병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에 묻히는 가장 저렴한 비용이 6억원이다.
  3. Felipe A.M. de la Balze, "Remarking the Argentine Economy(New York: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Press, 1995)."
  4. 동일 기간 동안 브라질은 연 3.2%의 성장률을 기록.
  5. A.Maddison, "The World Economy in the Twentieth Century(Paris, 1989)", pp.15-35
  6. 이성형, "아르헨티나 사태와 우리 언론의 자폐증", 2001년
  7. 물론 잘잘못을 떠나서 히틀러나 괴벨스의 선동 기술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도 연구할 정도로 획기적이긴 하다. 기술 배우기용으로만.
  8. "아르헨티나 페론이즘의 실체와 포퓰리즘", 프레시안
  9.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페론 집권기 마지막 해에 78억 달러였으나, 1983년에는 450억 달러에 이른다.
  10. 다만 당시 1위를 했던(일단 페론주의정당인 정의당 소속이기는 하다) 카를루스 메넴은 대통령 재임당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고 저환율 정책으로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를 유발시켰다. 그 덕분에 당시 결선투표에서 사퇴해야했지만
  11. 페론당 vs 라디칼당…페로니즘 평가 엇갈린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