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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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實綠

1 개요

고려왕조 대에 작성된 총 185책의 실록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고려왕조에서 남긴 실록은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1]. 그렇기에 고려의 역사에 대한 국가적 기록은 이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김종서를 중심으로 편집한 고려사와 여기에 주석을 달아 요점만 뽑은 고려사절요밖에 없다. 고려도 실록을 남겼고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전범이 되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아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아래 박영규가 쓴 책 때문에 고려왕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편찬당시 명칭은 고려실록이다. 따라서 고려왕조실록이라는 단어는 엄연히 말하면 잘못된 말이다.

2 편찬 역사

고려실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의 8대 왕이었던 현종이 2차 여요전쟁 당시 날려먹은 역대의 기록을 다시 쓰라고 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고려부터 목종까지의 기록을 현종 4년(1013년)에 편찬을 시작해 이후 20여 년이 지난 덕종 3년(1034년)에 완성을 봤는데 이것이 최초의 고려실록으로 일명 7대실록이라 한다. 총 36권으로 완성되었으나 후세에 전하지는 않는다. 이후 예종실록은 전문적인 실록 편수관이 실록을 편찬한 첫번째 사례가 되었다.

고려의 실록 제작체계는 중국과는 다른 구조로,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사관의 5대 편제였으며, 사관은 시정을 기록하는 관리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후 덕종실록(선대 현종은 실록편찬여부에 대한 당대 기록이 없음)이 편찬되었으며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공양왕의 실록이 추가로 편찬되었다. 고려사 기록에서 실록이 편찬된 왕은 상기 21왕이 전부라서 나머지 왕들은 실록을 편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국사에 보면 고려 역대왕의 실록은 모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양 또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총 185책으로, 75책인 고려사의 두세배 정도 분량이었다.

무신정변과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정세가 혼란하여 원래 다음왕 재위기간에 작성되어야 할 실록이 제대로 작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의 실록은 충목왕 재위시에 비로소 편찬되었다. 마지막왕인 공양왕의 실록은 조선왕조 시기인 1398년에 작성되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쓰는데 사용된 이후 춘추관에서 보관되다가 소실되었다.

3 특징

후대에 저술된 조선왕조실록과 구별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3.1 왕이 사망 후 다음대의 왕이 바로 실록을 편찬하지 않았다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 바로 다음대의 왕이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빛의 속도로 실록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제17대 왕인 인종 이전까지는 이러한 기준이 없었다.

최초의 실록인 태조~목종의 7대 실록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만월대의 연경궁이 전소된 후 현종대에 왕명을 받은 황주량(黃周亮)이 전고(典故)를 알고 있는 노인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한 후 덕종 대에 한꺼번에 저술된 것이고, 현종, 덕종, 정종의 실록은 문종 때 몰아서 제작되었다. 문종의 실록은 2대 후인 선종 때 제작되었고, 순종, 선종, 헌종의 실록은 숙종 때 몰아서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7대 왕인 인종 때 수국사 한안인(韓安仁)이 실록편수관을 별도로 임명해 편찬하게 하는 송나라의 편찬방식을 따르자고 건의하고 이에 인종이 동의,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김부식(金富軾)을 편수관에 임명하면서 이후 다음대 왕이 바로 전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아서 19대 왕인 명종실록은 4대 후인 고종대에 가서야 제작되었고, 신종, 희종, 강종의 실록 또한 24대 왕인 원종대에 가서야 몰아서 제작된다. 원종실록 또한 4대가 지난 후인 충혜왕 때 제작되었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29대왕인 충목왕 때에 제작,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은 우왕 대에 몰아서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의 실록은 다음 왕조인 조선시대에 와서야 제작되었다.(1398년, 조선 태조 7년)

3.2 예종, 인종 대 이후로는 객관성이 유지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도 몇몇 부분에선 내용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왕조 내내 왕조차도 실록을 함부러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편찬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던 반면, 기록에 따르면 예종과 인종 대 이후의 고려실록은 중국의 실록들과 비슷하게 왕이나 세력가들의 재제와 간섭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종실록은 원래 한안인 일파가 제작하고 있었으나 권신 이자겸(李資謙)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후 이자겸 일파가 예종과 인종 대의 실록을 좌지우지했다. 다음대 왕인 의종 부터는 아예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정권에 의해 실록편수관이 잠식되고 말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무신 최세보(崔世輔)가 동수국사에 임명되어 실록편찬을 감시했고 이후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신 세력이 실록을 일일이 감찰했다. 또한 고종대에 제작을 시작한 명종실록 부터는 사관(史官)만이 실록을 편찬해야 한다는 규칙이 깨져버리고 이규보(李奎報), 권경중(權敬中) 같은 비사관 인물들이 실록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때문에 막장이었던 무신정권 시기와 원간섭기 시기의 실록들, 더 이전으로는 예종, 인종대 이후의 고려실록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비판을 많이 받았고, 객관적인 실록 편찬에 있어서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3.3 보관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 5부를 두었던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1227년에 외사고를 짓기 이전까지는 오직 1부만 존재했다.

때문에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7대 실록 부터가 거란의 침입으로 사료를 몽땅 날려먹어 덕종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탈 때에도 상당수가 유실되고 직사관 김수자(金守雌)의 노력으로 일부만을 건졌다.

1227년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드디어 해인사에 외사고를 지어 이때부터 2부를 보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내사고 실록은 1232년(고종 19) 여몽전쟁 때 강화도에 옮겨질 당시 피해를 입었고, 1286년(충렬왕 12)에는 몽땅 원나라에 보내져 뜯겨 본후, 1290년에 반환되었다. 이후에도 강화도 선원사, 개경 등을 옮겨다니다가 결국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내사고본은 소실되었다.

해인사의 외사고본은 여몽전쟁 때 남해군의 창선도(昌善島)에 옮겼고, 이후 우왕 대에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면서 진도, 선산 득익사(得益寺), 예천 보문사, 충주의 개천사(開天寺), 죽산의 칠장사(七長寺) 등으로 계속 옮겨다녔다. 이후 떠돌아다니던 걸 조선 초기 고려사를 편찬할 때 한양의 춘추관 사고에 옮기고 보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3.4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분량이 적었다

기록상의 분량은 총 185책으로 비슷한 기간동안 저술된 조선왕조실록[2]의 6분의 1 정도 분량이었다. 이미 유실된 상태라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후대의 조선왕조실록보다는 그 내용이 세세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몇몇 날려먹은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고려사의 두세배 분량으로 결코 적은 분량은 아니다.

4 고려왕조실록 관련서적들

4.1 백지원이 쓴 교양 서적

왕을 참하라조일전쟁을 낸 재미교포 작가인 백지원이 낸 세번째 작품. 2010년 4월에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다. 전작들에서 드러났던 극렬 조선까 시각은 그대로인데다가, 저자 특유의 욕설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거친 필체는 여전하다.

조선은 망해야 할 나라라고 극도로 저주했던 저자가 이상하게도 고려에 대해서는 "자유롭고 활기찬 사회였다"라고 정 반대의 시각을 들이대는 바람에 이번에도 무수한 역덕후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조선을 까기 위해, 그 매개체로 고려를 긍정적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들에 비해서 그다지 상업적인 성과는 적었는데, 이는 전작들보다 전반적으로 책의 흥미가 떨어졌다는 평가들 때문... 무엇보다 까심이 부족했기에

편향된 작가의 시각과 지나치게 거친 필체, 전작에 이어 계속되는 고증 오류 때문에 이 책을 참고서로 삼기엔 무리가 너무 많다. 불쏘시개. 《고려 무인 이야기》나 밑에 나온 책을 권장.

4.2 박영규가 쓴 책

박영규가 지은 실록 시리즈 중 하나. 원래 명칭은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백지원이 쓴 것보다 훨씬 질이 좋으며 만화로도 나왔다.

사실 박영규는 환빠스러운 대륙사관이 드러난 삼국 관련 실록 시리즈(고구려,백제,신라)가 문제[3]고려, 조선 쪽은 내용이 괜찮아서 평판이 좋다.
  1. 이 화재가 조정이 피난 간 직후 서울의 난민들이 장례원에 소장된 공사 노비의 문적을 소각했는데 이 불이 바람을 타고 궁궐, 춘추관으로 번져갔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일제시대에 확립된 주장이다. 선조 실록에는 해당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이 일본군이 불을 지른 것처럼 묘사하고 있고 선조 수정 실록은 간민과 난민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 내용.
  2.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뺀 분량
  3. 화랑세기 인용을 문제로 꼽기도 한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는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