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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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19대 광개토대왕 고담덕20대 장수왕 고거련21대 문자명왕 고나운
[1]
시호장수왕(長壽王) / 강왕(康王)[2]
고(高)
거련(巨連) / 거련(巨璉)
생몰년도음력394년 ~ 491년 12월 (98세)
재위기간음력412년 10월 ~ 491년 12월 (79년 2개월)

1 개요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한 군주.

Longevity King[3], General King 한국사의 장수만세

고구려의 제20대 . 394년에 태어나 412년 음력 10월에 왕위에 오르고 491년 음력 12월에 사망하며 재위를 마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오래 살았다는 뜻의 장수다.닉값 將帥王(General King)이 아니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4] 당시 고구려가 불교 진흥 정책을 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는 거련(巨連). 단순한자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일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북위측에서 내려준 시호는 강(康). 하지만 북위에서 시호를 내린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강왕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조선 왕들이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하사받았으나 듣보잡인것과 마찬가지. 다만 북위에게 시호를 하사받은 건 독자적인 외교의 산물.

시호인 장수(長壽)처럼 98세까지 매우 오래 산 왕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5]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대비된다. 의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98세까지 생존하기는 쉽지 않으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정말 오래살았다. [6]게다가 재위 기간은 총 79년.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영조보다도 재위 기간이 길다. 위의 연도를 보다시피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길다(...). 덕분에 다음에 즉위한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다. 그 태자였던 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아바마마가 너무 오래 해먹고 계시니 제가 일찍 요단강 건너도 불효는 아니죠? 떠도는 이야기엔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왕도 못 된 조다같은 놈"이란 뜻에서 쪼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데서 나온 말을 장수왕의 유명세가 알려진 뒤에 튀어나온 민간어원설로 근거는 전혀 없다. 피휘 문서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지만 애초에 왕족의 이름이 평민들에게 그렇게 막 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101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으며, 인터뷰를 한 국어학자에 의하면 쪼다는 1960년 대의 불량배 은어인 '쫘 버려라'에서 유래되었거나 '쫀다'의 동사형이 '쪼다'로 변형되었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7]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고 장수왕도 거란, 백제신라를 공격했기에 정복군주라고 알려져 있지만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처럼 공격적인 정복군주는 아니였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사업을 국가 1순위 사업으로 삼아 재위기간 내내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으로 변모한 고구려 사회를 안정시키는 내치에 주력했다. 지두우 분할 시도나 백제 위례성 공격은 분명 정복사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두우 분할 시도는 물길이 북위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고 백제 한성 공함은 개로왕이 고구려에게서 이탈하려고자 했던 게 원인이였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이 능동적이라면 장수왕의 정복사업은 비교적 수동적이다.

장수왕이 죽자 북위 황제가 애도식을 거행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도 왕이 죽었을때 중국 황제가 애도를 한 적이 있으므로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더구나 장수왕 말년에는 북위 황실과 고구려 왕실이 혈연으로 묶여 있었으니 납득이 안되는 일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장수왕을 장수태왕이라 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의 칭호를 따르자는 의의는 좋으나 사료에서 장수태왕이라 기록된 예가 전혀 없다. 장수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중원고구려비에 태왕이라는 용어가 보이긴 하나 이것도 시호인 장수와 함께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기록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시호인 장수왕이라 하는 것이 옳다.

흔히들 고구려의 최전성기라 여기기 때문에 얼핏보면 이때 고구려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잘 나갔을 것 같지만 아버지가 넓힌 땅, 흡수한 북연의 인구, 평양성 천도로 인해 생겼을지 모르는 신구세력의 대립, 물길의 발흥, 북위의 압박, 고구려의 세력에서 이탈하려고 나제동맹을 맺어 안간힘을 쓰는 백제와 신라의 도전 등 나름 골머리 앓으면서 신경을 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2 내정

414년 만주 일대에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서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규정하며, 광개토왕때 입안된 수묘인 제도를 성문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손자인 문자명왕때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건립시점을 장수왕 시기로 보느냐, 문자명왕 시기로 보느냐는 건립 목적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419년 여름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24년 나라에 풍년이 들어 왕이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2.1 평양 천도

기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동천왕, 고국원왕 때의 경험으로 그다지 방어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는게 입증된 데다 척박하여 생산력이 후달리는 곳이였다. 이 곳의 겨울 평균기온 -11℃. 쉽게 말하자면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냉대 동계건조기후(Dw)+(한반도보다)내륙지방+(평양보다)고위도'라는 악조건 덕분에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외 모두 산이다.

반면 평양 지방은 황해도의 평야와 인구밀도를 바탕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고조선의 후기 수도였다는 점과 낙랑군에서도 행정중심지였던탓에 당대 동방(중국 동방)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더구나 백제, 신라, 가야를 조져놨기 때문에 남쪽의 조무래기들로부터 뒷통수를 테러당할 위험도 적은데다[8] 떠오르는 강자 북위를 방어할만한 위치였다. 이때 지어진 궁궐이 바로 안학궁(安鶴宮)이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9]로,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덕분에 조공왕이라는 괴랄한 별명도 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당연히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야 조공기사만 있을 수 밖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정 관련 기록이 워낙 빈약하여 주변국에서 장수왕대 고구려를 기록한 글(개로왕의 상표문 등)을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압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추측한다.

고구려라는 국호도 천도 후에 고려로 바꾸었다. 왕건의 고려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교과서에서는 고구려로 고정.

3 외정

이제부터는 외정. 내정이나 외정이나 고구려 자체의 사료가 거의 없다. 외정 관련 기록은 주변국에서 남긴것들이 퍽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편. 특히 중국에서는 조공,책봉 기록의 양이 후덜덜하고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도 주목할만하다. 일본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을 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장수왕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본과 고구려의 교섭도 기록으로 남아있긴한데 《일본서기》의 지랄같은 기년왜곡 장난질 때문에 정확하게 장수왕 시기의 기록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3.1 남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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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장수가 자신의 신라인 부하에게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불어버려서 경각심이 생긴 신라측에서 신라내의 고구려 군인들을 학살해버렸다. 이렇게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신라는 아직 단독으로 고구려에 상대가 되는 국력이 아니었기에 백제와 힘을 합쳐 나제동맹을 맺어 장수왕의 남진에 대항했다.

백제의 개로왕북위(北魏, 386~534)에게 밀서를 보내 침략을 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제는 고구려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된 상황이였다. 장수왕은 첩자인 승려 도림(道琳)을 보내 개로왕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궁궐 등을 짓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게 했고 결국 백제의 국고가 바닥날 낌새를 보이자 바로 백제를 침공해 한강 유역을 빼앗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고구려의 남방 강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때 장수왕이 직접 출병했는데 그때 나이가 83세...

백제를 딴 뒤 신라를 따려 무서운 기세로 동해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신라 북변 7개 성을 점령하고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던 서라벌까지 쭈욱 진격하던 도중 신라, 백제, 가야 연합군에게 격퇴당했다. 주로 장수왕이 백제를 치면 신라 지원군이 와서 도와주고 신라를 치면 백제 지원군이 오는 식으로 장수왕의 긴 치세 내내 반복됐다. 참고로 개로왕 피살 때도 신라 지원군이 갔지만 미처 도착하기 전에 이미 상황이 끝났던 거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을때 고구려 장수들이 더 치고 내려가 백제를 완벽하게 멸하자고 건의하자 장수왕이 백제의 뒤에 야마토가 버티고 있다는 식의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기록에는 장수왕이 뜬끔없이 백제가 야마토(왜)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있는 상식이라고 말한다.[10]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어이없는 내용인지 참고하기위해 그 내용을 아래에 적어놓는다.

"(웅략) 20년 겨울 고려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때 조금 남은 (백제) 군사들이 창하(倉下)에 모였다. (그들은) 군량이 이미 다해 근심하고 울기만 했다. 고구려의 여러 장수가 왕에게 '백제인의 마음은 정상이 아니라, 신(臣)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당황하곤 하옵니다. (그러니 그들을) 뒤쫓아 없애기를 청하나이다.'라고 했다. 왕은 안 된다. 과인은 백제국이 일본국의 관가(官家)로서 그 유래가 오래라고 들었다. 더구나 그 왕이 천황을 섬기고 있다. (이는) 이웃 나라가 다 아는 바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드디어 (추격을) 그만두었다."-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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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대전 인근까지 고구려식 산성이 발견되고 있다.

3.2 왜와의 관계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이 왜왕 앞에서 외교문서를 읽는데 그 내용이 고구려왕이 교한다(=가르친다)라는 것이라서 왜의 왕자가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왜5왕이 남조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왜의 변경을 약탈하고 사신을 차단해서 제대로 사신을 보낼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온다.

3.3 중국 북위, 남조와의 교섭

북위의 위협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특히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 된 북연(北燕, 407~436) 2대 황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 장수왕은 군사 2만을 파견해 용성의 주민들을 구출한뒤 용성을 약탈,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고 황제 대접을 바라다가 더 천대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풍홍을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할일을 했다는 것.) 이후 풍홍은 (宋, 420~479)에 망명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풍홍은 이 때문에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고구려의 위세가 남북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어서, 송의 사신이 이 때 풍홍의 잔당군으로 풍홍을 죽인 장수를 죽이고도 송의 형식적인 처벌만 받은 사건(송의 사신이 이 때 풍홍의 잔당군으로써 풍홍을 죽인 장수를 죽였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중국 왕조들이 이렇게 형식적으로나마 처벌한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면 그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다는 반증은 된다.

이후 북위는 고구려 왕실과의 혼인을 바랬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저 놈들 연나라도 저렇게 뺑끼치고 침공했음"이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로, 그녀의 오빠 고조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무른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북위에 역대 황제의 계보를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응한 북위가 황실 계보를 바쳤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로 기실 북위가 신하국으로서 계보를 고구려에 바친 것이 아닌 고구려가 봉물을 바치면서 일종의 조공국으로서 북위 황실에 대한 피휘(避諱)를 하기 위한 이유로 원한 것이다.

여하간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 송보다 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북조도 고구려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의 국력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북위, 남조, 유연(幽然)과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한다. 중국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고구려에 최대한의 높은 직위를 내리면서 고구려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중국 국가들이 내린 작위 기준으로 장수왕보다 높은 위치에 오른 국왕도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해야 원간섭기 몇몇 고려 왕들 정도가 고작인데, 독립국이었던 고구려와는 그 위상을 비교할 수 없다. 고구려가 북위를 공격하고, 북위 사신의 고구려 통과를 불허하고, 양다리 외교를 하는 등 피책봉국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도 북위는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토욕혼, 유연, 남조는 틈만나면 괴롭히면서도 고구려는 건드린 적이 없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북위에서 사신을 대우할 때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해 남제의 사신들이 불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남제의 사신을 첫번째로, 고구려의 사신을 두번째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4 지두우 분할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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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선은 원정로가 아니라 답사로다.

이후 479년에 몽골고원의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嶺)에 위치한 유목민 부족국가인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했다. 유연과 지두우 분할 모의를 했다는 기사만 남아있고 그 경과에 대해서는 기사가 남아있기 때문에 성공여부는 알수없다. 다만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 있던 거란이 고려(물론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대릉하 인근으로 도망했다는 기록이 2건이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할 시도는 했던것 같다. 헌데 그때 유연은 북위에게 털리고 있던 터라 지두우를 원정한 사정이 못되었고 이후에도 지두우나 물길이 아무런 변화없이 잘 활동하는걸로 보아서는 실패했을 가능성을 무시할수 없다. 확실한건 지두우 원정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도는 이루어젔고 그와중에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여 당시 내몽고의 유목민 세계에 혼란을 야기했다는것. 종종 내몽고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의 성터를 이 사건과 연관짓기도 한다.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아예 장수왕때 지두우를 먹고 내몽고 초원까지 확장했다고 못박고 있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가 가장 타당한 주장만을 담고있는건 아니다. 당장 요서경략의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있는 것만 보아도...

국정 교과서는 모든 학설이 변한 다음에 가장 마지막으로 변한다. 애초에 국사와 윤리, 국어라는 교과목은 국가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규정과 관리를 통해서 결정된다. 때문에 과거의 학설들도 분명한 오류가 확인된 것이 아니라면 쉽게 수정되지를 못한다. 가야 항목만 봐도 기존의 학설이 분명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대체할만한 학설이 확립되지 않아서 결국 과거의 전기 금관가야, 후기 대가야 연합설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서경략의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있는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요서경략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은 이유는 정말 단순한데, 요서경략 기록은 보이는데 언제인지 모르니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로 비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게 교과서에 실렸고, 이를 대체할한큼 주도적인 학설이 학계에서 확립이 안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 학설로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놔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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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건, 장수왕의 지두우 분할 시도가 내몽고 초원 진출이라는 표현으로 국정 교과서에서 등장,강조되기 시작한건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몽골땅에 농경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때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영교도 이 둘을 몽골(유연)과 한국(고구려)이 손을 잡고 벌인 사업으로 엮었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六年 평양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북위에 조공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11]

  1. 중국 화가 성병예가 그린 장수왕. 놀부보쌈? 한국측의 초상화나 표준영정은 없다. 성병예는 역대 고구려 왕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하나같이 유인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장수왕은 그나마 나은 편.
  2. 북위효문제(孝文帝)가 장수왕이 사망하자 시호를 내렸는데 그게 강왕이다.
  3. 실제로 장수왕은 장수했다.
  4.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가 기록상으로 더 오래산 왕이 있기 때문이다.
  5. 전근대시대에 평균수명이 낮았다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일단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30대 후반은 아직 정정할 나이다.
  6. 15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김수로왕, 119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산 군주로 알려져 있다. 이 왕들은 후대에 의해 년도가 조작 되었다고 여겨진다 .
  7. 이전 문서에 "귀족사회에서 은어로 사용되다 평민층으로 퍼저 나갔다는 설도 있음으로 아예 없다고 하기 힘들다. 비슷한 이야기로 염장지르다란 말이 장보고를 죽인 염장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쪼다라는 단어 자체가 1960년대 이후 현대에 와서 생긴 것이고 장수왕의 아들 이름이 조다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더 늦어서 아무리 빨리 잡아도 8-90년대다. 턱도 없는 주장이다. 비슷한 민간어원설이 퍼진 사례로 염장지르다 역시 마찬가지, 염장장보고를 죽였다는 사실도 장보고 위인전이 널리 읽히며 간간히 알려졌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건 드라마 해신 방영 이후다. 애초에 근대 이전에 장보고의 네임밸류가 그렇게 대단하지 못했다. 이런 민간어원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주장은 좀 자제하자.
  8.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대에 돌궐, 북주, 말갈(물길), 신라, 백제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고 대성산성을 건축하기도 했다. 6세기 말부터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털린 이후로는 평양이 국경에 인접해버리는 위험한 꼴이 되어버린다. 이건 백 년 가까이 훗날의 이야기이니 장수왕이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이 때 고구려는 신라가 우리 대신 백제를 조지라고, 빈집털이를 하지 않겠다는 밀약을 맺었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관산성 전투.
  9.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10. 물론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허풍적인 사관을 생각해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11.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정책이 드러나는거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백제보다는 낫지만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대 까지(신집은 소수림왕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대 까지가 상세하다.)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고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비의 존재 때문에 기록이 어느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연개소문만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기록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시대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