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JAPAN

X JAPAN
밴드명X JAPAN
레이블EMI
소속사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발생지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활동시기1982년~1997년
2007년~현재
장르헤비메탈
파워메탈
스피드 메탈
심포닉 메탈
글램 메탈
멤버YOSHIKI (드럼 & 피아노)
Toshl (보컬)
PATA (기타)
HEATH (베이스)
SUGIZO (기타 & 바이올린)
HIDE (기타)
TAIJI (베이스)
공식 사이트The Official X Japan Website

1 개요

밴드 X 1990년

1982년에 결성된 일본국적의 비주얼계 록밴드.

일본의 록, 메탈계를 대표하는 밴드중 하나로 1982년 일본 치바에서 결성돼 1997년 밴드 해체를 거친 이후 2007년 영화 쏘우 4에 수록된 OST 곡 I.V 를 발표하며 재결성하였다.

이들에 대한 대중의 평은 실제 이상의 과대평가와 그로 인한 반동에서 비롯한 과소평가의 양극단을 오가지만 LUNA SEA, GLAY, Dir en grey부터 나이토메아 등 수많은 후배 밴드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점이나 1992년 일본인 아티스트 최초로 3일 연속 도쿄 돔 콘서트를 성사시킨 일화[1] 등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일본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

기본적인 구성은 트윈 기타로 기타 솔로부분을 두 기타가 나누어서 연주하며, 보통 파타가 백킹 부분을 히데가 리딩 부분을 연주하였다. 근데 배킹과 리딩이 분명 따로이긴 한데, 딱히 내용상 큰 차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단 곡에 따라 차이는 존재한다

2 멤버

멤버 일람
드럼피아노보컬베이스기타기타바이올린
현 멤버[2]YOSHIKIToshlHEATHPATASUGIZO
TAIJIHIDE
전 멤버ATSUSHITERRYEDDIE
HIKARUTOMO
HALLY
JUN
ZEN
KERRY
SATORU
ISAO
멤버 변동 내역[3]
드럼피아노보컬베이스기타기타바이올린
1985년 6월YOSHIKIToshlATSUSHITERRYEDDIE
1985년 12월YOSHIKIToshlTAIJIJUN
1986년 1월YOSHIKIToshlHIKARUZEN
1986년 4월YOSHIKIToshlHIKARUJUN
1986년 11월YOSHIKIToshlTAIJIKERRY
1987년 1월YOSHIKIToshlTAIJIISAOHIDE
1987년 4월YOSHIKIToshlTAIJIPATAHIDE
1992년 1월YOSHIKIToshl공석[4]PATAHIDE
1992년 8월YOSHIKIToshlHEATHPATAHIDE
1997년 9월X JAPAN 해체
2007년 10월YOSHIKIToshlHEATHPATA공석[5]
2009년 5월YOSHIKIToshlHEATHPATA SUGIZO

2.1 YOSHIKI

본명하야시 요시키 (林 佳樹)
출생1965년 11월 20일
출신지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공식 사이트Yoshiki Official Website

본명은 하야시 요시키(林佳樹). X 원년 멤버로서 토시와는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의 오랜 친구로 밴드 내에서의 포지션은 드럼과 피아노. 연주력은 본인의 곡을 소화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수준이나 그 이상 어느 하나 특출나다 보기는 어려운 그런 평범한 정도이고 X JAPAN의 역대 멤버들 중 가장 많은 작/편곡을 했지만 타이지의 탈퇴 이후 작/편곡을 두루 전담한 X JAPAN 시절의 곡들은 요시키 작곡에 타이지 편곡의 X 시절 곡들과는 달리 록-메탈계의 리스너들에겐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6] 현재는 과도한 상업성의 추구와 고질적인 신보의 발매 연기[7]를 비롯한 여러가지 무책임한 행보들로 인해 자신이 쌓아 온 과거의 명성을 깎아먹음과 동시에 수많은 팬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어 버리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막장스런 행보를 보이는 중.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2 Toshl[8]

본명데야마 토시미츠 (出山 利三)
출생1965년 10월 10일
출신지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공식 사이트Toshl Official WEBSITE 武士JAPAN

본명은 데야마 토시미츠(出山利三). X의 원년 멤버로서 요시키와는 유치원에 다닐 무렵부터의[9] 오랜 친구로 맑고 깨끗하면서도 특색이 강한 미성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처음 소년기에 요시키와 밴드를 결성하던 시절에 담당하던 포지션은 기타리스트였지만 중학교 재학 중 본래 보컬을 담당하던 멤버가 사정이 생겨 밴드를 나가게 되어, 이를 계기로 요시키의 권유를 통해 보컬로 전향하였다.

1987년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특유의 맑고 깨끗하면서도 특색이 강한 미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동년 가을경 X가 본격적인 밴드 활동에 앞서 팀의 재정비에 돌입한 뒤 1987년 겨울 X의 활동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기존의 맑은 미성에 허스키함을 가미하는 쪽으로 변화를 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와 더불어 X의 음악, 특히 요시키의 요청에 따라 토시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레코딩에서도 라이브에서도 있는대로 목을 혹사해야 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활동 양상으로 말미암아 토시의 목에는 심대한 무리가 작용하였고 결국, 1995년 겨울 달리아 투어를 통해 X JAPAN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하던 시점에 이르러서는 음역의 하락과 동시에 과거 컨디션이 호조일 시에 보이던 특유의 시원 시원하던 매력 역시도 상당 부분 상실하기에 이른다.

이후 1997년 라스트 라이브와 뮤직 스테이션 및 홍백가합전에서의 마지막 무대 그리고 1998년 히데의 장례식에서 연주한 마지막 진혼가를 끝으로 X JAPAN과는 결별, 이후 사이비 종교 HOH의 교주 MASAYA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HOH의 광고탑으로서의 활동을 개시, 이로서 보컬로서의 기량은 점차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X JAPAN의 해체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년 X JAPAN의 재결합 이후 2008년 3월에 있었던 도쿄 돔 3 Days 공연이나 동년 5월의 히데 추모 공연에서는 지난 10년에 이르는 공백으로 말미암아 생긴 기량의 쇠퇴로 인하여 X JAPAN 시절의 곡들은 부르는 것 조차도 버거워 할 정도의 처참한 모습을 보였지만 1년이 지난 2009년에 이르러서는 일단 마구 질러대는 식으로라도 어찌저찌 X JAPAN 시절의 곡들을 부를 수는 있게 되었고,[10] 2010년 후반기 이후, 2011년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어느 정도는 자신의 본 기량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11]

2014년 8월에는 SMAP나카이 마사히로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인 킨스마(金スマ)에 출연, 공중파 방송을 통해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이자 한편으론 가해자이기도 했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상세히 밝히기도 하였는데 사이비의 종교의 위험성과 그로서 말미암은 고난의 세월들이[12] 여실히 방송을 통해 전달이 되었는 바 시간이 남아도는 잉여로운 위키러들이라면 한 번쯤은 진득하니 시간을 내 해당 영상을 봐 보도록 하자.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영상이 저작권 문제로 차단되어 잘 정리된 글을 링크한다.

2.3 PATA

본명이시즈카 토모아키 (石塚 智昭)
출생1965년 11월 04일
출신지일본 치바현 치바시
공식 사이트PATA Official Website

본명은 이시즈카 토모아키(石塚 智昭). 깁슨 레스폴을 애용하는 기타리스트.[13] 블루지한 플레이를 즐겨한다. '파타'라는 예명은 마야 미네오의 만화 파타리로에서 따왔다고 한다.

존재감이 심히 안습하다. 단순 라이브에서의 존재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밴드에 가입하게 된 계기도 요시키의 트윈 기타 라인업 고집으로 인하여 헬퍼로 가입한 것이었고 밴드 운영에서도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요시키와 타이지의 불화 사이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다가 히데의 설득으로 겨우 타이지 편을 그나마 들어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밴드 내에서의 불화를 그나마 중화 시켜주던 실질적 리더 히데나 항상 많이 싸웟던 요시키와 타이지, 그리고 신임임에도 불구하고 요시키에게 히데 사후 반박을 했던 히스 조차도 못할 정도로 밴드 활동 내에서도 거의 발언력 등은 제로. 말 그대로 거의 밴드 내에서는 기타"만" 치는 존재나 다름 없었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실력은 평범한 수준으로 흔히 같은 팀 내의 히데보다 낫다 못하다를 논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히데 생전 두 사람간 연주를 비교해 보면 현격한 실력차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14]

재결성 이후에는 라이브 시 스기조와 더불어 솔로 연주분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하는 등 ... 이 정도면 그냥 객석에서 아마추어 하나 데려다 연주시키는 게 나아 보인다. [15] 허나 그나마 나았던 구석이 있다면, 구 X Japan의 말기인 THE LAST LIVE〜最後の夜〜 공연에서는 초기부터의 기타리스트로써의 실력을 유지해 나가는 파타와 아티스트로 성장해 버린 히데의 그 당시 상황때문에 기타 연주 실력에서 압승해 버린다.[16]

사실 밴드 안에서 워낙 존재감이 없다 보니 밸런스 조절로 파타에게 어떻게든 뭔가 하나 수식여구를 붙여주려고 찾다가 결국 '실력없는파' 기타리스트, 테크니션 등등의 수식어를 붙이긴 했지만 기타리스트로서도 사운드 메이킹으로서도 히데가 파타보다 더 높으니 애꿎은 히데만 피해를 본 셈이다. 일본 프로야구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다. 초기에는 공연 중에 경기를 보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17] 팬들에게는 멤버들 중 제일가는 애주가로 꼽힌다. 인터뷰에서 받고 싶은 생일선물이 매일 줄지 않고 술이 펑펑 뿜어져 나오는 술병이라고 말한 것부터(...)

연주 앨범이었던 요시키의 솔로 앨범인 Eternal Melody와 더불어 솔로 앨범이 먼저 한국에 발매된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하다. 1집과 2집 모두 한국에 발매되었는데, 참여했던 보컬리스트가 하우스 오브 로즈(House Of Lords) 출신의 제임스 크리스찬이었던 지라 일본어 가사의 앨범이 국내에 수입 및 라이센스 금지가 되던 시절에도 영어 가사라는 이유로 멀쩡히 발매가 되었다.[18] 앨범 스타일은 엑스 시절과는 정반대 스타일인 아메리칸 하드 록 스타일. 평상시 그의 존재감 만큼이나 엑스 골수팬이 아니라면 발매 된 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참고로 전곡의 작곡은 파타가 했지만, 히데와는 다르게 기타"밖에" 칠 줄 몰랐기 때문에 나머지 악기에 대한 편곡은 거의 세션 멤버들에게 맡겼다. 앨범 자체로만 보면 다른 멤버들처럼 솔로 뮤지션으로써의 실력을 보였다기 보다는 그냥 엑스 스타일 이외의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시험삼아 녹음해 봤다 정도이다.[19]

2.4 HEATH

본명모리에 히로시 (森江 博)
출생1968년 1월 22일
출신지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공식 사이트HEATH Official Website

본명은 모리에 히로시(森江 博) 1992년 1월 베이스 주자였던 타이지의 밴드 탈퇴 후 약 반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 새로이 영입된 멤버로 히데의 전 여자친구의 애인이라는 인연이 주효하게 작용해 밴드 X JAPAN에 가입하였다.

밴드 가입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밴드내에 끼쳐온 영향력은 전임자였던 타이지와는 다르게 매우 적었으며 연주력면에서는 굳이 타이지와 비한다고 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 기실 평범한 수준이나[20] 그렇다 하더라도 그 평범한 기량만으로도[21] X JAPAN의 베이스 주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화해내는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22]

X JAPAN으로서의 활동외에는 솔로로서의 활동 및 파타와 함께 도프헤즈(DopeHeadz)라는 밴드 결성 활동한 바가 있다.

2.5 SUGIZO

본명스기하라 유네 (杉原 有音)
출생1969년 7월 8일
출신지일본 가나가와현 하다노시
공식 사이트SUGIZO Official Website

LUNA SEA의 멤버이지만, X JAPAN의 기타리스트로도 겸직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6 HIDE[23]

본명마츠모토 히데토 (松本秀人)
생몰1964년 12월 13일~1998년 5월 2일 (향년 33세)
출신지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공식 사이트hide official web site [hide-city ]

본명은 마츠모토 히데토(松本秀人). 기타리스트. 페르난데스의 시그내처 모델이 따로 있으나 실제 레코딩에서는 깁슨 레스폴을 애용했다고 한다. 멤버들 중 최고의 개념인이자 요시키에 이은 밴드의 2인자.[24] 본인의 영문이름을 밴드에서는 대문자로 표기하고, 솔로활동을 할 때에는 소문자로 표기했다.

기타리스트로서는 평범하다는 평을 듣지만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굉장한 수준. X JAPAN의 작사/작곡은 요시키가 유명하지만, X JAPAN 멤버들에게 가장 적합한 음악을 작곡했던 사람은 히데다. 가령 요시키는 토시의 성량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고음을 내지르는 곡들을 많이 쓰는 바람에 토시가 혹사당하곤 했지만 히데는 토시의 음색을 빛낼 만한 곡을 많이 쓰곤 했다. 다시 말해 곡을 쓰는 성향 자체가 완벽한 밴드음악 중심. 이 때문인지 요시키와 정반대의 음악 성향을 가졌다는 평도 많다.

히데는 전에 활동하던 그룹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를 접고 미용사가 되려던 참에 설득되어서 가입했다…는데 한국에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잡지 락킨F 1998년 11월호에서 요코스카 샤벨 타이거 시절 동료였던 키쿠치(드럼), 쿄(보컬)의 인터뷰에서 '음악을 그만 둘 생각은 없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해산 이후에도 한동안 '요코스카 사벨 타이거'의 히데라는 명함을 사용했었다.

요시키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묵묵히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요시키의 독불장군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던 모양으로, X JAPAN 해체 무렵에 방영되었던 NHK 특집 프로 '엑스 저팬의 궤적'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짜증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외에 X JAPAN의 상업화 러쉬에 열받아, "우리들이 1회용 장기말이냐!"며 술 취해서 롯폰기의 길에서 소리지른 적도 있다. 그래도 밴드에 애착이 깊었는지 토시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어 밴드를 탈퇴하고 싶다고 말하자 갑자기 '토시의 목소리 없는 X JAPAN은 상상할 수 없다'며 밴드를 해체한다는 기자희견을 연 요시키에게 반발하며 밴드의 완전 해체를 끝까지 막으려고 한 멤버이기도 했다.

X 가입 당시 원래 베이스를 맡으려 했으나 타이지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기타로 바꾸었다고 한다.[25] 초기 X의 캐치프레이즈였던 "Psychedelic Violence/Crime Of Visual Shock"는 히데의 작품. 93년을 기점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해서 솔로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솔로 시절에 X JAPAN 시절보다 더 대단한 음악을 보여줬으나 아쉽게도 1998년 5월 사망.

1999년 GMV의 요시키 인터뷰 내용을 보면, 히데 생전에 뉴 X JAPAN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보컬은 기타리스트 히데가 겸할 예정이었으며 4인으로 컴백하려 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요시키에 대한 발언과 X JAPAN에 대한 회의적인 발언을 볼 때 신빙성은 전혀 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2.7 TAIJI

본명사와다 타이지 (沢田泰司)
생몰1966년 7월 12일~2011년 7월 17일 (향년 45세)
출신지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본명은 사와다 타이지(沢田泰司). 멤버들 중 혼자가장 연주력이 뛰어났고 히데와 함께 X의 비주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X 시절 트레이드 마크인 빗자루 머리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26]

X 시절 명곡이라 불리는 곡들은 거의 TAIJI가 손을 댔다. 요시키의 멜로디 메이킹 감각도 타이지의 편곡능력이 없었다면 빛을 못 보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지배적.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러닝타임의 곡들에 엄청난 몰입도를 부여한 것은 타이지의 편곡이다. 요시키의 원곡에 비해 화려하고 정교해진 I'll kill You와 紅(쿠레나이)이 대표적이다.[27]

엑스 재팬의 노래는 요시키의 멜로디 작곡 능력과 요시키의 멜로디를 락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가 있는 리프로 다듬는 히데의 기타 리프 메이킹 능력, 토시의 특색있는 보컬 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의 벨런스를 적절히 조절하고 정돈하는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조화되어 널리 사랑받을 수 있었다.

슬랩, 태핑 등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면서도 이러한 테크닉들이 따로 놀지 않고 곡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뛰어난 베이스 플레이어이며[28], 원래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서 그런지 클래식 기타 연주에도 실력이 있어서 기타 세션까지 할 정도이다.[29] 엑스 시절 히데와 파타에게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기타 실력이 뛰어나다. 그의 실력은 엑스의 탈퇴 직후 곧바로 일본의 전설적 헤비메탈 밴드 Loudness에 곧바로 가입했을 정도. 라우드니스의 기타리스트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TAIJI를 눈독 들여 놨었다가 탈퇴(사실상 요시키의 해고) 일주일만에 곧바로 데려와 버렸다. 타이지는 타카사키 아키라와 개인적인 친분도 꽤 깊다. 애용하는 모델은 킬러의 Dagger, Impulse 모델을 사용하다가 시그내처 모델인 Phoenix 베이스를 사용한다. 물론 레코딩시에는 펜더 프레시전 베이스를 애용.

요시키의 독재적인 밴드운영에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멤버였다. 가입 초창기에는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요시키에 반발하여 밴드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Endless Rain이 발라드와 락의 절묘한 궁합으로 히트하고 멤버들이 발라드 곡 작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30] 요시키가 '앞으로 앨범에 들어가는 발라드 곡은 항상 자신만이 작곡한다.'라는 의견에 반기를 들어 <Voiceless Screaming>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멤버들의 참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본래 요시키의 곡으로만 채워질 예정이었던 Blue Blood 앨범에 히데의 곡 <Celebreation>, <Xclamation>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멤버들 중 가장 창작에 비중이 적었던 토시를 위해서 자신이 작곡한 곡은 항상 토시가 작사를 하게 하였다.

결국 요시키와 잦은 마찰을 겪으며 1992년 도쿄 돔 콘서트를 마치고 해고. 공식적인 이유는 음악성 차이였지만 사실은 Yoshiki의 권고라 쓰고 통보라 읽는다로 인한 해고성 탈퇴였다. 요시키가 혼자 다른 멤버의 두 배가 넘는 인세를 차지하는 데 대하여 항의했던 것이 그 직접적인 이유. [31] 이미 JEALOUSY 앨범 녹음 들어갈 때부터 사실상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계약처분을 받았다. '스튜디오 뮤지션'이란 말 그대로 앞으로는 X JAPAN의 정식 멤버가 아닌 세션 뮤지션 취급을 하겠다는 것. 인디 시절 부터 함께 밴드를 이끌던 타이지의 입장에서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철저히 붕괴시키는 계약이었을 것이다. 즉 인세문제가 나왔을 당시에 이미 요시키는 타이지를 해고처리했다.[32] 도쿄 돔 공연에서도 요시키가 타이지에게 "너는 하루만 무대에 오르고 다른 날은 다른 세션 멤버를 쓰겠다"고 했다가 히데가 요시키를 설득하고 타이지 또한 "도쿄 돔 공연 만큼은 3일 전부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다오"라고 부탁해서 겨우 무대에 섰다고 한다. 이후 벌인 해고 소송에서 패배, 이후 TAIJI는 Loudness를 거쳐 Cloud Nine등등…. 헤메고 헤메이다 이혼까지 당하고 홈리스 생활도 하고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지만, 재활 후 자신의 밴드인 D.T.R을 재결성하여 음악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2011년 7월 14일. 미국 사이판으로 향하던 비행기 내에서 돌연 난동을 벌여 체포되었다가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 병원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되었다가 17일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 락계에서도 칭송받던 베이시스트의 너무나도 허무한 죽음이였다.[33] 여성 매니저와 관련된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유족 중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이 있는데 정글은 언제나 하레와 구우 애니메이션판 주제가[34]마법전대 마지렌쟈의 엔딩곡을 담당한 Sister MAYO다.

3 패션 컨셉

그들의 기괴한 화장은 당시 일본의 헤비메탈 붐으로 인해 우후죽순격으로 난무하던 밴드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 밴드 KISS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35], 사실 가부키식 화장의 경우 이미 1986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야마다 마사키의 밴드인 EZO부터가 시도하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이 화려한 화장과 염색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이는 이후에 후배밴드들이 이어받아 비주얼계라고 하는 일본 록 일부의 독특한 경향성을 형성하게 된다.

4 음악 특징

음악적인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 메탈을 많이 참고하되, 일본식 멜로디와 편곡이 가미된 음악이 되었다. 유럽 파워 메탈의 사생아라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유럽 쪽에서는 X JAPAN 특유의 스타일로 인정받기도 했다. 반대로 allmusic.com같은 영미권 평론 사이트에서는 그들의 기타리프나 악곡면에서 자신들만의 것은 별로 없으나 괜찮은 밴드라는 애매한 평가를 내린다.여기서도 중립적인 척 사실은 특정한 '방향'을 고수하는 올뮤직의 성향이[36] 유럽의 유명 밴드인 아노렉시아 널보사, 드래곤랜드[37], 소나타 아티카 등이 X JAPAN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게 대표적인 예.

이들의 음악의 장르는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곡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스타일은 존재하는 편이다. 최소한 리더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에서만큼은 스피디한 곡과 발라드곡 모두에서 서정성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스타일을 발견해낼 수 있다. 다만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비판도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X JAPAN의 노래는 메탈 아카이브에서는 Heavy/Progressive/Power Metal로 구분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 바로크메탈 계열에서 파생된 멜로딕 파워 메탈 쪽으로 구분하고 있다. '바로크 메탈'이 언급되는 것은 멜로딕 스피드쪽이 기타리스트의 잉베이 말름스틴화, 밴드의 메탈리카화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공연을 매우 조용히 감상하는 특성이 있어서 메탈리카, 마릴린 맨슨 등도 '일본에서 공연은 그다지… 한국에서 공연하는게 훨씬 즐겁다'는 요지의 말들을 한 바 있는데, X JAPAN의 공연만큼은 그런 일본인치고는 열광적인 호응이 있는 편이다. 공연장에서 남자보다 여자들 함성이 더 큰 밴드였다.

과거 십여년 전 국내 팬덤들 사이에서는 X JAPAN에 관해 부풀려진 소문들이 꽤나 돌았었다.[38].) 이런 류의 소문으로는 "요시키가 세계 드러머 서열 3위다."라는 것도 있는데, 애초에 음악인의 수준을 점수화시켜 등수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에 이 발언은 요시키의 드럼 실력과 관계없이 비교적 저급한 수준의 발언이라 할 수 있겠다. 해외 음악 잡지 등에서 가끔 '멋진 기타 솔로 곡', '멋진 주자' 등을 선별하긴하는 경우도 있긴하지만, X JAPAN의 빠들이들이 뿌린 이야기에 관해서는 거의 그 근거라고 할만한 순위 선정 자료나 비교영상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된다. 어찌보면 빠가 까를 만든다의 한 예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기 상으로 영미권 메탈이 전성기에 있을때 일본 내에 등장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음악적으로는 자신들만의 특출난 메탈 리프나 사운드를 가지지는 못했다. 특히 메탈의 인기가 완전히 꺾인 90년대 중반에는 메탈이 거의 배제되고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DAHLIA를 들고나오기는 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하지 못했고 발라드로서 인기를 끌었다.

4.1 한국에 준 영향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음악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표절을 당한 밴드 중 하나일 것이다. X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ENDLESS RAIN은 우리나라의 여러 가수들이 번안곡을 내기도 했다. 코드 진행은 물론 중간의 나레이션이 나오는 부분까지도 똑같기 때문에 일본노래가 노래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X의 팬들이 이 노래를 틀어놓고 ENDLESS RAIN을 부르기도 했다. 그 외에 SAY ANYTHING같은 곡들도 신문에 언급될 정도로 국내에서 많이 인기를 끌었다. 참고로 SAY ANYTHING과 ENDLESS RAIN은 일본 가라오케 내에서도 X JAPAN의 곡들 한정으로 제일 인기가 많은 곡들이다. 국내에서는 X JAPAN의 활동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문화 수입을 금하고 있었던 사정도 있고 해서 소수의 팬들에 의해 불법 수입 되었었다. 이 때문에 X의 노래를 듣는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에야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져서 X JAPAN의 음악을 듣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고 역시 한국 X JAPAN 팬덤의 흑역사인 것은 분명하다.

1993년 발매한 "tears" 라는 곡은 멜로디에 한국 가사만 붙여 mc the max의 잠시만 안녕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참고로 저 tears라는 곡은 X JAPAN의 역대 싱글들 중 가장 크게 히트한 곡이다.

참고로 X JAPAN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밖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매우 많은 밴드 중 하나였다. 일본 내에서만 보자면 B'z, 미스터 칠드런, 사잔 올 스타즈등 저들보다 훨씬 롱런하고 판매량도 더 우수했던 밴드들이 제법 있었지만 해외에서의 인기는 X JAPAN이 저들보다 더 많았다. 단적인 예로 유튜브에서의 X JAPAN관련 영상이나 곡들의 조회수와 댓글 비중이 일본보다 외국이 더 많을 정도. 참고로 유튜브에서는 일본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AKB48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요 그룹들은 자신들의 영상이나 곡들의 조회수와 댓글 비중은 일본이 해외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X JAPAN은 이런 경향이 비교적 없는 편.

5 일대기

5.1 인디즈 시절

인디즈에서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레코드사로부터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리더인 Yoshiki가 세운 자주 레이블 Extasy Record를 통해 VANISHING VISION을 발매한다. 이는 당시 메이져 레코드사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꽤 화제를 모았다. 이 앨범은 오리콘 차트에까지 올랐었다. 이 기록은 디르 앙 그레이I'll가 발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인디즈 앨범이 메이져 차트에 올라간 최고의 기록이었다. 현재까지의 누적 판매량은 17만 2천장 가량. 이후 Extasy Record를 통해서 LUNA SEAZi:Kill등 수많은 거물급 아티스트들을 발굴해 냈다.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 히데가 픽업을 한 것이고 ZI:KILL의 경우 요시키의 말도 안되는 처분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못하다.

X의 판매량에 대해서는 왕창 부풀리거나 왕창 줄이는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일단 공식적 오리콘 통계에서는 총 판매량이 약 1,117만장 정도로 추정된다.

5.2 X 시절

1989년 4월 'BLUE BLOOD'라는 앨범으로 SONY RECORD를 통해 메이져 데뷔. 연말에는 최우수 신인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그 해를 장식한다.[39] 'ENDLESS RAIN', 紅 등 X JAPAN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곡들이 많다.

1991년 7월, 두번째 앨범 'Jealousy' 발매. 이 앨범부터는 메탈리카블랙 앨범을 녹음했던 LA의 레코드실[40]에서 녹음함으로써 음질이 대폭 상승했다. BLUE BLOOD에 요시키의 색채가 진했다면 Jealousy는 멤버 개개인의 색깔이 잘 혼합된 느낌. 당초에는 30분에 달하는 대곡 'ART OF LIFE'라는 곡과 함께 2장의 CD로 발매하려 했으나 요시키와 토시의 건강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 1장만으로 발매했다.[41]

1992년 1월 5, 6, 7일, 역사적인 도쿄돔 3 Days 콘서트.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롤링 스톤즈마이클 잭슨같은 외국의 거물들에게나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이었다.[42] 그도 그럴 것이 도쿄 돔의 수용인원은 4~5만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데뷔하기 전에 "우리는 도쿄 돔에서 공연을 할 거다!"라고 TV에 나와서 떠들었다가 또라이 취급을 받았던 X는 1992년 도쿄돔 3일 연속공연이라는 위업을 달성해 낸다. 사실 지금도 도쿄 돔에서 3일 연속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는 거의 없다.

5.3 X JAPAN 시절

이후 세계 데뷔를 준비하며 이름을 X에서 X JAPAN으로 개명. 미국에 이미 동명의 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초에는 X from JAPAN이었으나 이 이름은 얼마후 바로 흑역사에 묻히고 X JAPAN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HEATH를 영입.

1993년 8월, 29분짜리 한 곡이 실린 앨범 ART OF LIFE 발매. 삶과 죽음을 주제로한 Yoshiki의 반생이 담겨있는 곡. 곡 구상을 위해 2주간 어둠속에 자기 감금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나온 곡이며 가사는 모두 영어. 가사에 일본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X JAPAN의 앨범 중 이 앨범이 가장 먼저 정발되었다. '자살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18세 미만금지로 판매되고 있다.[43]

1993년부터 매년 12월 30일, 31일 토쿄 돔 2일 공연. 토쿄 돔 공연부분에서 X JAPAN은 일본 최다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해외 아티스트들과 비교해도 3위이다. 현재는 토쿄 돔 연말공연 바통을 이어받은(?) KinKi Kids에 의해 깨진지 오래. 10년 넘게 연 3회씩 토쿄 돔 공연을 치뤘으니 버틸 재간이 없다.

1993년 이후부터 전체적인 활동이 줄어들며 멤버들의 솔로 활동 개시. X JAPAN의 싱글이 하나 하나 발매되기는 하였으나 활동은 많이 미비하였다.

1996년, 3번째 메이져 앨범 DAHLIA 발매. 전작 Jealousy로부터 5년이나 걸린 풀 앨범이었으나, 이미 곡들이 대부분 싱글 컷 되어 먼저 릴리스 되었기 때문에 꼭 BEST ALBUM같은 인상도 든다. 앨범 전체에 요시키표 발라드의 비중이 커졌다. 초창기에 X가 가지고 있던 격렬한 느낌이 사라지고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발라드 곡이 많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취향이 갈리기도 하였다. 작곡가인 Yoshiki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라드가 많이 나온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1996년 DAHLIA Tour를 돌던 요시키가 스테이지 위에서 쓰러진후 이후의 모든 스케쥴이 취소, 연말의 토쿄 돔 콘서트에서야 부활하게 되었다. 팬들도 멤버들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건만...

왠지 주욱 조용하다가 1997년 9월 해산 선언. 보컬인 TOSHI가 음악성의 차이를 이유로 탈퇴를 원했기 때문. TOSHI가 탈퇴를 표명한 것은 1997년 4월이었으며, 그 동안 1993~96년 도쿄돔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 작업을 하던 Yoshiki는 X JAPAN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보컬은 TOSHI밖에 없다는 생각에 9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해체를 선언한다. 이 기자회견에 TOSHI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X JAPAN의 멤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Yoshiki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

1997년 12월 31일, '최후의 밤'이라고 명명된 마지막 콘서트가 열렸다.

5.4 해체에서 재결성 이전

멤버였던 hide가 1998년 1월부터 솔로활동을 하다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히데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집중되었다. 히데를 따라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미국의 TIMES 지에 히데의 부고가 실리기도 했다.

토시는 신흥 종교에 빠져서 힐링음악으로 활동했으며 또 다른 멤버였던 히스와 파타는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했었다. 리더였던 요시키는 2002년도에 코무로 테츠야가 리더인 globe에 가입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각트와 S.K.I.N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는데 멤버 라인업이 굉장하다.

5.5 X JAPAN의 재결성 이후

해체한지 10년만인 2008년 X JAPAN이 재결성됐고, 영화 SAWⅣ의 엔딩테마 I.V를 발표한다. 2008년 3월에는 부활공연으로 도쿄 돔에서 3일간 공연을 했다. 같은해 요시키가 월드 투어를 결정했으며 동남아권으로 프로모션을 다녀갔었고 한국에도 같은 해인 2008년도에 한국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재결성의 계기는 바로 돈이 필요했던 토시가 요시키를 찾아가 부탁했기 때문. 하지만 이는 사이비 교주인 마사야의 계략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요시키의 도움으로 2010년경 완전히 사이비 종교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 공연이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멤버의 탈퇴 위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국내 연예기획사와의 마찰로 인해서이다. 한국 공연은 파토났는데 도쿄돔 공연과 타이페이 공연은 SUGIZO까지 가입한 상태로 진행된다.

2011년 10월 2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2009년 5월 1일. HIDE의 11주기를 앞두고 히스와의 갈등이 해결되었음과 SUGIZO(元LUNA SEA)가 정식으로 가입함을 알렸다.

2010년 파칭코화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범인은 산쿄. 공식 홈페이지

2010년 8월 닛산 스타디움 라이브에 전 멤버였던 타이지까지 스테이지에 등장하면서 사상 최초 7인의 X JAPAN이라는 내용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Headwax사(HIDE의 회사로, 현재는 그 동생인 히로시가 사장)로부터 HIDE의 초상권 사용으로 20억엔을 요구해서 서로간에 소송을 하네마네 이전투구중. 정말 고인이 보면 하늘에서 통곡을 할 일이다. 아울러 아직 향후 계획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LUNA SEA 역시 REBOO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HIDE의 초상권 문제와 SUGIZO의 거취에 따라서 팬들의 염원이던 활동 재개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최근에 EMI의 북미 법인과 3년 계약에 성공했다. 북미 한정으로 3월 15일 싱글 JADE 발매 예정. 본 계약은 미국 법인과의 계약이고 일본 쪽 담당인 EMI 뮤직저팬과는 계약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일본 국내의 레이블과도 계약이 없는 상태라서 발매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그나마 일본 도호쿠 대지진의 여파로 무기한 중단되었다.그러나 워낙 발매 연기와 취소가 반복되던 밴드라 팬들도 안티도 다들 그러려니 한다. 아니 자연재해가 아니었더라도 연기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거라는 분위기랄까? 참고로 JADE 싱글의 편곡자로 David Campbell을 영입했는데 그는 X 시절의 명곡인 "Say Anything"의 현악 편곡에도 참여했으며 이승환의 "천일동안",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등의 편곡을 담당한 바로 그 거물급 프로듀서다.]

결국 2011년 6월 29일자로 유럽-동남아-남미 아이튠즈에서 JADE가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었다.

요시키가 골든글로브의 OST를 작곡하면서 미국에서 최우수 해외 밴드상을 받기도 했다. 참고

요시키가 페이스북에 꾸준히 곡을 레코딩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Born To Be Free와 JADE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한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젠 팬들조차 믿지 않는다 2012년 10월 9일에는 요시키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Art of Life 2를 작곡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2020년 발매? 2014년 "HERO"로 컴백예정. 8월 17일 신주쿠에서 뮤비 촬영겸 공연을 했다.

세계적인 밴드 미스터 빅의 에릭 마틴이 Forever Love를 커버해서 불렀다. 링크

신곡은 그 나이대의 밴드들이 다들 그렇듯이 창작력 면에서 한계가 있고, 하다못해 옛날 곡이라도 잘 부르면 좋으려만 재결성 후의 X JAPAN은 곡 사이의 인터벌이 너무 길어졌다. 덕분에 예전 세트리스트의 90%를 그대로 연주하는데 공연 시간은 4시간을 육박한다.

2013년에 요시키가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해서 Forever Love의 뮤직 스테이션 버전을 연주했는데, 오오시마 유코가 감동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꽤나 난리였다.


2014년 6월 17일 워너 뮤직을 통해 The World ~X JAPAN 첫 전세계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였으나 이미 그 이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FAN'S SELECTION이 8만 장 정도로 그치는 부진한 판매량을 보였는 바[44] 이 앨범 역시도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0월 1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콘서트를 했다.

이 콘서트 때문에 9월 30일-10월 1일에 이루어졌던 일본 콘서트에서 보컬 토시가 목을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했다 ... 그냥 힘들어서 그런 듯

기사에는 열정적으로 19곡을 연주했다고 했지만, 사실상 별로 한 곡은 없고 중간중간 피아노 솔로, 바이올린 솔로 등을 한 곡으로 취급해서 그렇다. 실제로는 14곡 수준. 여러모로 안습. 공연 시간은 역시 거의 약 4시간.

2014년 11월 말, 요시키가 인터뷰로 앨범이 80%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하는 말이 "4월 완성 예정이지만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네요"이다. 자기도 욕을 먹는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이건 애초에 본인 잘못이라 뭐 딱히(...)

2015년 2월 25일 밤 요시키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Master Album Sequences 2.24.15라고 적힌 CD 사진을 올렸다. 과연 신보가 그의 말대로 4월에 완성될까?
참고로 12개의 트랙이 나와있으며 1번 트랙은 The Last Song 2번 트랙은 Jade 3번트랙은 Beneath the skin 4번 트랙은 Hero로 예상되는데, 이럴 경우 신곡과 예전곡이 섞인 또 하나의 지겹다 정말 베스트가 아닐까 예상된다. 링크

그리고 역시나 4월에 내온다던 앨범은 한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포기하면 편해.

그러던 중 2015년 6월 22일에 XDAY IS COMING이라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신곡이 약간이지만 배경음으로 깔려 있었다. 매우 가까운 시일에 깜짝 소식이 있다고 하는 걸로 보아, 20년만의 앨범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The Last Song'같은 기존의 곡들도 포함되긴 하지만, 사실 이 곡은 앨범에 속해 있지 않은 싱글로만 발매된 곡이었고 또한 마지막 곡이라는 뜻의 곡이 앨범의 첫 트랙이 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재결성한 다른 밴드들이 앨범을 내는 것을 보고 고통받던 X의 팬들이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새로운 앨범의 발매 일자는 기존에 말해 온 2015년 연내가 아닌 2016년 3월 11일로 정해졌다. 또 통수를 쳤다. 이에 팬들은 앨범이 나온다는 기쁨과 함께 또 미뤘다는 데에 분노하였다. 예전 jade 때도 3월 11일 발매였으나 미뤄졌던 전례가 있어 걱정하는 중이다. 영원히 고통받는 엑스의 팬들.

2015년 8월 20일 요시키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 투어 라이브를 발표했는데, 이는 DAHLIA TOUR 이후 약 20년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투어에 관심있는 위키러들은 참고해도 된다.
그리고 2016년 3월 11일 앨범 발매 후 다음 날 영국 웸블리 아레나 라이브와 같이 공개될 X JAPAN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트레일러가 공개 되었다.
2016년의 앨범에 앞서 2015년 10월 23일 싱글 앨범이 나온다고 덧붙였는데 요시키 본인이 레이블과의 계약으로 인해 곡명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새 앨범에 수록될 것으로 예상되는 곡인 KISS THE SKY, HERO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특히 기자회견을 통해 요시키가 새 앨범 제작에 관해 대답한 바, 레코딩은 한창 진행중이라고

본인이 웸블리 아레나에서의 라이브는 기본적으로 20년만의 새로운 앨범 발매 기념이기 때문에, 스스로 데드라인을 그어놨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본인도 앨범을 계속 미루던 과거사가 존재하다보니 이번에도 안나오면 본인은 업계에서 확실히 묻혀버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팬들 두번 죽일 일 있냐 특히 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X JAPAN이 여러가지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해 공백 기간이 길었지만 그 기간이 무색할만큼 최고의 앨범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2015년 11월 6일에 첫번째 싱글 Born to be free가 발매된다고 요시키가 SNS를 통해 알렸다. 앨범 커버가 야하다 이 놈들 앨범 커버는 왜 다 이래[45]

어째서 1st Single로 표기한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JADE가 디지털 싱글이라 싱글로 치지 않는 듯 하다.
2015년 11월 26일, 2015년 NHK 홍백가합전 출장이 발표되었다. 1997년 이후 18년만의 홍백가합전 출장.

2015년 12월 1일, 일본 투어 요코하마 공연에서 신곡 Angel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일본 투어 공연을 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 팬들은 이젠 그냥 살아서 라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하긴 이제 나이가 거진 50줄들이니 연예계 은퇴를 안하고 있는 것만으로 놀라울 따름
토시의 경우 세뇌시절 다친 허리의 후유증으로 인해 히로시마 라이브에서 아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요시키는 건초염으로 인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 만신창이 상태로 라이브에 임하고 있다.
멤버들도 이젠 그저 돈 때문에 한다기보단 비장함이 묻어나오는 상황. 요시키의 멘탈이 많이 성장하기도 해서 예전처럼 욕도 먹지 않는다.
물론 파타가 연습을 제대로 안 해서 자꾸 연주를 틀리거나, 앨범 레코딩이 심각하게 오래 걸리는 건 좀 짜증난다는 반응...

일본에서는 아직도 인기가 건재하다. 무서운 밴드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요즘 TV출연이 잦은 탓에 젊은 층의 반응이 많다. 대체로 무서울 줄 알았지만 친근함에 놀랐다는 반응. 라이브도 인상적이라는 반응이다.

한 칸쟈니 팬이 테레아사 드림 페스티벌에 출연한 X JAPAN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신을 보았다면서 글을 쓴 것이 요시키의 RT 덕분에 일본 내에서 꽤나 화제가 되었었다. 가창력이나 연주력 등이 뛰어난 가수들은 많지만, 엑스 멤버들의 연주는 카리스마 그 자체여서 분위기게 압도당한다고......

우리 나라에서는 90년대에 퍼진 빠들의 엄청난 과장 덕분에 안티가 늘어서 X JAPAN은 90년대에나 유명했지 그 이후부터는 인기 하나도 없는 퇴물 밴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 TV출연이 잦은 엑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 무서운 이미지의 밴드라는 이미지는 있어도(...).

사실 십수년전 엑스재팬에 관해 국내에 퍼졌던 이야기들 중에는 극성 팬들의 과장섞인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엑스재팬이 싫다는 측 역시도 극성 팬들의 그것에 못지않게 과장되고 허황된 비방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반일 감정으로 인해 밴드 이름부터 재팬이 들어가 있는 밴드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태극기를 태웠다는 루머가 퍼진 것이 대표적. 어디까지나 루머이긴 했지만.

오히려 젊은 층의 팬들이 늘어난 추세이다. 물론 아이돌 가수의 팬층과 같은 열광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엑스의 공연을 본 젊은 사람들이 엑스의 카리스마에 반해 팬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엑스가 TV출연이라도 하는 날에는 일본의 트위터가 대부분 X 관련 내용일 정도.

현재 일본의 가수들이 엑스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방송 중 관중석에 가서 공연을 보거나 해서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라시의 멤버들조차 관중석에 나가서 봤다고 고백하고, 다른 밴드의 멤버가 엑스 공연에 난입해서 같이 뛰어 다니거나 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5년 크리스마스,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 출연해서 Born to be free와 X를 연주하였다.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물리치고 10여분 동안의 엔딩 무대를 맡았는데, 엄청난 포스로 또 일본 전역에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아이돌 팬이 많아서 10대~20대의 여성 관객들이 많았는데[46]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관객들도 다같이 X점프를 하며 흥분된 분위기였다. 게다가 무려 첫 곡인 Born to be free때는 산타 복장을 입고 연주했다(...).

2015년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백팀으로 출전하여 Forever Love와 Born to be free를 연주하였다. 아울러 요시키의 피아노 옆에 타이지의 베이스와 히데의 기타를 함께 놓아 두었다.

그러던 중 2016년 1월 18일, 파타의 건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다는 발표가 났다. 팬들은 파타를 걱정하면서도 또 앨범 발매와 콘서트가 뒤로 밀리는 게 아니냐 하는 불안감에 걱정하고 있다.

결국 새 앨범과 웸블리 공연이 연기되고 말았다. 공연은 2017년 3월 4일로 미뤄졌고 앨범 발매는 잠정 보류. 엑스 팬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면 의도적인사건이 터졌기 때문. 물론 이번 상황은 파타가 중환자실에 입원까지 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반응이다.

2016년 3월 17일에 이르러서야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던 파타가 비로소 퇴원했음을 알렸다. 요시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파타는 안정을 취한 후, 8월 경에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발매 예정이었던 새 앨범에 대해서는 빠르면 가을, 어떻게든 연내에는(...) 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2016년 7월 말에 Jealousy 앨범을 Blu-Spec CD로 리마스터링해서 새롭게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 앨범

VANISHING VISION》(인디 앨범) (1988년 4월 14일)
BLUE BLOOD》 (메이저데뷔 앨범) (1989년 4월 21일)
Jealousy》 (1991년 7월 1일)
ART OF LIFE》 (1993년 8월 25일)
DAHLIA》 (1996년 11월 4일)
《BLUE BLOOD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Jealousy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6.2 싱글

  • I'LL KILL YOU (1985년 6월 15일)[47]

1. I'LL KILL YOU (요시키 작사, 작곡)
2. BREAK THE DARKNESS (요시키 작사, 작곡)

  • オルガスム (1986년 4월 10일)[48]

1. オルガスム (요시키 작사, 작곡)
2. Time Trip Loving (요시키 작사, 준 작곡)[49]
3. X (요시키 작사, 작곡)

  • (1989년 9월 1일)

1. 紅 +YOUR VOICE -1989.6.10 日比谷野音ライブより収録- (요시키 작사, 작곡)
2. 20th CENTURY BOY -1989.6.10 日比谷野音ライブより収録- (마크 볼란 작사, 작곡)

1. ENDLESS RAIN (요시키 작사, 작곡)
2. X -Live Version- (요시키 작사, 작곡)

  • WEEK END (1990년 4월 21일)

1. WEEK END (요시키 작사, 작곡)
2. ENDLESS RAIN -LIVE VERSION, Recorded at NIPPON BUDOKAN 1990.2.4.- (요시키 작사, 작곡)

  • Silent Jealousy (1990년 4월 21일)

1. Silent Jealousy (요시키 작사, 작곡)
2. Sadistic Desire -재녹음- (요시키 작사, 히데 작곡)

  • Standing Sex / Joker (1991년 10월 25일)[50]

1. Standing Sex (五十嵐美由姫 작사, 히데 작곡)
2. Joker (히데 작사, 작곡)

  • Say Anything (1991년 12월 1일)

1. Say Anything (요시키 작사, 작곡)
2. Silent Jealousy -Live Version- (요시키 작사, 작곡)

  • Tears (1993년 11월 10일)

1. Tears -X JAPAN Version- (白鳥瞳&요시키 작사, 요시키 작곡)
2. Tears -Classic Version- (요시키 작곡, 조지 마틴 편곡)

  • Rusty Nail (1994년 7월 10일)

1. Rusty Nail (요시키 작사, 작곡)
2. Rusty Nail (Original Karaoke)

  • Longing 〜跡切れたmelody〜 (1995년 8월 1일)

1. Longing 〜跡切れたmelody〜 (요시키 작사, 작곡)
2. Longing 〜跡切れたmelody〜 (Original Karaoke)

  • Longing 〜切望の夜〜 (1995년 12월 11일)

1. Longing 〜切望の夜〜 (요시키 작사, 작곡)
2. Longing 〜切望の夜〜 (Original Karaoke)
3. Longing 〜切望の夜〜 (The Poem)

  • DAHLIA (1996년 2월 26일)

1. DAHLIA (요시키 작사, 작곡)
2. TEARS -'93 TOKYO DOME LIVE VERSION- (白鳥瞳&요시키 작사, 요시키 작곡)

  • Forever Love (1996년 7월 8일)

1. Forever Love (요시키 작사, 작곡)
2. Forever Love (Original Karaoke)

  • CRUCIFY MY LOVE (1996년 8월 26일)

1. CRUCIFY MY LOVE (요시키 작사, 작곡)
2. WEEK END -'95 TOKYO DOME LIVE VERSION- (요시키 작사, 작곡)

  • SCARS (1996년 11월 18일)

1. SCARS (히데 작사, 작곡)
2. White Poem I -M.T.A. Mix- (요시키 작사, 작곡)

  • Forever Love (Last Mix) (1997년 12월 18일)

1. Forever Love -Last Mix- (요시키 작사, 작곡)
2. Longing -Bootleg- (요시키 작사, 작곡)

  • THE LAST SONG (1998년 3월 18일)

1. THE LAST SONG (요시키 작사, 작곡)

  • I.V. (2008년 1월 23일/iTunes 한정 발매)

1. I.V. (요시키 작사, 작곡)

  • Scarlet Love Song (2011년 6월 8일)

1. Scarlet Love Song -BUDDHA MIX- (요시키 작사, 작곡)

  • Jade (2011년 6월 28일)

1. Jade (요시키 작사, 작곡)

  • BORN TO BE FREE (2015년 11월 6일)

1. BORN TO BE FREE (요시키 작사, 작곡)

6.3 라이브 앨범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 (1995년 1월 1일 발매)
《LIVE LIVE LIVE TOKYO DOME 1993-1996》 (1997년 10월 15일)
《Live Live Live Extra》 (1997년 11월 5일)
《LIVE IN HOKKAIDO 1995.12.4 BOOTLEG》 (1998년 1월 21일)
《ART OF LIFE LIVE》 (1998년 3월 18일)
《The Last Live》 (2001년 5월 30일)

6.4 컬렉션 앨범

《X SINGLES》 (1993년 11월 21일)
《B.O.X ~Best Of X~》 (1996년 3월 21일)
《BALLAD COLLECTION》 (1997년 12월 19일)
《Singles ~Atlantic Years~》 (1997년 12월 25일)
《Star Box》 (1999년 1월 30일)
《PERFECT BEST》 (1999년 2월 24일)
《X JAPAN BEST ~FAN'S SELECTION~》 (2001년 12월 19일)

《THE WORLD ~X JAPAN 初の全世界ベスト~》(2014년 6월 17일)
  1. 1992년 1월의 도쿄 돔 3 Days 라이브 뿐만 아니라 1991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던 첫 필름 기그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수와 동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바이올런스 인 젤러시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수까지 전부 다 합산하면 근 1년간 동원한 관중의 수가 거의 3~40만명에 이른다. 물론 이것 역시도 일본 음악계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그리 대단하다 볼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메탈 밴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라는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2. 이미 고인이 된 HIDE와 TAIJI 마저도 그 상징성을 감안, X JAPAN 측은 여전히 현 멤버로서 분류한다.
  3. 1987년 밴드 X의 5인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X를 거쳐갔던 멤버들은 정확한 가입시기 및 탈퇴시기를 알 수가 없어 그 당시에 개최되었던 각 공연별 연주자 기록을 참고로 하여 임의로 표를 작성하였다.
  4.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별도 계약을 거쳐 끝내 YOSHIKI로부터 탈퇴 의사까지 종용받은 TAIJI가 1992년 1월, 도쿄 돔에서의 무대를 끝으로 X를 떠난 이래 해당 파트는 쭉 공석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었다.
  5. 이 시기의 SUGIZO는 X JAPAN의 정식 멤버가 아니었다.
  6. 혹자들은 이 리스너들의 판단을 두고 곧 일반 대중의 판단과 혼동하여 말하곤 하는데 타이지의 탈퇴 이후 X JAPAN의 인기가 사그라든 건 엄밀히 말해 밴드 자체의 응집력이 떨어져 눈으로 보이는 활동량 그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지 절대 음악성의 변화, 음악이라는 것 그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보편적인 대중의 안목은 X의 음악과 X JAPAN의 음악간의 차이를 구별하고 그 호오를 따질 만큼 그리 민감하고 깐깐하지 않다.
  7. 요시키 본인의 프로젝트인 VIOLET U.K.의 신보 발매 연기와 재결성 X JAPAN의 신보 발매 연기를 합산하면 그 총합이 무려 10년 이상. 특히나 2015년에는 연초부터 내일이라도 당장 앨범을 내겠다는 듯 분위기를 잔뜩 띄워 놓고서는 “올해 안에 반드시 앨범을 내겠습니다”라던 말이 “올해에는 앨범이 나오리라 생각한다”라고 말이 바뀌더니 약속의 때가 되자 보란듯이 앨범의 발매일을 또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미뤄버렸다. 그리고 2016년에는 멤버 파타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활동 자체를 잠정중단해버렸다.
  8. 2010년까지는 TOSHI라는 명의를 사용했으나 이후 개명. 참고로 Toshl의 마지막 알파벳은 대문자 I가 아니라 소문자 L이다.
  9. 4살 때 유치원에서 같은 스미레구미(제비꽃반)에 속한 것이 인연이 되었는데, 요시키와 토시를 묶어 스미레구미라고 부르는 것을 밀고 있는 듯.
  10. 길었던 공백으로 말미암아 쇠퇴할대로 쇠퇴한 기량과는 반대로 목에 가해지던 부담 역시도 줄어 있었던 바 목의 상태 자체는 매우 좋아져 한순간이나마 질러대는 고음의 음역대나 파워만큼은 87~88 인디 시절이나 앨범 젤러시의 발매 직후였던 1991년, 토시 본인의 최전성기 시절과도 견줄만한 수준으로 돌아와 있었다.
  11. 단 어디까지나 비로소 납득이 될만한 정도에는 이르렀다는 것 뿐이지 아직도 부족한 점은 많은 것이 2008년 재결성 이후 201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음부에서의 문제는 여전히 개선이 되어지질 않고 있고 고음부에 있어서는 현재 밀고 있는 세트리스트의 주요 곡들 중에서는 ENDLESS RAIN, Silent Jealousy, 紅, Forever Love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곡들은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가 가능 ART OF LIFE는 목 상태에 따라 완창이 가능할 때가 있고 불가능할 때가 있는 정도이지만 문제의 Rusty Nail만큼은 2008년 재결성 이후 단 한번도 제대로 된 목소리로 확실하게 소화해 낸 적이 없었다.(1997년 해체 이전 Rusty Nail의 고음부는 여유롭게 부르면서도 의 고음부를 부를 때는 다소 버거워하는 감이 있었던 것과는 반대) 그리고 X는 뭐 ... 이제와서는 상징적인 의미를 감안해 빠질수가 없는 곡일 뿐이지 실상 1993년 ART OF LIFE 발매 이래 음역이 깎이고 나선 한 번도 제대로 부르지를 못하던 곡이 이제 와서 제대로 불러 질리가...
  12. 장장 12년에 걸친 세뇌와 착취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 한화 100억원 이상에 달하는 금전의 손실 그리고 X JAPAN Toshl의 이름을 빌어 사이비 종교의 광고탑으로서 활동하며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양산하는데 일조했던 명백한 과오와 그로인한 명예의 실추 등
  13. 한정 수량 밖에 생산이 안돼서 가격이 엄청 비싼 1959년깁슨 레스폴 커스텀 모델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히데도 하나 갖고 있다.
  14. 두 사람의 플레이 상 취약점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은 X의 솔로 부분으로 이 부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음 하나 안 나가는 클린으로 넘긴 예가 거의 없었는데 92년 도쿄 돔 라이브를 비롯한 X 시절은 좀 나은 편이나(이마저도 일단 실수 없이 연주를 하는 것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았고 실상 Stab Me In The Back이나 SADISTIC DESIRE에서처럼 매끄러운 연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달리아 투어 시기에 이르러서는 히데나 파타나 매 라이브마다 거진 음 하나씩은 꼭 나가기가 일쑤였다. (라스트 라이브에서의 연주를 제외하면 히데가 클린일 경우 파타가 미스, 파타가 클린일 경우 히데가 미스 아니면 아예 둘 다 미스, 늘 이런 식이었다.)
  15. 누군가가 위키에 <Voiceless Screaming>의 기타 연주를 히데가 하기 어려워 해서 파타가 대신 쳤다는 루머를 적어뒀는데 <Jealousy> 앨범 수록곡인 <Voiceless Screaming>의 클래식 기타 연주는 파타가 아닌 작곡자인 타이지가 직접 연주한 곡이다. 라이브에서도 직접 클래식 기타를 들고 연주한다.[1]
  16. 그 당시 공연을 자세히 들어보면 히데는 연습부족(개인 음악작업, 연예활동)으로 자꾸 운지가 나가고, 박자가 절리는 걸 들을 수 있는데 파타는 아주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 준다.
  17. 경기에서 이기면 신나서 날뛰었지만 진 날에는 우울해서 짜져있었다고 한다(...)
  18. 비슷한 시기에 함께 한국에 라이센스 발매된 음반인 스기조의 SOUNDTRACK 앨범이나 엑스의 BEST OF X 앨범 등은 일본어 가사라는 이유로 연주곡을 제외하면 당시 곡들이 모두 잘렸다.
  19. 실제 히데는 기타와 베이스 이외에 다른 악기에도 관심을 많이 보이며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타이지는 기타와 베이스 모두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곡을 쓸 수 잇는 능력을 가졌다.
  20. 그래도 SCARS의 베이스 라인은 엇박이 심해서 카피하기가 그리 수월치만은 않다.
  21. 타이지 개인의 기량과는 별개로 X JAPAN 곡들 자체의 베이스 라인 연주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22. 물론 극히 일부 구간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라고는해도 Silent Jealousy에서의 솔로 파트라던지 X에서의 솔로 파트 연주분들과 같은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
  23. 밴드 활동으로는 대문자를 쓰지만, 솔로 활동으로는 hide라는 소문자를 쓴다.
  24. 음악적으로 핵중의 핵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요시키 개인의 성격이 어땠든 밴드에서 최중요 멤버는 메인 송라이터이기 때문. 대중들이 엑스 재팬 하면 떠올리는 것은 요시키가 작곡한 발라드와 스피디 넘버이지 히데의 곡이 아니다. 히데의 곡들은 요시키 노래 위주의 앨범에 일관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로 들어가는 경우기 때문에 사이드킥(?)이 맞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리프 메이킹이나 편곡도 작곡 못지 않게 중요한 분야긴 하지만 극단적으로 설명한다면 작곡된 것이 없으면 편곡할 일도 없고 리프를 만들 수도 없다. 이 문서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본인의 생전 성격이나 밴드에서의 위치도 딱 그 정도의 2인자. 물론 비주얼이나 인간관계면의 핵이긴 했다.
  25. 반대로 타이지는 요시키가 타이지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경력을 들먹이며 기타리스트로 포지션을 바꿀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베이시스트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가입 초기부터 요시키가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밴드를 탈퇴했다가 히데가 베이스 자리를 양보하고 "우리가 작심하고 같이 힘을 합치면 밴드는 반드시 전설이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여 밴드에 재가입하게 된다.
  26.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가 X JAPAN의 비주얼은 모두 히데가 담당했다는 것인데 오히려 X 초기 인디 시절에는 히데가 음악적 부분을 담당했고 타이지가 X의 비주얼을 담당했다. 이것은 타이지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공식 팬클럽이라는 Weekend에도 히데의 작품이라고 적어 놓는 오류를 범했다
  27. 紅은 원래 요시키가 앞부분에서 쓰기를 포기한 곡이었지만 타이지와 히데가 설득하고 그들이 대부분을 다시 작곡해서 만든 곡이다. 결국 타이지와 히데의 판단은 적중해서 紅는 그들의 대표곡이 된다.
  28. Rose of Pain의 태핑부분은 굉장하다.
  29. Jealousy앨범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에서 그의 클래식 기타실력을 잠시 맛볼 수 있다.
  30. 본래 요시키는 Endless Rain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했으나 타이지가 '그럼 다른 멤버들은 네가 피아노 칠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그리고 매탈 밴드가 기타 솔로도 없는 발라드 곡을 연주하냐' 라면서 락 발라드 형식으로 편곡하여 앨범에 들어가게 된다.
  31. 당시 타이지는 결혼 비용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였다고 한다.
  32. 이 부분은 타이지의 문제도 있었다. 약물, 알콜 중독 문제가 있었고 X의 연습을 빠지고 라우드니스친목질을 하러 놀러간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33. '순수하지만 미숙한' 성향의 멤버들끼리 빚은 이런 비극적 과정은 브리튼 연방의 모 명작소설에 묘사된 등장인물들과 충격적 결말을 연상시킨다.
  34. 애니메이션 전체 시리즈 오프닝, DX에서는 오프닝/엔딩
  35. 실제 요시키와 토시, 히데가 KISS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위쪽에 서술되어있듯이 엑스제팬 특유의 빗자루 머리를 만든 멤버 타이지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 듯 하다.
  36. 리뷰란에 네티즌들이 직접 리뷰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 이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리뷰를 통째로 지워버리기도 한다.
  37. 이 경우는 트리뷰트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보컬 요나스가 팬 서비스로 한 곡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38. 예를 들면 요시키가 세계에서 드럼을 가장 빨리 친다거나. 히데가 세계 제일 속주의 슈퍼 기타리스트라거나 히데의 오래된 팬들조차도 이런 발언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실제로 히데의 연주는 그렇게 빠르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그저 그런 수준의 연주이고, 냉정히 말해 히데도 욕먹는 파타 못지않게 꽤나 연주를 많이 틀린다. (물론 히데가 기타를 못 친다는 게 아니라, 잉베이 말름스틴이나 크리스 임펠리테리같은 일반적인 속주 기타리스트들과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평균적인 '프로' 기타리스트 정도
  39. 단 1989년에 실질적으로 일본 대중들에게 히트했던 곡은 걸즈 록 밴드 PRINCESS PRINCESSDiamonds였다.
  40. 후에 요시키가 사들였다가 다시 매각했다.
  41. ART OF LIFE의 락 부분 편곡은 타이지가 마지막으로 편곡을 담당한 곡이다.
  42. 그렇다고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한 록밴드가 X가 최초라는 말은 아니다. 도쿄돔을 개장했던 해인 1988년에는 BOØWY가 4월 4, 5일에 이틀 연속으로 해체 라이브를 개최했었고, 다음 해인 1989년에는 BUCK-TICK이 라이브를 했었다.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했었던 아티스트들 목록 참고.
  43. 단 한 소절때문이라고 한다.
  44. 애초부터 악곡의 수가 턱 없이 적어 베스트 앨범을 가지고는 별다른 재미를 못 보고 있었는 바 이 점에 대해서는 BALLAD COLLECTION 53만 장, PERFECT BEST 25만 장을 제외한 거진 10만 장 이하를 밑도는 부진한 판매량이 증명한다.
  45. 사실 예전에는 요시키가 직접 누드 커버 모델을 했는데 JADE 이후 모두 여성이라...
  46. 우리나라 드림 콘서트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돌 팬클럽 단위로 관람
  47. 인디 최초의 싱글. 1000장 한정 발매
  48. 인디 두번째 싱글. 2500장 한정 발매
  49. 인디 시절의 멤버가 작곡한 유일곡
  50. 앨범 미수록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