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공병우 (公炳禹) |
출생 | 1907년 1월 24일, 평안북도 벽동군 |
사망 | 1995년 3월 7일, 서울특별시 |
본관 | 김포 공씨 |
직업 | 안과 의사 |
가족 | 배우자 이용희, 슬하 3남 6녀 |
종교 | 개신교 |
목차
1 개요
한글을 사랑한 괴짜 의사[1]
안과 의사, 자판 연구가, 전 한글문화원 원장. 한국 최초로 전문 안과를 개원한 인물.[2] 그러나 한글 기계화로 더 유명하다.
2 한글 관련 운동
sky ICT-IT야사-공병우 박사와 한글기계화 운동
2.1 세벌식 타자기 개발
오른쪽에 초성·가운데에 중성·왼쪽에 종성을 배치하여 입력하는 체계인 '공병우 세벌식 자판'을 1949년부터 개발하고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6.25 전쟁 때 이미 한글을 타자기로 빠르게 입력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한 때 세벌식 점유율은 월등하게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세벌식 타자기 특유의 빨랫줄 글꼴(아래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문단 참고)이 '이' 자를 '일' 자로 위조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따라 정부는 세벌식 타자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네벌식 타자기를 표준으로 지정했다. 또한 1983년, 빨랫줄 글꼴의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정부는 네벌식을 마개조한 두벌식[3]을 표준으로 지정하고 세벌식의 사용을 계속 제한하였다. 이러한 탄압들에 대응하여 공병우는 정부에 반발하다가 코렁탕을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참고 동영상
2.2 한글 전용화
지식인들이 6.25 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 오면서 남한은 북한보다 한자 사용률이 높았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의 편리함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는 대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는 순한글은 입력할 수 있지만 당시에 많이 쓰이던 한자는 입력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한자의 사용을 포기하고 순한글을 사용하게 되었다. 90년대 이후 컴퓨터의 발달로 한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있게 되었지만 50년대 당시만큼 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도 공병우 타자기의 영향이다.
2.3 세벌식 워드프로세서 개발
위 빨랫줄 글꼴은 공병우가 타자기를 빠른 속도로 치기 알맞게 글꼴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이 글꼴의 특징은 초성, 중성이 빨랫줄처럼 되어 종성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네모꼴을 벗어난 것으로, 정부에서 세벌식 타자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글씨를 칠 때 글씨의 모양이 중간중간에 바뀌는 것이 없다보니 익숙해지면 편리한데다가, 2000년대 들어서 그 디자인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비슷한 글꼴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공병우는 한국어 입력기가 없는 컴퓨터에서도 한글을 입력할 수 있게 이 글꼴을 사용하여 새로운 로마자 대응 글꼴을 만들었는데, 이를 직결식 글꼴이라고 부른다. 이 글꼴을 그대로 영자 워드프로세서에 대입시킨 공병우 박사는 프로그램의 변경 없이 한글 문서를 만들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워드프로세서의 원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2.4 세벌식 컴퓨터 자판 개발
컴퓨터의 등장 이후 컴퓨터 용으로 자판을 개발할 필요가 생기자, 공병우는 여든이 넘은 몸으로 세벌식 공병우 최종 자판을 개발하였다. 이 자판은 공병우가 직접 개발한 마지막 자판이기 때문에 '세벌식 (공병우) 최종'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최종 자판'이 세벌식의 마지막 자판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공병우 박사 사후, 공병우 박사의 뒤를 이은 자판 개발자들이 계속해서 세벌식 자판 개선에 힘써왔고, 이는 2015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공병우 세벌식(공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손가락 연타 수가 적어서 피로도가 적다는 특징이 있고, 개량 자판에 따라 한 글자를 한 타에 칠 수도 있다. 신광조 세벌식(신세벌식)도 공병우 세벌식에서 비롯되었을 만큼 공병우 박사는 세벌식 자판 계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5 기타 한글 관련 활동
- 안과의사였던 공병우가 한글 타자기 개발 등 한글의 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에는 한글학자인 이극로의 영향을 받았다. 진료를 받으러 방문한[4] 이극로와 한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시각장애인용 한글 타자기를 개발한 사람도 공병우이다.
- 나이가 들어도 노익장은 여전하여 한글문화원을 설립할 당시 나이가 82세였다.
- 실력 있는 젊은 인재들과 정보를 나누어 프로그램 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래아 한글도 이러한 지원 아래 태어난 작품.
3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의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한글 연구로 더 유명해지긴 했지만 개요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안과의사, 그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하였다. 아직도 공병우가 개원한 공안과는 광화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하드렌즈를 만든 한국 콘택트렌즈 연구소에서 하드렌즈 연구의 주축이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5]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쌍커풀 수술을 하기도 했고, 그전까지 일본 가나로 만들어져 있던 시력 검사표를 한글로 제작하기도 하셨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과계의 "선구자" 이자 "최초" 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서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를 쌓기도 했다고 하나 정작 본인은 돈 버는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4 기타
공병우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빠른 자판 개발에 힘써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세벌식 자판은 두벌식 자판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6] 한글 타자기 개발에 대한 공로로 특허청은 1999년도에 공병우가 우리나라 7대 발명가 중 하나라고 발표했다.# 공병우의 생각을 잘 나타낸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을 요구받자, 자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는 일화가 있고, 시간 절약을 위해 50년대 당시에 집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꾸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에는 화장실이 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공병우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을 집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화변기가 조금씩 들어왔고, 당시의 글이나 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왠만큼 사는 집안에선 이미 화변기를 꽤나 설치해놨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때 공병우 박사가 사는 집 정도면 푸세식은 좀 터무니없고, 최소 화변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민주주의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80년대 민청련 초기자금이 없어 허덕이던 시절 문제 소지가 될까 현금자본을 대주지는 못하고 그게 그거지만 공병우 타자기를 수십 개 기증하여 자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1995년 사망 뉴스가 나오자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공병우 박사에 대한 조의글로 넘쳐났는데 당시 PC통신 게시판이 한 사람에 대한 조의글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거의 최초의 일이었다. 한 신문 기자는 이를 네티즌들의 사회장이 열리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백인제박사와 더불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검증을 위해 참여되었다. 단, 이 부분은 위조지폐를 찍어냈을 인쇄물 검시 담당으로 관련되었기에 범인 심리를 맡았다는 이유로 납북이 된 원인으로 추정된 백인제 박사와 달리, 서울에서 납북을 피할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5 함께 보기
공병우,《네이버캐스트》, 2014년 5월 1일 작성. 2014년 5월 9일 확인.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 따뜻한 하루
한글문화원 홈페이지
- ↑ 김은식이 펴낸 공병우에 대한 어린이용 평전 제목이다.
- ↑ 공병우는 자신의 성을 따서 병원 이름을 '공 안과'로 붙였는데 이 병원은 현대에도 남아있다..
- ↑ 이 두벌식은 정작 현대한글에 최적화 된 자판도 아니었고, 당시에 이미 나와 있던 박영효-송계범 두벌식보다도 못한 물건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 ↑ 공병우 박사의 공안과와 한글학회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 ↑ 콘택트렌즈 항목의 일회용렌즈에서 참조함.
- ↑ 그러나 백괴사전에서는 몇몇 게임의 단축키가 세벌식에서 작동이 안 된다고 공병우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국민들이 게임에 빠질 것을 우려한 예언가라는 반응.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경우는 세벌식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