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히데사토

藤原秀鄕
생몰년 미상

헤이안 시대 일본의 장수.

보통 타와라노 토타(俵藤太, 田原藤太)라고도 불리는데, 토타(藤太)라는 말은 '후지와라 씨(후지와라 씨를 '토우지'라고도 함) 장남'이라는 뜻. 타와라(田原)는 그의 고향 지명이다. 풀이하면 '타와라에 사는 후지와라 댁의 큰아들' 정도.

원래는 시모츠케(下野) 출신의 한미한 호족이었으나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단번에 출세해 종4위하 관위에 시모츠케 · 무사시(武藏) 두 구니의 지방관 및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에 임명되는 등 무문(武門)으로써 크게 출세한다.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혼세(本姓)를 후지와라라고 칭하는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사람의 후손및 후손인 것처럼 족보를 위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

1 개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는 원래 시모츠케의 재청관인으로 시모쓰케노죠(下野掾)[2]라는 말직에 있었는데, 엔기(延喜) 16년(916년) 고즈케 관아에 항명했다가 일족 사람 17명과 함께 유배령을 선고받았고, 2년 뒤인 929년에는 본거지 시모쓰케에서도 깽판을 부리고 다닌다고 관아에서 직접 추토령을 내렸지만 모두 실제 집행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가라사와(唐澤) 산에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을 정도. 그러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간토의 8개 구니를 차지하고 신황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은 그때까지 지명수배 상태였던 그를 다급히 사면해 마사카도 진압에 나서게 했다.

오토기조시》 같은 후세의 전설에서는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오히려 좋다구나 하고 마사카도에게 가담하러 왔는데, 그때 마침 마사카도가 손톱을 깎다가 나와서 맞았다고. 또 같이 밥을 먹는데 마사카도가 먹다 흘린 밥알을 히데사토가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털어버리는 것을 보고 밥맛이 떨어져서이런 경박한 사람은 일본을 다스릴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아와서 조정군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마사카도는 원래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해 화살과 칼로도 상처를 입지 않았고금강불괴, 북두칠성의 화신으로써 전장에서는 자신과 꼭 닮은 여섯 명의 카게무샤를 데리고 전투에 나섰기에 이들 가운데 누가 진짜 마사카도인지를 아무도 분별할 수가 없어 반란 진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히데사토는 마사카도를 가까이서 모시던 한 여자를 꾀어서 그녀로부터 진짜 마사카도를 구별하는 방법과 마사카도의 유일한 약점(관자놀이)을 알아내 마사카도를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3]

이후 히데사토는 마사카도를 진압한 공으로 그는 종4위하의 관위를 받고 시모쓰케의 카미가 되었으며, 나아가 무사시노카미에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4]까지 겸임하게 된다. 사후 정2위가 추증되었다.

일본에서는 무카데(지네) 퇴치 전설로도 알려져 있는데, 오우미 국 세타의 가라바시(唐橋) 다리에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나타나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채 가로막게 되고, 구렁이가 무서워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지 않았지만 마침 지나가던(...) 히데사토는 "구렁이? 그게 뭐?"라며 구렁이를 태연히 넘어서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그 날 밤, 웬 아름다운 아가씨가 도타가 묵고 있는 곳으로 찾아와 자신은 낮에 히데사토가 가라바시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타넘고 지나간 그 구렁이라 정체를 밝히더니, 실은 자신이 비와호에 사는 용신(龍神) 일족으로 지금 미카미 산에 사는 지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며 히데사토에게 퇴치해 줄 것을 간청한다. 그 지네는 미카미 산을 일곱 바퀴 반이나 감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로 히데사토가 활을 쏘아도 끄떡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화살을 들고 도타는 하치만신(八幡神)[5]께 기원한 뒤 그 남은 한 발의 화살을 쏘아, 간신히 지네를 퇴치할 수 있었다. 용신 일족의 아가씨는 히데사토에게 답례로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쌀자루 등의 보물을 주었으나 히데사토는 이런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놀고 먹기만 할 거라며(...) 비와 호에 던져버렸다고. 훗날 그가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했을 때에 용신 일족의 아가씨가 다시 나타나 마사카도의 약점을 도타에게 알려주어 마사카도를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일본측 매체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관련해 등장할 경우에는 마사카도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고 오히려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킨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치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음양사 - 다키야샤 아가씨》에서는 도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앞서 설명한 미카미 산의 지네 퇴치담도 함께 등장하며, 다이라노 마사카도와는 개인적으로도 절친하고 서로 재능을 인정하는 사이로,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키고 신황을 자칭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 진압을 요청하는 조정의 관리에게 애초에 조정이 동쪽 지방에 너무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그걸 또 가혹하게 거두어 들인 게 반란의 원인이라며, 마사카도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백성들이 지지하지 않았으면 이런 반란이 일어났겠느냐는 힐난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당장 무장하고 마사카도에게 달려가 가담하고 싶은 심정이다"라고까지 한다. 하지만 마사카도가 자신이 알던 마사카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종당해 난폭하고 거친 성격으로 변해버린[6]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이후 마사카도를 진압하는데 나서게 된다.

2 창작물에서의 그

Fate 시리즈에서는 타와라노 토타라는 이름으로 등장. 해당 항목 참고.
  1. 사칭이 아닌 진짜 그의 후손들 중 유명한 사례는 바로 헤이안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슈 지방의 유력 가문인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다. 대표적으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
  2. 일본의 사등관 가운데 세 번째에 속하는 문서 담당 및 심사를 맡은 일종의 판관직.
  3. 전설에서는 이때 히데사토에게 마사카도의 약점을 알려준 여자의 이름이 기쿄노마에(桔梗前)로, 오늘날까지 간토에서 마사카도나 그 가신의 후손을 자처하는 집안의 사람들은 집에 도라지(일본어로 기쿄)가 들어간 문장을 새기지도 않고 정원에 도라지꽃을 심지도 않는다고. 또 치바현 나리타 산(成田山)에 있는 신쇼지(新勝寺)라는 절에 참배하러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조복기도(신불의 힘에 호소해 조정의 적을 저주해 죽인다는 기도의식)를 이곳에서 했을 뿐 아니라 히데사토가 마사카도를 죽인 화살을 이곳의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쇼지에 참배하면 마사카도의 가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출처: 모로 미야 《헤이안 일본》). 1976년에는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주인공으로 하는 NHK 대하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風と雲と虹と)》의 출연 배우 및 제작진들이 그때까지 대하드라마 제작진들이 제작을 앞두고 (한국에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 전에 고사 비슷하게 지내는 것처럼) 신쇼지에 참가해 절분 의식을 하던 행사를 생략했다.
  4. 에미시를 막기 위해 북쪽 최전방인 무츠노쿠니에 설치한 진수부(鎭守府)의 최고 장관. 가마쿠라 막부 성립 전까지 일본에서 무사로써 누릴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관직이었다. 막부 수립 이후에는 정이대장군에 흡수됨.
  5. 일본의 무가에서 군신(軍神)으로 받드는 신. 전국에 하치만구라는 이름의 신사는 이 하치만신을 모시는 신사이다.
  6. 마사카도가 맨손으로 의 갈기를 잡아 뜯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마사카도에게 자신의 눈앞에서 직접 해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하지만 마사카도는 "그러면 말이 불쌍하잖아"라며 거절하고 대신 대나무를 손가락으로 부러뜨리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뒤 도타가 찾아가자 말을 한 마리 끌고 오게 해서 말발굽을 맨손으로 잡아 뜯기까지 한다. 말에게 왜 그러느냐며 충격을 받은 도타에게 "너는 전에 이런 걸 나한테 시키려고 했었잖아?"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