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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종교 |
천도교의 상징 궁을기(왼쪽)와 궁을 문양(오른쪽). 1905년 처음 만들어진 유서 깊은 상징이다.* 궁을기에서 흰 쪽이 깃대 쪽이다.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모습.* 오른쪽의 빌딩은 천도교 중앙총부가 있는 수운회관.
天道敎
Cheondoism[1]
목차
1 개요
1905년 동학의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가 동학을 개칭해 성립시킨 종교. 따라서 발원지는 경주, 교조는 최제우가 된다. 1908년엔 춘암 박인호가 4대 교주에 취임했다.
천도교에서는 포교를 포덕, 집회를 여는 장소를 '교당(敎堂)',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를 교령[2], 중요 종교건물을 '수도원'이라고 통칭한다. 또한 천도교 신자들끼리는 서로를 동덕이라 부른다고. 동덕여자대학교가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한 것이다.
'포덕'(布德)이라는 말은 연호로도 사용한다.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조선 철종 11년)을 원년(1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2015년은 포덕 156년.
사족으로 국궁에서 국궁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접장이란 말도 원래는 천도교의 포접제 하에서 쓰던 말이었다.
2 특징
2.1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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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구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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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발표 후 검토를 거쳐*, 2014년 3월 25일(포덕 155년) 정식 발표된* 천도교의 신 예복.* 왼쪽부터 교역자복(남/녀), 집례복(남), 수련복(남/여), 청수봉전복(여), 설교자복(남)이다.
동학을 계승한 종교답게 기본적인 골격은 동학과 큰 차이가 없다. 최제우 스스로가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 고 하였다[3]
특히 도교적, 불교적 색채를 가미한 종교답게, 주신인 한울님은 아브라함교와 같은 초월적 절대자의 성격보다는 인간 내면, 더 나아가서는 천지 만물에 근원으로서 잠재한 신격이라는 범신론적인 교리를 갖고 있다. 이것이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시천주(侍天主) 사상. 일종의 애니미즘적 성격도 있지만, 일본의 신토와 달리 신들을 개별적 객체로 보지 않고 한울님이라는 통합된 표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초대 최수운 시절에는 상제와의 문답을 나누거나 신령한 부를 내려받는 등 인격신의 면모가 있었으나 점차 인간 내면에 잠재한 신격을 강조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최시형, 손병희를 거치면서 사인여천/시천주, 인내천 사상이 나오게 된다.
모태인 동학이라는 종교가 본디 서학인 기독교에 반발해 형성된 만큼, 신을 인간과 분리시켜 절대적 위치로 상정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특히 반발하는 입장을 취한다.
2.2 의례
모든 천도교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인 오관(五款)이 있다.
1. 삼칠주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수행하기.
2. 청수봉전(淸水奉奠), 즉 모든 행사에 맑은 물을 모시기
3. 시일(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시일식(천도교의 종교행사를 말함)에 참여하기
4. 성미(성금 내기),
5. 기도(한울님에 대해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심고)
여담으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에는 오관 중 성미(誠米)를 설명하면서 '매 끼니마다 쌀 한 숟가락씩 떠서 모아 한 달에 한 번 교단에 바친다'라고 설명하나,오두미도? 이건 옛날 이야기. 지금은 당연히 돈으로 낸다.(...)[4]
천도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사상을 차릴 때 벽 쪽에 위패를 놓고 벽 쪽을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5] 이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시천주 사상에 입각해 1897년 4월 5일 동학창도38주년기념식전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1900년 <천도교의절>에서 공식화되었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차례의 경우 전통 방식대로 제물을 진설하기도 한다.
천도교의 삼칠주는 최제우가 했던 선생주문과 추종자들이 했던 제자주문이 다른데, 제자주문이 표준이다. 선생주문은 최제우 본인이 해야 말이 되는 내용이라 드물게 개인적으로 선생주문으로 수도해보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주문도 있고[6], 또한 처음 천도교에 입교할 때는 주문의 일부만 전해주기도 했지만, 점차 제자주문 전체를 입교하는 날 전해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3 역사
3.1 일제강점기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맹활약한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서 1919년 3.1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축이 되어 주도했으며,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기관지인 개벽을 간행하여 민족 정론지로 발돋움시킨다. 참고로 그 당시의 천도교는 기독교의 교세를 가볍게 웃도는 메이저 종교였다.
애초에 일제 말에 기독교 세력이 급격하게 늘기는 했으나, 그래도 인구의 1%에 가까웠다. 그에비해 동학은 기세가 꺾이긴 했어도 한때 전국을 뒤흔든 동학 농민 운동을 주도한 단체니... 이 시대까지는 압도적인 차이를 내고 있었다.
또한 어린이, 여성의 인권은 물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존중(천지부모 일체설)하는 상당한 선구자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의 활약은 어린이날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인 천도교인이다. 그는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게다가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린이에게 경어 사용 역시 천도교가 만들고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의숙도 천도교에서 설립한 일종의 미션스쿨이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도 이용익에게서 인수하여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운영하였다.
3.2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손병희가 교주에서 물러난 후 연해주로 건너가 1919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창설했다는 점에서, 대한국민의회가 합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연이 닿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부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것을 신구파 갈등이라고 칭한다. 기존 독립 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의 구파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간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신구파 갈등이 심각함을 신파와 구파 모두 알고 있어서 193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신구파가 통합됐지만 얼마 안가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신파가 천도교를 장악해 천도교는 3.1운동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노골적인 친일 종교로 변질되었다.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고, 그 거두가 최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반민특위에 끌려간 최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말도 있다.[7]
일진회도 엄밀히 말해서 이쪽 계열이다. 애시당초 동학이 이름을 천도교로 바꾼 이유가 손병희가 일진회 창립 멤버인 이용구와 손을 끊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파는 반일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무인멸왜기도운동(1938년 무인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구파의 세력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신구파가 혁파된 것은 8.15 광복 이후다.
3.3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해방 후에는 세력이 급속히 미미해져 현재는 꽤나 마이너한 종교가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지독한 신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와중에서 조직과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었고, 신도의 상당수가 북한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8]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국전쟁 직후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많았고[9] 박정희 정권때 정권의 지원으로 인해 교세 재건을 시도했다.[10] 이 시기 1960~1970년대 당시 천도교는 '반공종교'라는 이름하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였고, 교령에도 정치와 연줄이 닿은 사람들이 많이 앉으면서 종교집단보다는 정치집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때 천도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1978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유신정권에 반대해 분신 자살한 것이 거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참여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개입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최덕신 교령이 1986년 4월에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고, 천도교 교단은 이 사건에 타격을 받아 거의 교세가 무너졌다. 거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997년 8월 오익제 교령(2012년 9월 1일 북에서 사망)의 월북 사건.
3.4 현재
정치집단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 교령들의 월북 사건으로 결정타를 입어 흔들리고 교세도 쇠퇴하였던 천도교는 이후 종교 본연의 성격을 되찾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등 학자들의 교학 연구에 대한 노력을 통해 2010년도에 들어 교세가 성장세로 돌아오고 있다.
현재 국내의 신자 수는 10만명 정도다. * 그래도 천도교는 한국 7대 종단 [11] 안에 마지막 순위로 들기라도 한다. 한국 7대 종교의 마지막은 한국민족종교협의회로 14개 군소종교의 협의체.
위의 서울교구 중앙대교당만 보면 지금도 교단활동이 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국내의 민족종교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본부를 제외하면 상황이 상당히 열악하다. * 그래도 천도교와 원불교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편에 속하는데, 원불교는 삼성그룹일가의 후원으로 뒷배가 튼튼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종교 중 유일하게 군종장교를 배출하고 있으며, 천도교는 한국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이기에 정규교육 이수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는 있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처럼 수는 적어도 제대로된 관련 기념시설이라도 갖추고있지 다른 민족종교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대종교 정도나 알까 나머지는 그런 종교가 있는지도 모른다.
2014년 12월 현재 서울 서소문 성지화 사업과 관련해 가톨릭과 마찰을 빚고 있다. 가톨릭 항목과 관련 링크 참고. 한국의 예루살렘 [12]
이에 가톨릭 측은 공원 측에 천주교인 순교자가 많은반면, 공원바깥에서 죽은게 천도교인이라며 배째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일대 자체가 조선시대 처형장이었는지라 사형당한 사람들이 죄다 현 서소문 위치 한곳에서만 죽어나간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이 논리대로라면 서소문 일대 전체가 다 천주교 성지로 삼아야한다. 왜냐고? 현 서소문 공원 밖에서 죽어나간 천주교 신자들도 수두룩하니깐(...) 사실 죽은 수로 치면 당연히 유교가 제일 많다.
이외에 식목일 폐지 [13] 를 반대한 곳이 천도교인데 최제우 선생이 동학의 깨달음을 얻은날을 기념하는, 천도교 최대의 축제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식목일과 천도교 그 자체는 연관이 없지만 4월 5일을 천도교의 날로 동시에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으며 실제로 신도들은 4월 5일을 누가 물어보면 식목일과 천도교 창시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두 개를 동시에 대답한다.
4 북한에서의 천도교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천도교를 찬양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이 우파 종교정당이 되어 당초에는 막대한 당원을 바탕으로 무시못할 세력이었으나, 1950년 영우회(靈友會) 사건을 비롯한 탄압과 숙청, 지도부 장악을 당한 끝에 어용 위성 정당으로 전락해버렸다. 현재 북한에서는 공식적인 천도교 조직으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북에서 선전하는 내용에 의하면 북에서 가장 신도가 많은 종교는 천도교[14]라고 한다. 평양에는 평양교당이 존재하여 남북 천도교 합동 시일식이 집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도 있고 북에서 천도교에 관한 대우도 (명목상이지만) 좋기 때문인지 남북간 교류가 가장 활발한 종교가 천도교이다. 하지만 북한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천도교인 숫자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5 신자인 유명인
6 기타
고등학생들이 한국근현대사를 배울 때 원불교, 대종교와 이 천도교를 헷갈리기도 한다.
- ↑ 실제로 영문 웹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개념이다. 심지어 관련 상품도 제작되고 있다. 관련 상품이 천도교의 교리에 맞는지는 추가 바람
- ↑ 1955년 1월 13일 천도교 교헌(敎憲)이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교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기는 3년이며 3년에 한 번 열리는 천도교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새 교령을 선출한다.
- ↑ 다만, 동학의 탄생이 유불도와 관계가 없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라는 연구논문도 있다.
- ↑ 대신 액수가 정해져 있다. 1인당 최소 5,000원. 재화란 물건의 특성상 교단 내부에서도 성미와 관련해 말이 많은 듯 하다.
- ↑ 반대로 일반적인 유교식 제사에서 벽 쪽에 위패를 놓고 위패를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는 것을 향벽설위(向璧設位)라고 한다.
- ↑ 조선 조정의 탄압을 피해 최시형이 별개로 만든 주문도 있었고, 그외에 교파에 따라 다른 종교 영향을 받아 불교나 도교의 주문을 같이 하거나 창작하기도 했다. 다만 현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받았던 주문들만을 인정한다.
- ↑ 심문장에서 자기변호에 바쁜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를 외친 걸로도 유명하다.
- ↑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북한의 다른 종교 신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천도교 다음은 37만 5천명의 불교.(북한 "조선중앙연감", 1950).
- ↑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300만이라는 신도 수를 보유했고, 그 이후로 신도 수가 대폭 하락했음에도 60년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0만명이 넘는 천도교인들이 월남했다고 한다.
- ↑ 대표적인 예로 수운회관 건립, 용담정 정비 등이 있다.
- ↑ 불교, 개신교, 천주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및 기타 군소종교.
- ↑ 예루살렘의 경우는 갈등을 빚고 있는 종교들이 모두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만든 종교들의 갈등인데 반해 서소문 일대는 아예 교리 자체가 정반대의 위치해 있는 종교의 갈등이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볼 수는 없다.
- ↑ 정확히는 공휴일에서만 제외하는 것이지만 뜻도 불명확한데 쉬는 날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냥 폐지로 보아도 무방하다.
- ↑ 1만 5000여명의 신도가 있다고(2001년 기준 1만 5천명 정도 참조) 북에서는 자체 선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