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야구)

news1302870040_244756_3_m.jpg
2002년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을 때[1]
20111108072715327.jpg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2121114185396035_1.jpg
선수협 회장시절
은퇴식날 팬들의 모습[2]
"투수뿐 아니라 야수들도 분업화되고 있다. 홈런 치는 선수와 도루 하는 선수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재능에 따라 유형을 정할 수는 있지만, 장점을 극대화하고자 다른 장점을 잃는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생 본능이 살아 있는 야구도 무척 재밌다."

에릭 테임즈30-30 클럽 달성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출처
이름박재홍(朴栽弘 / Jae-hong Park)
생년월일1973년 9월 7일
출신지광주광역시 금남로 5가
혈액형A형
체격176cm, 85kg
학력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연세대
포지션중견수, 우익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2년 해태 타이거즈 1차지명[3]
1996년 현대 유니콘스 지명권 트레이드
소속팀현대 유니콘스(1996~2002)
KIA 타이거즈(2003~2004)
SK 와이번스(2005~2012)
응원가트랜스픽션 - 승리를 위하여[4]
역대 수상

1996년, 1997년, 1998년, 2000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96년 한국프로야구 홈런왕
1996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신인
1996년, 2000년 한국프로야구 타점왕
2002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보유 기록
1996년 한국프로야구 최초 한시즌 30홈런, 30도루 달성자
7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손민한박재홍(2012)서재응

1 소개

파일:/image/410/2013/01/25/20130125 1359056401.jpg 59 20130125094514.jpg

리틀쿠바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선수이자 2016년 현재 MBC 스포츠플러스 소속의 야구 해설가. 스나이더의 친척

2 선수 경력

한국 프로야구사를 대표하는 외야수 중 한명이자 역대 최고의 우타자 중 하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30-30 클럽 가입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200-200 기록 보유자[5]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최강의 호타준족으로 전설적인 대선수, 출신지는 다르지만 김경기의 뒤를 이어 인천 연고 야구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인천야구의 영원한 프랜차이저로 인정받는 선수.[6]

포지션은 외야수로, 전성기에는 중견수를 주로 봤고, 선수 인생 후반기에는 우익수로 활약했다.[7] 현역 시절 리틀 쿠바[8]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는 빵재홍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유명한 선수. 등번호는 현대 시절부터 62번. 이 번호는 본인이 해설하면서 밝히길 신인시절 남아있는 번호중에 그냥 골랐다고 한다.

2.1 데뷔 과정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장효조
OF / 상원고
이정훈
OF / 상원고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류중일
SS / 경북고
김성래
2B / 경북고
김동주
3B / 배명고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유지홍
1B / 선린상고
백인천
C / 경동고
고교야구에서 맹 활약을 펼친후 1992년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후일 아마 야구단 현대 피닉스와 입단 계약을 맺으며 해태 입단을 거부한다. 해태 입단을 거부하며 버티기로 일관하였지만 태평양 돌핀스를 현대그룹이 인수하면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한 후 최상덕이 해태로 트레이드 되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 더욱 충공깽한 점은 박진만과 키스톤을 이룰 뻔했다. 지금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 연세대시절까지는 내야수였기 때문에 나왔던 말이다. 프로에 와서 외야수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광주 야구팬에게는 배신자, 공적으로 찍히게 된다. 왠지 이 분의 스토리와 닮았다...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1996~2002)

400px
데뷔 시절1996년 30-30 클럽 달성 후 포효하는 장면.
리즈 시절을 보낸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정말이지 충격의 데뷔로, 데뷔 시즌에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한국 최초 30-30 클럽 가입으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 이종범 안습 그가 30-30 클럽에 가입하는 30번째 홈런을 친 날, KBS 9시 스포츠 뉴스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그널이 나간 후,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기 전에 박재홍의 30번째 홈런 장면부터 틀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며 박재홍이 30-30 클럽에 가입했음을 알렸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대기록이었던 것이다. 1993년에 양준혁이 거기에 필적할만한 신인최초 타격왕을 비롯한 3관왕을 차지했지만 그 해에는 이종범, 김경원 등의 신인들이 동시에 등장하여 포스가 딸려보이는 것이 사실이며, 2006년에 류현진이 데뷔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 이때 박재홍이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수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지금 보면 이상하게 여겨질 테지만,[9] 그 당시는 한국야구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벌어졌던 것. 결국 MVP는 구대성에게 돌아갔다. 물론 구대성도 MVP를 탈 만큼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55경기 출장, 18승 3패 24세이브 ERA 1.88 139이닝 183탈삼진이 바로 그것. 참고로 이거 마무리투수가 세운 기록이다(ㅁ..뭐..?) 또 박재홍이 MVP 수상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박재홍이 신인답지 않게 건방지다."는 소문이 기자들[10]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평가는 선수 생활 내내 박재홍의 발목을 잡게 된다.

공교롭게도 10년 후인 2006년에 또 다른 괴물 류현진이 등장했다. 그리고, 10년 전인 1986년에는 한국프로야구를 지배한 대표괴물인 선동열이 활약했다. 선동열의 경우 데뷔는 1985년이지만 실질적인 활약은 1986년부터다. 2016년에 괴물 신인이 등장할리가 했는데 약물복용했던 괴물이 나오기는 했다. 청정 괴물신인은 없다. 응?

여담으로 현대피닉스 입단 파문으로 인해 겨울에 운동을 개인훈련만 하고, 전지훈련도 가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이런 성적이 나왔다고. 신인 시즌 30-30은 세계 프로야구 사상 최초이며 2012년 MLB에서 마이크 트라웃이 30-30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이 트라웃도 2012년 ROY를 수상하기는 했지만 데뷔 자체는 이미 2011년에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데뷔 시즌만 놓고 보았을 때는 박재홍이 현재로선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신인 시절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박재홍이 타격시 워낙 홈플레이트 가까이에 붙어서 규정 위반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박재홍의 발이 거의 라인을 밟으면서 타격이 이루어지는데 경기중 라인이 지워지므로 바싹 달라붙어서 치기는 했다. 이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 사람이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 김성근 감독은 현대와의 경기 도중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철수시키면서까지 항의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2007년 같은 팀에서 만나게 된다.[11] KBO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리기는 했지만 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1997년에는 부상으로 한 달을 넘게 결장, 시즌 전경기보다 무려 30경기나 적은 96경기에 출장했음에도 .326에 27홈런 69타점을 기록, 부상 없이 출전했으면 32홈런을 날린 이승엽, 30홈런의 이종범과 함께 재미있는 홈런 레이스를 벌일 뻔했다. 1998년에는 두 번째 30-30 달성과 함께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팬들에게 안기며 도원야구장의 아이돌로 등극했다. 2000년에는 구단에 의해 인천에서 떠나 연고지를 임시로 수원야구장으로 옮겼는데 이때 세 번째 30-30을 달성했다. 이는 박재홍 본인에게도 마지막 커리어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선수들이 넘지 못한 유일한 기록이다.[12]

이후로도 현대의 중심 타선의 한 축을 계속 맡았지만, 2001년부터 갖가지 잔부상으로 인해 장타력이 급감해버리며 이후 은퇴할 때까지 30-30 클럽은커녕 20홈런을 치는 시즌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이후로도 3할에 두 자릿수 홈런이나 도루를 쏠쏠히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재홍이라는 이름값에는 뭔가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 어찌되었든 2002년도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올스타전 MVP를 얻고 준플레이오프까지 현대에서 활약했고, 2003년 시즌을 앞둔 스토브리그 때 정성훈+현금 10억 원으로 중심 타선을 강화하려는 김성한 감독의 요청에 의해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2002년 KIA 타선의 약점 중 하나가 확실한 4번 타자의 부재였다. 2002년을 보면 용병인 뉴선이나 펨버튼은 제몫을 하지 못했고, 포스트시즌에 4번을 친 홍세완은 무게감이 떨어졌다. 김성한 감독은 제2의 이종범으로 평가받던 3루수 이현곤을 믿고 1군 레귤러가 되기 시작했던 정성훈을 내주는 강수를 두었지만, 결과는...[13]

2.3 KIA 타이거즈 시절(2003~2004)

파일:/image/001/2004/04/21/kp1 2040421u1468.jpg

43h05001.jpg

47v06208.jpg
싫어하고 있다. 딱봐도 싫은 티가 역력하다

사실 KIA에서의 활약은 본인에게나 KIA에게나 양쪽 모두 흑역사에 가깝다.

2003년엔 3할 타율에 19홈런 18도루로 괜찮은 활약을 펼쳤으며, 이것도 햄스트링 부상으로 25경기를 날려먹으면서 기록했던 성적이었으니 풀시즌을 나왔으면 25홈런 정도에 준하는 기록이었다. 덕분에 2004년에도 어느 정도 기대를 받았으나, 2004년에는 무리하게 주루하다 햄스트링 부상이 재발하며 시즌을 날려먹었고, FA 취득시기와 관련해서 프런트와 갈등을 빚었다. 부상으로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FA 취득년차에 맞춰 출장을 고집하여 성적은 성적대로 깎아먹으면서 팀 분위기도 상당히 망쳤기에 시즌 중에 이미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당시 김성한 감독이 FA 일수를 채워주기로 약속하고, 부상도 심한 부상이 아닌 손바닥 부상 정도라서 타격은 좀 힘들지만 대주자라도 채워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유남호 대행체제로 바뀌면서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박재홍이 유남호 대행을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 않았고 9월 확대엔트리 때도 넣어주지 않았다. 이때 상황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데, 박재홍이 자신을 트레이드시켜주지 않는다고 정재공 단장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반면, 박재홍이 울면서 읍소했는데도 유남호 감독대행이 문전박대했다는 기사도 확인되며 결국 정재공 단장도 이를 거들어 팀케미에 해가 되는 선수로 낙인찍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쨌거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광주 야구팬에게 박재홍의 천하의 개쌍놈 이미지는 더욱더 확고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덤으로 커리어 로우를 썼다. 하지만 해태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KIA의 선수 대응 방식도 문제가 있었던 셈.

그리고 먹지도 않은 빵 때문에 평생 붙어다닐 별명도 얻었다. 이게 KIA 시절 선수단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미지 탓.

여담으로 2003년 초 KIA로 이적하자마자 바로 모기업의 고급차인 기아 오피러스를 할인받아서 구입한 후 타고 다녔다고 한다. SK 이적 후에도 오피러스를 몰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박재홍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KIA로 온 김건한도 KIA 합류 후 오피러스를 할인받아서 샀다고 한다.박재홍이 기아에서 한 건 오피러스 싸게 구매한거밖에 없다

2.4 SK 와이번스 시절(2004~2012)

width=100%
위에 KIA 시절 사진이랑 비교해 보면 너무 차이가 난다 아이 좋아2005년 8월 27일 인천 삼성전에서 홈스틸에 성공한 뒤
width=100%
인천으로 되돌아온 SK 와이번스 시절.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지만 왠지 김현수 닮았다. 김현수가 박재홍을 닮은게 아니고?

결국 2004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당시 SK 와이번스의 불펜 에이스였던 김건한과 1:1 트레이드되어 인천으로 돌아왔다. SK로 온 이유는 아무래도 김경기의 선례처럼 'SK가 인천 야구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SK 프런트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란 해석이 다수. SK에서는 정근우가 주전이 되기 전까지(정근우는 당해년도 입단한 신인이어서 아직 성장이 늦었고 2006년부터 각성한다)주로 1번 타자를 맡았고, 2005년에는 홈스틸도 시전했다. 2005년 시즌이 끝나고 대망의 FA신분을 얻어 자신만만하게 4년 35억을 요구하였으나, SK는 26억 5천만원을 제시, 양자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협상결렬로 FA시장에 나왔고, 장성호와 함께 대형 FA 투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현실은 참혹했다.
FA시장 개막전 머니게임을 예고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처음부터 타겟이 장성호 하나 뿐이었고,[14] 장성호가 FA계약을 마치자 수둘러 FA시장에서 철수하였으며, 04년에 트레이드 시도를 하였던 LG 트윈스는 FA시장이 열리기 바로 직전 장문석마해영을 바꾸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지상과제였던 팀 장타력 부족을 해결했다는 판단하에 박재홍 영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친정팀인 현대 유니콘스에서 박재홍을 재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송지만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경우 그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박재홍은 FA미아가 되어 원 소속팀 SK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4년 30억의 조건으로 계약을 완료하였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SK의 2년연속 우승을 쏟는데 일조를 하였다.

2009년 4월 23일 문학 롯데전에서 8회초 SK 구원투수 채병용이 던진 공에 롯데 조성환이 광대뼈를 맞아 실려나가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8회말 롯데 구원투수 김일엽의 초구가 박재홍의 무릎쪽으로 날아왔다. 야구팬들은 당시 김일엽이 박재홍에게 던진 공을 변화구로 보고 있으며, 구종은 다소 의견이 갈린다. 박재홍 본인이 직접 공중파 OBS 다큐멘터리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야구팬들의 의견을 반박하며 김일엽의 구종을 직구라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사건 직후에 기사들을 보면 김일엽의 공은 '변화구'라는 기사들이 나왔었고 실제로 경기 당시 측정된 구속도 120킬로대에 원바운드로 날아갔다. 타팀 관계자들이 왜 저러냐는 식으로 인터뷰한 기사도 나온다.

여간 저 상황 이후 박재홍이 곧바로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양팀 선수들이 벤치 클리어링을 벌였으며, 이 때 공필성 롯데 코치와 말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롯데팬들에게 가루가 될 정도로 까였으며 다음 맞대결이었던 사직구장 주중 3연전 중 5월 6일 경기에선 그가 타석에 들어서자 엑스꼴리버 장난감 칼을 든 꼴리건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엑스꼴리버 혹은 꼴리검 사건으로 이후에도 인구에 회자됐다. 빵 자르려면 빵칼을 들고 갔어야 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후 2016년 6월 8일 베이스볼 투나잇의 마리텔 버전인 '엠스플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이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난입한 꼴리건보다 오히려 사직구장 관중들의 야유가 더 신경썼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심하게 달려오면서 휘두르는 칼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애초에 진짜 칼이 아님을 눈치챘었고, 멀찍이서 던지고 달아난 꼴리건과는 다르게 정작 본인은 더 가까이 와주길 바라고 있었다고(...) 진짜 칼을 들고왔으면 무조건 배트로 제압했을거라는 말은 덤 빵아치(...)

이후에도 롯데 자이언츠 구단과는 상관없는 악플러들까지 몰려들어 같은 SK 소속의 윤길현, 채병용, 김성근 감독 등과 세트로 묶여 엄청나게 까이면서 죽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등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8월 20일 롯데와의 사직 원정경기 연장 10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대타로 들어서 롯데 팬들의 엄청난 야유를 뚫고 3루 강습 안타를 날려 결승타점을 기록하며 사직구장 전체를 침묵시켰다.

2009 시즌 내내 롯데 팬들은 사직구장에서 박재홍이 타석에 섰다 하면 야유를 퍼부었고 사직경기에서 SK가 이긴 후 구단 버스에 소주병을 던져 유리를 깨는 등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지만, 그 해 9월 SK가 삼성과의 문학 2연전을 싹쓸이하며 삼성의 13년만의 포스트시즌 탈락과 더불어 롯데의 2년 연속 가을야구를 도와주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 누가 알았을까?

이처럼 다사다난한 2009년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그에겐 순탄치 못했는데, SK는 시즌 막판 연승행진으로 1위 기아를 턱밑까지 추격했으나 너무나 아쉬운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에 그쳤고, 두산과 5차전(우취 포함 6차전)의 격전을 치른 끝에 코리안시리즈에 올랐다. 김광현 송은범 박경완이 없는, 차 포 마를 뗀 상황에서 벌떼불펜의 힘으로 버티며 코리안시리즈에서도 2승3패로 몰린 끝에 3승3패 동률, 더 나아가 7차전 6회까지 5대1로 리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시프트,작전,한박자 빠른 투수교체 등 야신의 온갖 쥐어짜내기가 시전되는 와중에 수비 실수 하나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승호 카도쿠라가 연달아 흔들리며 5대4로 쫓기는 상황이 됐고, 2루에 동점주자를 둔 상황에 다름아닌 우익수 박재홍이 김원섭의 애매한 타구를 잡으러 뛰어나오다 뒤로 흘려버리는 참사를 저지른다.
결국 3루에 묶어둘 수 있던 주자를 허망하게 들여보내며 5대5 동점을 하용하고 말았는데, 후속 정우람이 3루에 주자를 두고 추가점을 허용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수비 하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김성근은 박재홍을 수비에서 배제하고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하기 시작한다.

2009 시즌이 끝나고 또 다시 FA 자격을 얻었고, 원 소속팀과의 협상 마지막 날인 11월 12일 밤에 극적으로 계약금 4억 원, 연봉 4억 원에 SK에 잔류했다. 2010시즌에도 문학 야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하락세를 피하진 못했다. 300-300을 바라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선수였지만, 나이 탓인지 도루가 많이 줄어서 힘들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5타수 2안타 2볼넷 1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 .400, 출루율 .57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2.4.1 2011 시즌

한마디로 빵로또.

선발 출장 경기 중에 팀이 진 경기를 찾아보면,

4월 23일 롯데전 패 2타수 무안타
4월 29일 두산전 패 4타수 무안타
5월 7일 기아전 패 4타수 1홈런
5월 8일 기아전 패 3타수 무안타
5월 10일 삼성전 패 1타수 무안타
5월 14일 두산전 패 4타수 무안타
6월 4일 기아전 패 2타수 무안타
6월 5일 기아전 패 3타수 무안타
6월 9일 넥센전 패 2타수 1안타
6월 10일 두산전 패 4타수 무안타
6월 28일 한화전 패 3타수 1안타
6월 29일 한화전 패 4타수 무안타
7월 1일 넥센전 패 2타수 2안타
7월 12일 엘지전 패 3타수 무안타
7월 17일 엘지전 패 3타수 무안타
8월 11일 두산전패 3타수 무안타

47타수 5안타 타율 0.106!! 특히 두산과의 4판에서는 아예 무안타.

물론 패전 기록이지만 대타 성공률이나 기타 등등 모든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는 8월 까지 홈런도 하나 없는 조동화보다 장타율이 떨어질 정도다. 300-300은 사회인 야구 가서 할 기세

"자신이 김강민의 땜이냐" 하는 소리를 했다가 김성근 감독의 경질 직전에 1군에서 말소되었고 일부 팬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박재홍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구단 내부에 있던 발언으로 내부 징계로 끝날 수 있는 일을 기사들에게 공개시켜 일부 팬들에게 공격당하게 한 김성근 감독의 처분도 적절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SK에서는 코치 연수를 제의했으나 박재홍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FA 미아가 될 기로에 놓였으나 FA 보상선수, 2차 드래프트 등으로 외야수 자원들이 유출되자 SK에서 코치 연수 제안을 번복하여 현역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실망한 일부 팬들 사이에선 운빨 하나는 지대로다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2.4.2 2012 시즌

시즌 초를 2군에서 쭉 보냈고, 특별한 성과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이 이제 박재홍은 은퇴하고 선수협 회장에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 시즌이었다. 심지어는 팬들까지.

하지만 이만수 감독의 풀스윙 타격 지론과 궁합이 맞는 희귀한 사례가 되어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4월 26일 1군에 복귀하고서 4월 27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우익수이자 7번 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을 기록하면서 팀이 4:7로 승리하는데 나름대로의 몫을 해냈다.

4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경기에는 선발 우익수이자 5번 타자로 출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앞서던 3회말 1사 2, 3루에서 상대 선발 브라이언 고든을 상대로 쐐기를 박는 쓰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 3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8:5 승리를 견인했고, 팬들은 감격했다. 이날 홈런은 개인통산 296호.

4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2회말 안타로 출루한 후 조인성의 안타와 이어서 터진 실책으로 홈을 밟으면서 개인통산 1,000 득점(역대 7번째) 고지에 오르면서 개인통산 1,000 타점-1,000 득점의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기록의 보유자는 당시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으로 박재홍을 포함해 한국프로야구에서 단 4명 뿐[15]이었다. 박재홍은 이날 대기록을 작성했던 한편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으로 활약했지만 팀은 9:4로 패하고 말았다.

5월 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스코어 3:3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8회 최대성의 빠른 공을 통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려 팀의 5:3 승리를 견인하였고, 300홈런에 단 세 개 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5월 1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솔로홈런을 쳤다. 개인통산 298호

5월 31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솔로홈런을 기록했다. 개인통산 299호!

하지만 부상이 도졌는지 6월 들어 2군행. 홈런 한 개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리고 10월 3일 잠실 LG전에서 벤자민 주키치 상대로 드디어 300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10월 6일 문학구장에서의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8회 대타로 나와 안타를 치며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 장성호에 이어서 프로통산 5번째로 3000루타를 기록하였다. 동시에 만 39세 29일의 나이로 송지만이 가지고 있던 최고령 3000루타 타이틀(만 37세 5개월 18일)도 갈아치웠다.

하지만 시즌 후 지속적으로 프런트로부터 2년 연속으로 은퇴 후 코치연수를 종용당했고, 박재홍은 현역생활 연장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1월 26일 SK는 보류선수 명단에서 박재홍을 제외하며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리면서 선수경력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SK에서 방출당한 후에도 현역을 이어 가겠다고 밝혀 왔으나, 결국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3년 1월 25일 선수협 주관으로 은퇴식을 연다는 기사가 나왔다. 호타준족의 상징이자 황금 92 학번의 기수 중 한 명,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16]그리고 이 분에 이어 노총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2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SK 와이번스 프런트의 배려로 4월 20일 문학 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나 이 날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이 5월로 연기되었다.

3 선수협 회장빵회장으로서의 박재홍

비리문제로 인해 사실상 내쫓긴 손민한의 뒤를 이어서 2011년 12월 9일 11차 정기총회에서 275표 중 89표를 얻어 87표의 서재응에 2표 차로 새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5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야구팬들 중에는 기존의 비호감이 섞여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선수협회장?'이라는 등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지만 먹튀 손팝콘도 했는데 뭘 박재홍 자신도 내 코가 석자지만 일단 된 만큼 확실하게 해보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이호준이 바람을 잡아서 출마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로또가 문제야 로또가!

부정적인 시선이 꽤 많이 있었으나, 회장 취임 직후인 12월 15일부터 당면문제인 회계 감사에 착수하여 29일날 빠르게 결과를 내놓았다. 이후에도 전방위적으로 현재의 선수협의 비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방위로 노력하는 중. 야구팬들의 시선도 꽤 긍정적으로 바뀐 상황이다. 로또가 밀어서 로또 당첨

거기에 2012년 1월 16일자 총회에서 그동안 선수협의 자금 유용의 문제가 되었던 판공비를 2군 선수 장비지원금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하여, 선수협의 이미지 상승과 더불의 박재홍 선수 개인에게도 그동안 이기적이라는 소문을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계기가 됐다. 이는 과거 도원구장 시절부터 박재홍의 팬이었던 사람들이나 박재홍을 까는 사람 대부분이 박재홍 개인에 대한 시선을 뒤집는 계기가 된 셈.

2012년 6월 10구단 창단 문제와 관련해 선수협의 수장으로 KBO 측과 대척점에 서서 맞섰다. 10구단 창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리그 중단까지 고려하겠다며 강수를 두었으며, 야구선수들과 팬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선수협과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박재홍을 응원하였다. 일단 7월 13일, KBO 이사회에서 제10구단 관련 안건을 '긍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올스타전 보이콧은 철회했다.

여담으로 선수협 관련해서 강병규가 성실하고(?) 주체적으로 일을 딱딱 처리한다 하여 좋아한다. 물론 송회장님이나 팝콘 잘 튀기는 어느 무소속 야구 선수, 혹은 보이지 않는 그분등 은 우리의 뱅규甲에게 까이고 까인다.

2013년에는 사과문을 썼다면서 NC로 입단하려는 언플을 한 손민한의 행동에 대하여 트위터를 통해 작정한 듯 격한 반응을 보였으며, 얼마 뒤 현역 은퇴를 결정함에 따라 선수협회장 자리도 자동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식에서 손민한을 불러 그간 쌓였던 앙금을 풀면서 재조명받기도 했다. 손민한을 비판했던 건 후회하지 않지만, 꼬리표 때문에 선수로 영영 복귀하지 못할까봐 직접 불렀다고. 또한 손민한의 복귀 여부는 팬들과 후배 선수들에게 맡긴다고 했다. 그야말로 대인배. 관련기사

박재홍이 은퇴하면서 공석이 된 선수협 회장 자리는 서재응이 이어받았다.

4 은퇴식

SK 프런트와 좋지 않은 감정을 남기고 무적 상태에서 은퇴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은퇴 기자회견 후 프런트에서 시즌 개막 후 은퇴식을 치르자고 제의한 데 대해서는 동의해 SK 구단차원에서의 은퇴식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통상적으로 전 시즌에 은퇴를 선언한 선수들의 은퇴식이 개막전 다음날에 열리는 것을 고려하면, 박재홍의 은퇴식은 3월 31일 문학 LG전에서 열릴 것이 유력했다. 하지만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박재홍이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경기를 중계할 때 은퇴식을 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프런트에 요청함에 따라 은퇴식은 4월 말로 연기되었다. 결국 확정된 일정은 4월 20일 고향 연고팀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KIA 타이거즈와의 문학 홈경기 때 실시하는 것으로 공지되었다.

이 은퇴식 공지과정에서 SK 프런트는 엄청난 삽질을 했는데, 안 그래도 원정 관중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KIA전인 상황에서 이미 예매가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서 공지를 올린 것이다. 공지가 올라온 시점에서 응원지정석은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레전드 은퇴식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팬들의 은퇴식 예매를 순전히 운에 맡겨버린 초특급 병크. 이외에도 영구결번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불만까지 나오는 등 여러모로 은퇴식 기획에 있어 미숙함을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다행히도 당일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2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 프런트의 발표에 따르면 일단은 5월 중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며, 이 경우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실시된다. 여기도 악연이 있는 팀이다

결국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은퇴식이 예정되어있던 날이라 성적 외적 문제로 발길을 끊었던 SK 팬들까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문학구장을 찾았다. 이날 박재홍은 경기시작 전부터 유니폼을 입고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까지 맡았다. 이날 박재홍은 마운드가 아닌, SK 시절 주 포지션이었던 우익수 위치에서 홈으로 송구하는 시구를 선보였다.

레전드의 은퇴식이니만큼 승리를 기원했지만 쏟아지는 비 탓에 SK가 스코어 6:5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강우콜드로 경기가 끝나버렸다! 누구 은퇴식처럼 대첩이 안 된 걸 감사하게 여겨야하나[17]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결국 은퇴식은 진행되었고, 대다수의 관중라이트팬과 얼빠들은 경기장을 떠나고 남아있던 팬들진정한 빵충이들과 도원아재은 지붕이 있는 4층 포수 뒤 관중석과 응원 지정석에 모여 은퇴식을 함께 했다.[18] 그렇게 은퇴식이 진행되던 도중 이만수 감독이 그라운드에 들어서고, 은퇴식 진행자였던 문학구장 장내 아나운서 김우중 아나운서가 SK의 영원한 감독 이만수라고 소개를 하자 그렇잖아도 성적이 부진하고 논란이 많은 이만수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SK 팬들의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현장에 간 사람들 말로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야유가 흘러나왔다고 한다.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5 해설가 시절

은퇴한 후 엠스플에서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순철처럼 모두까기인형 스타일의 해설을 한다. 그리고 이숭용, 마해영, 양준혁 등에 비하면 해설가로서는 나은 평가를 받는다. 가끔씩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해설도 하며 메이저리그 지식은 부족하지만 선수 경험을 살린 해설과 조금이라도 메이저리그 지식을 습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3년 8월 2일, 3일 있었던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편파해설을 하는 바람에 삼성 팬들이 분노, 엠스플 게시판을 초토화 시킨적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례적으로 3연전이 끝나기도 전에 해설자가 교체되었는데 하필 교체된 사람이... 고만해 미친놈들아 ? 후술할 바게트 빵을 보면 알겠지만 엠스플 제작진 진짜 약빨았나 보다

경험이 쌓이면서 해설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여러 측면에서 좋아지고 있는 편. 선수 출신 해설가들 중에서는 말도 잘하고 논리적이다. 게다가 너무 흥분하지만 않으면 타고난 목소리 톤도 좋은 해설자로 꼽힌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해설을 약간이라도 병행한 덕[19]인지 야구에 대한 통계적 접근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밑의 도루 이야기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돌직구를 던지기는 하지만 해설의 정확성과 전문성에 있어서는 확실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2015 시즌에는 투수 출신이면서 자신처럼 해설을 잘하는 신입 정민철 해설위원과 시너지를 이루어 해설계의 투타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6 이야깃거리

  • KIA에서 선수로 뛰던 당시 대인관계가 썩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건 광주일고 동기인 김종국과의 관계가 생각만큼 원만하지 못했다는 것. 프로 입단 과정에서 박재홍과 김종국의 라이벌 관계도 한 원인이다. 아마 시절 평가는 김종국이 박재홍보다 우세했었다. 한국의 프로야구판이 좁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케이스. 또 자존심 강한 성격상 KIA의 고참들과도 전체적으로 융화하지 못해 팀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소문 때문인지 당시 SK 조범현 감독은 박재홍을 영입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한때 같은 팀이었던 박경완이 조범현을 설득해 영입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런 자신에 대한 편견을 풀고 싶었던 모양.
  • 야구 황금세대인 92학번의 한 사람이다. 광주일고 시절 김종국(주로 2루수)이 3번을, 자신은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고, 종종 투수로도 등판했다. 3학년이었던 1991년에는 팀을 청룡기, 황금사자기 결승전에도 올렸지만, 둘 다 경남상고와 신일고에 패해 준우승으로 그쳤다.[20]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박찬호 등 스타 투수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고교 시절 동기생들 가운데 타자로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21]
  • 하지만 고교 졸업 직후 해태의 1차 지명을 뿌리치면서 대학에 진학했고, 이후 앞에서 서술한 일련의 프로 데뷔 과정을 통해 광주의 팬들에게는 배신자로 낙인 찍히게 된다. 그래서 광주 해태전에서는 술에 만취한 한 해태 팬이 캔맥주를 던진 것이 하필이면 박재홍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지명을 거부하고 대학으로 가는 경우는 박재홍 이외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게 비난이 컸던 이유는 현대 피닉스돈지랄을 통한 우회영입 꼼수 때문에 지명권 트레이드라는 어처구니 없는 과정을 통해 입단했기 때문. 물론 해태가 현대처럼 돈을 팍팍 쓰던 구단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해태는 연고지역 출신인 박재홍에 대한 지명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최상덕 트레이드를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 들여야 했다. 참고로 마일영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다만 쌍방울이 돈이 모자라서 판 것 뿐.
  • 앞서 나왔듯이 언론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이는 박재홍이 "야구장에선 야구만"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때문에 야구장 안에서 기자의 인터뷰나 취재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해왔다.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1 박재홍 편에서 이런 모습이 생생히 드러난다.
  • 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팬들과의 의리는 상당히 신경쓰는 편. 현대에서 눈 밖에 난 이유가 연고지 이전과 관련해서 프런트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FA에서도 인천에서 300-300을 달성하고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고 팬들 역시 인천 프랜차이즈 사상 첫 우승을 안겨준 박재홍을 꽤나 좋아한다. 타팀팬들에겐 개념없다고 눈에 가시처럼 여기지만 인천의 야구팬들에게는 사랑받는 선수이다. 팬서비스도 잘 해줬다고 한다. 물론 기자들과 친한 편이 아닌 지라 신인왕+MVP 떡밥이 있던 시절에는 팬들을 귀찮아 했다는 썰이 풀리기도 했다.
  • 하지만 고향인 광주광역시로 경기하러 내려가면 얄짤없다. "지명까지 받았는데 돈 때문에 연고팀을 등졌다"는 것이 주된 반감의 원인으로[22] 해태 시절엔 박재홍을 향해 10원짜리 동전을 쫓아 다니면서 투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23], 이후에도 SK 와이번스가 광주로 원정을 가서 KIA 타이거즈와 경기를 할 경우, 경기 시작 전부터 구장에 들어와 있던 무등 아재들이 귀신같이 찾아내서 구수한 고향 사투리가 섞인 쌍욕으로 반겨줬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나이 지긋한 광주 기아팬들이 박재홍을 발견한 순간, "아따 재홍아~ 여그가 니 고향이여. 이 XXXX야!"로 말문을 열고, 박재홍이 쳐다보면 "뭘 봐! XXXX야!" 같은 구수한 욕을 시전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많이 순화된 것이라고 하니 광주팬들이 박재홍에 대한 실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저 지못미. 또한 1996년 신인 시절 당시 리그의 최고 에이스였던 조계현이 대놓고 본때를 보이겠다고 박재홍에게 벼르기도 했다.[24]
  •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2016년 10월 기준 미혼 이다. 크보계 동자공의 대가 양준혁(1969년생)이 2010년에 은퇴한 이래 가장 나이 많은 노총각 야구선수였다. MBC 스포츠플러스 '베이스볼 투나잇 야!'의 쉬어가는 코너 '변두리 야구'에서 조인성, 강동우와 함께 KBO 3대 노총각으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안습 다행히도 2012년 류택현이 플레잉 코치로 복귀함에 따라 2번째로 나이 많은 노총각 선수가 되었고, 2013년에 결국 양준혁에 이어 두 번째 노총각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MBC 스포츠플러스 '구구절절'에서 양준혁 해설위원, 정병문 캐스터[25]와 함께 악성 미분양 (노총각을 의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네이버 라디오볼 2013년 5월 13일 편에서 정철우 기자가 언급한 바로는, 박재홍 해설위원에게 "어렸을 때, 우상이었거나 정말 잘 했었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누구냐"라고 물어보자 대답이 "없어요"라고 하더니 대뜸 "나보다 야구 잘하는 선수를 못 봤다"고(…). 그리고 이어 "좌측 폴대 옆으로 살짝 빗겨나간 파울을 치고 우측 폴대 옆으로 살짝 비켜난 파울을 치고, 타석에서 살짝 물러선 후 그 다음 공을 센터 전광판을 맞추는 홈런을 때린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랜다. 그 이야기에 놀란 정철우 기자가 "그 선수가 누군가요?"라고 묻자 너무나 태연히 "저요".
  • 어렸을 때부터 야구만 열심히 했었는지 방송 중계 중에 LG 트윈스김용의의 별명이 또치라고 하자 또치가 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캐스터가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등장 인물이라고 하자 왠지 빼빼 마른 캐릭터일 거 같다[26]고 하면서 경기 중에 또치를 검색했다(…). 결국 검색 끝에 또치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나서는 별명에 수긍했다. 나이 40에 아기공룡 둘리를 처음 접해본 빵형.
  • 지금 10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1990년대 중반 프로야구 스티커 뽑기 붐이 불었을 때 이종범-마해영 다음의 시그니처 캐릭터가 박재홍이었다. 쉽게 말해서 스티커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앞으로도 그만큼 압도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신인은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근데 어째 셋 다 공통점이 있다?

6.1 빵 사건의 영원한 용의자 뚜레재홍

2007년 혹은 2008년에 있었던 일이다. 야갤에서 한 유저가 당시 복무중이던 신용운에게 싸이 쪽지를 통해서 질문을 하였고 빵 사건의 범인이 박재홍이라는 답변 쪽지를 받았다는 캡쳐를 제시하여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나 싶었으나, 싸이 쪽지의 발신자 이름 조작이 가능한것이 밝혀지고 이후 신용운이 그런 답변을 한 적이 없음을 밝힘으로서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이 일을 만든 유저는 이종범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기 위한 조작이었다고. 여담으로 사건 직후 신용운을 만난 경기에서 박재홍은 홈런(…)을 날렸다.
이후 OBS의 불타는 그라운드를 통해서 본인이 자신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지만, 이미 빵재홍, 뚜레재홍 등의 별명이 붙어버린 안습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뉘앙스였으나 워낙 입에 착착 달라붙어서 그런지 긍정적인 뉘앙스로 바뀌어서 계속 쓰였다. 본인도 그 별명을 알고 있으며 거부감도 없는듯. 해설위원으로 데뷔한 이후 대전 중계를 하러 내러갔을 때 빵집에서 빵을 사서 기자들에게 돌렸고, 롯데 경기 중계전, 김시진 감독과 만난 자리에서 한 기자가 "빵사건을 아냐?"라고 물었더니 김시진 감독이 안다고 하자 옆에 있던 박재홍 曰, "이제부터 빵사건이 뭔지 아는 사람만 빵이라고 부르라고 해야겠어요" 좋은 자기 PR이다
  • 팀의 최고참 급이 된 후로는 빵형, 선수협 회장이 된 뒤로는 빵회장님(…). 사실 빵형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타팀팬들도 박재홍을 대상으로 빵과 관련된 별명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SK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 2013년 정기 연고전 야구 경기에서 연세대측의 편파 해설을 맡은 바 있는데, 원래 해설하기로 했던 6이닝이 지나고 "빵이 없어서 배고파서 해설을 더 못하겠다"는 드립을 친 바 있다.(...)
파일:Attachment/bbangbro2.jpg
  • 아아…좋은 빵이다. 본인은 왼쪽의 브래드 피트와의 합성사진을 조동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동족상잔의 비극 오른쪽 사진은 2013년 9월 11일 군산 경기 해설 때문에 내려갔다가 유명한 빵집인 이성당의 단팥빵을 한입하는 빵해설의 모습. 동족상잔(…) 드립은 정우영 캐스터가 했다고 한다.


  • 2016년 4월 17일 NC-롯데 중계 중, '2002년에 조사한 '밥을 가장 잘 얻어먹을 것 같은 선수' 순위에서 2등(압도적인 1위는 정수근...이라는 통계가 나오자 "오히려 밥을 많이 사줄 것 같아요", "빵 많이 얻어 먹은 거 아니에요?" 라며 빵 사건 드립이 또 튀어나왔다. (...)
  • 2016년 9월 15일 넥센-kt의 경기 중 황덕균이 덕아웃에서 간식거리을 먹자 "저는 주로 을 먹었는데요, 배고프면 먹어야죠" 라며 캐스터와 시청자들을 터뜨렸다.

7 기록들

30-30을 데뷔 시즌에 기록하더니, 선수 시절동안 무려 세 번을 기록했다. 이것만으로 그의 능력은 설명이 된다. 특히 매년 162경기를 치루는 메이저리그에 비해 96,98시즌 당시 KBO는 126경기를 치뤘다. 때문에 30-30의 가치가 더욱 높다는 점을 상기하자. 경기수를 감안한다면 크보의 30-30은 160경기의 40-40에 가깝다. 심지어 1998년에는 30홈런-40도루의 기록을 수립하였다. 기록 달성 연도는 1996년, 1998년, 2000년. 2000년에는 타점왕까지 했었다. 호타준족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역사적인 선수. 아니,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강의 호타준족 타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가 이루지 못한 40-40에 도전하는 선수가 등장했다.)
참고로 2000년에는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100득점을 기록했다. 흠좀무. 한국야구 최초로 200홈런-200도루 기록을 세웠고 2009년에는 250홈런-250도루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도루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견이 많은데 도루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통산 도루 성공률이 겨우 64%에 불과하며 30-30을 기록했을 때도 대부분 60%대에 불과했다. 도루란 실패하면 주자가 없어지고 아웃카운트만 하나 늘어나는 리스크가 큰 행동. 따라서 70% 이하, 엄격하게 보면 75% 이하의 도루 성공율은 팀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는 플레이다. 삼성의 레전드인 양준혁도 같은 이유로(통산 도루 성공률 61%, 게다가 도루성공률 60%이상이면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소릴 해설당시 하여 시청자들의 어이를 상실하게 하기도..)도루 스탯에 대해선 평가가 박한 편이다.
스탯티즈 기록으로는 도루 대비 득점기여인 RAA도루가 -6,29가 나왔다. 오히려 도루한게 마이너한 꼴. 단순히 마이너스 수준이 아니라 1786위 중에서 1761위라는 처참한 RAA도루를 기록하였다. 도루 200개 이상한 선수 중에 박재홍만이 유일하게 RAA도루 기록에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즉, 200홈런-200도루는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스탯티즈RAA도루기록

원래 데뷔 시즌에 김재박 현대 감독의 시즌 구상은 박재홍을 톱타자로 기용해 김인호나 김성갑 같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존의 테이블 세터진을 보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박재홍의 도루성공률의 저조함, 그리고 결정적으로 1번 치고 장타력이 너무 좋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으로 타순을 변경하게 되었다.이종범도 도루성공률이 낮았다면 3번 계속 쳤겠지 결국 이 때문에 문동환 카드를 이용해 롯데에서 전준호를 데려와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김대익의 가능성을 믿고 쉽게 트레이드를 결정한 롯데는 그 이후 십수년간 톱타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롯데는 결국 그걸 해결하겠다고 정수근을 사오는데....

2006년까지만 해도 홈스틸까지 성공하는 등 (성공 동영상이 보고싶다면 여기로) 적극적으로 도루를 시도했으나,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에는 부상 위험을 감안하다 보니 좀처럼 박재홍에게는 도루 사인을 내지 않는지라 2007년부터는 2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다. 호타준족이지만 도루 실패율이 꽤 높은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을 국내에서 찾는다면 이영우양준혁 정도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개인 통산 최고 타율이 1997년에 96경기를 뛰며 기록한 3할2푼6리였을 정도로 기술보다는 힘으로 장타를 만들어 타점을 쓸어담는 스타일이었다. 스윙 자체가 원년 홈런왕 김봉연과 비슷했다.

획득한 우승반지는 1998, 2000(현대) 2007, 2008, 2010(이상 SK)으로 총 5개.

2013년 3월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카드 패치 때 SK가 아닌 현대 소속으로 나왔다. 팀으로 뛴 연차는 오히려 SK 시절이 8시즌으로 현대 시절 7시즌을 넘어섰지만, 전성기 때 임팩트가 임팩트다 보니 이렇게 된 듯. 그러나 애초에 연고지 문제 때문에 현대에서 쫓겨나다시피했고 인천 연고로 뛴 시즌으로 한정할 경우 12시즌이나 되니 인천야구 떡밥을 걸고 넘어지는 SK 팬 유저층에서는 불만을 제기했다. 이것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2013년 6월 프로야구 매니저의 추가 레전드 카드에서는 현대랑 SK 양쪽 모두 1장 씩 총 2장의 레전드 카드로 나왔다. 기아 레전드로는 안나오겠지 하지만 얼마안있어 마구마구에서도 레전드 기준이 완화되어 SK소속 레전드 카드도 추가되었고 2015년 10월엔 마구최고등급 카드인 블랙카드는 당당히 현대가 아닌 SK로 카드가 출시되었다

이하 선수생활 시절 통산 주요 기록.

  • 통산 300홈런으로 2013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역대 7위를 기록하였었다. 바로 위인 6위는 311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송지만, 5위는 314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한 박경완이다. 이 세 선수의 나이와 홈런 개수 차이를 감안해 보면, 은퇴할 때까지 입단동기인 송지만과 6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될 듯했는데, 2012 시즌을 끝으로 박재홍이 은퇴하면서 당시 현역이던 송지만의 사실상 승리. 덧붙여 2014년까지를 기준으로 한 현역 선수 중 박재홍, 송지만의 홈런 개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선수는 285개의 이호준, 273개의 김동주뿐으로 그 외 선수들과는 넘사벽이 존재한다. 결국 2015시즌 6월 19일 이호준이 301호 홈런을 치며 역대 8위로 밀려났지만, 김동주는 2014시즌을 끝으로 은퇴, 당분간은 뛰어넘을 선수는 없을걸로 보인다.
  • 역대 최고의 호타준족 답게 통산 도루 267개로 2013년 시즌 종료 기준 13위. 2011년에 김주찬에게 9위, 2013년에 이종욱에게 10위 자리를 역전당했지만, 2012년까지 도루와 홈런 모두 역대 10위권 내에 올라가 있던 선수는 박재홍이 유일했다. 이후 박용택정근우에게 밀려 순위가 더 내려갔고, 이용규가 평년 수준으로 성적을 기록한다면 2014년 말에는 14위까지 내려간다.
  • 통산 1,081타점으로 2013년 시즌 종료 기준 역대 5위. 그 위로는 1,389타점의 양준혁, 1,145타점의 장종훈, 2013년까지 각각 1,102타점의 이승엽과 1,097타점을 기록한 김동주 밖에 없다.
  • 통산 3,000루타로 2013년 시즌 종료 기준 역대 6위. 그 위에는 2013년을 기준으로 양준혁이 3,879루타, 이번에도 역시 데뷔 동기인 송지만이 3,186루타, 그 뒤에 장종훈(3,172), 장성호(3,069), 이승엽(3006)이 있다. 데뷔 당시의 임팩트는 박재홍>송지만이었으나 꾸준함이 강점인 송지만이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역전했다. 재미있는 점은 홈런기록과 더불어 보면 에누리 하나 없이 딱 300홈런-3000루타라는 점이다.칼같은 남자 빵형 칼빵
  • 삼진이 약간 많은 편이다. 1,147삼진으로 2013년 시즌 종료 기준 역대 4위. 2013년 기준으로 1위 박경완(1,600개)과 이번에도 역시, 현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송지만(1,451개)이 더 많은 숫자를 기록하였다. 3위는 장종훈의 1,354개.
  • 준족이었지만 통산 병살타는 151개로 굉장히 많다. 2013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리그에서도 느리기로 소문난 진갑용과 함께 역대 공동 8위. 통산 도루 20위권 내에서 이 정도로 병살타가 많았던 선수는 은퇴/현역을 불문하고 아예 없다. 물론 리드오프로 주로 출전하는 발빠른 선수와는 달리 누상에 주자를 두고 타석에 들어오는 박재홍을 무작정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 정규시즌 성적과는 별개로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3회나 우승하였는데,(1997년, 1999년, 2008년) 이는 양준혁과 함께 최다 우승기록이다. 특히 2008년 홈런레이스에선 월드홈런레이스라는 이름 하에, 국내선수끼리 예선을 한 후에 베이징 올림픽 대비를 위해 국내에서 훈련 중이던 네덜란드쿠바 선수 1명씩을 뽑아 대결을 했는데 거기서 우승을 했다. 오오 월드빵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사(死)구장타율출루율
1996현대 유니콘스126481.295142
(5위)
29
(5위)
430
(1위)
108
(1위)
75
(4위)
36
(4위)
537.559
(3위)
.369
199796331.326
(4위)
10816027
(4위)
69772266
(5위)
4.619
(3위)
.442
(3위)
1998119428.26611425230
(4위)
8486
(4위)
43
(2위)
669.544.373
1999129482.295142271249810117796.504.397
2000132489.30915131
(5위)
5
(1위)
32115
(1위)
101
(2위)
30
(3위)
647.589.388
2001127489.2841392031880757742.448.377
2002112432.27812024015675712414.438.343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사(死)구장타율출루율
2003KIA 타이거즈108392.301118155
(4위)
19807514601.510.393
200473186.2534791729297350.425.366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사(死)구장타율출루율
2005SK 와이번스109421.304128211186376
(4위)
2267
(4위)
2.487.400
2006124452.25911722118736122
(5위)
636.431.353
2007115347.2809719117545310414.487.356
2008112396.31812626219
(5위)
7266569
(3위)
3.538
(3위)
.420
(2위)
2009113315.2708512012465315532.422.370
201082191.2204270827221231.382.253
201174161.1863080112114150.255.301
201246104.2502650518160141.442.342
KBO 리그
통산 17시즌
17976097.284173231626300
(8위)
1081101226787565.492.376
  1.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 현대 유니콘스 선수사진으로도 사용중이다.
  2. 박재홍의 은퇴식 날이었던 2013년 5월 19일, 문학구장에서 찍힌 사진이다. 영원한 빵형. 막대빵선. 그럼 이 사람 은퇴할 때는 라면을 갖고와야 하나?
  3. 지명을 거부하고 연세대 입학, 졸업 후에는 1996년 실업야구 팀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결국 해태가 현금+최상덕을 받는 대가로 박재홍의 현대 유니콘스 입단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래에 후술한 것처럼 고향팀인 해태-기아를 상대로한 원정경기마다, 아재들에게 쌍욕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4. S! K! 박재홍! 호타준족 박재홍! X2 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 SK 박재홍 X4 박재홍 홈런!
  5. 더 정확히는 300홈런-267도루로 250-250이긴 한데 100단위로 끊는게 일반적이라.. 추후 200-200 기록 보유자가 새로 나오면 250-250으로 수정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럴만한 선수가 별로 없다. 가장 가까운 현역 선수는 181홈런-301도루의 박용택이고 FA 4년 계약중 2년이 남아있지만, 20홈런을 더 때려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도루는 500개 넘었던 이종범이 194홈런으로 달성치 못했고, 이종범의 일본시절이 없었다면 30-30은 몰라도 20-20은 몇번 더해서 250-250에 먼저 도달할 수 있었다는게 일반적인 중론. 351홈런을 친 양준혁이 193도루로 달성하지 못했던 대기록이다.
  6. 선수 본인은 인천 출신이 아니었지만 연고지 인천에 대한 애착심이 엄청났다. 은퇴식에서도 "인천은 제2의 고향"이라고 본인이 말할 정도. 당장 KIA로 트레이드된 이유중 하나가 인천 떠나기 싫다고 현대의 서울 연고이전을 반대하자 밉보여서 트레이드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였다. 조웅천 역시 고향은 광주광역시이고 순천상고를 졸업했으나 인천 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7. 광주일고 시절에는 투수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때 완전히 타자로 정착했다.
  8. 쿠바를 상대로 잘 쳐서 그런 게 아니라, 쿠바 선수처럼 잘 친다는 뜻에서 아마 시절에 붙은 별명. 간혹, 줄여서 "리쿠"라고 부르는 팬도 있다. 참고로 박재홍의 트위터 상 이름이 리쿠. 아이디도 littlecuba62다.
  9. 2006년 류현진이 MVP를 수상할 때, MVP를 이대호가 타야할 지 류현진이 타야할 지가 문제되었을 뿐, 류현진이 MVP와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것 자체는 논란거리가 아니었음을 떠올려 보자.
  10. 기자 본인들에게 건방지다는 얘기다.
  11. 물론 김성근 감독과 박재홍은 SK 시절 박재홍을 플래툰으로 돌리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사이가 그닥 좋지 못하다.
  12. 2015년 NC의 에릭 테임즈가 15년 만에 30-30 클럽에 가입하였지만, 이는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다. 토종 30-30은 박재홍이 마지막인 셈.
  13. 광주일고 선후배 지간이기도 한 이현곤과 정성훈은 타이거즈의 차세대 핫코너 자리를 놓고 경쟁중이었으며, KIA 입장에서는 이미 1루수 장성호, 2루수 김종국, 유격수 홍세완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현곤과 정성훈 중 둘 중 하나를 정리해서 내야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정성훈이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뒤 현대에서 잠재력이 폭발한 뒤 후에 FA 대박까지 두 차례나 이루었으며, 이현곤은 지병인 갑상선 항진증과 유리몸 기질로 인해 2007년 한 해를 제외하곤 매년 부상으로 골골대다가 2013년 NC로 이적한 뒤 거기서 은퇴했다.
  14. 그때까지만해도 이대호는 몸집이 크면서 정확도는 낮은 걸리는 슬러거에 불과했다. 2006년 이대호의 트리플크라운 작성 직전이었다.
  15.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엽, 그리고 2012년에 2천안타를 친 장성호 이렇게 2명이 이 기록을 달성하며 1000-1000 대열에 합류하여 2015년 현재, 1000-1000 기록의 보유자는 총 6명이다.
  16. 황금세대 92학번 중 2013 시즌에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송지만 단 한 명 뿐이다 송지만도 다음해에 은퇴하면서 이제 황금세대 모두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7. 그래도 정민철 은퇴경기는 한화의 승리로 끝났다.
  18. 현장 분위기는 꽤나 엄숙했고 일부 팬들은 비와 함께 눈물을 펑펑 흘렸다. 현장 후기에 따르면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으로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른다는 생각에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르던 그 순간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은퇴식 막바지에 연안부두를 틀면서부터는 나이가 꽤 드신 도원아재들마저 우는 모습을 보였다.
  19. 최근에도 간간히 메이저리그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 개최되는 MLB 올스타전 해설을 위해 신시내티로 갔다.
  20. 경남상고에는 훗날 두산에서 활약하는 차명주가 있었고, 신일고는 조성민과 강혁 등의 호화 멤버들이 버티고 있었다.
  21. 이 점에서 조성민, 임선동은 물론이고, 정민철 등에도 밀려 고교시절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서술되었던 이전 문서의 내용은 정확하지 못했다. 특히 정민철의 경우, 1992년 입단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이었던 정민태, 지연규 등에 이름값이 한참 밀려있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재홍이 고교시절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다면,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연고구단 해태가 고등학교에 졸업하자마자(1990년대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신인은 대졸 출신이 대다수였다) 1차지명을 했을리가 없다.
  22. 박재홍이 현대로 입단하게 된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23. 박재홍 데뷔 첫해 광주 원정 내려갔을때 박재홍한테만 물병을 던져대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경기 내내 헬멧쓰고 중견수 수비를 본적도 있었다.
  24. 그냥 그게 신문기사에 여과 없이 나왔다. 1996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
  25. 정병문 캐스터는 노총각을 탈출했다.
  26. 정확한 예상이었다. 또치는 실제로 빼빼 마른 캐릭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