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대천왕 | |||
장학우 | 유덕화 | 곽부성 | 여명 |
곽부성(郭富城, Aaron Kwok Fusing)[1]
홍콩출신의 가수 겸 배우. 1965년 10월 26일 생.
아시아중화권의 무왕(舞王)[2]
중화권의 마이클 잭슨
1 개요
1984년 홍콩의 TVB 무용단 전속댄서로 연예계 입문. 당시 유명 가수들의 백댄서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TVB 무용반에서 확실한 안무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나 무용가로서의 미래는 그닥 밝지 않았기에 1987년 TVB 연기반에서 연기 수업을 쌓게 되고 다수의 TVB 드라마와 영화에 단역 혹은 조연급으로 간간히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잘난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3]
아무튼 길고 긴(?) 무명시절을 거쳐서 1990년 4월. 대만의 광양 오토바이(KYMCO) CF에서 스타덤에 올라(물 싸다구 맞고, 인생 한방이다!) 1990년 9월 대니애불완 앨범으로 댄스가수로 정식 데뷔, 첫 앨범이 30만장이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하며 대만에서 그해 최고의 신인으로 입지를 굳힌 후 1991년 "아시불시해안정적주개", "도저유수능구고소아"[4]의 앨범을 연속 히트 시키며 대만에서는 탄탄한 인기를 구축하게 되며 1992년 초 3개 앨범의 정선집(베스트)이 발매되기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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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리즈 시절. 2집 앨범 자켓. 당시 3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 다시 홍콩으로 인기를 몰아오면서 가수, 배우, 모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일명 유덕화, 여명, 장학우와 함께 홍콩 4대천왕중 한 명으로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중이다.
2 역사
한국에서는 영화배우로 더 알려져 있지만, 사실 중화권에서는 가수로서 더욱 입지가 탄탄한 편이다.
대만에서 3개의 앨범(국어)을 동시에 히트시킨 후, 홍콩으로 돌아와 발표한 "도불완 애불완 창불완"[5]이 메가히트를 기록하면서 그 해(1992) 미스홍콩 대회의 네명의 게스트 중 한명으로 초청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함께 출연한 유덕화, 장학우, 여명과 함께 고대왕국의 왕자의상을 입고 멋진 공연을 펼쳤고 이를 계기로 80년대 알란 탐(담영린), 매염방, 장국영의 트로이카 체제 이후[6] 새로운 패러다임을 갈망하던 홍콩 미디어에 의해 4대천왕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고 아직도 이들은 이 카테고리로 수사된다.
당시 곽부성은 다른 천황들에 비해 경력이나 인기, 모든면에서 과연 '천왕'의 자질에 부합한가를 놓고 말이 상당히 많았으며, 그냥 '어쩌다 방송 한번 잘타서 거물급들과 하나로 묶인 행운아', '춤이나 외모 빼면 볼 게 없는 천왕'이라는 조소를 항상 달고 살았으며[7] 이는 그가 "애적호환"으로 1997년 TVB 십대경가금곡 최고 남자가수상을 받음으로써, 이 모든 비판을 일축시키기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하나의 '장벽'이었다.[8]
1993년. TVB 전속계약 만료[9]에 즈음하여 여러 음반사들의 러브콜이 쇄도했지만, 결국 그는 TVB 프로듀서 출신인 기획자 "소미"와 손을 잡고, 당시 유덕화 등이 소속된 "홍콩 워너(Warner)뮤직"으로 소속사 이적을 하게 된다. 곽부성의 연예계 생활은 바로 "소미"를 만나면서 바뀌게 되는데[10] 대만에서 데뷔하여 홍콩에서도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한 임지령[11]에게 밀리는 분위기였는데, 소미를 만나자마자 나온 노래가 곽부성 일생의 노래인 "광야지성". 앨범은 94년 1월에 발매되지만, 곡 자체는 93년 10월부터 이미 전파를 탔고, 노래가 말도 안되게 히트해 버려서 그 해 연말 시상식에선 없던 상까지 만들어서 그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긴다.[12]
곽부성의 94년 광동어 앨범 광야지성 표지
곽부성과 임지령. 93년으로 추정됨. 곽부성이 1965년생. 임지령이 1974년 생
3 음반
사실상 댄스 가수의 불모지인 중화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댄스 가수
1990년 9월 대니애불완(국어)[13]
1991년 4월 아시불시해안정적주개(국어)-10월 도저유수능구고소아(국어)[14]
1992년 6월 도불완, 애불완, 창불완(광동어)[15] -7월 애니(국어)
1993년 1월 파소유적애도류급니(국어)-4월 몰유니적애(광동어)[16]-11월 몽난류(국어)
94년 워너 이적 후 지나치게 다작하던 영화를 줄이고 가수로서 보다 매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다른 스타 연예인들처럼 광동어-국어 앨범을 동시에 내기 시작했고, 이후부터 숨가쁜 "커리어 쌓기"가 시작된다.
94년 워너 이적 후 앨범
1994년 1월 광야지성(광동어)-2월 천애(국어)-5월 천약유정 2 OST-6월 갈망(국어)-9월 철막유혹(광동어).
1995년 1월 아적개시재저리(국어)[17]-6월 순진전설(광동어)-9월 풍불식(국어)-12월 비망록(광동어)
1996년 신합(국어)-8월 최격제국 EP(광동어)-10월 청풍적가(광동어)
1997년 4월 수회기득아(국어)-7월 애적호환(광동어)-10월 애정니(국어) 12월 창저가(광동어)-
1998년 4월 풍리밀마(광동어)-10월 일변경성(광동어)[18]
1999년 5월 갈망무한(국어, 광동어ep)-8월 유원경몽(광동어)-10월 진적파료(국어)
2000년 4월 여도,유쾌(국어)-9월 저미(광동어)
2001년 1월 무기 대 미래(국어, 광동어ep)[19]-7월 신천지(광동어)-12월 절대(광동어)[20].
2002년 6월 폭열선풍(광동어ep)-8월 애정대무대(국어, 광동어 정선집)-12월 공수도(광동어)
2003년 8월 In the still of The Night(광동어)
2005년 Thematics(국어, 광동어ep)
2006년 My Nation(국어)[21]
2010년 영원애불완(국어, 광동어)
이 와중에 94년 "광야유혹 연창회(16회)", 96년 "최격 연창회(20회)"를 성공리에 개최하고 해당 년도에는 한국에 내한하기도 했다.[22]
그렇지만 21세기 들어서 '4대천왕'도 추억 속의 카테고리가 되어버렸고, 지금은 각자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들을 벌이고 있는 거물급 연예인들이 바로 '4대천왕'들의 현주소이다.[23]
일단 홍콩의 인기 가수라면 당연히 치뤄야 하는 '연창회'[24]가 가장 볼만한 가수로 평가된다. 사실상 유일무이한 솔로 댄스가수이며, 기본적으로 볼거리들이 공연 내내 이어지기 때문에 최고의 쇼로 화자된다.[25]
2008년 무림정전 연창회 포스터
4 영화
<흑도영웅>, <신조협려>, <천약유정2>,[26] <호문야연>, <천면은호>, <초류향>, <적각소자>,[27] <낭만풍폭>등의 액션물에서 우수에 젖은 큰 눈동자의 강인한 미청년 이미지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작품 <풍운>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신조협려, 천약유정2, 적각소자, 낭만풍폭, 풍운 정도.
신조협려. 외눈박이 살수 "은호"역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작은 드라마 <풍지도 - 무림계시록(風之刀 武林啓示錄)>. 국내 발매사는 90년대 홍콩 드라마 발매의 전설을 쓴 그 곳.
2000년대 이후 영화에서의 모습은 과거의 강인한 미청년 이미지에서 제법 벗어난 느낌. 여전히 강인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보니...엽기 살인마 같은 역도 맡으며 연기 폭을 넓히려 하고 있다. 2005년 "삼차구", 2006년 "아버지와 아들"로, 대만 금마장(한국의 대종상 같은)에서 2년 연속 남우주연상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룬다. 거기에 드디어 2016년 홍콩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2015년 작 '기향지'). 이 정도면 거의 시상으로는 그랜드 슬램 급(물론 경가금곡의 '금곡금장(올해의 노래)' 정도는 없지만 애초에 곽부성이 '오디오 형 가수'가 아니기에 그정도는 봐줄만 하다.).
안 흔한 50대의 정열적인 로맨스도 보여줄 예정. 작품 이름은 天亮之前. 어차피 국내 개봉 따윈 없다
5 트리비아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며, 국제적인 카레이싱 대회에 선수자격으로 참가할 정도의 스피드광이며, 수준급의 스키 실력 등을 과시한다. 심지어 그의 최전성기인 1998년 연창회가 끝나고 짧은 휴가를 얻자 마자 달려간 곳은 카레이서 라이센스를 딸 수 있는 서킷이 있는 말레이시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 가서 경비행기를 꼭 몰겠다고 하여 매니저인 소미를 멘붕에 이르게 하였다. 이쯤되면 병이다.
자타공인 레이싱 빠 곽부성. 류시퍼와 한 컷
절대 동안, 안 늙는다...
최근 6년 동안 사귄 웅대림(16살 차이)과 결별하였는데 이유는 그녀가 신인시절 찍은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영화라는 말도 있다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내린 결단이겠지만,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를 공개적으로 비난까지 한 것은 글쎄... 거기에 최근엔 대놓고 23세 연하 모델과 사귀는 중. 팡위안(모델) 장위안이 아니다. 최근엔 대놓고 상하이의 고급주택을 사달라고 했다가 서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상하이의 살인적인 집 값을 생각한다면 곽부성이 빡칠만 하다...애초에 여자를 잘못 고른 곽부성도 죄가 없다곤 할 수 없지만(아마 이 형, 평생 결혼을 힘들거야 ㅜㅜ).
참고로 국내 순정만화가 이은혜의 작품 <BLUE>에 나오는 인물 '승표'는 곽부성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천장지구 2편에 나오던 곽부성의 비쥬얼이나 분위기와 아주 흡사하다.
홍콩에선 드래곤 볼의 트랭크스의 헤어가 애론 스타일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물론 실제 트랭크스의 모델은 에드워드 펄롱
한국에선 홍콩 영화가 인기 끌던 시절의 끝물에 가까스로 떠오른 연예인이라, 일반적으로는 "나이는 많지만 잘 생긴 영화배우" 정도의 인지도지만, 홍콩에서는 "전설적인 댄스 가수"이며, 중화권을 통틀어 꽤나 유력한 영화인의 한사람이다. 단지 그가 음반 쪽 전성기를 구가할 1997~1999년에는 사실상 홍콩 음반이 한국에 거의 발매되지 않았으며, 영화쪽 전성기인 2005~2006년에는 홍콩 영화 자체가 한국에 수입되질 않았다. 한국의 곽부성 팬들에겐 꽤나 안습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러모로 한국과는 아쉬운 연예인.[28]
6 근황
2013년 11월 22일에 방송된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 출연하였다.
- ↑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으로 따지면 보통화 발음으로 궈푸청이지만, 광동어가 모어인 홍콩권 인사이므로 꿕푸씽이라 해야 하는게 맞다.
보통 얘들도 광동어로 불러주는 걸 '당연히' 선호한다 - ↑ 중화권 대중가요의 안습한 현실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유튜브 댓글에 "왜 중화권 가수들 중에는 곽부성과 (그나마)두덕위 이외에는 댄스 음악에 발전이 없냐? 전혀 노력을 안한다.
얘들이 마지막일지도"라고 성토할 정도. 5번째 댓글괜히 한류에 열광하는게 아니라니까 - ↑ 굳이 흠을 잡자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비해, 키가 작아-실제로는 167~8cm 정도에 불과- 여러배우들과 동시에 화면을 잡았을때,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었으며, 목소리가 하이톤에 그닥 매력적인 보이스는 아니었다. 초창기 국어 2집까지는 완전 미성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으니 말 다했다!
- ↑ 사실 이 노래는 오자키 유타카의 "I Love You"의 번안곡이다. 하지만 앨범에는 당시 곽부성의 국어 앨범을 총 지휘하던 진수남의 곡으로 실려있다.이유는 불명.
- ↑ 광동어 1집이다.
- ↑ 80년대 3인방이라 불린다.
- ↑ 사실 유덕화와 장학우는 이미 80년대에 데뷔하여, 위에 언급한 3인방 바로 밑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여명은 90년 "상봉재우중" 앨범 발매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92년 이전까지 곽부성은 그저 그의 국어 히트곡 "대니애불완" 정도만 히트한 상태라서, 이들과는 애초에 급이 달랐다.
- ↑ 다른 세 천왕의 팬들로서는 억울할 수 밖에. 물론 92년 홍콩으로 돌아온 뒤 폭발적으로 인기가 상승한 곽부성이라도, 유덕화-장학우는커녕, 여명과도 동급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1997~1999년까지 초 전성기를 맞으면서 곽부성도 제대로 된 천왕의 위치에 오른다.
- ↑ 이 당시만 해도 방송국 소속 가수. 당시 소속사는 '화성(ERA)'.
- ↑ 1992년 홍콩으로 돌아와서 tvb방송국의 쇼프로와 국어곡인 대니애불완과 애니의 뮤직비디오로 소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 ↑ 대만 출신의 남성 배우이자 가수. 국내에는 동갑내기인 '여성' 임지령이 더 유명하지만, 92년 18세 때 대만에서 데뷔하고, 93년 홀로 중화권의 '슈퍼아이돌'로 우뚝 선 인물이다. 홍콩 연예계의 최대 떡밥 중 하나인 "제 5대 천왕(정이건 등)"의 시초가 될 정도로 메가톤 급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 ↑ 홍콩의 3대 라디오방송국인 상업방송 "질타악단유행방'의 연말시상식은 남자가수상을 금,은,동으로 세 명에게만 수여하여 사대천왕 중 한 명은 못 받게 되어 있어 그 결과에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광야지성의 엄청난 히트와 더불어 함께 본 라디오의 특별방송인 광야지성생일음악회까지 열었기에 당시 지존무대금곡("올해의 댄스곡" 정도의 의미)"이라는 있지도 않은 상을 만들어 수상시킬 정도였음.
그래서 한국까지 오셨다. 궝얘지쎙'지구촌 영상음악' - ↑ 데뷔 앨범이다.
- ↑ 이 앨범 녹음 즈음에 자신이 따르던 둘째 형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
그런데 타이틀 곡을 도둑질한 작곡가 - ↑ 홍콩 데뷔 앨범
- ↑ 그의 명곡 중 하나인 우중감탄호가 숨어있는 시기적으로 아쉬운 앨범이다.
- ↑ X JAPAN 요시키의 연주곡인 今を 抱きしめて에 가사를 붙인 노래. 의외로 소미는 요시키와 친분이 있었다.
- ↑ 국어앨범이 나오지 않은 해. 이 당시 음반쪽은 최전성기임에도 국어 앨범이 나오질 않았는데 홍콩쪽에서의 활동이 너무 바빴기 때문.
- ↑ 최창민의 '그녀의 뒤엔 내가 있었다' 번안곡.
- ↑ 왁스의 '오빠' 번안곡(절대미려). 사실 왁스의 '오빠' 역시 신디 로퍼의 'She bop'의 번안곡이다. 이외에도 젝스키스의 Comeback을 번안한 '매복', 박지윤의 '아무것도 몰라요'의 번안곡인 '월만포가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뭔가 친숙한 건 기분 탓이다! - ↑ 워너 이적후 2001년까지는 가수로써 최전성기. 2002년 공수도 앨범으로 완전히 폭망한 후, 정규앨범은 2006년 My Nation 이후 없음. 사실상 2005년 이후로는 음악쪽으로는 연창회를 비롯한 공연에 치중하고 있고, 현재로썬 거의 영화에 매진하고 있음.
뭐, 이젠 영화에서도 꽤 인정받고 잘나가고 있으니 확실히 성공한 연예계 생활은 맞는듯. 다만 영화계는 워낙 세계적으로 쟁쟁한 거물급들, 성룡이라던지, 양조위라던지, 주윤발이라던지, 유덕화라던지... - ↑ 94년부터 98년 영화 "풍운"의 홍보를 위해 방한할 때까지 2년에 한 번씩은 무조건 방한하였다. 그의 국제 팬클럽인 '가미회'중에 '한국가미회'가 있다. 곽부성의 말에 의하면, "한국가미회" 때문에 한국 온다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시전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랬던 사람이 98년 이후 공식적으로 10년 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고, 2008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단물 다 빠진' 모습으로 등장하여 충공깽.
이 형이 장난하나??물론 5년 뒤인 2013년엔 회춘해서 다시 오셨다.아이폰 모델 시켜주셈. - ↑ 유덕화의 경우, 중화권에서 '지존'급의 연예인이며, 장학우는 한국으로 치면 '조용필'급의 위치에 여명은 사업에 바쁘다. 간간히 팬들이 잊을만하면 나타나 주시는 정도. 곽부성만이 나이값(?) 못하고 영화와 공연을 통해 왕성히 활동 중이다.
물론 더이상 앨범은 안나온다. 대신 그동안 내놓은 노래가 워낙 많으니...본인이 부른 노래를 다 기억이나 하면 다행일 듯. 거의 500여곡 이상을 불렀으니 - ↑ 라이브 콘서트를 길게는 한달 가까이 홍콩의 홍캄체육관에서 벌이는 것.
- ↑ 애초에 댄서로 시작했으며, 중화권에선 곽부성을 빼놓고 댄스를 논할 수 없다. 아니 사실상 없다. 중화권 애들이 한류에 열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 만으로 50이 넘은 곽부성을 넘어서는 퍼포먼스 형 가수가 아예 없는게 저쪽 동네의 안습한 현실이다.
내가 고생하고 만다 - ↑ 한국 개봉명 천장지구2
- ↑ 한국 개봉명 적각비협
- ↑ 심지어 98년에 발매된 '풍리밀마' 한국판 앨범에는 그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애적호환"을 놀랍게도 그가 "한국어"로 번안해 부른 "운명"을 보너스 트랙으로 실어서 팬들에겐 감동을 선사하였다.
물론 발음은 안습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