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알폰신

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53대54대55대
레이날도 비뇨네라울 알폰신카를로스 메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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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úl Ricardo Alfonsín

아르헨티나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정치인으로, 제49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1 정계 진출

라울 알폰신은 192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났다.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변호사가 되었다. 급진시민연합이라는 정당에 들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국회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알폰신이 주의원으로서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었던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로베르토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일단의 극우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고, 정권을 장악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의 인권유린과 정치 탄압으로 폭압적인 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이에 알폰신은 이런 군사 독재에 맞서 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당시 집권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기까지 했다.

2 대선 승리

한편 알폰신이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던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자신들이 저지른 폭정을 감추고 외채폭증으로 인해 경제도 덩달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자국민들의 불만을 입막음하기 위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포클랜드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전쟁은 개전 75일만에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 결과 포클랜드 침공을 주도했던 당시 갈티에리 대통령은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과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과 강력한 저항에 밀려 더 이상 통치하지 못했고 이듬해인 1983년 권력을 민간인에게 돌려줄수 밖에 없었다. 전쟁 1년만에 민주화 달성(...)

그리고 1983년 10월 첫 치뤄진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알폰신은 대선후보 출마를 권유받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여 임기 6년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아르헨티나 역사 최초로 민간 출신의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전날 비뇨네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의 알폰신에게 군사정권 집권기 당시 자신들이 저지른 인권유린과 살인 등을 문제삼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알폰신은 비뇨네의 요구를 수락하는 척 했으나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이러한 비뇨네의 요구를 철회하였다. 훼이크다 군부놈들아! 아르헨티나의 YS

3 대통령 재임

3.1 군부 독재 청산과 민주화

아르헨티나 민주 정부의 첫 대통령이 된 알폰신은 과거 집권기 군부 정권의 악행을 단죄하고자 강력한 과거 청산을 실시했다. 그 결과 비델라, 비올라, 갈티에리, 오스카르 생-장, 비뇨네 등 당시 군사 정권기 당시 인권유린과 살인등을 저지른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소에 세웠고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브라질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였고 그 동안 아르헨티나가 백호주의 정책을 내세워 멀리하던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 등 기타 남미 국가들과의 친선 강화에 주력했다. 죄다 적대국이었네

3.2 실패한 경제 정책

이렇게 대통령으로서 정책을 의욕적으로 이끌던 알폰신이었지만 정작 경제 문제에 있어선 실패하다시피했다. 알폰신 취임 초 아르헨티나 국내에선 알폰신이 민주화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둘 것이란 의견들이 많았다. 실제로 알폰신도 집권기 여러 경제 개혁 정책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알폰신의 경제 개혁 정책들은 상당 부분이 실현 불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군사독재기에 이사벨 페론를 쫓아낸 뒤에 인플레를 잡겠다며 경제개방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외국으로부터 빚을 대거 꾸어왔는데 일단 초기에는 외국자본이 대거 물려와서 성공할듯 보였지만 정작 동시기 세계경제가 그리 잘나갔던 시기가 아니라 수출은 지지부진했고 거기에다가 1980년에 미국에서 인플레를 잡겠다며 이자율을 크게 올리는 바람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 이후에도 이자율이 낮아졌고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이미 외채는 겁잡을수없이 불어나서 이미 갚을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 이 시기에 상당수 동구권 국가들이나 제3세계 국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문제로 경제위기에 시달렸는데 동시기에 경상수지 흑자를 낸 국가들도 외채문제때문에 이자갚기 급급했던 상황이었던 상황이었고 아르헨티나도 이 문제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차라 결국엔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물가가 치솟고 외채가 불어나 전국적으로 알폰신 정부의 경제 정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악화되어가는 이런 실업문제에 있어 알폰신 정부는 거의 소극적으로 대응하다시피하여 국민들의 인기를 잃고 말았고 알폰신 정부가 집권초 추진했던 군사 정권에 대한 과거 청산 역시 군부의 불만을 사 알폰신을 축출시키려는 쿠데타 시도까지 벌어졌다.

결국 국민들의 반감과 경제 사정의 악화로 인해 알폰신은 임기를 수개월 남기고 1989년 7월 8일 메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물론 메넴도 집권후반기에 경제가 폭망해서 동병상련이 되었긴 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급진시민연맹 총재직을 맡아오다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정치와 거리를 두며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3월 31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사망일로부터 3일 동안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공표했으며 수많은 인파가 장례 행렬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가운데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라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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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콜라타 묘지에 있는 알폰신의 묘역.

4 평가

아르헨티나에서는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뭔가 바웬사 같은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