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항목은 말비나스 전쟁으로 검색해도 들어 올 수 있다.
목차
1 개요
스페인어 : La Guerra de las Malvinas, Conflicto del Atlántico Sur
영어 : Falklands War, Falklands Conflict, Falkalds Crisis, South Atlantic War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이에 영국이 군사 대응으로 맞서면서 발발한 전쟁.
발생한 지 3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미사일 시대로 대표되는 현대 해전, 공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되는 전쟁이다.
2 배경
갑작스런 전쟁이라 영미권 언론은 포클랜드 침공 배경에 많은 소설을 썼다. 아르헨티나가 국내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포클랜드 제도 인근 해역의 석유 자원을 노린 것이라는 설,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여자랍시고 만만하게 보고 전쟁을 터트렸다는 설, 경제난에 빠져있는 영국이 쓸데없는 포클랜드 제도[1]에 관심을 갖지 않을것이란 판단 아래 전쟁을 감행했다는 설 등등등.
당시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와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외국자본 유입에도 커져가는 빈부격차[2], 외채의 증가로 국민의 불만이 쌓여있었고,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내부적 요인으로 전쟁으로 내부적 단결을 꾀할 필요성과 함께,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은 소수여서 기습으로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졌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1 섬의 역사
포클랜드 제도를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에 대한 주장은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서로 갈린다. 아르헨티나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스페인으로 귀화한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할 때인 1520년 경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1592년에 자국의 탐험가 존 데이비스(John Davis)가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둘 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섬에 제일 먼저 상륙한 사람은 영국인 탐험가 존 스트롱 John Strong 이다. 그는 1690년에 이 섬에 상륙했으며 포클랜드 제도가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이의 해협을 자신들의 탐험에 자금을 지원해준 영국 해군 재무관인 포클랜드의 자작 앤서니 캐리 (Anthony Cary, 5th Viscount of Falkland) 의 이름을 따 포클랜드 해협이라고 이름 지었다. 정작 섬이 포클랜드 섬이 된 것은 1765년 영국 해군 제독 존 바이런(John Byron, 우리가 아는 시인 바이런의 할아버지)이 당시 영국의 왕이던 조지 3세에게 제청한 이후부터다.
이 섬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프랑스인이다. 당시 캐나다 동부의 지배권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프랑스 식민지인 아카디아(지금의 캐나다의 노바 스코샤부터 시작해 퀘벡, 미국의 메인 주 까지 이르는) 지방의 프랑스인들이 영국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자 영국은 이들을 아카디아에서 추방하고, 프랑스는 이 사람들을 정착시킬 장소를 물색하다가 그때까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던 포클랜드 제도에 이들을 정착시킬 계획을 세우고 프랑스 해군 제독인 부갱비유의 백작 루이-앙투안(Louis-Antoine, Comte de Bougainville)에게 임무를 맡긴다.
부갱비유의 백작 루이-앙투안은 프랑스의 생 말로(Saint-Malo)에서 출발해 1764년 1월 말에 포클랜드 제도의 동쪽 섬에 도착하고 자신들이 상륙한 곳을 Port Louis(포르 루이/포트 루이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5세의 이름을 따 지었다.)라고 이름 짓고 정착시킨다. 영국이 이 섬을 포클랜드 제도라고 부르기 1년 전이었기 때문에 아직 이 섬에는 이름이 없었고, 정착민들은 자신들이 출발한 항구 생 말로의 이름을 따 이 섬을 '말로人의 섬' 이라는 뜻으로 îles Malouines(일 말루인)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는 같은 해 9월 12일에 이 섬이 프랑스의 영토임을 공식 선언한다.
비록 식민지 정착민은 150명을 넘지 않았지만 식민지를 유지하는 비용을 전적으로 부갱비유의 백작 루이-앙투안이 담당하고 있었고, 이 섬에서 불과 480km 떨어진 곳이 남아메리카 대륙이라 당시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스페인은 프랑스가 이 섬을 전초기지로 삼아 자신들의 남아메리카 식민지에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까 불안해했다.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던 프랑스와 프랑스의 전초기지화를 염려하던 스페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프랑스는 이 섬의 영유권을 총 70만 프랑에 스페인에게 팔고 1767년 1월 31일에 섬에서 철수한다. 스페인은 섬의 이름을 그대로 남겨 스페인어로 이슬라스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른다.
이와는 별개로, 프랑스가 정착한 이듬해인 1765년 위에서 언급한 존 바이런이 포클랜드 제도의 서쪽섬 위에 있는 선더스 섬(Saunders island)에 포트 에그먼트(Port Egmont)라는 요새를 짓고 정착촌을 형성한다. 당시 바이런은 동쪽 섬에 프랑스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프랑스가 1년 전에 그 섬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는 독자적으로 섬이 영국 영토임을 선언한다.
프랑스로부터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사들인 스페인은 서쪽 섬에 살기 시작한 영국인들을 내보내려고 노력하는데 때마침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1774년 "이 섬은 영국령이다." 라는 현판 하나를 세워두고는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한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페인령이던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영유권도 주장한다. 당시까지 포클랜드 제도는 무인도였는데, 1826년 루이 베르네(Louis Vernet) 라는 독일계 프랑스인 아르헨티나 이민자가 이 섬에 정착하고 1829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포클랜드 섬을 독립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며 루이 베르네를 섬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루이 베르네는 포클랜드 섬을 근거지로 삼아 해적질을 시작한다. 결국 미국의 물개잡이 어선 두 척을 나포한 것을 빌미로 미국의 군함 렉싱턴호가 포클랜드 섬으로 출동해 포격을 가한 후 이 섬을 무주지라고 선언해버린다. 이로 말미암아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외교관계가 1844년까지 단절되고 미국은 자연스레 영국편을 들어준다.
아르헨티나는 1832년 10월 루이 베르네의 후임으로 메스티비에르를 임명하고 주둔군과 함께 포클랜드에 파견한다. 영국 또한 이에 항의하며 온슬로우(Onslow)를 포트 에그먼트로 보내 성채를 다시 짓게 한다. 온슬로우는 같은 해 12월 20일 포클랜드에 도착한다. 공교롭게도 온슬로우가 도착할 즈음 해서 메스티비에르가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고, 온슬로우가 포클랜드 제도에 제대로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이 섬은 영국의 실효 지배 아래 있다.
1965년 UN에서 모든 형태의 식민지배를 끝낸다는 결의안 2065가 통과되고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협상을 시작한다. 하지만 영국은 이미 130년 넘게 섬을 실효지배하고 있었고 정착민들 또한 모두 당시 정착한 영국인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영 협조적이지 않았고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2.2 상륙 침공
1982년 3월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들이 문제의 포클랜드 제도 쪽으로 들어왔다. 목표는 단순한 고철수집.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라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아르헨티나 해군 소속 수송함을 타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도착한 곳은 현재는 별개의 속령[3]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당시는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 조지아 섬.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당시 방치되어 있던 포경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상륙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당시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항의와 함께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의 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
이 과정에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100명 안 쪽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하는 것으로, 최초의 병력 파견이 시작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중장 호르세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시점을 8, 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진도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전쟁을 앞당기기로 결정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결국 최대한 개전 시기를 앞당긴 결과, 4월 2일 아르헨티나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이내 제압당하고 항복했다. 포클랜드의 총독 렉스 헌트 경은 총독의 예복을 차려 입은 다음에 영국군에게 무기를 내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 영국땅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대는 즉각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했다. 그는 이후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총내놔 쉐키들아! 드, 드리겠습니다! (반자동 온리는) 필요없어!
갑작스런 침공으로 국제사회가 런던을 주목했다. 예전같지 않은 이빨빠진 사자 영국의 모습에 영국이 외교적 항의 및 협박 차원에서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중심적이었으나, 이는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이빨만 빠지고 발톱이 있었다.
2.3 영국의 반격
The Empire Strikes Back. : 포클랜드 사태.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4]-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
대영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네놈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아르헨티나 :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들었어!!
철의 여인이라 불릴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가렛 대처 총리는 대외정책 역시 매우 강경하여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했다. 여기에 쇠퇴 일변도의 영국이라도 더이상 해외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걸 좌시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국민 여론이 들끓어 오르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쟁 분위기에 휩싸인다.[5]
언뜻 '겨우 조그만 섬 때문에, 1만km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전쟁을 했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영국에게 포클랜드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남극으로의 전진기지였고,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여기에 포클랜드를 포기할 경우, 세계 각 지역의 다른 식민지들, 특히 지중해의 해군 요충지인 지브롤터의 영유권까지 위협받는 파급력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970년대 제기된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은 덤.
대처 총리는 즉시 아르헨티나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의회는 여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했고, 4월 5일 영국은 해군대장 존 필드하우스(John Fieldhouse)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군 기동부대인 Task Force 317.8의 지휘관 해군소장 존 포스터 우드워드(John Forster Woodward) 제독과 지상군 총지휘관인 해병 소장 제레미 무어(Jeremy Moore) 장군에게 출동을 명한다.[6]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제레미 무어 장군(왼쪽)과 샌디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전쟁 당시 영국군의 양대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당시 영국의 기동함대 투입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장기화, 기정사실화되면 영국의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달 정도 소요되는 기동함대의 항해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이 시도될 경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수단 역할도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말로 할때 내놓을래, 얻어터지고 내놓을래? / 아르헨티나: 여기 원래 내땅이었거든?!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럽 국가들의 대아르헨티나 수출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심지어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는 데 성공했다.[7] 미국: 아따 참으로 애매 하네?
당초 미국은 자국과 동맹이었던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중재외교를 실시하여 전쟁으로의 악화를 막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헤이그[8]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런던을 오가는 셔틀외교를 수행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투표로 귀속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절로 무산되었다.[9] 결국 4월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사회, 특히 동맹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3 전개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영국으로서도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함대와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세[10] 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이렇게 본격적인 군사행동은 오랜만이었다.
3.1 빙하 작전
5월에 접어들어 영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첫번째로 SAS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사령부를 기습하기로 했다.(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도 소개된 내용.) 그런데 그 작전이라는게 해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트 스탠리 빙하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도 또 걸작인데, "아르헨티나 애들이 설마 빙하를 거쳐서 급습할 것이란 생각은 안하겠지?" 그 말을 들은 해군 조종사들은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게 더 빠를걸요."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어쨌든 SAS 대원들은 빙하에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없다고, 결국 GG를 치고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이 와중에 3기의 헬리콥터 중 2기가 손실됐지만 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작전은 실패했다. 아이고 아까운 헬기만 기부했군!
3.2 블랙 벅 작전
그 다음으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Operation Black Buck)" 작전을 시행했다. 1단계로 벌컨 폭격기,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는 함포사격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특기할만한 일은 1단계로, 대서양의 어센션(Ascension)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차례나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 를 날아갔다는 점. 이 기록은 걸프전에서 미군 B-52가 미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기록이었다.[11]
다만 날아간 거리에 비해서 효과는 미미한 수준으로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지고, 단 한 발만이 제반시설에 명중했을 뿐이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그럭저럭 제트 전투기를 운용할만 했지만[12], 이곳도 벌컨의 폭격을 얻어맞아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13] 결국 아르헨티나는 초음속 제트 전투기인 미라지가 본토에서 출격할 수 밖에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말인즉슨,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은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영국 본토 항공전의 Bf109가 어째서 어려움을 겪었는지 상기해보라.) 그나마 그 와중에도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14] 즉, 무장 및 전술적인 상황에서 열세[15]이면서 속도 이점도 살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16]
사실 5월 1일에도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 비행단은 영국 함정들을 폭격했다. 이 당시만 해도 P-2 넵튠들이 날아다녔던지라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이것도 며칠후에 장비를 정지합니다가 되면서 도루묵...어쨌든 이 날 공격은 중고도(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 고도)에서 실시했는데, 영국 해군 함대 방공망에 걸려 도리어 털렸다. 이후부터 저공 침투(대략 100피트-30m 상공-고도로 침투했다.) 전술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이 저공 침투 때문에 불발탄이 많이 생겨 큰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자유 낙하 폭탄들은 보통 500 파운드(227kg)나 1,000파운드(454kg)의 무게다. 이런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속도로 날아들어오는 것이다. 포탄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피해를 주며 이 때문에 호위함 같은 경우는 명중했다 하면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3.3 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
5월 2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교전상황이 발생하여 이목을 끈다.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컨커러(Conqueror) 함이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침몰시켰다.[17][18]
ARA General Belgrano underway;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들 중에는 이 사건은 사실 아르헨티나의 뻘짓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래되었지만 강력한 함정이라도 잘 짜여진 호위 함대의 잠수함 방어 체계를 전혀 동반하지 않고 행동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게 다 현대전을 안 치러봐서 그렇다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큰데,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 있었고[19] 포클랜드 북쪽에서는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의 함대가 남쪽에서는 헤네랄 벨그라노의 함대가 포클랜드를 봉쇄하고 반격으로 나서려던 중이었다. 이 해전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은 후퇴함으로서 제해권(과 제공권[20])은 영국이 쥐게 된다.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방해 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21]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전투기들 항속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포클랜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정도다.[22]
3.4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HMS Sheffield;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 |
그리고 이틀 뒤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은 해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5월 4일 보복에 나선 아르헨티나군 해군 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 함을 격침시킨 것이다. 이로써 장군 멍군….[23][24]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공격기는 2대씩 짝을 짓고는 셰필드 함을 공격하기 위해 공역으로 진입해왔는데[25], 공교롭게도 셰필드 함의 대공 레이더가 두 전투기를 한대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버그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두 대가 모두 레이더에 감지되는 순간, 이러한 상황을 예정하지 못했던 셰필드의 전투 통제 시스템은 오류로 먹통이 되어버렸고,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는 셰필드로부터 어떠한 대공 공격도 받지 않는 '거의 훈련 상황' 속에서 엑조세를 셰필드에 명중시킨다. 이로서 제트 스트림 어택이 실제로도 유효한 전술 기동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당시 영국 해군도 사용하는 엑조세를 셰필드의 컴퓨터가 아군 장비로 인식, 적성 장비로 인정하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었다.
- 왠지는 모르지만 함장 이하 주요 승조원들이 CIC[26]에 없었다. 뭐냐 이건….
- 이전부터 ECM 장비인 UAA-1의 경우에는 위성 통신 장비가 내는 신호가 쉬페르 에탕다르 전투기 탑재 레이더와 유사해서 위성 통신을 하는 데에도 무작정 전투기 접근 중이라는 식의 오보가 끊이질 않았기에 실제 접근한 쉬페르 에탕다르기를 위성통신 장치 사용에 따른 오보로 판정한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의 경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낮게 날아온 쉬페르 에탕다르 2기를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등의 보고를 내놓았다.
재미있게도 이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불발탄이었다.[27] 미사일의 남은 연료가 인화한 화재가 배를 집어삼킨 것이다... 그러나 미사일 자체가 영 좋지 않은 함교 전투 통제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세필드는 격침 이전에 이미 바다 위에 떠있는 고철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료가 남아있던 로켓 모터가 화재를 일으켰고 이때 하필이면 셰필드의 피해 컨트롤 시스템이 피격과 함께 멈춰버린 바람에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셰필드는 영국으로 예인 중에 피탄된 곳에 물이 들어와(…)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안습….
그런데 더더욱 안습한 사실은, 아르헨티나는 셰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이 기사를 낼 때까지 스스로 알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체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장비를 정지합니다 꼴이 나 버렸고[28],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러한 증언은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이라고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 엑조세 두 기를 쏘았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의 사거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했기에 발사는 했는데, 도무지 어찌되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이는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를 남미 패권 싸움을 위해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가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보통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해상전을 벌여 버리니...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의 스틱스나 중국제 짝퉁 실크웜 못지않은 대함 공격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이 사건은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줘서 '셰필드 쇼크'라고 부르고 이후 군함의 건조에 있어서 대함방공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엑조세 쇼크라고도 한다.
쉬페르 에탕다르
해당 장면은 포클랜드와 상관이 없다. 이란-이라크 전쟁 속에서 이라크 공군의 미라주 F1이 발사하는 장면이다.
피격당한 셰필드 함
3.4.1 포클랜드 전쟁관련 프랑스 비난 루머와 반박
-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줘서 고객을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양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이건 프랑스 안티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공격하자마자 프랑스는 즉각 아르헨티나로부터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서 동맹국과 고객 양쪽과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70년대부터 영국은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한 국가였다. 뭐하러 정보를 또 얻겠는가. 한마디로 까기 위한, 억지 주장이니 (더 이상) 믿지 말고 말하지도 말자.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에 있었다. 급하게 전쟁을 일으켜도 딸랑 다섯 발밖에 안 받은 대함 미사일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다니….
- 안티들 중,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지(…)로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면 이렇게 반박해주자. 포클랜드 전쟁은 엄연히 아르헨티나가 먼저 기습 도발했으며 전 세계가 비난한 침략전쟁이다. 예를 들자면 일본이 독도에 쳐들어가거나 베이징이나 산둥성 혹은 쿠릴 열도에 쳐들어간 격이다. 당연히 친 놈이 나쁜놈이다. 게다가 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는 비단 프랑스 독단적인 조치가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같은 이유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기간 동안 보류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이라크에게 5척의 구축함을 다 완성된 상태임에도 인도를 거부했다. 만일 이때 이 구축함들이 이라크로 넘어왔으면 이란 해군은 그나마 유지되던 고속정 부대마저도 전멸했을 것이다.
-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깨지더라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쟁이 끝나자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다 넘겨줬다. 프랑스는 약속을 지켰다(마찬가지로 독일도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을 넘겼다.).
- 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공군합동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주의 비행성능과 정보를 넘겨줬다"는 소리도 새빨간 루머에 불과하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원래 정기적으로 합동훈련을 하며, 포클랜드 전쟁 때문에 시행된 훈련이 아니다. 게다가 프랑스 공군이 공중전 훈련에 미라주를 안 갖고 가면 뭘 갖고 가겠는가?
우주전투기 라팔무엇보다도 이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에는 가지도 않았고, 정작 영국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뉴질랜드 공군, 그것도 프랑스제 미라주가 아닌 미국제 A-4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대한 정보였다. 게다가 그 정보가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그 모델들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A-4 항목을 참고하여 등장 시기를 체크해 보자. 30년이 지난 기체에 관한 정보가 이리저리 넘어갔다고 전쟁 수행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아르헨티나 스스로는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 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도입시 상당한 기술장벽으로 발생한 애로사항 때문에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기술진을 파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오오 이거슨 고객감동 서비스이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프랑스인이 달아준 미사일에 격침된 영국 군함프랑스,아르헨티나vs영국출처: #
3.5 영국의 상륙전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산 카를로스(섬 서북쪽 위치, 반면 포트 스탠리는 동쪽이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SAS 2대대와 3대대, 코만도 여단과 육군 제5여단(구르카 대대 포함)이 투입되었으며 목표는 섬 동쪽 끝의 포클랜드 제도 최대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항구도시 포트 스탠리. 이 날 아르헨티나 공군 FAS가 공습을 가했는데, 엑조세를 피해 이 곳에 상륙하던 계획이 도리어 역류해, 자연 방벽(근처에 산지와 언덕이 제법 있는 지형이라 엑조세를 방어하기는 좋았다.)에 저공비행하는 FAS 기체들을 발견하지 못해 제법 큰 피해(대략 5척이 큰 피해를 입고 격침까지 가기도 했다)를 당한다. 물론, 그래봐야 상륙작전은 잘 끝났기에 아르헨티나에게 남은 건 털리는 것 뿐이었지만...덤으로 이 날 푸카라[29] 및 에르마치도 휴대용 대공 미사일(레이피어, 블로우파이프)에 탈탈 털렸다.[30]
5월 25일,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타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두 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이번엔 영국군이 엑조세 발사를 탐지하고 즉시 대응에 나서 본진은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그 중 한 발이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31]에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고 적재되어있던 물자인 에섹스 헬기와 치누크 헬기가 있는 상태로 5월 30일 격침되면서 이후 영국 해군측이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더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또한,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던 아르헨티나 육군 1개 중대가 이 날 항복했다.
영국 해군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우스 조지아 섬 주둔 아르헨티나 육군 지휘관 알프레도 아스티즈(Alfredo Astiz) 대위
5월 28일,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 육군 잔존부대를 제거하여 안전을 확보코자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영국군 피해는 전사 17명, 부상 31명.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250명, 부상자 121명, 투항병력 1,400명…. 사실 SAS에 구르카까지 투입된 순간 사망 플래그는 성립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구르카병들이 실전에 참여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하고 지칠대로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들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구르카 항목 참조)에 항복했다고 한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게 된다.
일시적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적인 지원은 없어 결국엔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으로 전문성이 의심되는 병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총알 떨어진 카빈총 든 예비군 10명이 중무장한 네이비씰 1명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다. 숫자가 차이가 나더라도 게임이 될 리 없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측이 머리수[32]만 믿고 중화기도 없이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어요.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전쟁시기가 겨울(남반구이므로)임을 감안하면... 그러나, 이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도 사실 용자들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여건상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은 당연히 영국군의 차지였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밤중에 이륙했는데, 이 당시 악천후를 감안하면 호위기들도 없이 임무를 수행한 이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일 것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들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이분들이야말로 소븐가르드 가실 분들이다. 당시 포트 스탠리를 점령하고 영국이 응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포클랜드 제도에 그토록 인해전술을 시전한 것이다. 그러나 활주로 확장 공사(1주일 걸릴 것으로 예정) 및 전차, 야포탄 등 그야말로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제대로 운송할 수 없었다. 전쟁 준비를 거진 1달에 걸쳐 할 수 있었기에 서두른다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현대전의 필수품은 물론, 기본적인 보급품(월동 장비마저도..)마저 다 빼먹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적인 해군의 부재로 전부 공중수송을 했으니 중장비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애초에 개념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만.
3.6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5월 30일, 아르헨티나군은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며, 작전이 끝난 직후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뜸!"이라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헛소리 작작 하시죠. 우리 인빈시블 멀쩡하거든요?"로 맞받아쳤지만 피격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피격당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마지막 엑조세는 함대 방공망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측의 발언도 약간 일리가 있게 보였던 게, 그 전에 얻어맞고 폐기 상태가 된 채 둥둥 떠있던 애틀랜틱 컨베이어가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헐크 함선을 인빈시블로 오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영국 언론들도 조용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첫 엑조세 공격이 이들 덕분에 아르헨티나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장님 놀려먹은 셈이다.
참고로 이 마지막 엑조세 공격 당시에 인빈시블의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
3.7 영국의 승리
5월 31일, 영국군은 켄트 산에 도달하여 포트 스탠리를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상황이 아르헨티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UN은 포클랜드 철수를 제안하지만 이를 거부했다. 결국 전세가 영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그동안에도 자신을 남미국가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의 일부로 생각했던 아르헨티나는 정작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신들을 지원해주지 않게 되자 급기야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이제야 말이냐! 그러나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칠레는 아예 영공통과 허용 등으로 영국을 지원[33]했다. 중남미 국가들도 유일하게 페루 한 나라만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으나 이미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영국 측에게 유리해졌다.[34]
6월 8일 기동부대가 이동한 상태에서 항공 호위기가 적은 상태로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게 된다.
당시 방공 미사일인 레이피어는 5여단 본부대 호위로 빠져있었고, 체공하던 해리어들도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침투하는 척하면서 빠져버리는 것 때문에 지친 상태라서 제대로 된 저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이 상륙함 자체가 현대적인 LSD나 LPD 같은 게 아니라 LST에 가까운 형태인지라 이후 영국측의 상륙 전술이 초수평선 상륙 작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에서 급히 차출한 민항기들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를 운용해 해리어들을 낚시하기도 했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B-108 캔버라를 보유했기에[35] 민항기를 출격시켜 영국군들로 하여금 캔버라 폭격기들이 출격한 것으로 오인하게끔 낚시를 시도한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꽤 있어서 영국군 조종사들 및 승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저공 침투하는 A-4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포클랜드 판 볼로 작전...이 아니고 Fenix 작전이다. FAS 지휘관인 크레스포 준장을 보면 점점 누군가가 생각난다. 덤으로 이 A-4들은 해리어들에게 AIM-9L을 맞고 털렸다.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영공을 개방해준 칠레 영공[36]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11일 포트 스탠리의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Longdon) 산에서 아르헨티나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던 아르헨티나군 중대병력은 의외로 분투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롱돈 방어선이 뚫린 뒤 14일 포트 스탠리의 아르헨티나군은 백기를 들면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영국 측 전사자는 258명, 아르헨티나 측은 64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21세기까지의 세월 동안 양측 참전자들 중 자살한 이들이 전사자의 수를 넘어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살자 숫자가 과장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 Mod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3명. 모두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으로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했다.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종료되자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승전했다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발악했으나 그 해가 하필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이 개최된 해라서 그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 의해 패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결국 패전한 것을 국민들에게 들킨 갈티에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광탈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983년 비뇨네 정권도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면서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반인륜적 폭력과 살인 등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포클랜드 전쟁으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후 아르헨티나는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영국도 뜻밖에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전쟁이었다.[37] 그래서 영국에서는 이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전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규모와 피해는 비교도 안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엄살같다….
여하간 대처는 그 막대한 전비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급상승해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덕분에 노동당은 길고 긴 야당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에 대해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막대한 전비는 안 그래도 힘든 영국 재정에 직격타를 날렸으며, 영국 경제가 막장화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전쟁이기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전쟁 이전 70년대의 영국은 연간 2.8%의 저성장, 석유파동으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 발생, 평균 10.1%의 실업률, 영국병으로 생긴 고비용 저생산성에 의한 재정악화 등으로 경제규모가 1인당 GDP 세계 18위까지 떨어지며 신음한 반면, 전쟁 이후인 1980~1990년 이후부터는 경제가 다시 발전해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 즉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 경제를 망쳤다는 설은 근거가 떨어진다. 이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영국이란 나라의 총 경제규모 자체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적어도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0년대[38]보단 훨씬 낫다.[39]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시작의 트리거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레이건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 화가 어려웠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의 대처가 재집권을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 1982년 영국은 실업률 10% 실업자 300만(연간기준)이며, 영국 북부지역은 5명중 1명이 실업자가 되었다. 긴축재정을 한답시고 공공기관, 산업을 모두 화끈하게 민영화했다. 게다가 영국의 자랑이었던 요람부터 무덤까지, 즉 공공의료도 뒤집어 엎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참상이 자세히 나와 있다. 대처 집권 3년차 타임지의 여론조사 결과는 "챔벌린(2차대전때 독일때문에 멸망 직전까지 간 수상) 수상과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고 평가했으며, 옥스퍼드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길 거부한 유일한 수상이다.(옥스퍼드는 수상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전통이 있다.)
영국 다음 총선은 100%대처가 질 것이라고 누구나가 예상했던 그때, 포클랜드 전쟁이 터지고 대처가 재집권 했으며, 2년 후에는 금융계의 빅뱅을 일으켰다. 물론 몇년 안에 영국의 제조업은 30%에서 10%대로 급락했고, 그러니 양질의 일자리는 사라졌고, 저임금 서비스업만 늘어났다. 금융산업은 전 산업을 지배했고, 영국 기업들은 주주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올리는 데만 급급했고, 저임금, 해고, 신규 투자의 감소등을 반복하니, 79년부터 91년까지 부자 소득은 61% 증가했지만, 하위층 소득은 오히려 18%나 감소했다. 빈익빈 부익부가 벌어진 것. 미국 제조업도 같은 시기에 박살이 났으며, 동시에 미국도 금융업 중심으로 옮겨갔다.[40]
그 덕택에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NICs(New Industrial CountryS)라고 불리던 국가들이 제조업이라는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당시 세계경제, 특히 세계의 생산품을 소비해주던 미국의 경제구조 변화에 따른 것으로 포클랜드 전쟁과 영국의 역할은 미미하다.
5 기타
- 과거 예비군용 정신교육의 주요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그러나 사실, 이 전쟁은 결국 두 나라 모두 경제와 나라 분위기를 흔들어 놓았다. 다만 나라 경제기반 자체가 약했던 아르헨티나[41]는 영국과 달리 재기에 실패해 쿠테타와 군사독재로 인해 지금의 막장이 된 것은 굳이 긴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다.
- 위의 찌라시와는 또 별개의 군 정훈교육 자료가 있다. 이건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어 이후 영국 언론이 자체 통제에 들어간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전시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
-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본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계획은 1982년 말로 맞춰져 있었다. 이때쯤이면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고, 영국이 퇴역시킬 계획인 주력 군함들이 고철로 해체, 폐기되어 실제로 사라지는 가운데, 겨울이라서 날씨도 극히 추워지고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의 영국 해군이 겨울바람으로 거칠어진 북대서양을 넘어오는데 큰 장애를 줄 것이므로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략이었던 셈. 하지만 그해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국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군사적인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불리한 전쟁을 자초했던 셈.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에이스인 피에르 끌로스떼르망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었다. 아르헨티나를 지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을 교육했다는 이유.
- 영국의 국영언론 BBC는 포클랜드 전쟁을 가장 중립적이고 정확하게 보도한 언론사로 손꼽히고 있다. 자국의 군대를 '아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중립적으로 '영국군'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 여담으로 마가렛 대처는 전쟁기간 중 발생한 아군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결코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형식적인 편지가 아니였다. 이로인해 일과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의 휴가도 반납해 가며 희생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각자의 개인사와 전사자의 죽기 전 상황을 상세히 적어 정성드려 편지를 썼다.
- 사실 이 전쟁의 진짜 정체는 영토분쟁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독재자인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충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이기면 좋지만 패해도 이 사실을 숨기고 이 전쟁을 빌미로 구국영웅 대우를 받으려고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조차도 갈티에리에게는 운이 안따라줬는데 하필 이 전쟁을 일으킬 시기를 잘못 잡아도 너무 잘못 잡았다. 다름아닌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이 개최된 해였다. 이 전쟁의 여파로 디팬딩 챔피언이자 두 명의 세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를 보유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월드컵을 망쳤고 선수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조국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갈티에리는 실각하고 머지 않아 군사독재정권도 종식되었다. 이 내용은 위의 그해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는 것이다.라는 내용과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 탑기어 시즌 21 에피소드 8과 9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아르헨티나의 티에라 델 푸에고의 Ushuaia 라는 곳에서 나갈것을 강요받고 실제로 이에 응해서 나갔다. 제러미 클락슨이 탄 포르쉐의 번호판이 포클랜드 전쟁을 기반으로 놀리려고 일부러 만들어진 가짜 번호판이라 우기는데 칠레 국경으로 떠날때 아르헨티나 우익들이 위협 운전을 한것은 물론 계란부터 시작해서 돌까지 던져 차 유리가 깨지는 등 뭔가 많았다고.
- 원래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에서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 봤다는 얘기도 있다. 결론적으로는 완벽하게 빗나갔지만 말이다.[42]
5.1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 편을 든 나라들많이 있단 말인가 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 그보다 애시당초 아르헨티나인과는 이 주제로 대화하지 않는게 신상에 좋다
- ↑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당시로 따져도 총 인구가 3,000명이 안 되는 지역인데다 산업도 목축업(양치기) 정도라 자급자족도 쉽지 않은 곳이다
- ↑ 이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신자유주의를 실험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헌데 정작 이러한 정책이 영국과 미국에서 히트치면서 90년대에 역수입ㅋ 물론 결과적으로 대망하긴 했지만 - ↑ 사우스 조지아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 1985년 10월 분리 되었다.
- ↑ 이 사진에 나오는 항공모함 허미즈는 전쟁이 끝나고 1986년 인도에 팔렸다. 인도에서는 거인이라는 뜻의 비라트로 운용되었고, 30년이 지난 2016년에 마침내 퇴역했다.
- ↑ 포클랜드 전쟁 전의 대처 정권의 지지율은 높게 잡아서 25%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 전쟁이 다음해에 있을 선거를 대비해서 정권의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었다. 이 승리로 대처는 무려 1990년대까지 지지를 연장하게 된다.
- ↑ 처음에는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미 남반구의 4월은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회복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해군참모총장이었던 해군대장 헨리 리치 제독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했다.
- ↑ 반면,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아르헨티나 측에서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었으나 결국 거부당했다.# 주석 27 참조.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자신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자신들이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 라는 논리로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미국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 했던터라 남미 정권은 미국과 꽤나 돈독했다. 포클랜드 전쟁기간만 제외하고.
- ↑ 나토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육군 대장 출신.
- ↑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 입장에서는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움 한번 안해보고 철수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굴복으로 여겨져 정권을 위태롭게 할 것으로 우려했다. 여기에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여서 주민투표로 결정할 경우, 영국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못한 제안이기도 했다.
- ↑ 2차대전때도 영국은 퀸 메리를 징발해 병력수송에 쓴 적이 있다. 이 계열 여객선은 이런 용도에는 미해군 고속수송선같은 역할을 해냈다. 30노트가까운 속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며 대양을 가로질러 내달릴 수 있는 군함은 흔하지 않다.
- ↑ 미군이 그동안 장거리 폭격비행 기록을 수립하지 않은 건 물론 전선 가까이의 해외기지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코소보 사태)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흠좀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 ↑ 사실, 전쟁 직전에도 여러 전문가들은 이 비행장을 연장 공사(대략 1주일 걸린다.)해주면 제트 요격기 및 공격기들을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아르헨티나 수뇌부는 영국이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로 기동함대를 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고, 설령 온다고 해도 인해전술이면 충분할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에 의존했다. 적어도 FAS(Southern Air Force, 스페인어로 Fuerza Aérea Sur를 줄여서 FAS) 지휘관이 이쪽을 터치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는 의미없는 예상일뿐... 이 비행장에서 미라쥬와 엑조세를 탑재한 슈페르 에땅다르, A-4를 운용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불타는 영국의 폭격기, 군함들의 사진으로 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지였으나 판단 미스로 탈탈 털린 것이다.
- ↑ 결정적인 피해는 아니었다. 이후에도 여기서 지속적으로 C-130 수송기 및 정찰기들을 운용한다.
- ↑ 이랬다가는 연료가 없어서 본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애초에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뜨고 내리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한 대가 연료부족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기는 했다. 대공포 사수들이 격추시켜서 그렇지...안습. 그래도 대공포 사수들을 욕할 수는 없는게, 그 날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중 해리어 4대를 격추한다.
- ↑ 영국의 해리어는 아르헨티나가 쓰던 Matra 530과 Shafrir-2와는 넘사벽인 AIM-9L을 사용했다.
- ↑ 이런 와중에서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들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용자, 대인배들이다. 사실, 이만큼이라도 한 게, FAS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다시 말해 경험치 만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침몰로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하고 700명의 승조원들은 악천후 속에서 구조되었다고 나왔다.
- ↑ 헤네랄 벨그라노는 아르헨티나에서 건조한 순양함이 아니라 1938년에 취역한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USS 피닉스(CL-46)였다. 진주만 공습 와중에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아 남은 전쟁 동안 활약했지만 결국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매각되어 활동하다가 침몰..
- ↑ 정확히 말해서 투입되어만 있었다는게 포인트다. 물에 띄워놓으면 뭐 할 건데,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체제가 있어야지... 실제로, 대잠 전력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전쟁 전 4월 동안에도 대부분의 수송은 공중으로 했다. 잠수함 공격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 ↑ 항공모함조차 짱박혀 버렸으므로,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들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
- ↑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오프라인이 되어 영국군 전함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 ↑ 사실은, 대잠 전력을 갖춘 함대, 장거리 전폭기, 정찰기 편대 등 해상전의 필수 요소들조차 없이 전쟁을 벌였다는 건 애초에 시작하기 전부터 진 싸움이었다.
- ↑ 그렇지만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뿐이었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좀 적었다. 사실 영국군이 상륙을 시작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으니...
- ↑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에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 전투를 벌여 보았으나 생환기가 50%정도 밖에 안 되는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방법이 없었다...
- ↑ 빔 기동(Beam Maneuver). 라이트 노벨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도 등장하는 공중기동.
- ↑ 전투정보통제실, 즉 지휘소
- ↑ 그러나 영국 해군의 실험결과 대함 미사일들은 격추되거나 불발탄이더라도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이는 자유낙하 폭탄들에도 적용되는데, 포클랜드 전쟁중 영국 해군의 프리깃들에 명중한 불발탄 자유낙하 폭탄들이 끼친 피해를 감안하면 절대로 이 명중한 불발탄의 위력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 ↑ 이 기체들도 사실 노후화된 기종들이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 ↑ 푸카라는 사실 반정부군 게릴라나 마약 조직을 진압하기에는 최적의 기체였다. 그러나 이런 기체들을 최신 무기들이 오가는 현대 전쟁터에 내보내는건...하도 끔찍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실제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 이들을 이용해 영국 함대를 공격하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20mm 탄환으로 가벼운 기스를 내는 것 밖에는 전과가 없었다.
- ↑ 수송선에 전방에 수직이착륙을 하기 위하여 방염처리한 장소를 만든 것이라고 하면 정확하다. 해당 함정에 대해서 항공모함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함의 임무는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다보니 항공모함이라고 표기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항공기 수송함이다.
- ↑ 지상군(알보병이 대부분)만 10,000명 가량 투입했다. 포클랜드 제도 인구가 많이 따져봐야 3,000명인 사실을 감안하면 인해전술 그 자체다. 제한된 수송 전력으로 이 병력을 수송하느라 5월 개전까지 준비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비(전차, 야포, 공사용 장비 등)와 전문가(공병 등)들은 전혀 데리고 오지도 못했으며, 개인 화기의 탄환도 재고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를 육방부라고 까지만 이 동네는 정말로 육방부 인증했다... - ↑ 당시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 ↑ 사실 페루는 포클랜드 전 발발 초 아르헨티나와 영국를 상대로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르헨티나 지지로 돌아섰다.
- ↑ 참고로 이 캔버라는 전량 영국이 아르헨티나에 판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 ↑ 흔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동서로 나뉘어있다고 인식되므로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칠레 영토 최남단 부근을 보면 푸에고 섬 근해에서 대서양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안선이 확보되어 있다. 때문에 영국군 전폭기들이 이 쪽을 돌아다니려면 칠레의 허가가 필요했다.
- ↑ 아르헨티나의 함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초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이 항구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 정확히는 1976년에 금융지원을 받음.
- ↑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영국의 농업은 말 그대로 파탄났지만, 전쟁 이후 1980년대 이후부터는 최신 기계화되어 2000년 기준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의 양을 생산하면서 노동력은 2%만 사용한다. 금융 및 일반 서비스 분야도 이때부터 엄청나게 발전했다.
- ↑ 미국은 지금도 세계 최대의 농업생산국이며, 세계 최대의 제조업국가며, 세계 최대의 금융업국가다.
- ↑ 70년대의 오일쇼크가 원인이다.
- ↑ 호주와 캐나다의 경우 외교적으로 영국을 지원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해군 함정을 보내 영국을 군사적으로 돕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