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로돔 시아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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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영 좋지 않다.

노로돔 시아누크(크메르어: នរោត្ដម សីហន, 1922년 10월 31일 ~ 2012년 10월 15일)

"캄보디아는 과거 모든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저항은 캄보디아 국민의 전통이었습니다. 캄보디아인은 항상 싸워왔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시아누크가 아니라 캄보디아 인민이다"
"나는 크메르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 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1973년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1 개요

캄보디아국왕이자 독재자이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20세기 이후 현대 입헌군주제나 왕정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의 국왕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실상 전제군주제로 밀고 나간데다 웬만한 독재자 이상으로 독재정치를 했던 인물이지만 캄보디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며 대학살을 펼친 어느 인간백정의 엄청난 학살극으로 인해 다소 묻힌 감이 있다.

2 생애

시아누크는 1922년 캄보디아 왕족의 한 집안인 노로돔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그는 왕이 되기에는 까마득할 정도로 혈통이 멀었던 사람이였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전부 차지해버리자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프랑스는 1941년 시아누크를 꼭두각시로써 캄보디아의 왕으로 만들었다. 즉,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캄보디아 국왕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18세 나이로 왕이 된 것이다. 시아누크는 여러명의 부인을 가져서 그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으며 놀고 먹는 생활을 해댔다, 그래서 그는 마치 프랑스의 뜻대로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지내는 듯 했지만 이 왕이 훗날 캄보디아를 휘저어 놓을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에는 재빨리 캄보디아 독립을 선포했으나 일본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나자 프랑스 식민당국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프랑스를 설득해 1953년 11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얻어냈고, 캄보디아 국민은 그런 그를 '캄보디아의 혼'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독립 뒤 왕위에서 물러난 그는 인민사회주의공동체라는 정당을 창설해, 첫 총선에서 승리한 뒤 일당통치 정부에서 대통령, 총리, 외교장관을 꿰차며 이른바 ‘자애로운 전제군주'로 군림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아누크는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언론과 지식인들에게는 재갈을 물렸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후 포퓰리즘 정치를 자행하며 자신이 캄보디아를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면서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게 했다.

또한 냉전 상황에서 제3세계 비동맹운동을 펼치며, 캄보디아를 미국이나 소련의 편도 아니라고 선언하며 미국으로부터는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친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커스 외교를 펼쳤다. 문제는 이러한 서커스 외교만 하느라 경제는 점점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지만 시아누크는 반발 세력들을 탄압하여 반대세력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훗날 캄보디아에 닥칠 엄청난 피바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이때를 그리워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현재까지도 매우 많으며 이러한 그리움은 시아누크가 훗날 다시 캄보디아의 왕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 시기 마오쩌둥, 김일성 등과 친분을 맺었는데 이 인연으로 북한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김정일이 죽었을 당시에 캄보디아는 대규모 조문단을 보냈다.

그러던 중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받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의 편을 들었는데 이는 베트남을 견제하려는 목표였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암담한 경제상황에 분노한 공산주의자들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1969년에는 다시 미국과의 외교를 재개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아누크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문제는 이런 박쥐와도 같은 시아누크의 행보를 미국도 믿지 못했고 결국 미국에게도 버림받게 된다. 결국 60년대 이후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를 병참수송로로 활용했고, 이에 골치가 아팠던 미국은 론 놀 장군을 사주해 미국과 베트남 전쟁에 비협조적인 시아누크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시아누크는 왕위에서 쫒겨나게 된다.

이후 축출당한 시아누크는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라디오를 통해 론놀 정권과 투쟁하라는 방송을 내보내며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탄압했던 공산세력인 폴 포트크메르 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어, 1975년 론 놀 친미정권 타도에 큰 힘이 된다. 크메르 루즈 집권 뒤 캄보디아의 명목상 대통령이던 그는 1년만에 사임하고 사실상 가택연금상태에 처했다. 자신의 아내 모니크와 함께 왕궁에 연금된 시아누크는 처형당할 뻔했으나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자녀 5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고 결극 시아누크 국왕의 아들 5명과 손자 15명도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수백만명을 대학살한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 70이 넘어간 이후 내가 불교신자만 아니었다면 조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고...

그러나 베트남을 잘못 건드렸다가 열받은 베트남이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크메르 루즈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크메르 루즈와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식민지 형태처럼 될 것을 우려한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하여,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폈고 이러한 12년 동안의 외교활동으로 캄보디아는 유엔 중재로 1991년 종전협상을 맺게 되었다. 종전 협상 2년 후에는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그는 캄보디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첫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아들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정당이 압승하자, 또다른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 센은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며 시아누크를 협박했고 이에 시아누크는 굴복하여 아들에게 공동총리제를 설득해 훈센에게 사실상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997년 7월 제2총리인 훈 센은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의 아들인 라나리드를 축출했다. 축출된 라나리드는 해외로 도피하게 되었으며, 훈 센은 반역죄 명목으로 라나리드에게 35년형을 선고했다. 또한 시아누크는 완전히 실권을 잃어버려서 1998년 시아누크가 총리직에서 쫓겨나 망명 중인 아들 라나리드에 대한 사면을 거부했을 정도로 시아누크는 무력했다.

실제로 시아누크의 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가 자신의 왕궁에 죄수처럼 유폐돼 있다고 말했다. 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훈 센의 측근인 콩솜올 왕실담당장관이 이들을 총괄 지휘하며, 왕은 왕궁 담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며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하는 반면 언론의 접근은 차단된다. 캄보디아 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이후 캄보디아 정당들의 중재자로 활동하다가, 2004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건강 때문에 아들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이 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평양과 같은 해외에서 보내다가 2012년 10월 15일 새벽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3 기타

  • 그는 프랑스 와인과 음식 애호가로 그가 주선하는 연회는 당시 외교가의 대표적 사교장이었다. 그는 무려 6번씩이나 결혼을 했으며 적어도 14명의 자식을 두었으며[1] 색소폰 연주를 잘 했으며, 작곡가이자 영화제작자 그리고 영화 감독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기도 했다
  • 한때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해서 “캄보디아 인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버릇없는 자식들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시아누크는 총선 때에도 후보자들에게 나의 이름을 팔지 말라고 직접 당부 했다.
  • 시아누크는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자주 북한방북하였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김일성은 그에게 섬 하나를 선물했으며 죽기 얼마전까지도 휴가를 지내러 북한에 방문했다.
  1.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