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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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改革

1 개요

1894년 7월 초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추진된 조선의 개혁운동. 정치, 경제, 군사, 법률, 사회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넓은 범위의 개혁이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불리기도 하며 총 3차례에 걸쳐 개혁이 이뤄진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추진된 제 3차 개혁은 을미개혁으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일단 '갑오년'은 아니니까. 삼국간섭을 전후하여 일어났으니 참고바란다.

일본측 학설에서는 갑오개혁을 한국 근대의 시작으로 비정한다. 때문에 일본 학설로 공부 배운 사람들은 근대의 시작 갑오경장이 나온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는 근대의 시작으로 갑오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듯.

1.1 명칭

중년층 이상은 '갑오경장'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데, 경장(更張)은 '고쳐서 긴장시킴'이라는 뜻이다. '거문고 소리가 조화롭지 못하면 반드시 그 줄을 풀어서 다시 조여야 한다'는 한서의 동중서전에서 유래한 말로 이것은 고사성어 '해현경장(解弦更張)'의 유래가 된다. 거문고의 줄을 고르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비유한 단어이다. 김홍집은 "대저 경장이란 바로 정치의 병폐에 대해 이를 변통하여 그 마땅함에 맞게 하는 것으로 곧 당시에 취해야 할 조치라는 뜻이다"라고 풀이한 바 있다. 쉽게 말하자면 '옛날 정책에 파묻혀 있으면 게을러지니 고쳐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뜻.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경장을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함'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경장은 주로 봉건체제의 틀 내에서의 보강을 의미하는 전통적 용어로 간주되는 편이다. 완전히 갈아엎는 '개혁'에 비해 전반적인 틀은 바꾸지 않는다고 보면 되겠다. 쉽게 말해 경장은 패치, 개혁은 신버전 출시다.

2 배경

  • 청일전쟁 발발직전인 1894년 7월 1일(음력),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내정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면서 이를 시행할 것을 요구협박했다. 허나 조선에서는 이미 개혁을 요구한 동학농민운동 때문에 경황이 없었기에, 이를 주권 침탈로 받아들이고 교정청을 두어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발표하여 사실상 거부했다.
  • 그러자 일본군은 7월 23일 새벽에 기습을 감행하여 전투 끝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서울내의 조선군 병영들[1]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무기, 탄약을 모두 빼앗아 사실상 수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대원군을 불러들여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 7월 25일, 군국기무처를 설치, 김홍집이 총재관을 겸임하였으며 위원 17인과 서기 2인을 두었다. 그해 12월까지 군국기무처에서 200여개의 각종 안건들이 통과되었다. 이 군국기무처는 얼굴마담인 대원군은 물론 고종도 간섭할 수 없는 초정부적 기구였으므로 사실상 독재나 다름없었다.
  • 이후 의정부를 개편한 내각을 설치하고 개혁작업을 계속 추진하였으나, 1895년 5월에 박영효가 음모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망명하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이 일어나 일본의 영향력도 일시 축소되면서 중단되었다.

3 내용

3.1 정치/행정

  • 정말로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갑오개혁을 관통하는 것은 얼굴마담으로 김홍집이 있었다는 것 밖에 없다. 친일은 기본이고, 가끔 친러도 섞인다. 내각의 구성이 최소 4번 정도 변하고, 이 때문에 성향이 휙휙 바뀌는 편이다. 갑오개혁이 한 것은 많아도 실질적으로 영향이 약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총리대신과 이를 보좌할 중추원, 기록국, 전고국, 회계국, 관보국을 두었으며 내각 밑에는 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농상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의 8아문을 두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서 500년 동안 이어지던 6조 제도가 보다 근대적인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 관세 징수를 담당할 관세사와 내국세 징수를 담당할 징세사의 설치. 이로서 일방 행정과 세무 업무가 분리되었다.
  •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중단. 이를 공식화하는 조치로 임금의 칭호를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라는 의미가 강했던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채택하였다. 또한 전하를 폐하로, 왕비를 왕후로, 왕세자를 왕태자, 왕세자빈을 왕태자비로 고치는 등 왕실 용어를 황제국 체제에 가깝게 격상시켰다.[2][3]
  • 궁내부 설치.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위한 목적이었다.
  • 홍범 14조의 반포
이것 때문에 '자주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이걸 최대한 긍정해준다고 해도, 1차 김홍집 내각에 한정할 뿐이고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본의 간섭 하에 이루어졌으므로 극히 제한적으로만 옳다.
  • 조선의 전통적인 행정구역8도23부로 개편하고, 그 아래의 부·목·군·현을 모두 군으로 일원화하였다. 그러나 23부제는 이듬해인 1896년에 폐지되고 다시 도제로 돌아갔다. 대신 8도 중 경기, 강원, 황해를 제외한 나머지 5도(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를 각각 남북도로 분할하여, 8도가 아닌 13도로 부활하였다.

3.2 군사

  • 기존 중앙군제의 철폐.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은 물론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무예별감과 금군, 장교양성을 담당했던 연무공원 등도 철폐되었다.
  • 기존 지방군제의 철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은 물론 감사, 유수, 부사, 군수 등 각 지방관이 책임진 병영, 요충지의 진보(鎭保), 3도 수군통제영, 통신기구인 봉수대까지 전부 철폐되었다.
  • 육군장관직제의 실시.
정-부-참으로 이루어진 근대적인 계급제도가 도입되었으며 군인의 품계가 기존보다 훨씬 향상되었다.
  • 육군복장규칙의 실시.
정장(正裝), 예장(禮裝), 군장(軍裝), 상장(常裝)의 4가지로 구분되는 근대식 군인복제가 시행되었다.
  • 훈련대, 신설대,[4] 사관양성소의 설치.

3.3 경제

  •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실시.
기존에 발행된 화폐(상평통보, 당오전 등)의 유통도 허용하였다.

3.4 법률

  • 연좌제의 폐지.
  • 고문 및 형구의 금지.
  • 경무청 설치 및 각 지방의 경무관 파견으로 기존의 군대, 행정과는 분리된 새로운 경찰제도 실시.
  • 재판소 제도 시행.
한성재판소, 고등재판소, 순회재판소, 지방재판소, 개항장 재판소 설치.
  • 법관양성소의 설치.
근대적인 법률제도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인원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

3.5 사회

  • 문벌 및 반상 차별의 철폐. → 신분제 폐지
  • 조혼의 금지
  • 노비제 철폐와 인신매매를 금지.
  • 과부의 재가를 자유재량에 맡김. (사실상의 허용)
  • 문서로 된 증거가 없는 사채 독촉의 금지.
당시 서양인들의 견문록에 의하면 관리나 토호가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아무 근거도 없는 빚독촉을 하며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삼정의 문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보다
교원 양성을 위한 한성사범학교의 설립. 외국어학교의 설립

3.6 기타

  • 독자적인 연호인 개국기원 연호의 사용.
  • 국문(한글)이 공문서에 사용되기 시작. 그리고 이두의 사용이 폐지되었다.

4 의의

조선시대 500년동안 이어진 각종 제도와 관습을 시대변화에 따라 바꾸고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하였으며 노비제도가 없어지는 등 신분제도도 사실상 철폐되었다. 다만 실제 인식은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젊은 노비들은 해방된 뒤 도시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대부분의 노비들은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던 집에서 신분만 머슴으로 바뀐 채로 약간의 봉급을 받아가며 이전과 똑같은 일을 했으며 대우 역시 노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원래 시골 등지에서는 어지간히 초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은 법보다는 유력자가 더 힘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고.

당시 양반들에게 최고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조치는 다름아닌 과거제의 폐지였다. 그래서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젊은 유생들이나 그 부모를 멘붕에 빠뜨렸다.[5] 당시 막 성인이 되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과거제 폐지로 멘붕을 일으킨 자신과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상세히 적어두고 있는데, 이승만의 아버지는 과거제의 폐지 소식을 듣자 손바닥으로 방바닥과 책상을 치고 자기 무릎까지 치면서 일본과 개화파를 욕했다고 하며, 이승만은 자서전에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 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 고 쓰기도 했다.이런 우라질!!!!! 이 때문인지 유인석이라든가 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꽤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인식할만한 변화는, 조선 8도가 조선 13도로 변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광역지방단체 기준과 명칭은 이 시기의 도에 광역시[6]와 특별시를 더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5 한계

처음부터 일본의 무력과 간섭을 배경으로 시작된데다가 일본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진 측면이 많다. 또한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것을 바꾼 나머지 시행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으며 후속작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을 정말 정말 싫어했던[7]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갑오개혁 조치들을 또 한번 무효화하면서[8] 끝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홍집, 정병하 등 오히려 친일성향이 약한 대신들은 죽고[9], 강한 인물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튀어서 이후 친일파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1. 신식군대인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 경리청 등.
  2. 따라서 갑오개혁부터 대한제국 선포까지 고종의 정식 칭호는 조선국 대군주 폐하였다. 국내 사극에서 자주 틀리는 부분.
  3. 얼핏 듣기에는 청나라의 사대에서 벗어났으니 독립한 걸로 보이기 쉽지만, 이 갑오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면 사대하는 대상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4. 공병대, 치중대, 마병대로 구성되었으며 철폐된 기존 중앙군의 병사들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5. 사법시험을 준비하거나 행정고시 1차 준비중인데 갑자기 사법시험이 로스쿨로 바뀌거나 행시 1차 시험과목이 객관식 전공과목에서 PSAT로 뒤바뀌고 행시, 입시에서 유예제도가 소멸되어 날벼락을 맞은 고시생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더욱이 과거시험 준비는 사법시험, 행정고시, 입법고시 준비생 보다 99.99%는 더 일찍 시작 하고 더 오랜 기간 준비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멘붕이 왔을 것이다...
  6. 과거에 직할시로 불렸다.
  7. 고종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신경질적이었다. 좋게 보자면 정세판단이 뛰어난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생리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 고종은 할 때 자기가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이 한 것은 다 없애려고 했다.
  8. 고종이 갑오개혁을 무효화하려고 했던 것은 이때만이 아니다.
  9. 다만 정병하의 경우는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의 침입을 숨겼다는 의혹을 받는다. 일본의 영향이 가장 컸던 을미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고종의 머리를 직접 잘랐다는 것도 의심요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