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유홍준(兪弘濬) |
생년월일 | 1949년 1월 18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1] |
본관 | 기계 유씨 |
직업 | 대학 교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
1 개요
2 트리비아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의 예술철학 전공을 졸업했다. 한 때 3선 개헌 반대 시위 도중 붙잡혀 옥살이를 한 전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故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고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장까지 했던 영남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 후 상경하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전임교수를 하고 있다. 1980년대 영남대학교 재직시절에도 수업 중에 자주 박정희 비판을 했다고 하며 자신은 이것이 전두환 대통령 비판을 하지 못하니 대신 박 대통령을 디스한 것이라고 한다.[2]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등단했고 '젊은이들을 위한 한국 미술사' 강의를 하다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함께 문화유산 답사를 다녔고 그를 바탕으로 <남의 문화유산답사기>[3] 말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펴내게 된다.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사퇴했다. 이후 은퇴하여 2014년 현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3 행적
한국미술을 강의하기 전에는 민중미술 쪽에서 활동했다. 민중미술에 대해 평론 쓰고 작가들 활동을 도와줬다는 듯하다. 여전히 민중미술계열 화가들 전시에 서문을 써주는 등 친하게 지내고 있다. 80년대에 기존 추상화 경향의 화가들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까면서 등장한 것이 민중미술이라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나 기타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60~70년대 추상화가들에 대해 쓴 글은 별로 없다. 다만 서구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인용하긴 했으며,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등 60년대 이전 구상화가들에 대해서는 글을 많이 썼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90년대 많은 대학에서 교양 강의 교재로 사용되었고,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함께 필독 도서가 되다시피 했다.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이 된 배경에는 그렇게 알려진 대중적 인기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미술사 연구자들은 주로 개인 연구에 중심을 두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지 않았는데, 유홍준 이후로 관련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인문학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자기계발서처럼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후 2014년에는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도 썼다. 일본에 남아있는 유물들을 설명하면서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다. 일본 국보 1호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등 헛소리하는 일빠들 아닥하게 만들기 좋은 실제 증거들을 정리해 두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작순례",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등 다른 책도 많이 썼다. "명작순례"에는 신사임당,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 잘 알려진 화가들을 포함해 조선시대부터 광복까지 주요 한국화가들을 항목별로 정리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한국에 있는 국보 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있는 국보급 유물도 정리한 책이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는 한국미술사 입문서이다. 한국미술사를 주요 유물 위주로 정리해 한국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정보도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개인사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한국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이외에 1박 2일 2011년 10월 16일, 10월 23일, 2012년 2월 5일 방송에도 출연했다. 황석영, 김용옥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이빨이라고 한다. 실제로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은 황석영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닌다.
2012년 11월5일 방송된 MBC '놀러와'에서 유홍준은 "최근 돈을 내고 좋은 전시를 본다는 개념이 아예 없어져버렸다. 이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높여야 할 때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을 고려한다면 무료로 박물관을 관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소신을 밝혔다.# 유홍준 교수는 중앙박물관 관람비를 더 받아야 한다면서 왜 문화재 보는 값어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냐고 비난한 바 있다. 그가 들려준 일화로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온 적이 있는데 당시 2천원이란 관람비를 2천엔으로 듣고 한국 돈으로 10배가 넘는 돈을 내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당연히 자국 중심문화재를 보여주고 보관하니까 이 정도는 당연했다며 비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유홍준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턱없이 부족한 문화 관련 예산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은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CCTV가 없어서 문화재 절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 불과 몇년 전의 현실이었다.# 이외에도 해외에 밀반출된 문화재들을 환수하는데도 최소 수백억 이상의 돈이 드는데 문화재청의 2012년 지출재정(예산 및 기금 지출규모)은 5,577억원에 불과했다. 이는 정부 재정지출규모의 0.17% 수준이다. 대영박물관 등 해외 일부 박물관이 무료로 운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박물관들은 기부금을 받는다. 그 위상 덕분에 기부금만으로도 운영이 되기 때문에 무료로 개방하는 것이다. 문화재청장 재직시절 숭례문이 불에 타고 그로 인해 엄청난 지탄을 받았으니 이에 더 민감하게 뭐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저 방송에서 한 '박물관 무료입장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음'이란 발언은 거짓말이라는 점. 당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나라의 국립 박물관보다 큰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다. 또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기부금'만 내면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는 박물관도 많다. 반론을 보면 마치 대영박물관이나 스미소니언 막물관이 막대한 예산과 기부금으로 꿀을 빨면서 문화재도 보존하고 관람료도 무료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 박물관도 정부의 예산삭감에 전시를 축소하거나 문화재 보호에 어려움을 격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국보다 상황이 나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들이 예산이 풍족해서 관람료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장으로서 저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고, 논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의의 과장에 가깝다.
또한 과연 관람료를 받는다고 해서 박물관 재정이 탄탄해질지는 확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관람객들의 관람료에 대한 거부감과 박물관 또한 정부의 부처중 하나로서 예산 경쟁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많다. 우선 유홍준 말처럼 관람료를 1~3만원 정도로 올리면 과연 지금처럼 중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 등의 박물관에 많은 관람객이 모일지 알 수 없다. 관람료 인상에 따른 관람객들의 거부감이 크다면 관람객 수가 감소해서 예산 확보에도 어려움을 격고 일반 대중들에게 문화재를 공개함으로서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박물관 본연의 취지가 훼손될 수도 있다. 중산층 미만 저소득층 이상의 애매한 서민 입장에서 관람료가 2만원 정도로 껑충 뛴다면 문화생활은 엄두도 못낼 수도 있다. 또한 만약에 박물관이 관람료를 받기 시작한다면 다른 부처에서 박물관은 관람료도 받는데 이제 예산 좀 그만 타가도 되지 않겠느냐, 혹은 예산 삭감을 해도 할말 없는거 아니냐 고 나오면 오히려 예산확보에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제한된 문화 관련 예산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박물관 뿐만 아니고 예술영화, 출판, 공연, 순수 예술 등 각 예술 분야들도 각각의 정당성을 가지고 예산을 노리는 것은 마찬가지 처지이다. 관람료 인상에 따른 관람객 감소에 다른 부처의 견제로 예산이 삭감 된다면 오히려 박물관 예산이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앞서 말한 이들 박물관은 기부금이 많고 재정이 탄탄하니까 입장료를 무료로 받아도 되는 것이다. 대영 박물관 입구에는 기부금을 받는 통이 따로 있다. 그런 소액기부자들도 나름 많을 뿐 아니라 거액 기부자들도 많기 때문에 운영이 되는 것인데, 애초에 기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국 상황에 이를 대입해서 입장료 무료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건 헛소리에 불과하다.[4] 앞서 문화재청 관련 내용에도 적혀있지만 한국 정부의 문화 관련 예산은 매우 적다. [5]
4 비판
2007년 봄, 효종왕릉에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너 취사를 해 물의를 일으켰다. 행사의 진행 주체는 유 청장 본인이 아니었지만 비판 여론에 대해 "제사를 지냈으면 그 자리에서 잿밥을 먹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물론 재실이 본래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취사 금지된 문화유적으로서의 재실에서 화기를 다루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이후 영부인 김윤옥이 벌인 '박물관 만찬'이 물의를 빚으면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재임하면서 취사가 금지된 창경궁과 경복궁을 국빈 및 일반 단체의 식사와 행사 장소로 대여하는 것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사실 2005년께에도 고궁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경궁 만찬시 취사 허가 문제와 함께 밝은 광원 등의 화재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고 화재 대비가 미흡했다는 이유, 주류 반입 문제 등으로 비판받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유홍준 교수는 무릎팍도사 출연을 통해 "고궁에서 대접하는 것은 국빈대우"라며 국익에 이익이라는 주장을 폈다.[6] 자신의 관점에서 목조건물같은 문화재는 출입통제등으로 보존하기보단 사람이 계속 쓰면서 사람의 온기가 닿아야 보존에도 낫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7][8]
숭례문 화재 시기 출장중이었다[9]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숭례문 화재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들어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진 않다. 다만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기에 문화재청장 자리에서 사퇴했다.
숭례문 소실보다 정말 비판을 크게 받았던 부분은 2005년 낙산사 화재였다. 대형 산불로 소실된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 대해서 50년 밖에 안된 절 건물은 별 거 아니라고 이야기했다고 소문이 돌아 큰 물의를 일으켰다. 다만 문제가 된 발언은 "6·25 때 다시 홀랑 타버린 절이 낙산사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20세기 후반기, 대수롭지 못한 안목으로 치장하고 복원해 놓은 별 볼 일 없는 절집일 뿐이다."라는 발언인데, 이는 1993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02쪽에 쓴 내용이다. #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지, 사건이 터지고 저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다.[10] 2005년 낙산사 화재 때는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 낙산사 복원에 30억원을 투입하고, 소실된 동종은 실측자료를 토대로 6개월 안에 복원하겠다."라고 발언했다. 이후 녹아버린 보물 479호 동종을 복원하면서, 동종 내부의 '낙산사 동종 복원기'에 자기 이름을 음각해 넣었다는 것이 밝혀져 다시 물의를 빚었다. $ 이에 대해서 통상 기록을 남기는 과정이라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11][12][13]
2005년 문화재청장으로 재임시 북한의 초청을 받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함께 방북을 했을 때, 만찬장에서 북한 스파이 영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14]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이 노획해 간 수자기가 반환되었을 때 몇몇 인사들과 함께 맨손으로 유물을 만지기도 했다. 맨손에 묻은 땀이나 기타 몸에서 배출되는 물질들이 직물의 색상을 변질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면장갑을 끼는 것이 원칙이다.[15] 다만 다른 기사에서는 면장갑을 끼고 수자기를 살펴보는 장면이 나왔다. # 사진을 봐서는 다른 직물과 색깔이 다른 부분을 살펴본 듯하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어 왜 맨손으로 뒤집어 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원칙상 면장갑을 끼고 살펴보는 것이 맞다.[16]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기념관 같은 곳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이에 대해 부적절한 표현이었다며 사과한 적도 있다. #[17] #
여기에 전북대 박물관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30년 수령의 히말라야시다 나무를 잘라내 버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다. # 박물관 직원들이 "나무가 박물관 유물과 경관을 가리고 있으며 주변 석물(石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자, 두재균 전북대 총장은 "그러면 옮겨라"라고 말했고, 이에 박물관 직원이 "나무 뿌리가 깊어 뽑으려면 석물까지 옮겨야 한다"고 답하자, 유 청장이 "박정희 정권 시절 대규모로 식재된 나무로 박물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베어버리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유홍준 청장이 과거 박정희가 건립한 영남대학교에 10년 간 재직하고 그 곳 박물관장으로 3년 간 지냈던 사실도 알려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층에서는 광화문 복원 당시 유홍준 청장이 박정희가 쓴 한글 간판을 일방적으로 없애버린 것도 의도가 있지 않냐며 민감하게 반응했다.[18]
추가로 글을 달면 원래 광화문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게 맞는 거다. 조선시대 문화재에 3, 40년 전 대통령의 글을 다는게 맞는 것 인가?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에 따르면 성격이 영 좋지 못하다고 한다.[19] 다짜고짜 신문기자에게 전화걸어서 '나 유홍준입니다'라고 소개하고는, 기자가 누군지 못 알아보자 '날 몰라요?'라고 말하고 바로 끊어버렸다고(...). 도지삽니다 그리고는 중앙일보 편집국장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중앙일보 기자에게 무시당했다고 성질내는 괴한 센스까지(...). 당시 전화를 받았던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문화기 쓰는 법 이전에 전화거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충고해주고 싶었단다.[20]강준만은 인물과 사상 2000년 6월호에 기고한 '유홍준과 오동명 - 엉터리와 진짜'라는 글에서 유홍준의 "'문화권력'으로서의 '권력과시'와 '권위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
- ↑ 서울토박이 집안으로 조부 때부터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자랐다. 참고로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시 출신이다.
- ↑ 전두환 정권 때 어느 정도의 박정희 깎아 내리기는 허용되었다. 목적은 당연히 전임자 깎아 내리기를 위한 정권 안정 도모.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간접적으로 디스하면서 정의구현을 외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었다.
- ↑ 전유성이 유럽 배낭여행 때의 여행담을 쓴 책이다. 전유성 특유의 위트가 잘 살아있는데 남의... 와 나의... 이 두 책이 아주 무관한 건 아니다. 전유성과 유홍준은 청운초등학교 동창으로 서로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유홍준 자신도 패러디 센스에 감탄했다고 한다.
- ↑ 참고로 미국과 영국에서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위상은 사실상 국립박물관과 같다.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말이다.
- ↑ 한국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은 실상 매우 낮으며, 정부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 영국을 예로 자국의 미술역사가 짧고, 지명도가 낮음을 인지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시대미술가를 양성하고 배출하고 있으며, 근현대, 중세 미술가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발굴하고 있다. 미술가가 곧 대내외적인 자국문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것이다.
- ↑ 실제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버킹엄궁이나 베르사유궁을 행사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자국의 문화를 타국 정상들에게 소개하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다만 우리나라 유적들은 이들과 달리 화재에 극히 취약한 목조건물이라는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 ↑ 방송에서 그 사례로 든 것이 진주의 촉석루.
- ↑ 문제는 촉석루가 조선시대 건물 그대로-냐면 그건 또 아니다. 촉석루는 애초에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와전히 소실되었고, 1960년대 복원공사를 거친 1960년대산 새 건물이 되었다(...). 고로 '목조문화재 보존'을 이야기하는 예로는 잘못.
- ↑ 당시 프랑스와 네덜란드 출장 중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한국어 음성 서비스 개통식 참석 때문에 프랑스에 있었다고 한다.
- ↑ 유홍준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고작 50년 밖에 안 된 복원물의 문화재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건 이상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낙산사에서 유명한 건 돌담과 동종이다.
- ↑ 실제로 과거에 복장한 유물을 다시 개봉한 뒤, 언제 개봉했다 다시 닫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관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탑이나 불상에는 내부에, 건축물 등에는 대들보 등에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도리어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책임자 없이 발뺌하는 셈이 되기 때문. 또한 미래의 역사연구자들이 언제 누가 이 유물을 손대고 고쳤는지 알 수 없게 된다.
- ↑ 그러나 탑 · 불상 · 대들보는 반박의 적절한 사례로 아닌 것이, 이들의 경우 내부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다가 부장물을 집어넣는 게 가능하나 동종은 그런 유형의 문화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탑의 사리공, 불상과 대들보의 빈 공간이야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원래 있었던 거니 그 안에다가 준공기 · 복원기 · 상량문 등의 기록물을 추가로 집어넣는 거야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낙산사 동종의 경우 그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 석 자를 떡하니 남겨놓았다는 게 문제. 이는 탑이나 불상 그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긴 것과 진배없다.
소정방?광화문이나 숭례문 복원 때도 상량문을 대들보 내부의 빈 공간에다가 집어넣었을 뿐이지, 낙산사 동종처럼 벽이나 기둥에다가 복원 사실을 따로 음각하지 않았다. 현재 한창 진행 중인 미륵사지 석탑 보수도 작업 완료 후 그간의 과정이 담긴 기록물을 탑의 사리공 안에다가 집어넣으면 별 문제 안되겠지만, 이를 탑 그 자체에다가 새겨 놓으면 당장 9시 뉴스에 나올 일이다. - ↑ 또한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기록 남기는 거야 전산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설사 물리적으로 뭔가 남겨야 한다고 쳐도 복원 사실이 기록된 푯돌 같은 걸 낙산사 주변에 조그맣게 세워 둬도 됐을 법한데, 아예 별개의 종을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옛 것 그대로 재현한 복원품에다가 이전의 동종에는 없던 자기 이름을 번듯하게 남긴 것은 이전에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권력자들의 자기 이름 남기기와 별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 ↑ 북한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삽입곡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는 주체사상 예술 작법을 따르지 않고 소련식 리얼리즘 기법으로 촬영했다 하여 극작가가 숙청되서 종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김정일이 제시한)주체예술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
- ↑ 다만 모든 유물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라텍스 고무장갑에는 금속을 변색시킬 수 있는 황화합물이 함유되어 있어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고, 반대로 면장갑에는 땀, 염분, 세척제 잔여물이 쌓여있을 수 있고 유물이 미끄러질 수 있어 사용시 주의를 요한다. 직물이라도 면의 종류에 따라 면장갑의 보풀이 묻을 수도 있어 장갑 사용을 달리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니트릴장갑을 사용하는 편. 지류(종이) 같이 잘 바스러지는 경우 맨손을 사용해 섬세하게 작업하도록 한다. 물론 이 경우 손을 수시로 세척해야 한다. # 자세한 내용은 소장품 관리의 기본 수칙 참고. #
- ↑ 사실, 이 문서 상단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유홍준씨는 본래 고고학이나 문화유산 보전, 복원쪽으로 정식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며 그 쪽 실무로 커온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장 재임 중에 생긴 논란(버너 취사, 고궁 화재 위험 무시, 문화유산에 자기 이름 새기기 같은 것)은 그 분야에 관한 무지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시절의 낭만에 심취해 벌인 것이라 여겨질 만한 데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몇 달이 멀다 하고 보도되는 문화재청의 병크와 인사권자 눈치를 보는 관행을 생각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청장의 약점을 실무진이 보완해 줄 수 있을 지는...
- ↑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주장은 유홍준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한 적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을 기리는 공간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현충사를 왜색풍으로 복원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정작 이순신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나 존경보다 겉면에 치중했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 실제 유홍준 청장은 과거 민청학련 사건으로 곤혹을 겪은 적이 있었다.
- ↑ 이하의 내용은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의 저서, '당신 기자 맞아?'에 소개된 내용이다.
- ↑ 유홍준 교수의 이런 태도는 유홍준 교수의 출신 배경이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유홍준 교수는 지금의 월간미술의 전신인 계간미술의 기자였고, 이 잡지는 원래 중앙일보에 소속된 잡지였다. 그러니까 후배라고 생각하는 기자가 자길 못 알아보는 데서 온 똥군기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