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39대40대41대
지미 카터로널드 레이건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공식 초상화
풀네임Ronald Wilson Reagan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
재임기간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서명
185cm
종교개신교(장로교)
198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98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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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
1979
로널드 레이건
1980
레흐 바웬사
1981
컴퓨터
1982
로널드 레이건
유리 안드로포프

1983
피터 위버로스
1984

The Great Communicator(위대한 소통가)
훌륭한 대화수단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이 언제나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ㅡ 자신이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편지에서[1]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2]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

'Ronald Reagan? The actor? Then who's the vice president? Jerry Lewis? I suppose Jane Wyman is the First Lady!'

로널드 레이건? 배우? 그러면 부통령은 누구야, 제리 루이스? 그러면 영부인은 제인 와이먼이겠군!

백 투 더 퓨처 中 마티가 과거의 브라운 박사에게 1985년 미국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이라고 하자 브라운 박사가 비웃으면서 한 말

'No wonder your president has to be an actor. He's gotta look good on television.'
왜 영화배우가 대통령이 됬는지는 당연하구나. 그는 텔레비젼에서 호감으로 보일테니 말이야.

백 투 더 퓨쳐, 위 대화 이후, 마티가 카메라로 녹음된 방송을 티비로 보여주자 브라운 박사가 감탄하며 하는 말

1 개요

1980년대의 미국, 더 나아가 세계 전체 역사를 대표했던, 냉전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지도자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90년대 호황기의 기틀을 세운 대통령

일명 미국판 끝판왕 카우보이

'"당신이 공화당원 이기를" - 1981년 존 힝클리 주니어의 암살 시도 후 병원으로 실려가던 도중 응급처치사에게...

마가렛 대처와 함께 서방권 냉전기의 끝물을 끗발날리게 장식한 사람. 미국 역사상 패권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 대통령 중 한명. 미국에서는 우익 성향을 아주 강하게 드러낸 대통령 치고 인기와 팬덤이 상당한 대통령. 대처가 호감도와 인기, 평가가 49.5대 49.5 그럼 나머지 1은??, 지역과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성향간, 좌우파간 평가가 너무 극명하고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비하면 레이건에 대한 평가는 갈리긴 하면서도 호감도와 인기는 자국내 대처를 뛰어넘는다.[3][4][5] 냉전미국 현대사를 얘기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가 없는 대통령.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라 한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고 노년에는 치매에 걸린 지도자로 기억한다.

2 바이오그래피

영화배우시절 독일 국방군 육군 보병 을 연기한 모습.
사실 비트부르크에 동지들이 묻혀있다

아일랜드계 구두방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한 일리노이 시골에서 태어났다. 주로 일리노이의 작은 도시 딕슨에서 자라났다. 가족 및 지인들은 그를 "Dutch"라고 불렀다. 일리노이의 작은 대학교 유레카 대학교 졸업 후 [6] 라디오 아나운서 일을 하다가[7] 그를 눈여겨 본 어느 기획사에 의해 영화배우가 되어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레이건 본인은 비중이 없는 편이 많다. 유일한 예외라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B급 영화 《전쟁 포로》. 헌데, 이건 딱 반공물 수준이다. (...)[8] 그러나 명작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 대신 캐스팅 될 뻔도 했었다. 캐스팅되었더라면 대통령 레이건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

오히려 그 시절 레이건은 영화 배우 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정치활동에 집중했고 영화계 내 반공 운동의 선도주자를 달려 배우들의 사상을 FBI에게 일일이 보고할 정도였다. 그래서 성향도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해리 트루먼을 지지하는 등 민주당 성향이였으나 그의 아내 낸시를 만난 후 점점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띄게 되어 아이젠하워닉슨을 지지하였다. 후에 그의 정치적 변화를 그는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라고 여러번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메디케어가 1961년에 시작되자 이는 미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법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베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데 그 연설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전국의 관심을 받았다. 그 후 캘리포니아 주지사자리에 도전하면서 두가지 공약을 내세우는데, 첫번째는 '복지 혜택을 받는 백수들을 다시 일하게 만들겠다'와 두번째는 당시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사태를 청소하겠다' 였다. 레이건은 당시 두번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 정치인 팻 브라운을 꺾고 당선되었다. [9]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써 세금을 올려 재정흑자를 만들었고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반전운동을 주방위군을 불러서 맞서기도 하였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 이후 당시 인기가 별로 없던 현역 대통령 포드에게 도전하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려고 했다. 현역 대통령이 당 경선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10] 포드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는것 처럼 보였으나 공화당의 보수표를 결집시키며 남쪽과 서쪽에서 승을 거두며 보수 온건 성향을 띄는 포드를 거의 이길뻔 했으나 간만의 차이로 패배했다. 포드는 지미 카터에게 패배하게 된다. 4년후 그는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도전했으며 공화당 경선에서 조지 W. 부시를 쉽게 꺾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포드 - 카터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미국이 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지자 레이건은 인기를 잃은 지미 카터를 쉽게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 당시 만 70세로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자이자 이혼 경력이 있던 최초의 대통령.

배우였던 시절에 유일한 히트작이《폭풍우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는데, 레이건 재임시절 이 영화를 반복시청하는 것이 레이건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느 정치인은 무려 60번을 봤다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했다. 그와 이혼한 첫 번째 아내는 이혼 사유를 묻자 "《폭풍우의 청춘》은 이제 질리도록 봤으니까"라고 했다고 한다[11]. 첫 번째 부인은 《이얼링스》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오스카상까지 탔던 터라 수준차이가 나서 이혼한 게 맞다. 직접적인 원인은 여자가 동료 배우와 바람을 피웠다는 게 정설. 사실 레이건도 둘째 부인이고 역시 배우였던 낸시 레이건과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 사실 이혼 경력이 있고 속도위반을 한 사람이라 민주당 후보로 나왔으면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공화당에게 사생활로 공격받았을 거다.

청년시절 딕슨의 로웰 파크에서 인명구조대로 일한 바 있다. 6년간 총 77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도 자신이 당시 사람들을 구조한 기억은 자랑스럽게 회고했다고 한다.

군생활을 1937년 아이오와 주방위군 육군 제332기병연대 예비역 이병으로 시작, 같은 해에 예비역 육군 기병소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육군 항공대로 전속되어 1945년 12월 9일에 전역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령이다.

3 정책과 성향

대통령이 된 후 그가 펼친 정책은 레이거노믹스로 이야기되는데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들에 대한 강경한 대외 정책과[12] 감세를 통한 경제 안정화, 그리고 무시무시한 슈퍼무기 개발이 그 주요 골자이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서 강경한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물이 바로 스타워즈라고도 불리는 우주에서의 전쟁과 지금도 미국이 러시아 등을 견제하는 주요 수단인 미사일 디펜스이다. 또한 감세 정책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경제 정책의 시작이 되었고 이 시기의 미국의 경제 정책은 기업에 대한 규제 약화와 복지 등 정부 지출의 축소, 그리고 세금의 감면이 주요 내용이였다.

레이건의 이러한 성향은 리버테리안 경향이 강한 미국인들의 성격에 가장 걸맞는 대통령이였다. 또한 레이건은 배우 출신답게 위트있는 말을 매우 잘해서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 대단한 인간미로 승부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대통령 임기 이전인 1976년 뉴욕 타임스의 러셀 베이커는 그를 훌륭한 대화수단위대한 소통자라는 수식어를 붙인 바 있다.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토요일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힌 라디오 국정연설[13]을 놀랍게도 생방송으로 진행해왔으며 특히 취임 후 첫해 무려 7회에 달하는 TV 국정연설을 해왔다.아 XX TV좀 볼려니까 대통령이 깽판을 치네? 이러한 메스미디어를 적극 앞새워 자신의 장기인 위트넘치는 화술은 재선 당시 압도적 지지율로 임기를 연장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14]을 상대로 무려 49개주에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곳은 먼데일의 고향미네소타와 골수 민주당인 워싱턴 D.C. 선거인단 수로 따지면 525 대 13이다.

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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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공식석상에서 찍힌 마지막 사진.
2001년 90세 생일 당시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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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당시 모습.

이후 레이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각종 재단을 세워 후원활동을 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말년에 알츠하이머 병을 앓다가 2004년 자택에서 만 93세 4개월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두 번째로 장수했고 사망 당시에는 최장수였다. 최장수는 간발의 차이로(...) 2006년 93세 5개월로 사망한 제럴드 포드.

레이건의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 이제껏 낙태를 반대해온 공화당과 레이건 가족들이 냉큼 태아를 연구재료로 이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마이클 무어가 이것을 비꼰 바 있다[15].

2016년 3월 6일 미국의 최고령 전직 영부인이었던 낸시 레이건이 94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5 평가

5.1 군사 외교적 분야

레이건의 군비 강화 정책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침체되어가던 소련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해 결국 동구권 붕괴를 불러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2005년에 공개된 기밀문서들에 의하면, 레이건은 잘 알려진 고르바초프와의 관계 외에도 그의 전임자들인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그리고 체르넨코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냉전 전사'(Cold Warrior)가 아닌, 대화로 냉전을 풀어가려는 레이건의 모습을 재탐구하는 책들이 씌여졌다. 관심이 있다면 자세한것은 제임스 그레이엄 윌슨(James Graham Wilson)이 지은 《즉흥적인 대화의 승리》(The Triumph of Improvisation)와 제임스 맨(James Mann)이 지은 《로널드 레이건의 반란》(The Rebellion of Ronald Reagan)을 참조해보자. 해당 문서들은 National Security Archive에 온라인에 공개되어있다.

그리고 이 양반, 아이슬란드 레익캬빅에서 하마터면 소련고르바초프와 함께 모든 핵무기들을 영구폐기시킬뻔했다. [16] 다만 레이건이 우주에서 대륙탄도미사일에 레이저빔(...)쏘는 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기술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고르바쵸프도 쉽사리 핵무기를 내려놓지 못했다.[17] 당시 대화내용을 보면 레이건이 관련 기술들을 소련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고르비로서는 믿을수가 있나.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게 많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을 뚫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의 스타워즈(SDI) 계획에 들어가는 비용의 단 10분의 1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정도로 미군의 군비 지출은 낭비적인 측면이 컸다. 즉 소련은 군비 때문에 무너진게 아니라 공산주의의 모순으로 무너진 것이라는 견해다. 다만 이것 말고도 냉전사학계에서 냉전의 붕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뜨겁게 오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연구를 해보는걸 추천한다. 그리고 이런 레이건 시대의 군비 확장은 이미 지미 카터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것으로 군비 예산 증가율은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거의 비슷했다. 레이건만 지적하는 것은 옳지않다. 이렇게 치솟던 군비 지출은 후임인 조지 H.W.부시대에 이르러 정리되기 시작한다.[18]

또한 니카라과콘트라 반군 지원과 이 과정에서 이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19]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외교 정책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다라는 욕을 들었으며 그 외 성과를 거둔 정부 정책(소련과의 군축 합의라든가)도 결국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거 레이건이 받아먹은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1985년 4월에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을 맞이해 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한 것 때문에 엄청나게 까였다. 레이건은 '그들은 나치의 끄나풀이기는 했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황 판단을 못한 희생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변론하고 일정 중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라몬즈프랭크 자파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각각 'My Brain is Hanging Upside Down (Bonzo Goes to Bitburg)', 'Reagan at Bitburg'같은 노래들로 대놓고 디스당했을 정도.

5.2 경제적 분야

감세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90년대 황금기가 왔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카터가 임명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폴 볼커를 끝까지 지켜준 것도 평가받는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고금리정책을 유지하여 단기적으로 엄청난 불황을 초래했는데[20], 레이건은 온갖 공격과 위협을 받던(암살설까지 있었다) 볼커에 대한 신임을 유지하였다.

당시 연준은 금리를 21%(!!!) 까지 끌어올렸는데[21], 이로 인한 경기불황과 자산가치 저하로 많은 기업과 부동산들이 헐값에 매각되었고(당시 엄청난 버블경제를 구가하던 일본이 많이 매수했다), 당연히 레이건 정부에 대한 분노와 볼커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듯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버블을 방지하고 경제를 구조조정하였으며,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유지하며, 클린턴 대통령 시대 역대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미국의 심각한 부채 및 양극화의 후유증의 원인을 기여한 것도 레이건노믹스라는 평가이다.
레이건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분야중 하나로 안 그래도 많이 들어가는 군비 지출은 당시 감세 정책을 펼치던 미국 정부의 재정에 크나큰 악화를 불러왔다. 이른바 미국 정부의 악명높은 "쌍둥이 적자"(무역 수지와 재정 수지 동시 적자)는 그의 정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70%에서 무려 28%까지 떨어졌으나 경제적 효과는 미미하다 못해 부정적이었다. 그 덕택에 임기말 들면서 서서히 일본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얘기가 나올정도.

마지막으로, 레이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견해는 미국 내의 "welfare queen"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직역하자면 "복지 여왕"으로서, (보통 유색인종의) 여성이 일은 안하고 복지 혜택만 타간다는 비난을 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학계에 의하면 실제로는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정상적인 미국 가정", 즉 결혼하고 부부가 함께 일하는 가정을 "정상"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독신인 여성들을 탄압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복지혜택은 정말 콩알만한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그러면서 일부러 복지혜택 자체는 없애지 않았는데,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반면교사로 삼으려고 없애지 않은것. 그리고 레이건은 또한 파업하는 공항 노동자들을 한꺼번에 해고한 일로도 유명하다. 약 13000명의 항공 교통 관제사들이 파업하자 이를 불법 파업으로 간주하고 모두 해고시켜버렸는데 이를 롤 모델로 삼아 많은 기업들이 파업하거나 노조에 협조한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게 된다. 임기기간 노조 수가 1700 정도에서 1000정도로 급락한건 덤. 낙수효과 (Trickle Down Effect)를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5.3 네오콘

레이건의 당선은 공화당 내의 신보수주의자들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들은 훗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 안좋은 쪽으로 대활약을 펼친다.

6 대한민국과의 관계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시절 여러번 방한한 적도 있었고 그 당시 전두환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박정희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전두환은 취임 직후 최초의 백악관 국빈방문을 성사해 냈고, 이후로도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일본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과도 절친했던 레이건은 한미일 삼각공조를 성공적으로 이록해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의 뒤를 무조건 봐준 것은 아니라서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후일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이 사형되는 걸 막고 미국으로 망명을 가게끔 도와주었으며(이건 카터의 부탁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6월 항쟁 때에도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군 부대가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면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여 한국이 민주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전두환 측에서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공개 지지를 표명해달라고 했지만, 내정간섭을 우려해 거절했다.#

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미 국무성 통역가 통 김(Tong Kim, 한국명 김동현)씨의 증언에 따르면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 때문에 서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었던 레이건은 전두환과 만나는 4번째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30분 남겨둔 브리핑자리에서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참모들이 레이건에게 전두환을 “서울에 방문했을 때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라 설명했다. 레이건은 그때야 비로소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무의식적으로도 촌철살인을 쏟아내는 레이건

7 여담

배우 출신 답게 인간미로 승부한 정치인이다.

1980년 대선 유세 중 그의 반대자들이 야유를 부리는 통에 연설 진행을 못하자 일갈하는 장면. "Oh, Shut up."

테쿰세의 저주를 처음으로 깬 대통령인데 근데 하필 이 혜택을 본 사람이.........재임 중인 1981년 3월 30일 정신병자 존 힝클리 주니어[22]가 쏜 총에 맞았지만 심장을 빗나가서 큰 부상없이 겨우 살았다. 사실 범인의 총알은 단 한 발도 레이건을 맞추지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탄차에 튕긴 총알을 맞았다. (하지만 레이건과 달리 백악관 대변인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는 총알에 맞고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훨체어 신세로 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을 얼마 안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압권인 것은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꽤 위트있는 농담을 했다는 건데, 들것에 실려나갈 때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응급처치를 하던 간호사들에게 내 아내 낸시에게 허락은 받고 만지는 건가?라는 말을 했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들에게 당신이 제발 공화당 지지자이기를...이라는 말을 했단 거다.[23] 그리고 그 때문인지, 살았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여보, 피하는 것을 까먹었어(Honey, I forgot to duck)."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이 말은 뎀프시롤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복서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패한 후 자신의 아내에게 한 유머로 유명한데 적절하게 리바이벌한 것.

병원으로 이송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사건 발생 몇 주 후 일기에 "총을 맞는 것은 아프다"살살 맞으면 안아프다며 "나를 쏜 젊은이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으나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썼다. 그는 또 "나는 낸시가 그곳에 있는지 찾으려고 눈을 떴다. 그녀가 그곳에 없는 날을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낸시 여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드러냈다.

하지만 이렇게 담대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고령인 몸에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탓에 이 사건 이후에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한동안 산소통을 백악관에 상비할 정도였고 집무 중에 피를 토한 적도 있다.

퇴임 후인 1992년에 연설 중에 반핵주의자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그의 부통령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였다.

배우 출신답게 말을 굉장히 비유, 묘사적이면서도 맛깔나게 했다고 한다. 실제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저 어투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 실제로 기자에게 했던 명대사들을 들어보면 그가 다른 대통령들과는 많이 다름을 알수 있다. 조지 부시가 저 말투를 어설프게 배운 것은 중요치 않다

  • "불경기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24]
  •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깨워도 좋소이다. 국무회의 중이라도 얼른 나를 깨워주시오" - 레이건은 국무회의 중에 자주 졸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본인이 자학개그를 한 것.
  • "경제학자란 현실에서 발생하는 뭔가를 보고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할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 "제가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건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에 갑자기 작동이 잘 안 됐습니다. 알고 보니 KGB가 제 보청기에 도청장치를 했더라고요."
  • 언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방문을 받았는데, 투투 주교는 레이건의 면전에서 미국과 레이건의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투투 주교가 돌아간 후 누군가가 "투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투투라는 이름의 운율(TuTu)에 맞춰 "So-So(그저 그랬어요)"라고 말해서 좌중이 뒤집어졌다고. 이 일화는 레이건의 장례식날 한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 때도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람들을 웃긴 셈.(...)뼛속까지 개그맨
  •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와 TV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이 끝난 후 참모들이 "처음 토론에 나선 것 치고는 꽤 훌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덤덤하게 "무슨 소리! 나는 존 웨인과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명배우인 자신이 존 웨인 같은 대배우와 같이 촬영 할때도 안 떨었는데 카터와 맞서서 덜덜 떨 까닭이 있겠느냐는 농담. 역시 자신이 무명배우였다는 걸 강조한 자학개그이자, 동시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사실 존 웨인보다 못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돌려 깐 것이기도 하다.
  • 카터와의 TV토론 때 카터가 자신을 비판할 때 씨익 웃으면서 "There you go again(또 시작이네요)"라고 받아넘기는 행동이 유명세를 탔다. 당시의 실제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 행동은 카터에 비해 레이건을 상당히 위트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의 뛰어난 이미지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
  • 뉴햄프셔주에서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상대방 후보의 연설이 끝난후 상대방 후보를 지지하는 탤래그래프 지의 편집장인 진행자 존 브린이 음향 담당자에게 "레이건씨의 마이크를 꺼버려."라고 하자 "미스터 그린, 이 마이크를 쓰는 비용은 내가 내고 있소."라고 일갈했다. 원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말그대로 폭풍간지. 브린을 그린이라 한것 역시 일종의 조크.
  • ABC뉴스의 샘 도널드슨의 최근 지속 경기침체에 대해 연준의 실수와 국회탓을 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내가 꽤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임이라고 받아쳤다(...).[25] 원본
  • 여담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에 당선된 대통령이기도 하다. 최고령이라 그런지 임기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피부암, 대장 용종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심심찮게 수술대를 오르내리며 부통령이 몇시간 단위로 권한대행을 반복했다. 1기 임기부터 KGB의 도청장치 보청기를 끼고 다녔는데 그 보청기가 초대박을 터뜨렸다고. 그리고 알츠하이머 진단은 1994년에 받았지만 아들 로널드 레이건 주니어의 주장처럼 퇴임 이전부터 점점 인지능력 저하의 징조가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 재선에 도전 중이던 1984년 8월 11일에는 대국민 주례연설 직전 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 소련을 멸망시킬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5분 후에 우리 군의 폭격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흠좀무한 멘트를 남겼다. 사실은 방송 직전에 입을 풀기 위한 조크였고, 실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련군에서 이 내용을 인지하고 약 30분간 긴급대기 태세에 돌입했다는 후문. 원본
  • 이 위트 있는 레이건도 멕시코에서 어리버리를 탄 적이 있는데, 멕시코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레이건이 연설을 마친 후 한 멕시코 고위관리가 일어나 스페인어로 연단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에 멕시코 국민들은 박장대소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머쓱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레이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옆에 있던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가 이렇게 귀띔했다. "저 사람은 각하의 연설을 통역한 것 뿐입니다."(...) 멕시코인들의 반응이 무덤덤한 이유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인가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제법 좋은 편이지만 정치학자나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의 평가는 조금 미묘. 혹평하는 쪽에서는 부도덕한 스캔들교양 없는 면모, 지나친 군비 확장,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그에 따른 기독교 근본주의 확산 등으로 최악의 대통령으로 비판하고, 높이 평가하는 쪽에서는 냉전 종식의 주역이라는 것과 지금의 강력한 미국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옹호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2016년 현재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한국에서는 존 F. 케네디나 에이브러험 링컨을 최고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각각의 역할에 따라 인기있는 대통령이 갈리는데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선까지만 하고 권력을 의회에 이양한 조지 워싱턴, 노예 해방을 이끈 에이브러험 링컨 그리고 현대 미국의 이미지를 만든 레이건 정도다. 그 가운데 레이건이 가장 인기가 많은 상태.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을 이겼다는 것.

위에 링크된 카터와 레이건의 토론 동영상의 리플들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레이건 때처럼 세금 감면하면 경제가 활성화됨 → 빚만 늘었거든연? 그래서 뭔 꼴이 났는진 부시 보면 모름? → 레이건 때 예산 법안은 민주당이 통과시킨겁니다만?[26] 현 정부는 잘하는게 있긴함? → 그래서 중동에 무기 팔아먹고 깽판쳐놔서 미국 욕먹임? → 카터같이 무능한 대통령보단 낫습니다만? → 수꼴 티내지 말고 공부나 더 하시젼 → 님 난 이 토론 직접 갔었음 깝 ㄴㄴ

이런 식(...)어디서 많이 본거같지만 그냥 넘어가자

정말 미국의 모든 현안에 관한 활발한 키배가 벌어지고 있다. 보수 진보 대립이 확연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거의 반드시 언급되는 대통령. 이유는 다름 아닌 알츠하이머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된다.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딸이 타임지에 기고한 수기엔 그의 말년의 생활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주위 사람들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도 딸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날 아냐?'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차남 로널드 주니어는 자신의 부친이 재임기간에 알츠하이머 조짐이 보였다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그로 인해 다른 남매들에게 사실 왜곡이라고 까였다. 참고로 로널드 주니어는 아버지와 달리 이라크전을 반대하고 오바마를 지지하는 등 진보주의자이다.

배우 시절엔 역시 훈남이었다. 그러니까 배우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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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두 번째 결혼 전에 잠깐 데이트했던 배우 파이퍼 로리(Piper Laurie)가 회고록을 썼는데, 레이건은 잠자리에서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로리는 18세였고, 레이건은 39세였으며 둘은 영화에서 부녀사이(!)로 출연하다가 눈이 맞았다고. 40분이 넘게 거칠게만 힘을 쓰는 레이건에게 불평했더니 "너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이쯤했으면 오르가슴을 여러 번 느꼈어야지. 넌 병원에 가봐야해('There's something wrong with you. You should have had many orgasms by now—after all this time. You've got to see a doctor.')"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감은 넘치셨던 모양. #

뱀발로 축구선수 호날두의 이름도 이 대통령에서 유래하였다.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로널드'보단 '롸널드'에 좀 더 가깝다. 뉴스같은데서 들어보면서 한번 해보자.

별명이 레일건이라고 한다.

생전에는 장로교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미국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에서 치뤄졌다.

생전에 젤리빈 덕후로 유명[27]했으며 레이건 사후 유족들은 그의 빈소에도 젤리빈 한통을 놓아 고인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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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백 투 더 퓨처 1편에서 마티가 1950년대로 가서 브라운 박사를 만났을 때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자 "뭐? 영화배우? 부통령은 제리 루이스(코미디 배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28]

왠지 SCP 재단에선 취급이 좋질 않다. 암살 미수 사건 등 그의 정치 여정을 소재로 한 예언서 만화시리즈(SCP-095)가 SCP로 등록되어있지 않나, 심지어 자기 연설을 완전히 고인드립 수준으로 능욕한 고어 괴영상(SCP-1981)이 나오질 않나... 덤으로 세계도 한 번 멸망시킬뻔 했다.(SCP-1984)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무명 배우가 아니라 그럭저럭 유명한 배우로 성공하지만 미국 내전 통에 의문사당한다. 지못미... 근데 태평양 정부(켈리포니아 공화국)의 장관으로 등장한다. 어라?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데이터 이스트사에서 개발한 드래곤닌자라는 격투게임에서는 악의 닌자단에 의해 납치당한 레이건 대통령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막상 구출된 레이건 대통령은 포상이랍시고 준게 겨우 햄버거 1개였다.

스티븐 킹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29] 이후 망해가는 미국에서 험프리 다음으로 취임한다. 취임시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이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지고 이란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바람에[30] 인질 전원이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 다만 호메이니 치하 이란은 사형은 자주 해도 참수는 안했으니 실제로 인질들이 처형됐다면 참수보단 자기들 전매특허인 기중기 교수형이나 총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버틀러-대통령의 집사라는 영화에서 알란 릭맨이 레이건으로 나오는데 상당히 인간적인 미를 선보인다. 주인공 세실 게인즈 부부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하였고 백악관 내 흑인과 백인 직원의 임금, 승진 기회를 평등하게 했다. 세실이 은퇴하자 역대 대통령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세실이 은퇴 후 주미 남아공 대사관에서의 항의 시위[31]에 참가한 것을 보면 그가 남아공의 경제제재를 반대한 것이 주인공의 신념을 흔든 계기 중 하나로 보인다. 비록 미국 내의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작중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유일한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 이래 세실이 갖고 있던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영화판과 소설판 모두 등장하는데 영화판에선 백악관 정원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마구 욕을 하다가 그 말을 자신에게 하는 말로 오해한 고르바초프가 레이건놈이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면 무너뜨려야지! 라고 베를린 장변을 무너뜨려 버린다.(...)

테디 루스벨트 전기로 유명한 에드 모리스의 레이건 전기가 꽤 유명하다. 가상의 사람들을 통한 레이건의 이미지 구현으로 논란이 심했는데 의외로 객관적이라는게 중평.

마블코믹스 데드풀에서 악령으로 부활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한명으로 나오며, 데드풀이 배를 가르자 젤리빈이 쏟아져 나왔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노블 왓치맨에도 역시 레이건이 배우 출신 대통령이였던 것을 개그소재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로어셰크의 메모장이 배달되기 전, 삼류 일간지 신문사 편집자들이 기사에 넣을 소재가 떨어졌다고 고민하다 한 사람이 로널드 레이건이 대선 후보로 나올거라는 얘기를 하자 하는 말, "뭐? 말도 안돼, 누가 카우보이를 백악관에 놓길 원한단 말이야?"

  1. 레이건이 왜 위대한 소통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2. 1987년 6월, 레이건이 베를린에서 한 유명한 연설. 문은 브란덴부르크 문, 장벽은 베를린 장벽을 의미한다. 이 말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물론 동유럽 공산권의 '철의 장막' 붕괴를 상징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3. 사실 이건 당연할수밖에 없는게 영국은 상원 선거를 따로 치르지 않고, 하원의 권한이 위낙에 막강하다보니 마가렛 대처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않고 업무를 수행했던데 반해 당시 레이건 정권 당시에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했긴했지만(86년 중간선거에선 뒤집혀짐) 하원은 그래도 민주당이 우세였기에 정책수행에 있어서 일정수준의 견제를 받아서 마가렛 대처보다 온건할수밖에 없긴 했다. 물론 스타일의 차이도 크긴 했지만...
  4. 게다가 더욱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같은 시기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로써 비슷한 정치적 노선으로 강한 협력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다뤄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나... 대처에게는 집권당의 노선과 맞지 않는다고 지방자치단체들을 박살내고 정적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법을 개정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공연하게 두둔하고 남아공에 대한 UN의 경제제에 상임이사국으로써 반대표를 던지고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였으며 피노체트가 지배하는 칠레에 무기를 판매하고 실각 후 체포된 피노체트의 석방을 강경하게 주장한데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영장도 필요 없이 IRA 소속이라는 추측만으로 바로 사살 할 수 있는 shoot-to-kill 정책을 시행하는 등 '선거로 당선된 것 뿐이지, 악명높은 독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악평까지 듣는 심각한 약점들이 다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레이건 역시 이란-콘트라 사건의 사례 등에서 외교정책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었다거나, 비트부르크 묘지 참배 등으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비판받는 면이 있기는 하나, 김대중의 사형을 막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후원했다거나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여 군사력 투입을 막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측면도 있다. 즉, 도덕적 영역에서는 애초에 비교하기도 어려운 것.
  5. 그리고 1980년대 미국 경제가 당시 영국 경제에 비해 분위기가 좋았던 탓도 크다. 일단 미국도 레이거노믹스 초기에는 실업률이 10%를 넘어갔으나, 영국과 달리 1983년을 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영국은 경제는 계속 성장하였으나 1987년까지 실업률은 두 자릿수였다.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낙관적인 것은 이런 당시의 경제 붐과 무관하지 않다.
  6. 경제학 전공이였는데 학점 평균이 C였다고 한다 (...)
  7. Timeline191 시리즈에 잠시 언급이 나온다
  8.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과거로 간 마티 맥플라이가 브라운 박사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미래 세계의 대통령이 레이건이라고 말해자 박사가 '그 듣보잡 3류 영화배우가 대통령이 됐다고? 구라 좀 작작 쳐라'라고 말했을 정도. 듣보잡 배우 이름도 외워주는 상냥한 박사님.
  9. 팻 브라운의 아들인 제리 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의 두번의 주지사 임기가 끝난뒤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임했다. 그 후 다른 일을 하다가 2010년대에 다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어 2015년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있다
  10. 현역 대통령에게 경선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다
  11. 무명 배우 나부랭이와는 더 이상 못살겠다는 유머.
  12. 그의 강경한 대외정책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연설문#
  13.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즈벨트의 노변정담식 라디오 연설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14. 카터의 부통령 출신. 먼데일은 최초의 여성부통령 후보까지 앞세웠으나, 여러모로 불리했다. 이 압도적인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15. 무어 왈, "태아고 나발이고가 문제냐? 기퍼(레이건의 별명)가 죽게 생겼는데!"
  16. 기록에 따르면 대화가 대략 이렇게 오갔다. "핵무기 50% 감축 어때요?" "아니 그거 그냥 100% 해버리죠?" "오 좋아요!"
  17. 미국이 그런 기술을 갖게된다면 소련의 핵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은 한 쪽이 선공을 하면 반대쪽이 반격을 하며 상호파괴가 확신된다는 점에서 전쟁억제력이 있는데, 만약 한쪽이 반격을 못하게 된다면? 전쟁억제력은 없어지는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우리가 오늘날 은하 반대편으로 워프 포탈을 만들 가능성만큼 그 기술에 닿지 못하였다. 고르바쵸프는 물론 이 사실을 몰랐다.
  18. 특히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된 급속전략타격자산들을 중심으로 육군이 많이 잘려나갔다. 해군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았던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간 것 빼고는 타격이 없었다.
  19. 당시 이란은 대사관 납치 사건을 벌였었던 경력이 있는 적성 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하자. 레이건은 이 사건으로 의회에서 탄핵까지 당할 뻔했다.
  20. 물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질적인 불경기와 카터 시기 일어난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다. 볼커가 정말로 배짱이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은,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엄청난 고물가+경기침체의 상황에서 더욱 더 심한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물가안정에 올인하였고, 결국 인플레를 잡았다는 데 있다.
  21. 참고로 이때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등 라틴 아메리카국가들도 엄청 피봤다. 안 그래도 원자재값이 한창 떨어지는 바람에 재정에 여유가 없어진 상태에서 고금리 버프까지 겹치니 도저히 버틸수가 없어지게 된 것. 거기에다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책까지 펼쳐지면서 결국 21세기들어 중남미정권이 대거 좌파로 넘어가계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파산자체야 당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대다수가 기초체력이 나빠서 나자빠진점도 있지만 그 이후의 처방과정이...
  22. 과대망상증 환자였는데 대통령을 저격하면 자신이 동경한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자기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3. 드립에 수석 의사가 "지금 이 순간은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받아쳐줬다고 한다.
  24. 80년 선거전 당시로, 카터의 경우 재선 도전이었다. 그리고 결국 카터는 실직했다. 다만 이 말은 레이건의 오리지널은 아니고 원래는 33대 대통령인 트루먼이 한 말이다. 그 뒤에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한 것.
  25. 자기가 민주당원이었다는 사실만이 잘못이라는 뜻
  26. 이란 콘트라 사건 등의 악재까지 겹쳤지만, 원래 1930년대 이래 민주당은 거의 항상 하원 다수당이었다. (해리 트루먼 시대 일부 빼고) 대표적인 인물이 팁 오닐(Tip O'Neill, 본명은 토머스 오닐 주니어) 하원 의장으로 1977년 카터 정권교체기부터 1987년 까지 의장직을 수행했다. 임기말인 1987년부터는 상원도 민주당이 장악했다. (Robert Byrd 상원 민주당 대표)
  27. 백악관 회의 때 각료들에게 돌리거나 외국 정상들에게도 백악관 로고가 붙은 젤리빈을 선물할 정도였다.
  28. 당시 영화 제작진들은 '괜히 이 장면을 넣었다가 큰 일 나는 거 아닌가..'하고 벌벌 떨었지만, 정작 레이건 대통령은 이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계속 돌려봤을 정도로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 대인배
  29. 그러니까 리 하비 오즈월드댈러스에서 저격했던 사건을 주인공이 타임슬립해서 막았던 사건.
  30. 다만 이때의 레이건을 변명하자면 군 병력 증원없이 돈만 퍼부었던 베트남이 케네디 2기 정권 시절에 망했고(...) 하노이에 핵을 투하한 터라 핵을 동원한 위협은 소용이 없어서 군사개입을 했었다.
  31. 흑인 인권 운동을 벌이던 아들이 주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