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광제

청의 역대 황제
7대 인종 가경제 용얀8대 선종 도광제 민닝9대 문종 함풍제 이주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6대 샤이시얄투 이루겔투 칸47대 터르 게렐트 칸48대 투기멜 엘베그트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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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선종(宣宗)
시호만주식상간 황제
중국식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한호[1]도로 얼덩거 한
(Doro Eldengge Han)
칸호[2]터르 게렐트 칸
(Tör Gerelt khaan)
중국어아이신기오로 민닝
(愛新覺羅 旻寧[3], 애신각라 민녕)
연호
(청)
만주어도로 얼덩거
중국어도광(道光)
몽골어-
생몰기간음력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 (69세)
재위기간음력1820년 10월 13일 ~ 1850년 2월 25일 (29년 145일)

선제인 가경제의 차남이지만 형이 일찍 죽었기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고, 곧 청나라의 유일한 적장자 출신 황제이다.. 황자시절에는 지친왕(智親王)으로 불리었다. 1820년 즉위해 1850년까지 30년간 청나라를 통치했다.[4] 즉위하자마자 가경제 이후로 쇠퇴에 가속도를 밟기 시작한 청나라를 떠맡았다. 이때 인구는 기억 이상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이러한 청이 열강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는 서막을 여는 시대이기도 했다. 1840년의 아편전쟁과 뒤이은 난징 조약(1842)이 대표적이다.

그는 매우 검소한 황제였다고 전한다. 황궁의 예산은 은 20만전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스스로 솔선하여 낡은 옷을 입었다. 이것이 유행을 탄 나머지 고관들도 모두 낡은 옷을 입고 나와 자신의 청렴을 과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낡은 관복이 새 관복의 두 배 가격을 하고, 그나마도 못사서 열심히 해지게 하고 더럽히는 촌극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청렴 프렌들리 정책' 덕분에 무영전대학사 조진용(曹振鏞)은 총애를 받았는데, 이 자는 채소 장수와도 직접 흥정을 할 정도로[5] 쪼잔한 인물이었다. 청렴하단 이유로 고기야 무장가(郭佳 穆彰阿)라는 대신도 총애를 받았는데, 정작 그는 밖에서는 사치로 악명이 자자한 위선자였다. 청렴한 임금이 반드시 현군은 아니라는 대표적인 케이스(비슷한 예로 숭정제가 있다).

어이없게도 자린고비를 자처한 황제 자신이 사후에 안장될 능묘 공사에는 훗날의 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이나 이전 황제 중 최대인 건륭제의 유릉(裕陵) 공사비보다도 더 많은 240만 냥을 소모했다. 이는 동릉 구역에 처음 지었던 능묘에 물이 새는 하자가 발견되자 그걸 수리해서 재사용하는 대신 아예 서릉 구역에 새로 능묘를 다시 지었기 때문. 하지만 이때 능묘의 위치가 동릉에서 서릉으로 옮겨진 덕분에 뒷날 군벌 손전영이 동릉 구역의 황릉들을 무차별 도굴할 때 무사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검소함의 보람이 있긴 한 셈이다. 대신 도광제가 받았어야 할 횡액은 아들 함풍제에게 넘어갔으니.[6](...)

여하간 도광제는 1810년대부터 마구 들어오기 시작하여 당시 중국의 최대 문제였던 아편과 정면 승부를 선언한다. 사실 자신도 아편을 피웠지만, 과감히 끊어버리고 임칙서를 파견하여 외국 상인의 아편까지 몰수해 바다에 버리게 한 것. 보스턴 차 사건이 연상되는 단호하고 간지나는 사건...으로 보였으나 문제는 미국조지 워싱턴과 달리 이들은 영국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는데 있다.

초상화를 보면 별로 안 그랬을 것 같지만 황태자 시절엔 "거동이 멋있었다."라고 전한다.[7] 그도 그럴 것이 도광제는 친왕 민녕 시절에는 할아버지 건륭제 앞에서 팔기식 궁술을 선보이며 사슴을 잡아내는 등 무예가 뛰어났으며 가경제 시절에 자금성으로 반란군이 잠입하자 손수 권총을 들고 이들을 제압했던 경력이 있다. 더불어 이 시기의 도광제는 럭셔리함의 상징이었던 아편을 아주 멋지게 피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도, 궁녀들도, 심지어 아버지 가경제도 도광제를 멋쟁이로 보았었다.

도광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의 순조(1800~1834), 헌종(1834~1849)과 겹친다.

  1. 만주식 군주 칭호
  2. 몽골식 군주 칭호
  3. 원래 이름은 면녕(綿寧)이었지만, 綿이 상용한자인 관계로 중국발음이 같은 旻으로 바꾸었다.
  4. 즉위 과정이 굉장히 특이한데, 1813년 가경제가 즉위해있던 당시 백련교도들의 일파인 천리교 신자들이 자금성 내로 쳐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한다!(처음엔 200명이나 되던 인원들이 뚫는 과정에서 8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고) 이를 계유지변이라 불리는데, 당시 황태자였던 도광제는 당황하고 있던 근위병들을 지휘하여 손수 총을 쏘면서 이를 진압했다고 한다. 물론 끝난 뒤 내통자들을 처벌한 것은 옵션. 가경제는 당시 열하로 피서를 떠나가 있어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5. 물론 중국에선 남자가 장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청제국 대학사가 채소 장수와 흥정을 하는 건 역시...
  6. 건륭제 때 확립된 청나라 황실의 조장제도에 따르면 황제가 동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면 그의 뒤를 이은 황제는 서릉 구역에 능묘를 마련하는 식으로 동릉과 서릉을 번갈아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동릉의 유릉, 가경제는 서릉의 창릉이었으므로 응당 도광제는 동릉으로 가야 했으나 서릉의 모릉으로 조장 제도의 방향을 틀어버리자 아들인 함풍제는 어쩔 수 없이 동릉의 정릉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7. 200년 전이고 지금과 미의 기준이 달랐다는 걸 상기하자.