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를 다룬 사서(史書).
《고려사》의 축약본. 고려사가 너무 내용이 많고 번잡해서 줄였다고 하여 절요라 한다지만, 사실은 고려사만을 참조하지는 않았기에[1], 내용면에서 《고려사》와 다른 점이 있다. 편년체로 서술되었으며 기전체인 《고려사》, 송의 서적인 고려도경과 함께 고려시대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사료이다. 총 35권 35책.
2 상세
조선 문종 2년(1452년) 김종서 등이 왕명을 받고 고려사 저본으로 찬수하여 춘추관에서 간행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전하지 않지만 당시의 편년체 사서로 세종 때 윤회가 편찬한 《수교고려사》와 권제의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을 참조하고[2], 1451년 완성된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하여 5개월 만에 편찬한 것이다. 《고려사》 만큼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고려사》 외에도 다른 사료도 참고하였기에,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 《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도 있어 고려시대의 역사서로 상호 보완적인 사료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고려사》 성종 원년조에 없는 4월, 10월, 12월 기사들이 《고려사절요》에는 보이며 3월에 백관의 칭호가 어떻게 바뀌었는 지도 《고려사절요》에 더 잘 나와있다. 반면 《고려사절요》에는 없는 송 황제의 책봉조서가 《고려사》엔 보이고 있다.고려사절요 성종원년, 고려사 성종 원년.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경우, 《고려사》에는 열전(列傳)에 수록되어 있어, 양쪽에 다 실려있기는 하지만 《고려사절요》에는 현종 원년인 경술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일부가 분실되었다는 분실 이유가 적혀있다. 나머지 6조는 경술년의 병란에 잃어버렸다.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하였기 때문에 편찬 당시 원칙을 정하여 범례로 기록하였다. 국가의 치란흥망에 관계된 기사로서 귀감이 될 수 있는 기사, 왕이 직접 참여한 제사, 외국의 사신 관련 기사, 천재지변에 관한 기사, 왕의 수렵활동, 관료의 임명과 파면 관련 내용, 정책에 받아들여진 상소문 등 군주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내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고려사처럼 왕과 왕실 관련 용어들은 직서(直書)를 원칙으로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외왕내제라 하여 왕과 왕실관련 용어들을 황제국의 법도에 따라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제후국의 도리로써는) 참람(僭濫)하다 하여 조선시대에는 많은 용어들을 제후국의 법도에 따라 고쳤다. 《고려사절요》를 편찬할 때, 고려시대의 왕실 용어들도 제후국의 법도에 따라 변경해서 기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역사는 있는 그대로 적어야 한다'(직서)는 의견이 승리하여, 비록 성리학의 예법으로 보면 참람하다 할지라도, 고려가 실제 사용한 그대로 황제국의 용어를 기록한 것을 말한다.
직접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론을 기술하지 않았으나, 고려시대 사신과 이제현 · 정도전 · 정총등 저명한 학자들의 사론 108편이 있어 사론을 살피는 가치도 쏠쏠한 편. 여기서도 조선 전기 역사책답게 우왕과 창왕은 왕 취급 못받고 재위년도도 간지로 표기되어 있다.
1968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으로 출판하였고 인터넷 상으로도 볼수 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도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데, 《고려사절요》와 유사한 대목이 많은 것으로 보아 많이 참조한 듯. 다만 《고려사절요》 원본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고려사절요》의 내용을 인용한 《동국통감》을 주요 자료로 채택한 덕분에, 《고려사절요》의 내용도 동사강목에 반영되었다.(출처: 박종기 저,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국역본을 공개하는 사이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