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觀德亭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의 하나로 이름의 유래는 예기 사예편에 나오는 "활쏘기란 그의 높은 덕을 살펴보는 것(射者所以觀盛德也)"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으며, 관덕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의 관아마다 활쏘기가 포함된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지면서 관덕정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 건물들과 함께 헐려 나갔다. 건물 자체가 온존하는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이 유일하며, 관덕정이라는 건물로써도 제주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

현재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으레 활터에 붙는 이름으로 쓰이며, 창경궁에도 마찬가지로 왕이 활을 쏘던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남아 있다.

1 제주 관덕정

제주도에 남아 있는 관덕정은 조선 시대에 처음 세워진 이래 현재까지 헐리지 않고 그 자리를 온전히 보존한,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덕정 건물이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2동. 세종(世宗) 30년(1448년)에 제주목사 신숙청이 처음 지었으며,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정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으로 처마가 길고 건물 높이가 낮은 제주도 건축의 특징을 갖추었다.

관덕정이 위치한 곳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칠성통이 가까이 있고, 제주도 행정의 중심인 제주목 관아(2002년 복원)와 성주청이 있었고, 관아가 헐린 뒤에는 제주도청이나 경찰서, 건너편에는 식산은행이 위치해 있었고, 해방 뒤에는 관덕정 바로 옆에 미군정청이 설치되었다. 덕분에 관덕정 앞에서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는데, 당장 이재수의 난 때는 제주성에 입성한 이재수가 관덕정 앞에서 악질 봉세관에 빌붙어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고 종교를 앞세워 제주의 토속신앙을 파괴한 사이비 신자들을 잡아다 처형했고, 4.3 사건을 촉발시킨 3.1절 발포사건이나 한라산 남로당 무장대의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관덕정 앞에 본보기로 내걸렸다.[1] 관덕정 앞에서 '산폭도' 혹은 '군경 가족'으로 몰려 공개처형당한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고. 그야말로 관덕정 한 곳에서 제주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나 뒤집히고 요동쳤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때는 미문화원으로 쓰인 적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탁 트인 것이 아니라 문이 달려 있었다.

제주목 관아의 복원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주의 주요 관공서가 이전되었고, 원래 관덕정 앞에는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분수대도 있었는데 관아 복원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제주목 관아가 복원된 것은 좋지만 대신 관덕정 앞이 예전만큼의 제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에 관덕정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던 제주의 고유한 광장 문화가 퇴색되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밖에 주요 흑역사관덕정 살인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관련 항목 참조.

2 대구 관덕정

대구 관덕정은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 밖 서남쪽 200보 지점, 행정구역 주소로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로 동아백화점 건물 뒤쪽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보다는 늦은 영조 25년(1749년)에 세워져서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는데, 지금의 대한적십자병원 대구지사[2] 부지 및 동아쇼핑 앞까지 모두 대구 관덕정의 앞마당에 해당했다고.

임진왜란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 뿐 아니라 경상도 일대의 중죄인들 역시 대구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들도 관덕정 앞마당[3]의 「관덕정 말랭이」라 불리던 곳에서 처형되었다. 이곳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지의 하나였다.[4]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사연으로 이후 관덕정을 성지로 기념하고 1991년에 원래 위치 건너편에 관덕정순교기념관을 세웠는데, 천주교뿐 아니라 천도교(동학)에게도 대구 관덕정이 중요한 성지인 것이 교조(敎祖)인 최제우가 이곳에서 처형당했기 때문.[5] 천도교에서도 이곳을 성지로서 기념하려고 건물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해방 뒤에 건물이 헐려 버렸다고. 지못미.

관덕정이 천주교의 순교 성지로서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병인박해순교한 이윤일 요한이 당시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면서부터였다.[6]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그가 순교한 관덕정 처형장으로 알려진 대한적십자병원 옆 부지 155평을 확보한 뒤 198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991년 5월 31일 개관하였다. 내부 지하에 경당이 있고 경당 안에는 성(聖) 이윤일 요한의 유해가 안치된 돌제대와 영정, 당시 형틀로 쓰였던 황새바위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1.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자전소설 지상 위 숟가락 하나라는 제목은 그때 관덕정 앞에 내걸렸던 이덕구의 시체를 은유한 표현이다.
  2. 병원 자체는 2010년에 폐원되었다.
  3. 지금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4. 나머지 2곳은 봉덕동에 있었던 「장대벌」과 비산동 날뫼 뒤에 있던 「꼬부랑개」.
  5. 정확히는 지금의 대구 약령시(藥令市) 앞 덕산시장(염매시장)의 한복판, 지금의 계산아파트가 들어선 곳
  6. 한국 103위 순교성인 항목 참조. 해당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는 바티칸성 베드로 성당이 아닌 곳에서 행해진 유일한 시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