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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지 밝히시오.""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올시다."
"...어떻게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소이다."- 한 재판에서 재판관과 라이트의 대화 中(...)
목차
Frank Lloyd Wright (1867~1959)
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근현대 건축가. 일반인들에게는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근대 건축으로 시작했으나 생의 마지막에는 현대건축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을 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카피에 불과했던 미국의 건축이 독자적인 양식을 갖추고 이후 현대건축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하다. 르 코르뷔지에의 대립쌍으로 둘을 엮어 현대 건축의 양대 산맥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
2 대초원 양식을 완성하기까지의 인생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크게 세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유럽의 주택 양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미국만의 주택양식인 "대초원 양식(prairie style)"을 완성하는 시기다.
2.1 탄생과 성장
1867년에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났고, 16세 때 위스콘신 대학교를 들어갔다. 학업에 천재적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 시대가 그랬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이라 대학교의 학비는 라이트의 집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한 불화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라이트는 고학으로 졸업하였다.
1887년 근대건축의 선구자 루이스 설리번의 설계사무소에서 일을 배웠다. 루이스 설리번은 현대 디자인에서 명언으로 평가받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을 남긴 사람이다. 주로 시카고등지에서 활동하며 초기 마천루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사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장식적이었던 그의 작품에 적용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라이트의 시대는 현대건축이란 것이 막 태동했을 무렵이기에 라이트는 고전적인 근대 건축에만 매달렸다. 설리번 아래에서 그의 장기였던 장식들은 라이트 건축의 전반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이트는 1889년에 시카고 근교의 오크파크에 자신의 집을 지었고, 1893년에는 그 주변의 주택을 중심으로 자신의 설계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연도에 라이트는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세계 전람회에 출품된 일본 전시관에서 호오덴 사원의 복원 등 일본 전통 건축을 접하게 되고, 일본 건축과 예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건축가 중에서도 알아주는 일빠를 꼽으라면 라이트를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이후 라이트는 일본 미술의 수집가이자 화상으로도 활동한다.
이후 많은 주택이 오크파크 주변에 지어지는데, 라이트의 건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다. 이 기간동안 라이트는 일본의 주택과 유럽의 주택을 섞어서 점차 자신만의 양식을 개발하게 된다. 같은 시기에 라이트는 자신의 집에 스튜디오 등을 증축하며 발전시켰는데, 여기서 얻어진 많은 실험적 경험들은 훗날 대초원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2.2 대초원 양식을 만들다
위스콘신주 근교의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며 대도시보다 교외지역을 선호했던 그는 당시의 주류 건축인 보자르 스타일(고전적인 구성방식을 중심으로 한 양식, 흔히 떠올리는 유럽 건물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 고전적, 반 유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는 미국의 문화적 독립성을 추구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이란 나라의 문화는 유럽의 카피에 불과한 2류였다.
건축 철학에서 그가 따른 것은 '유기적'관념인데, 그는 건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중요시한 이러한 자세는 미국 특유의 광대한 초원이라는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며 '대초원 주택 양식'을 만들어낸다. 라이트의 집이 있었던 오크파크는 당시에는 그저 초원이었다. 지금은 한적하기는 해도 주택이 꽉 들어찬 주택가다. 세월의 변화란..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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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초원 양식의 대표작인 로비 하우스.
- 수평성이 강하다. 이는 미국 평원의 끝없는 지평선과 어울린다.
- 공간 구성은 중앙의 굴뚝을 중심으로 십자형태이며, 벽들이 완벽하게 막혀 있지 않아 방들이 흐르듯 연결되어 유기적인 공간을 만든다.
-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축선을 일치시키는 등 자연과 주택을 개념적으로 일체화시킨다.
- 형태적 특성으로는 길게 뻗은 지붕과 끈처럼 이어지는 수평적인 창 배열이 있다.
이 독특하면서 아름다운 집은, 미국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미국만의 독자적인 양식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세련된 창틀의 무늬 등 장식 요소에 많이 의존하는 근대적인 주택에 머물렀다.
3 유기적 건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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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킨 빌딩.
이렇게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것을 연구하던 그는 도시 속에서도 이러한 만남을 시도한다. 1904년 뉴욕주 버팔로 시에 지은 라킨 빌딩에서, 사무소 건물은 외부를 향해 열리지 않고 내부를 향해 열리며 천장에 창을 내었기 때문에 외부공기와 자연광을 접촉할 수 있다. 이 건물은 환경 조절 장치를 갖춘 최초의 오피스 건물 중 하나이다. 유리궁전 보고 있나?
1910년 그의 작품집이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유럽의 주류 건축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까진 좋다고 치자. 아버지의 행방불명은? 그의 인생에 서서히 헐리우드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3.1 막장드라마
이 시기 그는 거만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기혼 여성과 오픈 카를 타며 어울리고, 비싼 옷과 풍성한 넥타이로 자신을 포장하더니 여섯 명의 아이들과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유럽으로 도피하는 바람둥이 행각을 벌인다. 이 때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사람이 개인적 자유와 결혼 생활의 노예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런데...
1914년, 그의 주택 겸 작업실 탈리에신에서 내연녀 Cheney 부인과 아이들이 도끼로 살해되는 것도 모자라 범인은 급기야 방화까지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해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정신줄을 잡고 집을 복구한다. 이 때 복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맡은 일이 도쿄의 제국호텔.
이 건물은 지진 방지를 위해 당시의 최신 기술을 동원하여 고심해서 설계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돈과 시간을 너무 과다하게 쓴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 건물은 1922년 완공되었고, 다음해 도쿄에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500만의 인구 중 15만명이 사망했고 도시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제국호텔은 홀로 멀쩡했다. 이로 라이트의 명성은 또 높아졌으며, 1970년대 도시화로 새 건물을 지어야 할 때가 오자, 제국호텔을 기념하기 위해 해체하여 나고야의 메이지 시대 민속촌에 로비 건물동을 조립해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제국호텔이 지어진 해 두 번째 아내(Cheney 부인과는 내연녀 사이)도 얻고 다시 재기하려던 찰나....
믿기지 않는 일이 또 일어난다. 1925년 기껏 복구한 탈리에신 주택이 다시 불타 사라진다. 화재 당시 주변 주민들은 화재진압을 돕기는 커녕 라이트가 수집했던 동양의 예술품들을 훔쳐 갔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와도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동유럽의 귀족이었던 여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고는 삶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후 라이트는 근대건축의 역사를 쓰는 데 합류하게 된다.
4 20세기 유기적 건축의 완성
4.1 낙수장
이 문단은 낙수장 · Fallingwater(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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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라이트는 그의 후원자였던 에드거 카프만의 여름 별장인 낙수장(Falling water)를 완성한다. 이 저택은 폭포 위에 지어졌다!.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자연과 그대로 융합한 이 저택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택이다. 라이트의 자연주의적인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하였으며, 인문학적인 면에서 시적인 표현을 이룩한 건축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하여 공학적인 혁신을 이룬 건물이기도 하다. 캔틸레버는 한쪽 끝만 받치고 길게 뻗은 바닥을 말한다. 이건 안정되게 짓기 힘들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서 쓰는 깃발의 끝 부분만을 잡고 수평으로 들어 보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라이트는 주택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택에 있어서만큼은 특정한 스타일을 내세우는 것을 꺼려했는데,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각에 맞는 스타일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주택의 본질적인 면, 즉 온화함과 보호 등의 개념을 중시하여 천장을 낮게 한다거나 코너를 활용하는 등의 디자인을 했다. 특히 벽난로(hearth)를 따뜻한 가정의 중심이라 생각하여 이를 부각시킨 주택 설계를 많이 하였는데, 낙수장에서는 집의 가장 중앙에 벽난로와 그 굴뚝을 두고 여기서부터 각 공간이 뻗어나가는 듯한 형태로 표현해냈다.
이 집이 자연과 동화된 유기적 건축인 이유는 단순히 폭포 위에 세웠다는 사실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콘크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료를 해당 지역에서 가져다 썼으며 이는 수직적으로 부각되는 석재 매스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언급된 1층의 벽난로나 메이드룸에선 원래 그 자리에 위치해 있던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집의 일부로 만들어 쓴 것이 돋보인다. 거실로 들어서면 강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집 안에서 다이빙을 시도할 수 있다! 낙수장의 특이한 점으로는 모든 방에 커다란 테라스가 하나씩 딸려 있다는 점인데 이 또한 사적인 공간을 자연을 향해 열어두어 자연과 주택을 연결시키려 한 시도다. 심지어 진입로 부분에서 원래 있던 나무를 자르지 않은 채 그 주변을 돌아 건축물이 지어진 것을 보면 라이트가 자연과의 동화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 지 느껴진다.
낙수장은 그 과감한 선택을 통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에 따라 논란 역시 불러일으켰다. 우선 건축주인 카프만부터 아우성이었다. "일단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 사실이다(...). 그리고 공학적으로도 20세기 초의 기술로 만들어졌던 탓에 캔틸레버는 계속 쳐져 갔다. 지금은 켄틸레버 곳곳에 금이 가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은 서구 건축사에서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 건축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집이 애초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젊은 에드거 카프만 주니어에게 당시에 그의 아버지인 에드거 카프만 시니어가 살던 집이 그 집안의 위세에 알맞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도발을 해서 의뢰받은 작품이다. 이 건물이 지어지자 당시의 고령인 에드거 카프만 시니어는 얼마 살아보고나서 잠을 못 자겠다며 불평하며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 며칠 이상 머물지 않는 주말 별장정도로만 쓰이다가 에드거 카프만 주니어는 이 집이 거주용보다는 예술작품이라 판단, 기부해버렸다. 이 집은 1964년 개관하여 지금까지 관람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담으로 다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들처럼 레고 아키텍쳐 시리즈로도 나와 있는데 재현도가 높은 편.
4.2 구겐하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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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이트의 최후의 작품인 뉴욕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건축주인 구겐하임이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고, 라이트는 그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는 건물을 만들어냈다.[1]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는 1943년에 끝났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공이 늦춰져 결국 라이트 사후 반년 뒤에 완공된다. 맨 인 블랙에서 윌 스미스가 신나게 뛰어다녔던 이 건물은 미술관 건축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건축에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평평한 바닥'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 건물 전체가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 없이 이어진다! 바닥과 벽, 천장이 함께 흘러가는 모양을 통해 공간과 구조의 유기적인 흐름을 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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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에 가까운 라이트의 기존 건축과는 달리 이 건물은 후기 표현주의 건축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특징적인 외관이 돋보인다. 때문에 처음 지어졌을 땐 커다란 세탁기 같다고 비난받았지만, 사실 고대 지구라트 신전의 모양에서 착안한 형태를 그대로 뒤집은 것이 디자인의 모티프였다. 그 외에 "벽이 저렇게 휘어 있어서 그림이나 걸겠냐" 같은 비판이 있었는데, 완전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걸릴 전시물들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비판은 더욱 거셌다. 미술관의 경사진 바닥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심도있는 감상이 없이 흘끔 보고 지나가게 되므로 건축물 자체가 아티스트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일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라이트의 미술관에 걸지 못하게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비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공간부족이었다.[2] 직원들의 업무공간은 물론 작품을 보관하는 수장고 공간마저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미술관 완공 후 그 뒤편에 업무공간 및 수장고 공간을 위한 건물을 새로 지었고 원래 업무공간, 수장고로 계획되었던 부분은 특별 전시를 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하여, 현재는 라이트의 건물 전체가 다 전시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완공 6개월 전 평생을 논란 속에서 살았던 풍운아는 9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5 영향과 평가
여러 모로 르 코르뷔지에와 비교된다. 도시와 기계를 찬양하며 대량생산에 의한 효율을 주장했던 코르뷔지에와 달리 자연을 찬양했다. 도시를 좋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싫어했다!. 라이트는 더욱 장인적이고 맞춤생산에 의한 다양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코르뷔지에가 이후 모더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처럼 라이트는 자연적인 건축, 환경적인 건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동양의 건축기술과 양식을 서구에 알린 것도 큰데, 일본 건축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온돌 난방을 경험했다. 1916년 일본 제국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 귀족의 조선관에서 온돌을 체험한 뒤 Herbert Jacobs house를 1937년 만든다. 이 조선관은 원래 경복궁의 자선당 건물이었다. 일제시대에 당시의 일본 귀족 부호였던 오쿠라 키히치로가 뜯어가 자기 집에 세웠던 것. 이후 자선당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뒤 1996년에야 주춧돌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원래 자리에 복원된다.
또 온돌이라기보다 그냥 바닥을 뜨겁게 하는 난방법에 가깝지만 온수 파이프를 이용한 바닥 난방의 역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보일러 항목 참조.
비판도 많은데, 앞서 나온 것처럼 그의 건축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라이트의 업적이 부풀려졌다는 의견도 있다. 유럽의 건축적 역사에 비해 내세울 게 없었던 미국이 자국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라는 의견.
여담으로 레고의 '아키텍쳐 시리즈'에도 이 사람의 작품들이 많이 나와 있다.
6 어록
-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 "내 건물에 물이 새서 책상 위로 떨어진다고? 그렇다면 책상을 옮기시오."
- "자연을 공부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가까이 하라. 그런다면 그것은 당신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 "공공적인 것만큼 공공적이지 않은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