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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생전의 모습
나는 1년에 네판만 이기면 된다.
藤沢秀行(ふじさわ ひでゆき, しゅうこう). 1925년 6월 14일 ~ 2009년 5월 8일,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본명은 후지사와 타모츠(藤沢保). 후에 '秀行'로 개명했는데 본래는 '히데유키'라고 읽지만 '슈코', '슈코 선생님'으로도 불렸다.
5남은 신주쿠에서 어린이 바둑 교실을 운영하는 후지사와 카즈나리 八단, 손녀는 2010년 4월 당시 사상 최연소인 11세 6개월에 프로가 된 후지사와 리나 二단.[1][2] [3]
1977년 제1회 기성(棋聖)전에서 하시모토 우타로를 꺾고 타이틀을 획득한 다음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린하이펑, 오오타케 히데오 등을 물리치고 6연패에 성공해 명예 기성 타이틀을 획득했다. 후지사와는 당시 알코올 의존증 상태였는데 기성전을 앞두고 죽을 각오로 술을 끊어(!) 금단 증상에 시달리면서 타이틀을 방어한 다음 다시 술독에 빠져 지냈다.
1983년 조치훈에게 3연승 후 4연패하며 기성 타이틀을 잃었다.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4]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였는데, 조치훈이 20대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자 "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봐야겠군."[5]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조치훈은 "대선배님을 오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6] 라고 대답한다. 후지사와는 조치훈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7]라고 했고, 조치훈은 이 말에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8]라고 대꾸하고는 진짜로 리버스 스윕에 성공했다. 심지어 조치훈은 "선배님의 기성위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후지사와는 이후 위암이 발견되어 절제 수술을 받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성 림프종, 전립선암 등 3번의 암을 극복한다.
1991년 하네 야스마사를 3-1로 이기고 왕좌 타이틀을 획득하며 이듬해 고바야시 고이치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해 사상 최고령(67세) 타이틀 방어 기록을 세운다.
1999년 창하오, 조훈현, 타카오 신지와 은퇴 3번기를 뒀는데 은퇴 대국은 1938년 혼인보 슈사이 - 기타니 미노루 이후 처음이었다.
2009년 5월 8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두터운 바둑을 가장 잘 안다고 평가받았다. 어이없는 실수로 대국을 놓칠 때도 많았으나 날카로운 착상을 선보여 '화려한 히데유키'라고도 불렸다. '초반 50수까지는 일본 제일'로 여겨져 한때 일본기원에서는 초 · 중반의 검토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부분을 "히데유키 선생님께 여쭤 보자"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조훈현은 일본에 있을 때 후지사와의 연구회에 참가하는 등 가르침을 받았으며 세고에 겐사쿠를 정신적인 스승, 후지사와를 바둑판 위의 스승이라 표현했다. 물론 내제자로 들어가서 숙식을 하고 기초적인걸 배우고 기타니 미노루 도장과 대립한 터에 국통은 세고에 九단이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후지사와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제2회 기성전에서 가토 마사오에게 1승 3패로 몰리자 제5국을 앞두고 졌을 때 목을 매달기 위해 좋은 나무를 찾은 다음 대국장으로 향했다. 이 대국에서 후지사와는 2시간 57분의 장고 끝에 둔 수로 상대의 대마를 잡으며 이겨 역전 우승의 발판을 마련한다.
기성전을 6연패하는 동안 빚 때문에 집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최고의 한 수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어서 빚도 여자도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으로 "훈현이가 보고 싶다"며 위스키 한 병만 들고 한국에 온 적이 있었으며[9], 그의 방에 있는 바둑판은 접이식이라 관계자들이 놀랐다는 일화도 있다.
엄청나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그의 대국료와 우승상금은 대부분 유흥비에 사용되었다. 그의 말버릇 중 하나는, '나는 1년에 네 번만 이기면 된다' 였는데, 기성전 타이틀 방어전이 7전 4승제였기 때문이다. 타이틀 방어전이 치뤄지기 2개월 전부터 술과 여자를 딱 끊고 기성전 우승상금을 받으면 10개월동안 노는 식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 타이틀전은 국제대회와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상금(5000만엔 정액[10])이 걸려있기 때문.[11] 그 때문에 6연 기성을 차지했는데, 한 번은 기성전 우승 상금으로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려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말년에 흑역사가 있는데, 일본바둑협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단으로 단증을 발급하다가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적 있다.
여담으로 술에 취하면 검열삭제를 연호하는 술버릇이 있었는데 덩샤오핑을 만났을 때에도 술에 취해 "검열삭제를 중국어로 뭐라고 하느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다 회견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아들 후지사와 카즈나리는 프로 8단이며 손녀도 바둑계로 입문하는데 한국에서 건너간 홍맑은샘 도장 출신이라 한다.
2010년 후지사와 9단의 손녀 후지사와 리나(藤沢 里菜 )가 일본기원 사상 최연소 입단(11세 6개월) 입단 하였다. 피는 못 속인다. 현재 3단까지 승단했으며 일본 기원의 여류 기대주로 손꼽힌다. 하지만 셰이민이 리나를 만나는 순간 관광보내는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