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 당시 사진과 현재 경영대 앞에 조성된 건대항쟁 기림상
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의 2000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하던 중 경찰과 4일 동안 대치하다 단체 연행된 사건. 당시 이들은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 화형식'을 가지고 '반공이데올로기를 부수자'는 구호를 외쳤다. 보도지침에 의한 강력한 언론통제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도권 언론사들은 이들을 '좌경용공분자', '빨갱이'로 보도했다. 31일에 '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력을 투입하여 5개 건물에서 분산 농성중이던 학생 1,520여 명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290명(!)을 구속했다. 당시 단일사건 구속자수로는 당시 세계최고의 기록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86년에는 상당수의 학생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교도소로 들어오면서 교도소 역시 일선 교도관들과 경비교도대를 동원해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특히 11월 6일에 법무부는 전국의 교도소장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수감중인 학생들에 대해 순화교육을 시키도록 하여 탄압을 부추겼다.
사실 애학투련 결성식 자체는 군부독재정권시절 일상적이었던 민주화 시위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경찰에 새어나갔고, 이 기회로 학생운동을 일망 타진하기 위해 경찰이 의도적으로 농성을 유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쉽게 말해, 애초부터 해산이 목적이 아니라 전원 연행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건물안에 몰아넣었고, 대치상황을 조성함으로서 언론에 '그림'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당시 경찰병력에 쫗긴 학생들은 그 넒은 건국대학교 캠퍼스안에서도 학생회관, 교양학관, 도서관, 본관, 사회과학관 5개 건물에 흩어져서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현장사진 경찰에선 도시 한복판에 해방구를 건설하기 위한 좌경용공분자들의 조직적인 봉기 식으로 발표했지만, 정작 이들은 쌀 한톨, 라면 한봉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권은 일정한 전술에 의해 움직이고, 농성을 하려면 지휘부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식량이나 물같은 것을 어느정도 준비하는게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 농성에 참가한 그 누구도 이러한 준비를 한 바가 없었다. 결국 학생들끼리 가진 돈을 털어서 1층 매점 문을 뜯고 돈을 적당히 책상위에 올려놓은 뒤 과자를 꺼내서 먹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이런 농성은 국내외의 관심이 불러 일으킬만한 장소를 선택해서 사전에 감옥행을 각오한[1] 소수의 인원이 기습적으로 점거해서 짦으면 몇십분 길어야 2~3일 버티는게 당시 운동권의 전술이었다. 1984년 민정당사 점거 농성[2],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3] 등이 대표적으로 수십명 규모의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건물에 진입해서, 내외신기자들이 모이면 플래카드 내걸고 구호외치다가 경찰에 끌려나와서[4] 감옥행. 현실적으로 수천명 규모의 그것도 해방구라고 칭할 정도의 장기 농성을 준비할 역량도 의지도 없던 시절이다.[5] 때문에 도시해방구 운운하면서 사전에 조직된 어쩌구한 경찰 발표는 헛소리다.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출연한 애학투련 간부는 '찬바람 부는 10월달에 학생 수천명 모아놓고, 농성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우린 덫에 걸린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 기간중인 10월 30일에 정부가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금강산댐을 지어서 터뜨려서 200억톤의 수공을 하려 한다는 개구라발표를 하고 당시 방송사에서 금강산댐 수공관련 특집방송까지 했었다. 당시 집권하던 29만원 대통령과 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이 이것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을 막고, 정권유지를 하기 위해서 이것을 주도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은 수공위협을 하는데 북한편을 들고 반정부 데모하는 학생을 모조리 잡아들여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6]
인천 5.3 운동은 그 자체로 소요에 가까운 가두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역공을 당할 소지가 있었지만, 건대항쟁은 그야말로 경찰과 공안당국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학생운동가들이 고스란히 딸려들어가서 억울해진 케이스가 되었다. 1986년에 있었던 운동권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2016년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제1학생회관 1∼2층에서 '건대항쟁 30주년 기념 사진전'을 통해 미공개 사진을 공개한다.#- ↑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비장한 각오로 구속결의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을 써서 지도부에 맡기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결의서를 가지고 '##의 뒤를 잇자' 식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조직하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 ↑ 한시간만에 모두 체포됐다.
- ↑ 이때는 미국 문화원이란 특수성 때문에 경찰에서 강제진압을 망설였고, 결국 72시간동안 농성하다가 맞은편 건물의 롯데백화점에서 남북적십자 회담으로 해산되었다. 왜냐하면 북한 관계자가 농성장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지지발언 하는 날엔 모두 망했어요가 되기 때문에. 그 때 대북 적대의식이 높은 걸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
- ↑ 투쟁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끌려나오는 순간까지도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한테 두들겨 맞곤...했다.
- ↑ 사실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에서 천명 단위의 장기농성을 사전에 준비한 적은 한번도 없다. 경찰 진압에 쫗겨서 강제농성행이 된 경우는 많지만. 대표적인게 1996년 연세대 사태이다.
- ↑ 종이로 플래카드를 만들고 주변 주민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해 봤자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고, 여러모로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