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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 센(크메르어: ហ៊ុន សែន, Hun Sen, 1952년 8월 5일 ~ )
약 30년 가까이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으며 1985년 32살 나이에 최연소 총리가 된 이후 연정, 쿠데타, 선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30년째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훈 센은 현재도 정적 숙청과 탄압, 인권 침해 논란 등으로 야당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오고 있으며, 그는 외신과의 인터뷰는 일절 하지 않는 등 폐쇄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하다.[1]
2 생애
훈 센은 1952년 캄보디아의 콘폰체무 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베이징에서 망명하면서 라디오로 무장 투쟁을 선동하고 있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따라서 친미 정권인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열심히 싸워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깽판을 부리기 시작하자 그는 점차 크메르 루주를 멀리했다고 하며, 결정적으로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크메르루즈의 명령을 거부하고 베트남으로 도주했고,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루주 군대를 양성했다. 이렇게 키운 군대를 바탕으로 베트남군이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과 함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어 베트남과 함께 괴뢰 정부를 이끌었다. 이후 훈센 총리는 베트남이 크메르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수립한 캄보디아 정부에서 주요 자리들을 거친 후 1982년에는 29세에 나이에 부총리가 되었고 1985년 32세의 나이에 총리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7년 7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시아누크의 아들이자 총선에서 승리한 당수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 1총리를 캄보디아에서 쫒아냈고, 캄보디아의 훈 센 제2총리는 제1총리의 교체를 위한 의회 회기 소집을 계획하고 군부의 지지까지 얻어서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물론 라나리드 진영의 게릴라전이 있었으나 손쉽게 격퇴되었다. 이후 캄보디아의 절대권력자가 된 훈 센 제2총리 휘하 군부대들은 축출된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에 동조하는 부대원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온 캄보디아의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죽였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자료 또한 라나리드 편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실시했는데 증언에 의하면 라나리드 편의 병사는 캄캄하고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채 심문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으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누르는 고문을 당했다고 하며, 훈 센측 고문 기술자들이 라나리드측 병사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이들이 수용소에서 마신 물은 하수도 물, 특히 인분이 섞여 구린내가 나는 물이 전부였다고 한다. 기사 또한 전기충격은 기본이고,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의 잔인한 고문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한편 타이 국경지대로 숨어든 크메르 루주와의 싸움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을 끝으로 끝났다. 한편 협정 이행을 위해 대규모 유엔 평화유지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할 때도 훈센은 야당을 탄압했고 유엔이 지켜보는 데에도 약100명 이상의 야권 인사가 살해됐다.
현재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tv인 바욘TV는 훈 센의 맏딸인 훈마나가 소유하고 있다. 아프사라TV는 캄보디아 여당인 인민당 소속인 사이삼알 환경장관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인 네악키스멩이 소유하고 있다. 네악키스멩은 이름 앞에 오크나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라는 뜻으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라는 뜻이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에서는 훈센의 개인 자산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서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것은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훈센과 그의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마구잡이로 팔아넘긴 거나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 또한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캄보디아의 숲과 호수 그리고 해변과 산호섬까지 전부 외국인들에게 팔려나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08년 4월 26일날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가량이 외국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 크메르루즈의 학살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던 인구보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캄보디아 정부를 비판했다.
사실 그가 크메르 루주라는 희대의 미치광이들 때문에 개판이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가지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농민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았겼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8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전 세계의 내노라 하는 의류기업이 모여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다는 불만이 상당히 팽배한 상황이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지만, 캄보디아 정부가 의류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시위를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기사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 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훈센 총리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집회 장소에 간이텐트를 치고, 임시거처 삼아 장기투쟁을 벌여온 야당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와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또한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재판도 받지 못한 채 외딴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 수감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자유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친 철조망으로 막혔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진압용 차량을 동원하며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다고.
실제로 2013년 7월 치뤄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으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돼 투표를 못할 정도로 부정선거 의혹을 받고 있다. 이렇게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 야당이 선거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넘어간 모양. 다만 여기서 인간말종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 … 누구든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일 정도로 강하다면, 그 개새끼들을 흠씬 두들겨팬 다음 우리에 가둬버리겠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훈 센 총리의 이 같은 노골적인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아들에게 승계하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유력한 후보자는 장남인 훈 마넷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캄보디아인권센터(CCHR)에 따르면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자신들의 글 때문에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며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훈 센 총리의 지시로 체포되는 등 여러 독재자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사
그리고 최근 제1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의 삼랭시 대표에 대해 입국 금지 조치를 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맞다.기사
3 기타
]그리고, 한국의 순천향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다고 한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 한쪽이 특이하게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75년 4월에 프놈펜을 공격해 크메르 루주와 전투를 하다가 부상을 입어서 의안을 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18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데 그 이유가 캄보디아 내전 당시 정글에서 생활할 때 모기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운 것이 지금까지 끊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주치의도 금연을 권하고 가족과 국민도 담배 끊기를 바라지만 매우 어렵다고, 실제로 몇 차례 금연을 시도했는데 전부다 실패했다. 다만 손자나, 손녀들과 있을 때 또는 국제회의장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 골프에 취미를 붙여서 매주 한두 차례 골프장에 간다고 한다. 하지만 골프장에 가기 전에 반드시 집사람의 허락을 받는데 그 이유는 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라고. 또한 노래 작사를 즐긴다고 하며, 직접 만든 가사를 가수에게 주기도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식사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하며 뉴스를 접할 때는 TV 두 대와 라디오를 동시에 켜 놓는 습관도 가지고 있다. 기사
캄보디아 최고의 여배우였던 피셋 페아클리카 1999년 7월 6일 프놈펜의 한 시장에서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지 일주일만에 사망했는데 이여자의 사망이 훈 센의 연인이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고아 출신으로 왕립무용단원을 거쳐 영화계에 들어가서 스타가 된 여자인데, 몇몇 주장에 의하면 훈 센이 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것을 훈 센의 아내가 알고 크게 질투하자 경찰국장이 여배우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경고했으나, 그녀가 듣지 않자 경찰국장이 그녀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기사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하자 2015년 11월 24일 조문을 다녀가기도 했다.기사- ↑ 물론 이는 훈 센뿐만 아닌 다른 독재자들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