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46위 강양후(絳陽侯) 화무해47위 곡역후(曲逆侯) 진평48위 동모후(東茅侯) 유쇠
48위 균후(菌侯) 장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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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陳平, ?~BC 178). 진말한초의 모사, 정치가. 공신서열 47번째항우에게 초필살기를 때린 인물 치고는 서열이 한참이나 낮아보인다. 장량이 62위인데 뭘., 곡역후에 봉해졌으며 식읍 5000호를 하사받았다.

목차

행적

전한덩샤오핑[1]
이간질의 달인.

양무현 출생. 위나라 사람.

젊은 시절 집은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좋아했다.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은데다가 그의 형은 자기 똑똑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동생을 잘 먹였기에 간혹 그에게 "집도 가난한데 뭘 먹고 이토록 살이 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풍채가 좋고 언변이 화려해 젊을 적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여자 관계도 많이 가졌었는데 자신의 형수와도 검열삭제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 어디까지나 소문. 이 말대로라면, 자길 돌봐준 형을 상대로 NTR을 시전한 배은망덕한 놈팡이가 되니...

형수와 간통 관련 건은 사실 좀 복잡한게, 일단 간통설을 주장한 것은 관영, 주발의 시기에 비롯된 헐뜯음이었는데, 이들은 서술은 "신이 듣기로는 진평이..."라는식의 뉘앙스였다. 즉 대놓고 카더라 통신. 이에 유방은 위무지라는 사람에게 물었는데, 위무지는 "형수와 간통하면 어떻습니까, 능력만 있으면 되지."라며 진평의 결백을 어필하는것이 아닌, 능력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변호한다. 거기다 후세에 조조도 인격보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진평을 예시로 들었다. 즉, 변호하는 쪽에서 오히려 진평의 간통설을 기정사실화한다(...) 참고로, 진평의 형수는 진평이 밥축을 낸다고 생각하여 진평을 디스한 적이 있고, 이를 들은 진평의 형이 자신의 아내를 쫓아낸 일이 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이들 부부의 이혼 원인을 분석하던 중, "진평의 형수가 진평하고 간통하다 쫓겨났다"는 결론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진평이 사는 마을에 사제(社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는데, 진평이 제사에 올린 고기를 나눠주는 재(宰)가 되자, 고기 나누는 것이 매우 공평해졌다. 그러자 진평은 한숨을 쉬며 아, 이 진평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2]

말에 벌어진 '진승의 난'에 동참, 처음에 위나라 공자 구를 섬겨 큰 계책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사람의 헐뜯음까지 받자, 진평은 위나라를 떠나 우연히 초패왕 항우의 심복이 되었다.

그 후로 삼진을 격파한 유방에 넘어간 (殷)을 다시 꼬드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은왕 사마앙이 유방의 침략에 다시 항복, 그 죄를 물을까 두려운 진평은 아무래도 전에 유방을 살려준 경력까지 있던 터라 재빨리 도망치고 만다. 이 와중에도 강도에게 변을 당하지만 기지로 위기에 벗어난다.[3]

고생 끝에 진평은 친구인 위무지의 천거로 유방에게 정식으로 발탁되어 모사로 대활약 한다. 이 과정에서 장수들의 반대가 있었으니,진평을 도위에 임명하고 수레에 함께 타도록 하였으며 장수들을 감시하는 호군(護軍)을 맡게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말하였다.

“왕께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초나라 도망병에게 함께 수레를 타라 하시고 저희 같은 노장(老將)들을 감독케 하십니까?”

유방은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진평을 더욱 총애하였다. 그러다 동쪽으로 진격하여 팽성에 이르렀는데 초나라에 대패하고 말았다. 유방은 후퇴하면서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며 형양에 도착하였다. 진평을 아장(亞將)으로 삼아 한왕(韓王) 한신에게 배속시켜 광무를 지키게 하자 주발과 관영등의 장수들은 모두 진평을 비판했는데

“진평은 허우대는 멀쩡하나 속은 비어 있는 자이옵니다. 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진평은 형수와 사통하였고 위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쳐 초나라에 붙었다가 초나라에서 뜻대로 되지 않자 한나라에 투항하였사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께서는 진평을 호군으로 삼으셨사옵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진평이 여러 장수들에게서 황금을 받았는데, 많이 준 자에게는 선처하고 적게 준 자는 홀대한다 하옵니다. 진평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간신이오니 왕께서 제대로 살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런 장수들의 말을 들은 유방은 진평을 의심하게 되어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를 불러 꾸짖었다. 그러자 위무지가 말하였다.

“신이 진평을 천거한 이유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으나 왕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의 행실이옵니다. 행실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전투를 승리를 이끌지 못한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사옵니까? 신은 지략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였을 뿐이오니 왕께서는 진평의 계책이 한나라에 이로운가부터 따져 보시기 바라옵니다. 그 다음에 형수와 사통했는지 황금을 받았는지 조사해 보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유방은 진평을 불러 나무랐다.

“그대는 위왕을 섬기다 다시 초왕을 섬기러 갔으며 다시 나를 섬기고 있다. 신용이 있는 자는 본래 이렇게 여러 마음을 품는 것인가?”

그러자 진평은

“위왕은 신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에 위왕을 떠나 항왕을 섬겼사옵니다. 항왕은 항씨 일가 외에는 사람을 믿지 못해 뛰어난 책사가 있더라도 중용하지 않는 까닭에 초나라를 떠났사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왕께 귀순한 것이옵니다. 그리고 신은 맨 몸으로 온 까닭에 당장 쓸 돈이 없어 장군들이 보내 준 황금을 받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만약 신의 계책에서 쓸만한 것이 있다면 받아들여 주시고, 쓸만한 것이 없다면 사직하게 해 주시옵소서. 황금은 아직 그대로 있으니 잘 봉해서 관청에 보내겠사옵니다.”

유방은 진평에게 사과하면서 많은 상을 내렸다. 진평을 호군중위(護軍中尉)에 임명하여 모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니, 감히 불평을 하는 장수가 없었다.

거국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장량과는 다르게 소소한 계략과 유방의 조언을 담당했다. 주특기는 반간계, 즉 이간질이다.

반간계 수행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유방 휘하 장군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장수들의 감찰직을 아울러 맡고 있었던 탓에 이를 뇌물수수로 오해받아 탄핵 당하나,(위의 사례) 소하장량이 적절히 변호해 주어 오히려 유방으로부터 착수금 10만금을 받고 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다름아닌 항우와 그의 최측근 모사인 범증을 이간질 시키는 데 성공한다.

진평이 항우와 범증을 어떻게 이간질 시켰냐 하면 다음과 같다.

진평은 유방에게 공작금으로 황금 수만근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유방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평에게 황금 4만근을 내줬다. 진평은 이 금으로 중국 전토를 뒤져서 온갖 진기한 음식들을 장만했다. 그 이후 진평은 항우의 사신이 유방에게 올 기회를 만들어낸 후 이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그리고 항우의 사신이 오자 바로 일갈크리...

"어라? 범증 어르신의 사신께서 오시는 줄 알았더니 새파랗게 어린 항우 그 애송이자식의 사신이잖아? 여봐라. 항우같은 애송이의 사신은 이런 화려한 상을 대접해 줄 필요가 없다. 싹 치워라!"

그리고 진평은 진수성찬을 치운 뒤 초라한 밥상으로 항우의 사신을 대접했다. 이 사실을 항우의 사신이 항우에게 그대로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범증을 내쫓았다. 범증은 쫓겨난 뒤 고향으로 가다가 지병이 도져서 사망했다.

그리고 범증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은 항우가 전력을 다해 형양성을 공격하자 진평은 야밤을 틈타 유방으로 위장한 기신(紀信)과 갑옷 입은 군사로 꾸민 여자 2천 명을 동문으로 내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이에 속은 항우가 방심한 틈을 타 진평은 유방을 모시고 서문으로 빠져나가 관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밖에도 의형제 진여의 배신으로 졸지에 백수가 된 장이를 거두어 한신에 부하에 편입시키고 가짜 장이의 목을 진여에게 보내 그를 방심하게 만들다가 한신에 의해 토벌당하게끔 만들었다.

개국 후 그 공으로 호유후(戶牖侯)에 임명된다. 이 와중에도 초왕 한신, 대량왕 팽월, 회남왕 영포를 숙청하는 데 꾀를 써 큰 공헌을 한다.그 덕에 더 풍족한 곡역 지방의 5천호를 식읍으로 받게 된다. 더더욱이 유방의 신임은 극에 달해 진평이 유방을 위해 계략을 6차례 내놓을 때마다 진평의 봉읍 수는 6차례나 증가했다. 그리고 장량은 유방이 관중에 입성한 후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건강관리에 주력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꿔 유방의 제일가는 모사로 활약한다.

그리고 유방이 흉노 원정 중 묵특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자 역시 그 특유의 기지로 묵특에게 한나라 미녀를 보낸다는 소문을 퍼트려 흉노 왕후의 질투심을 부추긴 뒤 유방을 구출해 낸다.

연나라노관이 모반하여 번쾌가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을 때, 고조의 황후인 여후와 인척관계에 있던 자[4]가 번쾌를 죽이려 모함한 사건이 있었다. 유방은 진평과 주발에게 번쾌를 잡아죽일 것을 명했다. 이 때 진평과 주발은 상의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장안으로 연행한 후 죽이는 것은 유방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번쾌를 잡아서 돌아오는 도중에 유방이 죽자, 번쾌는 석방되고 권력은 여후에게 돌아갔다. 만약 진평이 번쾌를 죽였다면 여후는 진평을 살려뒀을까? 진평의 융통성과 대세를 보는 안목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상국 소하조참이 죽자 유방의 유언으로 왕릉은 우승상, 자신은 좌승상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여후를 위시한 여씨들의 전횡에 그는 숨을 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일례로, 강직한 성격인 왕릉이 "왜 그대는 여씨를 내치지 않는가?"라고 격분해 따지자, 이 때 진평은 웃으며 "아직은 때가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라.지금 조정에서 직접 간언하는 것은 내가 당신만 못하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도 나만 못하오"라고 그를 달랬다.[5] 그러면서도 그는 집에 틀어박혀 술만 퍼마시면서 매의 눈으로 여씨들이 느슨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얼마 후 여태후가 사망하자 태위 주발과 공모해 재빨리 그들을 뿌리째 뽑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리고 유방의 넷째 아들인 유항을 문제(文帝)로 옹립한다.

주발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6] 같은 공신인 육가의 중재와 황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의기투합해 여씨천하를 척결한다. 이후 여씨토벌에 공이 주발이 더 크다 하여 주발에게 우승상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한단계 아래인 좌승상을 맡는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주발이 역으로 진평을 추천하여 결국 우승상에 오른다. 여담이지만 진평 사후 주발이 다시금 우승상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주발이 물러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한문제가 승상 직위에 있는 주발과 진평에게 각각 나랏일을 물어보았다. 올해의 재판은 몇 건이나 있는가, 나라의 재정 상태는 어떤가 등의 질문에 대해 주발은 당황하며 대답하지 못한 반면, 진평은 담당하는 관리가 따로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면 될 거라고 답했다. 그러자 문제가 물어보았다.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다면 승상인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가?" 여기에 진평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위로는 황제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를,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맡은 바 직책을 완수시키는 것이 승상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진평에게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궁전에서 나와 주발이 분한 마음에 진평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그런 명쾌한 답변을 알면서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소!" 진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아직도 승상의 임무를 모르셨단 말이오? 가령 폐하께서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어보신다 한들 승상이 그걸 직접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주발은 부끄러워하며 데꿀멍하였고,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는 병을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부터 유방을 따른 수하가 아닌, 중간에 편입된 수하이지만 유방에 입맛에 맞는 계책을 펼쳐 여러 공로로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대세를 잘 살피고 한신, 여후의 예를 보듯이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능력이 뛰어나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처럼 은거한 장량보다 끝까지 남아서 더 많은 활약을 한 진평의 처세술을 더 높게 쳐주는 시각도 있다. 물론 여후 밑에서 치사하게 사느니 은거한 장량이 더 낫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진평은 모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는 모략을 많이 꾸몄는데 이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만약 내 후손이 제후 자리에서 쫓겨난다면 그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내가 음모를 많이 꾸민 화근 때문이리라"라며 말한 바 있다. 그후 진평의 작위는 아들, 손자 때까지 이어지다가 증손자 진하가 남의 아내를 NTR강탈한 죄로 목이 잘리면서 후국은 폐지되었다. 또 다른 증손인 진장이 한무제의 황후 위씨의 형부가 되는 인연으로 가문이 부귀를 누리긴 했지만 끝내 후작의 작위는 찾을 수 없었다고.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전형적인 고우영 그림체의 미남으로 뺀질뺀질하게 구는 모습으로 나온다. 유방 앞에서 과거의 비리나 잘못을 추궁당하자 '뭐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 아닙니까?'는 식으로 뺀질거리고, 유방은 진평의 해명에 낄낄거리면서 오히려 진평을 더 총애하게 된다.

문정후가 그린 '영웅 초한지'에서는 '홍문연' 당시 범증이 유방을 흠뻑 취하게 한 뒤 트집을 잡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의 인품에 호감을 느껴 일부러 유방에게는 술을 조금 따라주고 항우에게는 술을 가득 따라주어 항우가 먼저 취하게 만들어 방해했다.
  1. 개국 이전의 때 부터 각자의 세력에서 중임을 맡아 활약한 점, 개국 후의 엄혹한 정국 속에서 탁발한 처세술과 지모를 발휘해 살아 남은 점, 그리고 은인자중하던 끝에 기회를 보아 대반격을 감행, 국정을 농단하던 여씨 일파와 사인방 세력을 축출해 낸 점, 이후 각자가 속한 국가와 사회에 대대적 도약기를 도래시킴에 있어 공헌한 점 등, 피차 상당히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이 이야기는 그냥 뻘소리가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고기는 아무렇게나 집어먹을 수 없었고 반드시 권위를 가진 사람의 손에서 재분배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식탐을 부리거나 분배자가 신분고하에 따라 고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로 치부되었다. 식지동이란 고사가 이를 잘 나타낸다. 재상의 '재' 역시 짐승을 잡아 요리하는 백정이라는 뜻을 가졌던 '宰'자를 사용한다는 점에도 유의.
  3. 이 도망과정도 파란만장했으니 진평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널 때였다. 사공은 진평의 용모를 보고 분명히 도망치는 장수일 것이며 허리춤에 귀중한 보물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여겨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사공의 낌새를 눈치 챈 진평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배 젓는 것을 도왔다. 사공은 그제서야 진평이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고 죽이려던 생각을 그만 두었다.
  4. 여후의 제부였다고 한다.
  5. 이 말을 들은 왕릉은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 (드립이 아니라 사기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6. 위에 언급한 뇌물수수 사건 때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힌 인물이 주발이었다. 거병부터 유방을 따른 장수 중 하나인 주발 입장에선 굴러들어온 놈이 낙하산으로 감찰직을 맡게 됐으니. 진승상세가에 의하면 이 때 진평을 제일 비난한 사람은 주발과 관영이었다고 한다. 또한 젊을 적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진평은 수없이 여색을 탐하며 형수랑도 검열삭제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런 색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그의 등용을 반대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