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의 난

李在守亂

1 개요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제주 토착민들의 봉기. 매국노이자 광신도황사영, 친일파이자 수전노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천주교 역사의 3대 흑역사 중 하나. [1]

천주교측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희생되었다."라는 의미로 제주신축교난(濟州辛丑敎難)이라고 부르며, 신축민란(辛丑民亂), 제주민란(濟州民亂)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부린 행패와 엄청난 범죄행각으로 인한 사건이기 때문에 교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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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는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민인데, 한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에서도 다스릴 수가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여하여도 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고 심지어 인명을 살상하여도 감옥에 가두지 못합니다. 금번 삼군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습니까? 그런데 군기를 빼앗아서 성을 함락시키고 발포하니 이게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인 것이요 양민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비록 죽어도 원한이 없습니다."

이재수. 체포된 후.

2 고통의 땅 제주도에 천주교가 들어오다.

19세기말 대한제국 시절, 천주교는 제주도에서 자리를 넓혀가면서 탐관오리 및 모리배들과 손잡고 더러운 짓을 자행했는데, 그 사례로 외세를 뒤로 한 천주교인이라면 거리에서 행패를 저질러고 약탈을 해도 처벌하질 못했다.[2] 이를 막아야할 프랑스인 신부들은 교인을 빙자한 모리배들이 천주교 탄압한다고 속여서 그냥 내쫓으면서 이들을 두둔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한국어를 아예 몰랐기에 말도 잘 통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어를 대충 아는 이들도 모리배와 짜고 실컷 착취 및 약탈에 급급했다.

물론 이렇다고 신부들이 다 억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되려 이들을 처벌하는 군졸이나 민중을 죄인으로 몰아 구타하는 걸 묵인했고 모리배들이 강간 및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던걸 교인이라고 설마하니 그럴 리 없다고 편견적으로 두둔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주교인이라면서 마구잡이로 강간을 저지르곤 천주교회로 달아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교회로 달아나면 관리들도 잡지 못했기에 온갖 행패가 끊이지 않았다. 살인을 저질러도 체포는 커녕 시체검시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천주교인이 유부녀를 강간하거나 처녀를 윤간해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수 없었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2천 년만에 소도가 부활했습니다

거기에 봉세관 강봉헌이 이전에 사라졌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고, 가옥세, 수목세, 가축세, 어장세, 어망세, 염분세, 노위세, 잡초세(...)까지 징수해 갔고 징수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믿는 깡패들을 고용해 강압적으로 징수를 하니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진상품으로 인해서 극심하게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외세 종교의 평등 사상과 문물 도입으로 생활이 나아지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제주도민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제주도민은 분노하였다.

3 도민들이여! 일어나라!

결국 1901년 2월, 훈장이었던 현유순이 성당으로 끌려가 고문받다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참다 못한 제주도내 유지들이 4월에 교폐와 세폐를 막기위해서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제주 도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천주교와 교회의 폐혜, 지나친 세금등을 토로했고 이를 제주목사에게 시정해줄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상무사는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온건적인 방향, 요즘 말로 평화적인 요구와 시위로 전개 되었는데....

같은해 5월 14일, 천주교인들이 상무사의 지도자였던 오대현[3]을 납치해 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재수를 새로운 지휘자로 추대하고 일본인들에게서 무기를 구입해 제주도 내의 여러 천주교회들을 불태웠다.[4] 당황한 프랑스인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으로 피난갔지만, 제주성을 지키던 대한제국 주둔군조차 그다지 이들을 지켜줄 마음이 없었다. 결국 5월 28일, 몰려오는 민군에게 일단 명색이 주둔군이라 간단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오래가지 않아 전투(?)를 중지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성으로 들어온 민군들은 그동안 악명이 높던 자들을 골라 참수했는데 그 수가 3백에 이르렀다고 한다. 몇몇 천주교 신부들도 한패라고 하여 같이 끔살당했다.

당시 제주도의 고위관리들도 천주교인들이 관리들도 무시하며 저지른 짓에 이를 갈아왔기에 나몰라라 하였고, 제주도 군졸들은 되려 이들에게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으며 대정군수 채구석은 아예 반천주교 단체를 만들어 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뒤로 돕기까지 했다. 제주목사 김응석은 일단 공격 명령을 내려 몇 차례 사격을 가하여 몇몇 민군을 사살했으나, 그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주둔군에게 사실상 전투 중지명령을 내리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민군 측 사망자는 8명으로 그쳤다.

이를 봐도 그만큼 천주교에 대한 악명이 자자했음을 민과 관 모두가 공감하고 도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참수된 신부들이 모두 프랑스인이었기에 프랑스 측이 이를 빌미삼아 제주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일이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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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이 찍은 당시 제주성 부근의 천주교도 시체들. 이들 대다수가 천주교를 들먹이며 행패를 저지른 자들이라 증오를 가득 받아서 이렇게 끔살당하고도 묻혀지지 않고 그대로 바깥에서 썩어나갔다. 나중에 대충 집단무덤을 만들어 파묻어버렸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게, 천주교도 묘지가 된 황사평은 민군이 제주성을 공격하기 직전 진을 쳤던 곳이다.

4 봉기의 끝, 그리고 이재수의 죽음

5월 31일, 프랑스군이 제주도에 도착했고, 대대적으로 참전할 뜻을 보이자 비로소 대한제국 정부도 급히 제주도 측에 사람을 보내서 자칫하면 외국군대가 참전하여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이미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이 멋대로 쳐들어와 민중을 학살하던 걸 겪었거니와 이번에는 프랑스가 들어와 간섭할 것을 우려한 정부에선 깊이 우려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재수는 정부가 외국군대를 겁내고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냐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있으면 무수한 제주도민이 학살될 것을 알고 1901년 6월 10일, 1만명에 달하는 제주도 민중저항군을 자진해산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천주교,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통해 요구조건이었던 교폐와 세폐방지를 보장 받았다.

이재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기로 하고 자수했다. 이에 친우인 강우백이 너만 죽게 할 수 없다면서 같이 자수했으며 이 민란을 지지하던 양반 출신의 오대현도 자수했다.[5]

오대현은 "관노 출신의 용기있는 이가 모든 책임을 다하는데, 내 어찌 양반으로서 가만 볼 수 있겠는가. 천한 것이라며 그를 얕보지마라. 그의 기개는 대장군감이었다."라며 이재수를 칭송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괜히 무기를 들고 나섰겠는가? 조정의 무책임과 외세의 약탈로 피해보는 백성을 생각해 달라."라고 당시 조정과 천주교 측을 법정에서 꾸짖기까지 했다.

더불어 이재수나 도민들은 또 하나 원흉인 강봉헌에 대한 처벌도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강봉헌에게 책임을 넘길 수 있으면 되려 가볍기에 강봉헌도 이 민란에 대한 책임자로 잡혀 재판을 받고 파직당했다.

이리하여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1901년 10월 9일,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재판을 받고 교수형(영화에선 참수형)을 당하여 삶을 마쳤고 제주목사 김응석과 대정군수 채구석[6]은 파직되었으며 몇몇 주동자들은 징역형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셋이 모든 책임을 졌기에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 이순옥과 오대현의 아우와 강우백의 식솔들은 일체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이재수 등이 봉기군을 해산하고 자수함으로서 외국군은 개입할 명분을 잃었고, 제주 도민들의 피해도 줄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재수 등은 주민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죽은 천주교도들의 묘지를 안장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1903년말이 되어서야 사라봉(沙羅峰) 아래 황사평(黃沙坪)에 안장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또한 5,160원의 배상금이 프랑스에 지급되었으며,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은 제주도민들의 탄원으로 석방된 채구석이 도민들로부터 걷어 지급했다.

5 평가

외세종교로 인한 충돌과 서양군대의 침입, 3백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던 여러가지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건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그동안 한국 근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한반도 본토에 비해 제주도 향토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미비하고, 다른 민중 항쟁에 비해 파급 효과가 적은 것이 그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나마 1961년 이재수의 혈육 이순옥 씨의 주도로 제주도민들은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세 사람을 기려 삼의사비라는 비석까지 세웠다. 비석의 위치는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계의 반발로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진 이 비석은 1997년 새로운 3의사비가 세워지면서 그 비석 밑에 묻혀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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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든 3의사비. 새로 만든 비 아래에 이순옥 씨가 1961년에 주도하여 만든 3의사비가 묻혀져있기에 제주도에서도 이걸 복원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3의사비의 비문에 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다. 비문의 내용 중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란 부분에서 천주교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 측에서 이에 대해 지나친 내용이라고 반발하였으나 비석의 건립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

일본의 영향등이 잘 나타나 있지 않은데 [1]등을 참고.

6 천주교 측 반응

2011년에 천주교에서 당시 천주교도 사망자들을 복자로 시복 추진하겠다라는 개소리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시복시성 준비 중인 124위에는 이재수의 난 관련자가 단 한 명도 없다.[7] 당시 천주교측 피해자는 상술된 것처럼 거의 대부분이 천주교의 이름을 내세워 강간, 고문 등을 저지른 파문되어야 마땅한 엄연한 중범죄자들인데 이들이 시복된다면 다른 제대로 된 순교자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다. 천주교가 정상적으로 심사한다면 탈락하는 게 당연.

가톨릭 출판사에서 펴낸 순교의 맥을 찾아서(2009)를 보면 646쪽에 나온 부분이 비천주교쪽으로 보면 굉장히 거슬릴 수도 있다.

..지방관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비리를 천주교 쪽으로 넘겼으며 무당 및 토착 세력이 도왔다고 나오면서 오대현과 이재수에 대하여 그저 반란자, 폭도로 묘사하고 있으며 천주교인 학살이라고 쓰고 있다.

다만 이 책은 지은이(신부 및 가톨릭 관계자)가 여럿이 그런지 반응이 다르니 무턱대고 천주교가 피해자라능이라며 징징거리는 불쏘시개는 아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인 648쪽에서는 이 난에 대하여 4가지로 압축하여 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1. 일부 천주교인들의 비리 및 행패를 저질렀으며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이 천주교인을 고용하여 더 행패를 조장했다.

2. 이에 대하여 프랑스 신부들은 그저 무조건 옹호하면서 외세와 종교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3. 한국 침탈을 노리던 일본이 무기를 제공하고 서로 분열을 조장했다.
4. 거기에 무조건인 천주교적인 믿음을 강요하며 무속 및 토속 신앙 및 불교같이 오랫동안 자리를 한 이들과 갈등이 빚어졌다.

이 일이 있었다고 제주도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선교사들이 와서 다시 선교를 해서 어느 정도 다시 교세를 세우고 학교까지 만들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선교사들이 자국으로 징병당해서 다시 쇠퇴...

당시(1902년) 선교사가 상부에 보낸 기록에 의하면 신입 신자들은 그렇게 많은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대정(大靜)지역은 여전히 적의에 차서 도망가는 몇몇 신자들을 놓친것을 한스러워 하고, 정의(정義)지역은 좀 온건하나 천주교인을 자처하는 불량배들이 외교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에게서 쫒겨난 이들로서 주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는 구실하에 돈을 갈취하고, 이에 선교사는 이들 여러명을 관야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8]

이 사건의 발단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이 상당했었는데, 이런 제주 천주교회와 일본인의 갈등은 이어져서 1902년 6월 양시중(梁始中)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교회와 제주 향촌 사회와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아. 1903년 초에는 정의군 지역에서 천주교회의 타파를 요구하는 문서가 나돌았으며, 호근리에서는 허 좌수(許座首)라는 자가 반천주교 결사를 조직한 적도 있었다. 결국 1902년 김명필 사건이 터져 갈등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7 기타

  • 이재수의 유일한 혈육 이순옥 씨는 1982년 86살로 작고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를 알리고자 노력해왔다. 아쉽게도 3의사가 묻혀진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렸기에 그녀에겐 더더욱 한맺힘으로 남았다. 소문으로 천주교 측에서 주도했다는 말까지 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의 지도자가 일제에 부역하고 조선인을 인종차별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이란 걸 감안하면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그래서인지 이순옥 씨는 천주교에 대한 증오를 품어오며 평생을 개신교 신도로[9] 살아왔다고 한다.(영화에선 다 큰 처녀로 나오지만 당시 이순옥 씨는 고작 5살밖에 안되었다.)
  • 한국 교과서는 물론 역사책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던 이 사건은 제주도 출신 작가이기도 한 현기영에 의해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제목으로 재조명되었다.[10] 1999년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대대적으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이재수가 너무 광기에 찬 모습으로 나와 제주도에선 이재수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당시 제주도 천주교회에선 이 영화가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알리는 게 아닌가 우려도 했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천주교 여러 고위 성직자들은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종교로서 세계에서 학살과 차별을 조장한 천주교의 역사를 되새기고 반성할 기회라 하여 영화에 대한 반대시위와 같은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하긴 했다. 이런 점에서는 일부 타 종교에 비해서는 확실히 나은 편이 있다. 어찌됐건 영화는 기대 이하 평과 서울관객 5만이라는 흥행으로 참혹하게 사라져서 이 사건은 다시 묻혀졌다. 제작비만 40억원을 들였기에 참패했고 박광수 감독은 이 뒤 독립영화를 주로 감독하고 있다. 영화 주연으로는 이정재, 심은하 등 지금 생각해보면 ㅎㄷㄷ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지만 무진장 재미없었다(…).
  • 2003년에서야 당시 사망자 317명 이름이 담긴 책인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1901년 7월)이 공개되었다. 그동안 7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벌어졌다는 인식[11]과 달리 실제로는 그 절반에 미치지 않았으며 정확한 사상자 수와 이름까지 나와있다. 이 책자에 의하면 천주교인은 모두 309명이 죽었으며 민군은 모두 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로 절대 다수가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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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망자 명단을 적은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
  1. 다만, 뮈텔과 황사영이 동급은 아니며, 애초에 뮈텔은 신앙적으로도 잘못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황사영이 최소한의 개념은 가진것처럼 보일정도다.
  2. 특히나 프랑스 신부들은 고종이 지급한 여아대(如我待, 나(고종)처럼 대하라.)가 있었기에 제주에서는 그 누구도 건들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3. 참고로 이 노인네는 자신의 첩이 교인에게 강간당했음에도 교인이라는 이유로 벌을 주지 못하는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온건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온건파쪽의 인물을 납치해 갔고 납치 과정에서 2명의 도민을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지역유지들과 도민들의 꼭지가 돌아버리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4. 이를 두고 일본이 돈받고 무기를 팔았다고 해도 가난한 섬 사람들에게 꽤 싼 값에 무기를 제공한 점으로 보아 동학혁명 이후 대한제국에서 전쟁을 빌미로 끼어들 일본의 노림수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다. 당시 일본이 하던 짓을 보면 당연하지만. 다만 프랑스가 끼어들 움직임에 일본이 포기했다는 게 대세이다. 당시 프랑스가 일본에게 제주도민들의 일제 무기 구입에 대하여 일본을 탓하자 일본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 게 아니라 몇몇 무기업체들의 짓이라고 변명했다.
  5. 이렇게 백성들이 봉기를 한 다음, 협상을 하여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대신 지도부 몇몇만이 총대를 메고 자수해서 목숨을 대가로 내놓는 사례는 조선 후기의 '민란'에서는 거의 관례적으로 반복되는 사례이다.
  6. 똑똑하다고 별명이 채똑똑이. 배상금 부담을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배상금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불가능으로 여겨질 정도로 난공사인 천제연 도수로공사를 완성시켜 5만평 가량의 황무지를 농지로 탈바꿈 시켰다. 참고로 채구석의 다섯째 아들인 채몽인(蔡夢印)이 세운 기업이 애경유지공업 주식회사다. 제주항공이 누구네 회사인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하다.
  7. 오히려 그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파문까지 생각했었다.
  8. 교구연보;1878~1940. 362페이지
  9. 하지만 해방 후에 이런 인두껍만 썼지 인간이 아닌 것들한테 다시금 뒤통수 맞을 줄은 몰랐겠지
  10. 재일 출신의 소설가 김석범(그의 본적은 제주도이다)의 소설 《화산도》에서도 일부 언급되기는 한다. 거의 현기영에 의해서 발굴된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사건 당시인 1901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윤식이 남긴 일기 《속음청사》를 기본 베이스로 황성신문 같은 당대 신문 기사들도 찾아가면서 자료를 모으고 썼다고.
  11. 그런데 이 인식은 천주교 측 주장이었다. 그만큼 자기들 신도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다가 이게 공개되면서 이제 300~350명, 이전과 달리 절반 정도로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