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5.3 운동

400px
5월 3일 당시 주안역 앞 시민광장 모습. 다양한 구호들이 눈에 띈다.
출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1 개요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앞에서부터 벌어진 민주화운동으로 6월 항쟁의 불씨가 되는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2 배경

원래 5월 3일 주안역 앞 광장에서는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인천시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개헌추진 결성대회는 3월 1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7개의 주요 도시[1]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이 결성대회들은 광주 대회를 제외하고는 경찰과의 큰 충돌 없이 조용히 해산되는 분위기였는데, 4월 28일 신림 4거리에서 서울대생들의 전방입소반대시위에서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을 하자 놀란 김대중김영삼이 다음 날 민국련[2] 회의에서 "소수 학생들의 반미, 용공, 과격 시위를 반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뒤이어 4월 30일 전두환이 개헌논의를 수용하는 대신 신한민주당이 가두서명시위[3]를 그만둔다고 합의하고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도 "소수이겠지만 좌익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하며 민주화운동에 이런 사람들이 끼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하는 등 여야의 보수대타협의 기미를 보이자 5월 1일 운동권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4]에서 보수대야합이라며 신민당을 강력히 비난하고 민국련에서 탈퇴했다. 이어 노동자, 학생 등 운동권에서는 5월 3일 인천에서 열리는 개헌추진 결성대회에 대거 참가하게 되었다.

3 전개

5월 3일 대회에는 자민투, 민민투를 비롯한 서울, 인천의 수 십개 대학의 학생운동 그룹과 서노련[5], 인노련, 인사련, 인기노련, 인로협, 민통련 등 노동, 사회, 종교 계열의 다양한 운동권이 결집했으며 일반 시민들도 수 만명이 참가했다. 시위자들은 신민당은 재벌, 미제와 결탁한 기회주의집단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파쇼 타도와 삼민헌법을 촉구하고 격려하는 등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고 요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단결된 구호나 목표는 없었다. 당시 수도권 지역의 모든 운동권 정파들이 총집결했으나, 통일된 지도부도 사전에 합의된 계획도 없었고, 수만명의 시민앞에서 각자 자신들만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인물을 뿌리는 상황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주안역 앞의 시민회관에서 공동집회를 진행하는 데는 합의했으나 학생운동 그룹중 자민투, 민민투 등은 가두행진을 통해 각각 석바위, 동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지역 노동운동 그룹인 인노련, 인사련 등은 남아서 집회를 하는 등 서로간의 의견차이를 보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고 오후가 지날 수록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오후 5시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부에서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투석전을 진행하는 등 저항하여 경찰 측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경찰이 최루탄을 직접 겨냥하고 무차별 구타하는 강경진압으로 당일에만 총 319명이 연행되고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해산되었다.

4 이후

연행된 사람들은 엄청난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개중에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의 진술을 통해 운동권 지도부를 포함한 60여 명에 대한 수배가 내려지고 이들은 도피 생활을 하면서 기존의 수도권 지역의 운동권은 거의 몰락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6월 4일 서울대 출신의 권인숙이 부천서에 잡혀가 성고문을 당하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뒤이어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4.13 호헌조치와 맞물려 6월 항쟁의 발단이 된다.

당시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이우재[6]의 말에 따르면 경찰의 유도진압 의혹이 있었고 당시 교도소의 폭력적 통제 강화에 따른 가혹한 구타와 고문, 열악한 환경에 수감자들이 반발하여 단식,소음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나중에 가서는 수감 중에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우연히 만난 당시 교도관이 5.3구속자들이 가장 지긋지긋했다고 할 정도.

5 보수야당과 운동권의 대립

이전까지는 야당에서는 그들을 지지해 줄 투쟁 세력을, 운동권에서는 이라는 구심점을 가지고 서로 협력했으나 5.3 운동 전후로 신민당에서는 운동권을 좌익으로, 운동권에서는 양 김을 체제에 안주하는 기회주의자로 폄하하면서 서로간의 대립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5월 3일 대회에서 운동권은 대회장에 진입하는 김영삼을 가로막았고 신민당의 개헌현판식까지 취소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노동권 정치세력의 등장을 예고했고 이후에 민중당, 민노당이 되었다.

6 같이보기

  1. 개최 시기 순으로 서울(3/11), 부산(3/23), 광주(3/30), 대구(4/5), 대전(4/19), 청주(4/26), 인천(5/3)
  2. 1986년은 어느 때보다 반독재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였고, 민통련은 그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양 김 씨와 민통련 간의 비상설 연락기구인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을 결성했다.
  3. 85년 국회의원선거 1주년인 86년 2월 12일부터 개헌을 위한 1천만 서명 운동이 진행되었다.
  4. 당시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연합조직. 문익환 의장 아래 계훈제, 이소선(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김재준 목사, 강희남 목사,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문정현 신부, 이돈명 변호사, 송건호, 이창복, 장기표, 이부영, 임채정, 박계동 등이 중앙지도부를 이루고 있었다.
  5. 서울노동운동연합. 당시 서노련 지도부에는 김문수, 심상정, 유시민 등이 있었다.
  6. 인노련 소속, 5.3민주항쟁에 대한 해고노동자의 소고(小考)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