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51대52대53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마우리시오 마크리

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약칭 C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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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1953년 2월 19일 (65세)
임기2007년 12월 10일 ~ 2011년 12월 10일
2011년 12월 10일 ~ 2015년 12월 9일(퇴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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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생년월일1953년 2월 19일 (65세)
국적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라플라타
직업아르헨티나의 前 대통령
임기2007년 12월 10일 ~ 2011년 12월 10일
2011년 12월 10일 ~ 2015년 12월 9일 (퇴임)

2 초기 활동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라플라타에서 태어났다. 아르헨티나의 명문대학인 국립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페론주의 활동을 했다. 법대 재학 중 같은 학교 학생으로 역시 페론주의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만나 연애를 하고 1975년 결혼했다. 부부는 변호사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활동할 계획을 가졌다. 그러나 1976년, 이사벨 페론이 축출되고 호르헤 비델라의 군부 독재가 시작되자, 남편의 고향인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시로 이주하여, 이 곳에서 지역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군사정권이 종식되자 남편과 같이 페론주의 계열의 정의당 소속으로 다시 정치를 시작했다. 1987년, 남편은 리오가예고스 시장에 당선되었다. 1989년, 정의당 소속의 카를로스 메넴이 당선되어 정의당이 여당이 되어 그들의 정치활동은 더욱 유리해졌다.[1] 남편은 1991년에는 산타크루스 주지사에 당선되어 2003년 대통령이 될 때 까지 재직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주지사의 부인으로 남편을 내조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여성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1995년 산타크루스 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여당 정의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2001년에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지방 주지사인 남편보다 전국적으로 더 알려진 정치인이 되었다.

3 부부 대통령

2001년에 급진시민연합 정부가 경제난의 혼란속에 축출되고나서 페론당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여러번 대통령이 교체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주요 도시지역에서 예금동결과 페소화 가치의 폭락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으며 2002년에 두알데가 잔여임기를 행사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혼란은 가속화 되었고, 급기야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의당은 노선 대립으로 분열되었다. 키르치네르의 분파는 승리를 위한 전선으로 나왔다. 키르치네르 부부는 승리를 위한 전선을 이끌며 활발한 선거운동을 했다. 1차 투표에서는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1위,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2위를 했으나, 2차 투표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역사적인 대승을 거둘수있을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속속발표되자 메넴[2]이 사퇴하면서 남편이 당선되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남편 당선의 1등 공신으로 높게 평가되었고,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의 정책 집행에도 깊숙이 관여했고, 뛰어난 언변과 능숙한 대인관계로 인기가 높았다.

남편은 2007년 재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했으며, 대신 아내가 출마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했으나,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성장도 이룩한 덕택에 키르치네르 부부의 인기가 높았던 관계로 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세계에서 최초로 부부가 연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또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이사벨 페론[3] 이후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되었다.

4 대통령 재임

2007년 12월 10일에 취임식을 갖으며, 아르헨티나 역사상 두 번째의 여성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재임초기부터 여러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수출세를 신설하겠다고 하다가 부통령으로부터 비토를 먹었으며 마라도나로 부터도 까였고 이후로 불성실한 근무태도 논란도 벌어진데다가 2008년 하반기부터 2009년까지의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기까지 했다

외교적으로는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하는)의 조차반환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처음에는 영국과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최근에는 국내외 상황이 따라주지 않고 있다. 2013년에는 포클랜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대부분이 영국 잔류를 희망했고, 곧이어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에도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유족들의 반발로 초청받지 못하는 등 다시 냉각 관계로 접어드는 분위기.

다행히도 2010년부터 2012년 상반기까지 다시금 급속한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2010년 10월에는 전 대통령인 남편을 심장병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다. 2011년 대선에서는 남편에 대한 추모열기에다 경제성장의 호조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혔다. 페론주의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계속 좌파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아예 이제는 '키르치네르주의'라는 페론주의를 계승한 신개념 정치철학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바탕으로[4]언론통제(그루포 클라린[5]에 대한 재제조치)와 동원된 친정부조직이 배경에 있다는 의혹이 있어[6]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7] 또한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4년 임기에 재선까지만 가능한 대통령 임기를 3선이 가능하도록 하는 개헌을 하여, 2015년 이후에도 더 집권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차츰 독재로 흘러간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논란에다가 성장둔화와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재선 후에는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져 30%대에 머물고 있고. 이 와중에 우루과이 대통령이 크리스티나를 성질이 더럽고 정치감각도 떨어지는 마귀할멈(남편은 그래도 감각은 있었다면서)이라는 내용의 비아냥을 해 각종 패러디물의 소스거리가 되고 있다(...). [8] 2013년 총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목표인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면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때부터 의욕이 없어진 모양인지 조언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사망한 여파때문이지 이때부터 국정운영에 다소 소흘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비판을 사고 있었기도 했다.

2015년 1월, 아르헨티나 유대인친선협회(AMIA) 폭탄 테러 사건[9]을 수사하던 알베르토 니스만 검사가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니스만 검사의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에서 작성중이던 대통령 체포 영장이 발견되면서 이란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조사를 방해했던 아르헨티나 정부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손을 쓴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월 18일 검찰에서 대통령이 사건 조사를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을 기소했는데, 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되었고, 오히려 2015년 2월 아르헨티나의 좌파단체 회원들이 니스만 검사의 사건 조사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고 주장했고,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대사 추방을 촉구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제기된 1990년대 폭탄테러 사건 조사 방해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2015년 2월, 뜬금없이 트위터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의 발음을 조롱하는 트윗을 올려서 인종차별이라는 욕을 먹었다.트인낭은 진리입니다.기사 3월 19일에는 미국과 영국이 크림을 러시아 일부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 곳이나 크림반도나 주민투표를 해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결과가 나온 것은 같은데 한 쪽의 결과는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중기준(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고 오히려 미국과 영국을 비난했다. 관련기사 참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2015년 4월 22일~24일 러시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23일 블라디미르 푸틴과 러시아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말비나스 섬과 관련한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양자 협상을 추진하려는 아르헨티나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 한편 아르헨티나는 2015년 1월 2일 러시아로부터 12대의 전투폭격기를 임차하기로 합의했다. ##

여하튼 2014년 들어 미국 헤지펀드와 갈등으로 디폴트 선언후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지고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침체가 심해진데다가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높아서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할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는데 경기침체가 심하다고 하지만 현대 아르헨티나를 기준으로 한다면 디폴트 선언한거 치고는 양호한 수준인데다가(...)[10] 남편대부터 내려온 지지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고 이때까지만 해도 마크리 후보의 지지기반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이었으며 세르지오 마사가 과거 키르치네르 정부 시절에 같이 일한적이 있던 페론주의자이기 때문이었다.[11]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외교정책을 펴서 국내에서 외교 한정으로 평이 좋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크리스트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자체가 시올라 후보를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닌데다가 세르지오 마사와도 관계가 나빠진채라 결국 시올라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마끄리 후보에서 3.2%차이로 근소하게 패하며 허무하게 정권을 내주었다.

5 기타

크리스티나가 대통령이 되자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2003년 ~ 2007년)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하던 중에 국정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아내의 조력자로 최선을 다했다. (2007년~2009년)에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로도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2009년 ~ 2010년)도에 지병인 심장바미로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에 사망을 하였다. 향년 61세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담에서 다른 국가들의 정상들은 다들 웃는 얼굴인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만 울상을 짓는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있다. G20 정상회담을 하기 직전 남편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정상들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위로해줬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우고 차베스룰라가 훨씬 더 네임드다.(...) 그리고 동시기에 칠레의 미첼 바첼리트도 여성대통령이었고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도 여성 대통령이라서 사실 대표적인 좌파 지도자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이렇게 된 이유는 차베스는 1998년에 대통령이 되었고, 룰라는 2002년에 대통령이 되었던데 반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2007년에야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인 키르치네르가 차베스나 룰라와는 꽤나 친하게 지내기도 했으며[12]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로 딱히 적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우고 차베스나 룰라와도 친하게 지내기는 했다. 그렇지만 좌파 지도자라는 이름답지않게 인종차별적인 농을 던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입이 방정거려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잦다. 중국인의 영어 발언을 조롱하는듯한 농담 때문에 물의를 빚고 있다. 본인은 '우호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53px-Cristina_Fernandez_y_Obama.jpg 오바마와 함께
카스트로와 함께 여기서도 카스트로는 아디다스와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과 함께

제2의 에비타, 제2의 이사벨, 남미의 힐러리라는 별칭이 있다. 대통령인 남편의 정책에 관여하면서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에비타와 비슷하고, 남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점에서 이사벨과도 닮았다. 남편과는 법대 재학 중 만났고, 대도시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도 시골 지역인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고 남편이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정치적 동지 역할을 한 것은 힐러리 클린턴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2011년 말,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으나, 암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정되었다.# 암은 아니었지만, 계속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으며, 우고 차베스가 사망한 후에도 베네수엘라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장례식까지는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결국, 2013년 10월, 뇌수술을 받기로 하여 1개월 간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대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뇌수술을 받겠다고 발표한 것이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라서 동정표를 노린 꼼수라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위 사진에서 보듯, 젊은 시절에는 미녀였다. 그렇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디가지 않았는지 아줌마 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하며(...) 이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보톡스를 많이 맞고 있어서, 반대자들에게는 '보톡스의 여왕'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기도 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항목자체가 크리스티나에게 안 좋게 써져있어서 좀 그렇지만[13] 그래도 과거의 정부와는 다르게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일어났던 "더러운 전쟁"의 진상을 밝히는데 적극적이었고,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성사시키는 등 성소수자의 권리 향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14] 그렇지만 본인이 상당히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평도 있어서(이른바 "K그룹"과 관련해서 뒷얘기가 많다.) 평이 상당히 미묘하다. 또한 남편이 살아있었을때는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찰떡궁합으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평이었는데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인물이 없어져서 다소 막장화(?) 되었다는 평도 있다.

후에 교황이 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과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혹은 썩 좋은 편이 아니기로 유명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6 가족 관계

  •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 (父)
  • 오펠리아 에스더 빌헬름 (母)
  • 故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배우자)
    • 막시모 키르치네르 (장남)
    • 플로렌시아 키르치네르 (차녀)
  1. 그래서 아르헨티나 좌파 일각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민영화를 추동하는 정치인으로 여기며 까기도 했다. 사실 그런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던것이 1990년대 당시의 페론당은 전형적인 대처리즘 정책을 추진하던 정당이었고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는 당시에 카를로스 메넴의 노선에 딱히 대항적인 정치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 대통령 재임당시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서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지고 실업률이 증가한데다가 무엇보다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저환율 정책(1달러=1페소 이는 당장의 물가안정에 크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 뒤에 아르헨티나 상품의 대외적인 가격이 크게 높아지면서 수출이 줄어들어버리는 바람에 부메랑이 되어버렸다.)을 펴서 19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라 이미지가 영 좋지않았던게 컷다.
  3.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으로, 1973년 선거를 통해 부통령이 되었고, 1974년 남편이 취임 몇달만에 사망한 이후에 세계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정치면에선 막장이어서 실정을 거듭하다 결국 쿠데타로 쫓겨났다. 후임 군부는 더 막장이었지만 여담으로, 이 사람은 아르헨티나가 민주화된지 30년이 넘어가지만 좋은 소리는 못 든는 모양. 오히려 재임 시절 있었던 인권운동가 실종 사건으로 2007년에 스페인에서 체포되기도. 그나마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지는 않고 가택 연금으로 그친 듯.
  4. 다만 특별히 표퓰리즘적인 정책만을 편견 아니다. 환전제한 조치를 사실 표퓰리즘 정책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묘한 정책이기때문. 물론 그와 별개로 아르헨티나의 에너지 보조금 정책을 적절히 손보지는 않고 물가가 올라가는 와중에 인플레율을 억제하겠다고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전철요금, 철도요금 등 주요 공공요금을 동결한건 사실이기에(손을 아예 안댈려고 한건 아닌데 객관적으로 보면 미봉책인 수준이었다.)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된건 사실이다.
  5. 아르헨티나에서 영향력이 강한 언론재벌로 TV방송사와 출판사, 신문사등을 소유하고 있다. 논조는 한국으로 친다면 중앙일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6. 다만 이 부분은 단순히 논조를 통제하려기보다는(애초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시절에도 보수논조의 언론이 멀쩡히 운영하고, 노조의 파업에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배신감때문에 손을 봐주는것이라는 평도 있기는 하다. 사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으로 재임했을때는 그런대로 사이가 괜찮았으나, 2007년 수출관세 인상 파동을 계기로 사이가 급속히 틀어졌고 이후로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된셈이라는 것,
  7. 다만 후임 마끄리가 취임후에 언론노동자를 해고한다거나 텔레수르의 송출을 제한한다거나, 주요 보수언론에서 정리해고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공공요금도 급속히 오르고 있음에도 노오력 드립을 쳐서인지 이부분은 부분적으로 재평가 되고있는 듯하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8. 근데 그럴소리를 들을만도 했던게(...) 남편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9%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또, 물가상승률도 크게 낮아진데 반해, 페르난데스때 들어서 물가상승률이 상당히 높아진데다가, 2기 집권기부터는 성장이 저조해지고 통계조작 얘기도 심심치않게 나올정도로(헬게이트 시기였던 80-90년대에 비하면 임팩트가 좀 약하지만) 상당한 개판이 되었다(...) 이에 비해 무히카 대통령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으로 때문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있다.
  9. 1994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일어났던 폭탄 테러로 85명이 사망했고 300명이 다쳤다.
  10. 과거 세차례의 경제난이 닥쳤을 시절에는 수백%-수천%대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었다. 그런것에 비하면 물가상승률 30%는 양호한 수준이고 월급도 같이 올라가기는 해서 고통이 덜한편이다. 물론 그래봐야 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이다
  11. 정확히 말하자면 우파 페론주의에 속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같은 정의당(페론당)아래에서 한솥밥 먹던 사이였지만 2000년대 초중반 시기를 거치며 페론당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따로 정당을 차린것.
  12. 당시 유가상승으로 돈이 넘쳐났던 베네수엘라로부터 원조(?)를 받아서 돈을 갚기도 했고, 브라질의 룰라와는 비슷한 시기에 집권해서인지 의형제로 자처할정도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13. 사실 남미가 친중이 된 이유가 단순히 외교적인 이유만으로 된것도 아니고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룩하다보니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한데다가 중국에서 이것저것 투자를 많이 해주니까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이득이 되어서 친중을 지향하게 된면도 없지않아있고(그리고 이는 우파정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남미에서 생산되는 원자재를 더 수입할 건떡지가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친중을 지향했다해도 사실 가장 중요한점은 남미 자체가 반한국가로 가득찬건 더더욱 아니었다는 점이다 단지 언론이 X신일뿐, 그리고 북한이 돈이 있어야 남미에서 뭘 하지 . 애초에 국제관계가 그리 양면적으로 갈라지는것이 아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페루 대통령을 지냈던 오얀타 우말라는 아예 서울에서 무관으로 재직하던 경력이 있어서 한국에게 우호적이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와 함께 남미 강경 좌파 3인방 중 하나로 꼽혔던 라파엘 코레아도 장하준과 인연이 있는데다가 경제정책 면에서도 한국의 사례를 다소 참조한것으로 알려진 친한파였다. 우고 차베스도 한국에서 위낙에 방한을 거절을 해서 감정이 나빠진것이지 삼성전자가 베네수엘라에 공장을 세우는걸 반겨했던 인물이고 한창 2003년 석유파업이 끝나고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5년간 고유가로 10%대 경제성장을 이룩해나가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국내적으로도 인기가 절절에 달했을때(한국에서 우고 차베스가 상세하게 소개되었을때가 이 정도. 물론 그 이전에도 생방송 세계는 지금을 통해서 일부 소개되기는 했다.) 한국에서 기자들과 PD들이 취재나온다고 하니까 오히려 우호적으로 맞아주기도 했다. 에보 모랄레스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라튬 개발로 투자를 해준다니까 반겨했던 인물이었다
  14. 사실 이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특별한건 아니고 타 중남미 국가에서도 대체적으로 비슷한 상황이며 전반적으로 동성결혼 합법화 정책을 통과시키지 않았어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는 경우는 많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가 중남미에서 첫번째로 동성결혼이 합법화(그 이전에 멕시코 일부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지만 전국에서 합법화 된건 2015년이다.)시킨걸 보면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성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펼치는데 적극적이었던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