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도원구장 연고팀의 사건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파일:Zzanmool.jpg

1 개관

과거 인천의 연고 야구팀이 도원야구장을 홈으로 쓰던 시절 관련 사건 사고 모음. 도원전사, 도원아재, 인천아재라고 입력해도 들어올 수 있다.

아래 사건들을 보기 전에 알아야 할게 SK 와이번스가 입성하기 전까진 인천야구팬들의 상당수는 도원의 전사들이라 불리는 초강성 열혈성향이었다. 그 마산아재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2] 사실 그 마산아재들조차도 일단은 "아재"라고 불리는데, 도원은 '전사'인 점에서 이들이 마산아재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초강성 팬덤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3]

안 그래도 마계라 불리는 거친 해안도시에 야구팀은 하나 생겼는데 그 팀이 하필이면 지구상에 다시 없을 시즌 승률 1할대의 프로야구단이라서 날이면 날마다 지고 매 시즌 꼴찌 혹은 뒤에서 두 번째에 자랑할만한 슈퍼스타 하나 없는데다[4] 구단 운영도 개판에다 모기업마저도 자금력이 약한 기업들만 들어오는 탓에[5] 툭하면 모기업이 바뀌고... 이러다 보니 울분이 쌓인 야구팬들은 점점 과격해져갔고, 특히 사람이 많은 주말엔 매번 시비가 붙거나 하여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실제로 이 시기에 숭의야구장의 그물은 관중 보호망이 아니라 등반대의 역할을 하는 날이 많았고(...) 쓰레기통과 의자는 요긴한 땔감으로 쓰이는 날이 빈번했다고(...) 전해진다. ㅎㄷㄷ

그러다가 현대 유니콘스가 들어온 뒤 우승하여 좀 가라앉...을 뻔했는데, 2000년 현대의 야반도주 연고지 이동으로 인해 기존 인천야구팬들이 빠져나간 뒤 한동안 인천 야구팬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잠시 침체기를 맞게 된다. 2000년 프로야구 개막 후에 인천 숭의구장에서는 몇 년만에 온 팬들이 "여기 현대 구장입니까?" , "현대가 없네요?" 라고 묻자 다들 "현대가 누구요?" "아 ~ 야반도주팀이요?" "빈대새끼들 팬이면 꺼져" 이렇게 무시했다더라...[6]

이후 SK 와이번스조범현 감독의 지휘 아래 2003년 구단 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하고,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 2007년 ~ 2010년의 4년 동안 1121의 호성적을 찍으면서 다시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여 신규팬이 유입된 현재는 인천야구 팬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지금은 그런대로 얌전한 상태이다(...) 도원전사의 정신은 축구팀 인천 유나이티드 서포터즈가 이어 받고 있는 중 축구장으로 바뀐 도원구장에서 인천 유나이티드는 죽기 살기로 지고 있다

2 사건사고 목록

2.1김동철 자살 사건

김동철은 인하대학교 재학 중 중퇴하고 삼미에 입단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프로 입단 첫 해인 1982년 32경기(15선발)에 출전하여 1승 8패 평균자책점 7.06[7]의 부진한 기록만을 남기고 시즌 후 방출되었다. 이후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하여 야구계에서 자취를 감춘 김동철은 이듬해 프로야구 시즌 개막을 하루 앞둔 1983년 4월 1일에 철도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2 삼미 선수단 청문회 요구 사건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시범경기에서 3승 1무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롯데 자이언츠와의 부산 개막전에서 당대 최강의 에이스 최동원을 상대로 5:1로 승리를 거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삼미는 중위권 도약을 자신하며 시즌을 맞이했다.

그러나 1985년 4월 한 달이 기나긴 재앙의 터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 다음날인 3월 31일 구덕 롯데전부터 완봉패를 당하더니 근 한달간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하며 무려 18연패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말았다.[8] 이것은 11연패 기록을 +7연패 늘린 기록.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역시 바로 전 해인 1984년에 삼미가 세운 기록(...).

삼미의 기록적인 부진에 단단히 화가 난 인천 야구팬들은 도원구장 앞에서 구단 버스를 가로막고 김진영 감독의 청문회를 요구함과 동시에 연패의 주범 중 한명이었던 장명부를 퇴출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결국 삼미 구단은 김진영 감독에게 휴가 명령을 빙자한 사실상 해임이라 읽는다을 내렸고 신용균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 시즌을 치르기로 했다. 결국 4월 30일 MBC 청룡과의 홈경기에서 4:1로 승리함으로써 기나긴 재앙이 마무리됐다. 삼미의 18연패 누적 과정과 빡친 아재들의 시위 장면, 눈물겨운 시즌 2승째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자.

더 안습한 것은... 18연패를 탈출한 그 다음 날인 1985년 5월 1일삼미 구단이 청보식품으로 매각된다는 소식이 발표됐다는 점.

김진영 감독은 이후 다시 돌아와서 청보 핀토스의 초대 감독이 됐지만 결국 계획대로 감독직을 해임당했다. 안습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도원구장 1루 감독석에 앉은 사람은... 인프라 밖에 모르는 그 분.

2.3 파울망 타기

단일 사건이라기보단 경기 지겠다 싶으면 간간히 일어나던 일종의 관례행사(...)로, 특히 역전 당할 때 그랬다. 파울망말고 직접 경기하던 도중 선수석에 직접 가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기 전까지, 즉 삼미-청보-태평양 시절에는 이기기보다 지는 경기가 더 많은게 당연했고, 술취한 아버님들의 온갖 행패가 있었던(불타는 쓰레기통 투척이나 소주팩(혹은 병) 투척 등)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만취하신 어느 어르신이 맨 위 왼쪽의 사진처럼 꼭 순결하기 짝이 없는 하얀색 순면 100% 삼각 빤스(다른 색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만을 입고 파울망을 타고 올라가서 경기가 이 따위냐!!느니, 내가 항상 야구장 올 때마다 진다와 같은 내용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그 유명한 도원구장 파울망 타기 사건이다. 다른 어르신들의 환호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다. 물론 이때엔 경기가 중단되고 경찰이 출동해 아저씨를 끌어내야만 했다. 지금이야 웃기는 추억이지만 야구를 즐기러 간 사람들에게 있어선 민폐 중의 민폐. 심지어 알몸으로 몸에 페인팅을 하며 응원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파울망도 탔으며,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덩이에 응원을 하기도 했다(…).

2.4 해태 타이거즈컵라면 투척 사건

1980년대 후반 해태팬이 드글거리던 시절 숭의야구장은 1루까지도 해태팬이 앉곤 했는데 어느날 태평양이 심하게 지던 경기에서 1루에 앉은 한 해태팬이 나가면서 "해태 화이팅!"이라며 염장을 질렀고 그걸 본 어떤 아저씨가 먹던 사발면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그 아저씨는 전직 야구선수였는지 칼날같은 제구력을 뽐내며 해태팬을 정통으로 맞춰버렸고 라면을 된통 뒤집어 쓴 해태팬은 주변 태평양 팬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퇴장했다고 한다. 기사 같은 건 없고 그냥 카더라 통신.

2.5 숭의야구장 관중추락 사건

1980년대 후반 숭의야구장은 건물 자체가 높지 않아서 맘만 먹으면 벽을 타고 올라가서 관중석으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마산처럼 용접기를 동원할 일은 없었다. 출입구 막으면 담치기가 있으니까. 뭐 숭의구장 우측 외야 너머 광성고등학교 동산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도 있을 정도였으니. 거기다가 구장에 지붕이 설치된 것도 아니라서 이렇게 들어온 관중들 중에서는 구장 최상단의 난간에 앉아서 경기를 관전하는 도원전사들도 부지기수였다. 그 시절의 구장답게 당연히 안전장치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1989년 인천야구의 첫 포스트시즌에서 벌어졌다. 난생 처음 포스트 시즌을 구경하는 인천의 야구팬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한 이치고 표를 못 구한 일부 관중들이 담치기를 할 것도 자명한 사실.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이 벌어진 1989년 10월 11일, 인천야구장을 메운 관중 중의 한명인 40대의 강모씨가 구장 최상단 난간에 앉아서 경기를 보다가 흥분하여 중심을 잃고 구장 바깥쪽 7미터 바닥으로 추락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해당 관중은 머리를 다치고 중태라는 신문기사가 났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1989년 10월 12일자 옛날신문 스포츠면을 참조하라.[9]

파울망 타기를 비롯한 여러 사건이 나온 기사

1989년 10월 12일자 경향신문 스포츠면 9면 오른쪽 구석에 이 사건이 올라왔다.

2.6 현대 유니콘스수원야구장으로 야반도주 사건

아마 현대는 서울입성이라는 말이 수없이 거론 되었는데 때는 1999년도 개막전이였다. 작년에 좋은 성적을 거둔 현대 운영팀들은 개막전 부터 관중석이 반이상이 없어지는 걸 지켜보고 이에 다짐을 해버린것이다. 이제는 떠나자. 올해 인천은 사실상 몰락의 시작이라고 왜냐면 현대가 창단 된지 4시즌만에 관중석이 이리 많이 없어지는 걸 예상해 버린 구단 운영팀들과 관계자들은 IMF가 닥쳐온 한파로 한국의 현실을 깨달았고 2번째는 인천광역시장의 우리 요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숭의야구장은 애초에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거라 인천광역시에서는 아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고[10] 하지만 현대는 우리가 직접 뜯어버린다 새로 만든다고 했는데 인천시에서는 아예 그냥 시원하게 거부했다.[11]
이는 현대 구단들에게 및 인천시민의 분노를 사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안그래도 현대는 96년도 창단 뒤부터 보수 설개를 들어섰고 당시, 단장이였던 국내 최고급이라고 불리던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단장이 그것도 직접 현장에 와서 구장 상태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였다.

이러던 날에 김용휘 단장은 어서빨리 최고급 구장으로 만들자라는 소리에 광역시장은 문학구장도 만드는 판국에 여기까지 바꾸면 어찌하자는 말에 문학구장은[12] 어쩌라는 형식이었는데 지금은 제 1홈구장도 병신인데 너같은면 뛰다가 선수들 죽이고 싶냐?라고 이에 빡친 김단장이 답했다고 한 때 메이저리그 선수였던 박찬호가 후에 밝혔는데. 현재 한국 야구 인프라는 세계에서 제일 엿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졌다.라고 이렇게 평했는데 선수들이나 단장들이 빡치지 않았을까? 안그래도 당시 야구장 중에서 원 탐이 1위, 2위, 3위를 달리던 바로 뒤가 현대였다. 그리고 가장 문제점은 우천취소시 야구를 못하게 되면 덕아웃에서 물이 차서 물 호스로 빼야하는 특이한 사례까지 겹쳤었다. 고생할껀 다하고 보상도 못받는 형태인데 결국에는하나마나 같은 짓이다. 그래서 현대 고위 관계자는 이 말을 듣고 빡쳐서 결국 관중동원도 병신인데 이 참에 확 서울로 연고 이전을 한다는 소리를 한다.[13]

그러나 현대 선수들 전원은 후에 서울 입성을 이제서야 듣게 된다. 안그래도 인천시에서 사랑받던 김수경(투수)박진만, 박재홍(야구),김홍집(야구)등 몇몇 선수들은 인천에서 남자 vs 정민태 및 다른 선수들은 서울로 가자 실랑이가 있었다는데 결국 서울로 구단은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인천시민들은 현대 구단들에게 여러분 이거 다 개소리인거 알죠?? 말에 믿었다고 그러나 현대가 야반 도주 후 인터넷에서 현대를 비난하는 욕이 나왔다. 특히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그 날의 이슈는 현대가 뉴스에 뜬 것이다. 그리고 99년도 시즌 후 현대는 가을야구도 떨어졌고 이제는 탈 바꿈을 해야한다고 인천 숭의야구장에 플레카드를 내걸었는데 그것은 경 (주)현대 유니콘스 야구단 서울입성 축 이라는 플레카드가 나오면서 사실상 현대는 전날 밤에 서울로 떠났다. 이제서야 인천시민들은 소식을 듣고 한동안 현대욕은 다하고 야구장 안간다고 신규구단이 들어오더라도 안간다고[14] 그렇게 현대는 기분좋게 서울로 가려 했으나 입성실패를 하고 제 2홈구장으로 쓰던 수원야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옮긴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수도 서울 팀 , 에게 줘야 할 돈을 제때 못준거랑 둘째는 현대 구단내 모기업인 현대전자가 가로채어 자기네들이 사용했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후자가 맞는 소리다.

이유는 SK에게 받은 인천 연고지 비용 54억원과 현대기업에서 따로받는 지원금이 있었는데. 이걸 하이닉스 놈들이 가로채가서 몰래 쓴 것이다.
이에 빡친 현대 유니콘스 임직원들은 갈길이 없어지자 텅 빈 구장인 수원으로 들어갔다. 그 때 부터 8시즌 동안 수원과 현대는 서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해야 했다.[15]
대략 현대 선수단들도 당황했다고 우리 왜 여기있죠?라고 감독 김재박도 어이없어했다는데,,, 이렇게 현대는 KBO에 임시로 일단 잡겠다고는 말했지만, 2년간 아무런 말도 없이 불법 점거를 했으니 2002년 이 후로 부터 KBO 측에서는 앞으로 1차 지명 불가능 이라고 못박아 뒀는데 이는 사실상 큰 데미지를 입고만다, 그 만큼 선수들을 보유하며서 그 뒤 선수들을 잡는데 현대에게는 아예 2차1라운드 픽을 잡으라고 통보한것이다. 아니지 오히려 쌤 통이다. 그러게 애초에 야반도주만 안했어도 이 따위 일이 없었던 것이지 ㅉㅉ

그리하여 현대는 이 해 최대의 수확을 얻었다. 이유는 공동 다승왕을 만들었다. 김수경(투수), 임선동, 정민태와 신설된 홀드 부분에서 조웅천이 최초로 1위를 했다 마무리 부분에서는 위재영이 두산 진필중[16] 다음으로 39개로 2위를 했다.
타격 역시 좋았는데 야구계에서는 안좋은 말이 있는데 타격왕이 되면 절대로 그 팀은 우승 할 수 없다.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걸 깬 것이 박종호의 0.340 1위[17] 홈런왕 박경완[18] 타점왕 박재홍(야구)
이렇게 현대는 연고지 이전 첫 해부터 리그를 작살냈었다.[19] 그렇게 리그 폭격하니 한국시리즈 우승했다.

하.지.만!!! 현대는 결국 닥쳐올 것이 왔다. 신생팀 SK에게 주측 선수들 두 명을 줘야하는 것이 컸다. 그리고 2001년정민태가 한국을 떠나 일본야구계로 진출을 했는데 역시 이 이적료비용을 구단 운영비로 해야만 했다. 15,000만엔 + SK에게 2명 선수 지출로 받은 15억 으로 구단을 꾸려 나가야 했다. 그리고 전년도 선수들이 연봉이 올라갔으니 그만큼 구단 운영 역시 컸다. 몸 값 높은 김경기를 원 위치였던 연고지로 보내버렸다. 문제는 전준호를 폭행한 것이 크지만 문제는 선수협 오적으로 찍힌 것이 컸다. 하지만 전년도에서 연봉이 올라간 선수 중 연봉 값을 한 선수가 이숭용, 박경완, 임선동, 위재영, 신철인, 박진만, 전준호, 박종호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몰락하면서 제대로 먹튀짓 까지 한다.

그리고 2002 시즌 입단하는 대졸, 신인, 투수, 셋 에게 10억 정도 높은 지출을 하면서 현대 선수단 내부가 또 한번 난리가 난 것이다. 그리고 내야수 김민우 까지 3억원 때에 받고 들어 왔으니.... 현실이 우려된 것이다. 조용준은 선수생활 풀타임 4년을 해왔지만 김민우는 현대에 입단해 부상크리와 병풍사건에 연루되면서 망했고 이대환 배힘찬은 팀에서 먹튀짓만 하다가 방출 되었다. 그리고 현대는 더 이상 신인 계약금 3억 이상을 주지 않게 되었다.[20]

진짜 현대는 이 일로 인하여 사실상 거지가 되어버렸다.[21]

결국 2003년2004년 두 시즌을 우승했으며 돈을 어느정도 갖추었지만 역시 페이롤은 그지였고 남는 장사없이 망했다. 특히나 2003년에는 정민태가 돌아왔을 때 국내 최고 연봉을 보전했는데 웃끼게도 현대는 그럴 여유는 보였으나 지출보다 적자를 날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특히, 수원야구장은 정민태의 몸값보다도 못한 수치를 기록하게 된다. 심정수 역시 2시즌 동안 괴물같은 활약으로 몸값 7억 이상의 타자였으나 어디까지나 연봉은 보장되었지 언제까지나 보장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듬해 현대는 야구 순위 7위로 완전 박살나고 이미 현정은 회장은 이 때부터 인수 기업을 찾고 있었다.

그 다음해에 2006년은 어찌어찌 신인들과 조화롭게 하여 리그 2위를하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한화에게 1승3패로 한국시리즈 탈락을 한다, 그 헝그리한 정신이 어디까지 가는가 였는데

드.디.어 2007년 드디어 현대그룹에서 지원금 X, KBO가 위탁한다.라는 소리였다. 말그대로 구단을 파는 것이였다.
졸지에 FA 계약을 한 송지만 선수[22]만 억울했다. 2007년 최종순위 6위를 랭크하고 10월 5일 한화 이글스 전 2:0 승리하고 유종의 미를 거뒀다.[23]

그 후 현대 선수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팬덤 역시 조금했으나 그 팬들도 사라지거나 또는 현대를 인수한 히어로즈 팀에게 인수되었다.

현대는 2008년도 1월 팀 해체를 결심하였고 찾는 팀들은 STX,농협,KT[24]등등 다수의 중견 및 대기업들이 있었다. 한 때는 일본의 기업인 소포트 뱅크가 인수한다는 썰이 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루머였다.

첫번째 매각 시도는 농협중앙회가 있었다. 2007년 1월 16일, 언론은 "하이닉스의 경영 부진에 의해 농협중앙회에 야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실제 하이닉스와 농협중앙회 측은 유니콘스 주식과 부채를 134억에 인수하는것까지는 동의하였고, 보도자료로 '농촌사랑야구단(가칭)'을 이야기하고 목동구장을 홈으로 사용하기 위한 개보수 비용까지 산출하는 단계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유니콘스 프런트의 퇴직금 부담 문제와 농협중앙회 노동조합과 농민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무엇보다 주관부터인 농림부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모든 임원진의 업무정지 가능성까지 제기하자 1월 19일, 농협 측은 농민 등 여론의 반발을 이유로 인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 인수 시도는 비리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수뇌부가 정권의 비호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시도했다는 설이 계속 돌았다.

KBO는 6월까지도 계속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렸지만, 7월 협상을 주도한 정대근 농협중앙회 회장이 구속됨으로서 판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예전에 마구마구 초기 시절에 유저들의 스크린샷 게시판에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들과 농협의 로고를 섞인 유니폼을 합성시켜 만든 사진이 있었는데 다들 우스꽝스러운건지 몰라도 현대가 농협이랑 너무 잘어울린다고 말설이 나왔다 안그래도 현대와 농협 두개의 기업 둘 다 색깔이 초록/노랑으로 일치하였기에 이런 드립이 나온지도 모른다.

이 이후 미국의 한인 부동산회사인 프로스테이트 홀딩스가 KBO에 유니콘스의 인수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가 불분명한 이 기업에 대해 KBO는 실무진이 오면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대놓고 이야기했고, 이 기업은 알아서 인수 의향 타진을 철회한다

두번째 주자 STX의 경우는 현대를 인수하고 역사도 인수한다고 했으나 마스코트 및 팀 수정을 한다는 소리와 10월 말까지 인수 한다는 소리였는데,
모종의 이유로 인수 반대라는 말이 나왔고 결국 축구 경남 FC만을 생각하겠다는 방침으로 취소했다.

마지막으로KT였다. STX의 인수는 공식적으로 KBO가 협상결렬을 선언해서 좌절된 것이기에 다른 기업이 있는게 아니냐는 예측이 있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당시 KT의 이석채 회장이 야심차게 시도한, 2007년 12월부터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시도는, 해체 후 재창단으로 걸림돌이 되는 하이닉스와의 협상을 우회하는 걸로 규정되어있었다. 임시 구단 사무실이 꾸려지고, 엠블렘이나 유니폼 시안이 나오고 프런트 구조나 FA영입 명단이나 코칭스탭 명단까지 떠돌기 시작할 정도로 이 인수시도는 꽤나 심도있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KT가 요구한 년 12차례 잠실구장 사용 문제와 그것에 동의한 KBO의 합의안과 서울 연고권에 대한 보상으로 입성금을 내라면서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구단이 공동성명을 내면서 반발하고 나서면서 일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모 스포츠언론의 기자[25]가 KT가 실무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던, 가입비로 야구기금 부채분과 서울입성금을 합쳐 185억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함으로서 60억만 내면 된다는 경영진측의 설명에도 통 탐탁치 않아하던 사외이사와 노조와 주주들의 큰 반발을 샀다. 여기에 다른 구단들은 유니콘스 운영비로 써버린 야구기금을 KT가 부채로 안을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의를 더 보일것을 촉구하면서 KBO 이사회에서 KT와의 협상추진을 조건부로 통과시키자, KT는 공식적으로 인수를 포기한다.[26][27]

새 시즌은 점점 다가오는데 모든 것이 좌절되고 결국 7개구단 체제로의 전환이 점쳐지던 1월 중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에서 창단 의사를 밝힌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네이밍 마케팅을 들고 온 수상쩍은 장사꾼회사를 예전같으면 일언지하에 거부했겠지만, KBO나 유니콘스의 상황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닐 절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1월 30일, 가입금 120억을 내면서 현대 유니콘스를 대체할 새로운 8구단의 창단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히어로즈'란 구단명으로 새로 창단하면서, 공식적으로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지는 계보와 우승기록 그리고 인천야구의 정체성은 영원히 사라졌다. 현대 유니콘스란 이름은 더 이상 볼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절대 작지 않았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1996년 창단 ~ 2007년 팀 해체 12년 동안 4회 우승 / 8회 가을야구를 하였으며, 특히, 논외로 한시즌 팀 최다승인 91승[28]을 만들었다. 어찌보면 현대가 돈대라고 비아낭을 듣긴해도 2000년도 까지는 현질로 해서 우승도 했고 2001년 이 후로는 돈이 없을때 우승을 2번 씩이나 한 신기한 팀이라고 듣는다.

총평을 하자면 현대는 왜 인천에서 떠났을까? 라는 의문이였다.

원래 수원야구장에는 이 분께서 입성하는건데 서울로 떠나는 현대는 원래 잠실도 잠실이었지만 목동으로 들어가는 상태였고
하지만, 모기업이 망해버려서 갈 곳이 없어지고 제2 홈구장에 SK가 안오겠지 라는 형식으로 무려 KBO도 모르게 6년 동안 먹튀 짓 까지 한것이다.
SK역시 우리도 서울 입성 할래요 뿌잉뿌잉 하다가 퇴짜를 맞고 현대가 인천에서 떠나자마자 인천으로 간 것이다.
SK는 쌍방울 선수단을 승계 했을 때 당시 홈구장이 전주였는데 IMF때문에 구장은 황폐하가 되었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인게 고등학교 야구부가 2개교였다. 한마디로 창단을 하면 타 팀에서 백업선수로 몰락된 선수들과 드래프트 선수들로 선수를 꾸려나가야 했기에 실로 SK는 쌍방울 마냥 이렇게 할 바에 우리도 넣어주세요 했지만 KBO는 현대가 먼저 서울 간다는데요? 뜬금 개소리에 밀렸다.
그리하여 수원으로 옮길 예정으로 했으나[29] 고위층에서는 우리가 수원이라고? 아니 ,, , , 특별시에서 하고 싶다는 말을 바꿔서 마침 텅빈 그야말로 현대에게는 연고지 이전 비용 54억원 그냥 쭉 주고 무혈입성이 되는 순간이였다.

SK는 반대로 현대가 연고지 이전 했을 때 자기네들은 오직 Only 인천 SK을 외칠 것을 강조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는 팬서비스가 굿. 현대 역시 팬서비스 좋았으나 SK 창단 초기에는 다들 조금 어색한 분위기였다.

2000시즌 ~ 2002시즌 까지 하위권에서 멤돈 SK는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숙적 현대 유니콘스를 만난 것이다.[30]
그래도 준우승을 했지마 케치 프레이즈에서는 행복한 2위 ,행복한 준우승이라며 일군 SK는 마케팅에 대박을 쳤다.
다시 3년간 성적이 하위권으로 놀다가 2007년도 후임 감독 김성근을 무려 인천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의 20년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SK에게는 왕조를 만들어줬다 사상 첫 SK 창단 우승 인천 구단 9년만에 우승, 한국시리즈 6년 연속 진출
2007년 한국시리즈, 2008년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 및 2009년 한국시리즈 준우승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2011년~2012년도 준우승으로 SK는 프로야구 600만 관중에 힘을 보태줬다. 그야말로 진격의 거인이였다.

그에 반대로 현대는 그냥 돈만 있으면 되고 팬도없고 서울로 직행하렸으나 구단의 병크짓으로 애초에 서울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수원에 있거나 또는 제 2홈구장을 제 1홈구장으로 바꾸던가 했어야 했다.[31] 아님 야구의 불모지 강원도 의암야구장이 있으나 여기는 기온차이가 심함으로 왠만한 구단들도 기피하는 구장이였다. 그러나 SK가 연고지 구단이었으나 2000년도 ~ 2016년도 단 한차례도 경기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면 현재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구장으로 거론되면 거의 문학야구장이 다들 입에서 나온는데 이건 모기업 현대가 자기네들이
건설하다가 지들끼리 상의하에 따라 의견차이로 좁히지 못해서 RUN을 했다. 그냥 가출했다. 그야말로 자기집 나두고 주인있는 집에 불법점거
를 했다는 표현이다. 그만큼 모기업이 5년간 공들인 작품을 이쪽이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모기업 마저 현대전자에서 SK로 팔려갔다.

원래 현대그룹의 계획은 연고가 있었던 수원 야구장에서 대략 3~4시즌 정도를 치르면서 그 사이에 서울에 전용구장을 확보, 서울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목동 야구장의 증·개축을 시도하였으나 그 비용이 200억 이상으로 추산되자 신축으로 가닥을 잡았고 상암동에 25,000석 규모의 전용구장을 지어 이전하려 하였다.기사 그러나 이 직후 현대그룹의 분열과 정주영 명예회장의 타계 등 그룹에 악재가 줄줄이 겹쳤다.

게다가 모기업 하이닉스(구 현대전자)가 부도위기를 겪고 있다는 이유로 서울 입성 비용 54억을 가로채 써버렸다. 특히나 이 돈은 신생 인천 연고팀인 SK 와이번스가 기존 연고팀에 대한 연고침해 보상비로 건넨 비용[32]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임시연고지였던 수원명목상(왜 명목상인지는 아래 각주 참고)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이자 제2구장이었으므로, SK 와이번스의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주고 연고지는 연고지대로 침해받는 뚜껑 열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33] 이후 모기업 하이닉스는 2001년부터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기까지 단 한 푼의 지원금도 주지 않았다.[34] 심지어 현대자동차그룹에서 2001년 인수를 제안했으나 인수금액 900억드립을 쳤고, 결국 제안을 철회하고 비교적 저렴한데다가[35], 연고지 조건[36]도 맞는 해태 타이거즈 인수로 방향을 돌렸다.

결국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원금 없다'고 GG를 치게 되고, 2001년 이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범현대가의 지원금으로 근근히 버텨왔으나 2003년 구단주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이후 정몽구 회장이 그룹 사정을 이유로 지원을 끊은 2007년부터는 선수들 연봉 지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KBO 기금으로 구단을 운영하게 되었다.[37][38]

이처럼 현대 유니콘스의 서울 연고이전은 대주주 하이닉스의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기존 팬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연고이전을 추진했던 현대그룹 고위간부들은 뒷날 2005년, 구단이 어렵게 되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대거 빠져나가 버렸다(…). 이후 8개 구단 체제 유지와 현대 구단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등을 감안해 KBO2007년부터 도시연고제를 시행하였다.[39] 하지만 수원 연고로 전환해서 정착하기에도 이미 많이 늦은 상황이었다.

서울 입성 실패는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유니콘스를 괴롭혔는데, 현대는 수원구장을 잠시 임차점거[40]하는 상황이라 정식적인 연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003년 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한 팀 뎁스의 약화는 이후 현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초창기의 거지 히어로즈가 극심한 전력저하에 시달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위라운드도 아니고 무려 6시즌동안 1차지명을 못 뽑았으니....[41] 넥센 마켓 약체화의 1차적인 원인은 넥센마켓폭풍 선수매각이었지만, 사실 선수매각은 주로 투수진 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야수진에서 넥센마켓이 판매한 사례라면 이택근황재균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도 한 명은 돌아왔고 조평호, 김민우, 신현철은 2차드래프트 40인 외 지명을 통해 이적, 지석훈차화준NC 다이노스로 트레이드[42], 김남형, 전민수가 부상과 부진으로 방출되면서 팀을 떠났으나 이들은 2군에만 있었던지라 사실상 유의미한 전력이라고 보기 힘들고, 이 정도의 전력이탈은 다른 팀들도 일상다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넥센 히어로즈는 눈뜨고 못 봐줄 물 빠따를 선보였고, 결국 그 공백은 트레이드와 자체육성을 통해 간신히 메울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2016년 현재 강정호의 미국 진출 이후로 내야진에 현대 출신 선수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고, 유재신[43]....이 내야수일까?, 이숭용의 후계자인 박병호는 그의 은퇴 직전에서야 트레이드를 통해 간신히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외야진은 현대 출신은 이택근유한준이 있지만, 그 다음 서열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트레이드 출신의 서동욱이성열 정도를 제외하면 바로 박헌도까지 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이젠 박헌도 또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롯데로 이적...이종욱을 왜 내보내셨어요? 오히려 그나마 현대 출신들을 좀 찾아볼 수 있는 쪽이 싸융짱문오납 투수진[44], 한화에서도 3번째 포수에 불과한 허도환에 열광해야 했던 포수진이니 말 다했다.

과거 현대 유니콘스에서 입단해서 현재 넥센 히어로즈로 들어온 배테랑은 이와같다.

이택근[45] 대학 최고의 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수(야구선수),강귀태,허준에게 밀렸다. 후 외야로 전향하면서 타격 3할을 치면서
팀의 의 우승을 경험한 선수 아직 현대에서 우승을 경험한 타자는 유일하다.
2006년/2009년도 골든 글러브도 받고 병역 혜택도 받고 FA 자격도 2차례나 받은 선수였으나,,,
원래 구단의 자금난으로 2010년 ~ 2011시즌 2시즌동안 불모로 잡혔다가
왠 사기꾼 구단주 양반 거지볼의 협상으로 그것도 첫 번째 FA 50억으로 친정팀으로 귀환했다.
넥센 히어로즈 사상 첫 외부 영입 선수의 첫 사례이다. 두번째에서는 30억대를 받았다.

오재영은 현대 유니콘스에 있을 때 성적은 평범했다. 현대왕조 마지막 우승 일원이였다가 신인상[46]을 받았다,
그러나 2005년 2년차 징크스에 걸려 현대 말기 3년동안 부진/부상으로 개점휴가를 하면성 상무에 있다가 2009년 ~ 11년 까지 부활을 하였지만 2012년 폭망하다 2013년~2014년 까지는 그럭저럭했다. 현재는 2016년 오주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강정호 현대가 뽑은 최후의 올라운더 보루이자 넥센팬들에게는 동고동락 영원한 유격수 현재는 메이저리그 내야수[47]

현대 시절에는 그냥 신인이였고 원래는 KIA에 입단이거나 롯데에 입단 될 뻔한 선수였는데 둘 중 한팀이 선수 뽑기를 바꿨고 거기서 현대는 쾌재를 외쳤다고 초창기에는 신인일뿐 동기생이던 황재균보다는 일찍이 1군에 입단했으나 타격이 시망이여서 2군에 있다가 얼마 안가 아웃되었다. 반대로 황재균은 2006년 2군에서 최상의 성적을 거둔 후 2007년 여름에 41경기 타율 0.300을 달성했다. 당시 지석훈이 못해서 1군에 올라왔다.(강정호는 지석훈 타구에 맞고 시즌아웃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전지훈련이라고 하였다. 이미 시작 전부터 부상이 있었나 보다.)

팀 명이 히어로즈로 바뀐 이 후로는 동기 였던 황재균을 3루로 밀고 차세대 국대 유격수로 발돋음 하였다. 한국 유격수 최초로 40홈런을 날렸다.
2006년도~2010년도 까지는 그야말로 국내 대형 유망주 타자 씨가 부족했다. 지명 된 선수들 중 가장 뚜렷한 성적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이 응원하는 선수이다. 한 때는 이장석의 매몰로 100억 대형 유망주라는 꼬리표가 있었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들이 아주 거대한 타격으로 삽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정호가 이렇게 뜬 이유가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이전 까지 타격을 3할을 치고 있었는데 타 팀 분석그래프 중 다른 팀 유격수들이 줄줄히 욕먹는 와중에 강정호 혼자많이 어찌해서든 덜 까이고 있던 상태였다. 처음에는 삼성이 넥센 상대로 트레이드 한다는 뻘소리가 있었다. 김상수가 초반에만 해도 안타치더니 좀 하겠구나 싶더니 A형간염으로 타격이 2할 6푼에 발만 빠른 선수였고 LG 역시 넥센에 자주 트레이드 하는 팀으로써 LG가 못먹는 감 찔러봤는데 오지환은 2010년 당해년도 실책/삼진왕 2관왕을 하면서 DTD에 일조하였고 팬들 역시 돌아버릴 지경이였다. 그리고 안치홍은 반대로 2루수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이쪽은 그래도 멀티 플레이어로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성적이 기복 있다는 하에 있는 이야기였고 김선빈은 문제가 수비였다 뜬공을 히 드랍 더 볼을 매번 하다가 까인 케이스였다 키도 가장 최단신으로 166cm 이것이 걸림 돌이였다. 김재호는 프로 초창기에 타격이 안되는 수비하는 선수로만 기억이 날 뿐 김민성은 트레이드가 되어 현실이 되었는데 유격이 아니라 친구가 보던 3루수로 가버렸다. 그런데 2012년 강정호가 봉와직염으로 무너지자 시즌 중반에 알바하고 다녔다. 홍명찬은 아예 재기불능으로 2015년 끝으로 사라졌다.</ref> 강정호는 현재 2016년 10월 3일 아시아 내야수 최초로 20 홈런 돌파를 하였다. 해외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도 사랑 받는 선수가 되어 가고 있다.

김영민(야구선수) 역시 2006년 드래프트에서 유재신, 강정호, 장원삼, 이현승, 황재균, 신현철 과 나란히 뽑힌 선수였다.
거기서 현재 유일하게 남은 투수로써 포텐이 터지긴 전 2015년 초기 까지는 넥센 팬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었지만
2015년 시즌 말미 김세현으로 개명 후 2016년에는 넥센의 마무리 붙박이로 손승락의 롯데 이적으로 간신히 공백을 잘 메꿔주었다.

2016년 리그 세이브 단독 1위를 마크 하고 있다.

유재신 705 대첩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 여러모로 대단한 대주자 선수 아버지는 그 유명한 MVP를 탄 유두열
2016년 9월 1일에 작고하셨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보근 현대 시절에는 2군과 1군을 오가던 선수였고 2009년도 부터 성적을 내는 선수 현재는 중간계투 또는 셋업맨

임태준 2007년에 드래픽이 된 선수인데 입단 9년차 중 7년차 내내 2군에 있다. 현재는 2군에서도 1할대에 타격을 치고 있다.

현대가 드래프트 뽑은 선수들 중 최후의 남은 선수들은 이렇게 현재 5명이 끝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정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한 원동력이 된 바탕은 구단만의 특한 가족같은 분위기 형성이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고, 이는 넥센 히어로즈에서도 이어진다.
  1. 현재는 야구장은 없어지고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인천에 있던 도원야구장은 인천 SK 행복드림구장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 마산아재보다도 더 한 적도 많아서 인천팀이 거의 맨날 지면 자연스럽게 쓰레기 던지고 선수를 향해 음식물까지 던졌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3. 다만 예전같은 파괴력(...)은 이제 없지만 어찌됐든 2015년 현재까지 꾸준히 열혈 팬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마산아재들과 달리, 도원전사들은 2000년 유목민들의 야반도주를 기점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기 때문에 인지도면에서는 마산아재들이 더 널리 알려지긴 했다.
  4. 장명부임호균 정도가 그나마 삼미가 내세웠을 만한 전국구급 스타였다. 그러나 임호균은 1984년 롯데로 트레이드 됐다가 나중에 인천으로 다시 온다.
  5.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모두 모기업의 자금난이 구단 매각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태평양 돌핀스의 모기업인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업계 순위 1위의 꽤 탄탄한 대기업이었지만 선제적 구조조정 차원에서 야구단을 팔았다. 그때 야구단 매각을 주도했던 사람이 현 아모레퍼시픽 회장인 서경배.
  6. 즉, 연고지를 이전한 유목민 현대를 그대로 응원하는 인천팬, 현대에 배신감을 느껴 SK팬이 된 인천팬, 그리고 연고지 이전 충격에 야구 자체를 끊어버린 인천팬 이렇게 셋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삼청태 문서 참조.
  7. 2014년 현재까지도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 역대 최고 평균자책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8. 이 기록은 2023-08-08 10:27:35 현재까지 KBO리그 한 시즌 최다 연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시즌 최저 승률(1982년 0.188), 기별 최저 승률(1982년 후기리그 0.125)과 더불어 삼미가 세운 3대 안습 기록의 대표작.
  9.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10. 다만, 현대는 이미 구장을 신축구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후에 메이저리그 식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문학야구장이다.
  11. 어찌된건지 몰라도 구장을 부순 뒤 그 자리에는 축구장이 들어섰다.
  12. 2002년 2월 쯤에 완공이였다.
  13. 하지만, IMF의 여파로 한국 야구는 이미 관중수가 떨어질 때로 떨어졌고 당시(96년도 500만을 넘도록 많이 왔으나 IMF 영향으로 300만~200만 근처 되었다.) 거의 미국 야구나 일본 야구에만 눈에 관심을 갖는다.
  14. 하지만, 이건 반은 헛소리이고 반은 나중에 찾은 인천야구팬들 대부분 SK팬이 되었다.
  15. 원래 연고지가 강원/인천/경기도의 신인드래프트를 가질 수 있는 SK가 있는데... 현대는 SK가 아무 말 없다가 나중에 나가라 할 때 나가지도 않았다고...
  16. 정명원의 한 시즌 최다 40 세이브(1994년)를 42개로 만들어 놓는다. 2006년 2011년에는 오승환이 한 시즌 최다 및 동양 야구 최다시즌 세이브 및 타이 기록을 세운다,
  17. 다만, 감독 김재박이 기록 만들기에 일조함에 동참했다
  18. 포수 최초로 시즌 30홈런/40홈런 달성자
  19. 한시즌 최다 91승인데 2016년 두산 배어스가 9월 28일에 타이기록을 만들었다.
  20. 장원삼이 2억5천만원 으로 현대 신인 중에서 마지막으로 많이 받은 선수
  21. 후신격인 팀 레알 초창기 5시즌 2008년 ~ 2012년 부터 거지였다.
  22. 불행이라면 가장 KBO에서 불행을 기록했다. 첫 국가대표에 뽑혔지만 정작 대회에 출전 할 수가 없었다. 발목 부상 그리고 2006년 WBC에서는 주측선수들만 활약해서 그는 5타수 2안타 치고 끝났다. 그리고 홈런을 곧잘쳐도 어떤 괴물 둘 이 리그를 정복하니 송지만 입장에서 20홈런 ~ 30홈런 기대할 수 있고 장종훈의 후계자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첫 국가대표 소집당시 발목 부상으로 당해서 2001년 망하더니 2003년 또 한번 망해서 송지만은 그냥 이 분과는 달리 골든글러브를 받아본 것 빼고는 MVP 투표에도 밀리는 형식이다. 그만큼 돈을 더 벌고 싶은데 구단에서는 저 선수, 이 선수 등등 만큼하라고 하니 그 들이 잘하는거지 송지만 선수도 당시 성적도 괜찮을 때 괜찮았다.
  23. 여담으로 2007년 까지 한화 이글스에게는 현재까지 마지막 가을야구다.
  24. 실제로 창단되었다. 제 10구단 체제로 2014년 2군리그 참여 2015년 1군 참가
  25. 익히 알려진것과 달리 박동희의 (협상 공개 이전에 나왔던) '오늘의 단어' 드립은 KT의 인수작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로도 유니폼 디자인 시안 결정 등 인수작업이 계속 추진된게 그 증거.
  26. 이후 185억 투자 기사를 썼던 모 기자는 KT의 인수 포기 이후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착잡하다'를 '찹찹하다'로 잘못 쓴데다가('찹찹하다'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착잡하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이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이로 인해 이 기자는 야구계 뉴스에선 사실상 퇴출되고 만다.
  27. 결국 KT는 2014년 현대가 연고지로 삼던 수원에서 10번째 구단 kt wiz를 창단하여 2015년 정식으로 1군 무대에 데뷔했으며, 수원에서도 7년 6개월만에 프로야구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28. 2016년 9월 28일 두산 베어스가 타이 기록을 맞춤
  29. SK 창단주 최종건씨의 동상이 있는데 그야말로 야구하기에는 좋은 구장이였다. 수원은 현대 시절 제 2홈구장으로 1년에 10경기 남짓할까 했다. 특히나 삼성 선수단이 오면 만원관중이 심심찮게 있었다. 이유는 삼성전자 본래가 수원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야구팀은 정작 더운지역에 머물려 있다.
  30. 다만 흥행에서는 조금 부진한 이유가 현대는 임시점차 + 야반도주였고 SK는 창단 4년차에 불과했기 때문
  31.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인천/강원/경기를 한 묶음으로 한 KBO는 어떠한 말도 허가하지 않았다.
  32. KBO에서 책정한 SK 와이번스의 가입비는 250억원이었고, 이 중 쌍방울에 대한 선수보상비 70억을 제외한 180억 중에서 기존 연고지팀에 대한 보상비용으로 30%인 54억을 현대 유니콘스에게 지불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 이 비율이 20%였는데, 현대는 이전 대상지인 서울에 2개 팀이 있어 30%로 상향했다.
  33. 그래서 일부 SK 팬들은 이 비용을 현대 야구단이 운영자금으로 썼다고 주장했지만 자금을 가로챈 것은 모기업인 하이닉스였고, 01년 당시 구단 운영금은 정민태의 요미우리 임대료였다.
  34. 자금난에 처한 현대전자는 대주주로 운영했던 현대 농구단을 방계회사인 KCC에 매각했고, 야구단은 거들떠볼 겨를도 없었다.
  35. 해태그룹의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은, 해태를 250억원에 팔았는데 현대 유니콘스 인수비의 1/3밖에 안되었다.
  36. 기아자동차 공장이 광주에 있음
  37.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2001년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같은 리그에 2개 팀을 지원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을 빼야만 했다. 포스코 역시 같은 리그2개 팀을 운영하는데, 이쪽은 그나마 포스코 아니면 투자할 기업도 없으니 리그 내에선 아무도 군말 안 하고 있는 거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틈만 나면 한 팀가능하면 두 팀 다 없애라고 난리다.
  38. 앞에서 나왔듯 원래는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39. 광역연고제 하에서 현대 유니콘스는 남의 연고지에 더부살이하는 상황이라 SK 와이번스에게 돈을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40. 하지만 SK는 오로지 인천 SK만 외쳤지 경기강원지역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KT 위즈가 창단하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명목상 SK의 제2구장이었을 뿐 홈 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수원에서 홈경기를 하겠다며 인천 SK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SK가 수원 2구장 경기를 배정하는 순간 현대가 비켜줘야 했겠다는 사실도 있겠지만
  41. 기간은 6시즌이지만 2007 드래프트에서는 1차지명이 2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날려먹은 인원은 7명이다. 사실상 한 시즌 드래프트를 통째로 스킵해버린 꼴. 6라 이하 포기하는 걸 밥먹듯이 한 팀도 있는데 뭘
  42. 그나마도 조평호를 제외한 이적 인원들은 넥센 히어로즈가 리그 상위권 팀으로 도약한 2013년을 전후해 빠져나갔다.
  43. 잘 모르시는 팬들이 있는데 유재신은 현대에서 드래프트 된 선수이므로 2006년 신인 드래프트를 참고하세요
  44. 그 싸융짱문오중에서 김세현, 오재영이 현대출신이다. 참고로 방화범 오재영은 원래 현대에서 신인왕을 받았던 선수였다.
  45. 1999년 드래프트 지명 선수 2003년 졸업 반으로 당시 보류권을 갖고 있던 현대에 입단
  46. 현대 유니콘스 최후의 신인상
  47. 한국 야수 중에서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입단한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